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47
“여기에 귀신이 있다니까. 내가 어제 봤어.”
이제야 겨우 초점이 잡힌 시야에는 고양이처럼 양손을 말아쥐고 있는 제미나가 있었다.
나름 위협적인 모습을 표현해보려 한 모양이었지만 전후 사정을 모르는 블라드에게는 그저 영문 모를 기행일 뿐이었다.
“······너 뭐 잘못 먹었냐?”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아침부터 쳐들어와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더니 귀신이라니.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드러눕는 블라드였지만 제미나는 그런 블라드의 이불을 단호한 손길로 치워내고 있었다.
“······진짜 아침부터 왜 이래.”
“이것 봐. 여기 명확한 증거가 있다니까.”
다시 자고 싶다는 듯 눈을 끔뻑끔뻑 뜨고 있는 블라드에게 제미나가 여기 좀 보라는 듯 하얀 종이를 들이밀었다.
그림이 그려져 있는 그 종이는 어젯밤 세계수의 신녀가 제미나에게 전해주고 간 것이었다.
“어제 만난 귀신이 놓고 간 그림이야. 어때? 보는 것만으로도 막 서늘함이 느껴지고 그렇지?”
“······.”
“이 정돈되지 않은 그림체를 봐. 누가 봐도 저주가 담긴 그림이라니까?”
과연 제미나가 말한 것처럼 전혀 정돈되지 않은 그림체였다.
다만 그에 비해 색감만큼은 화려했으니 도통 어느 나이대가 그린 그림인지 가늠하기 힘든 그림이었다.
“이걸 귀신이 주고 갔어?”
“그렇다니까.”
“······혹시 그 귀신이 머리는 백금발이고 입고 있는 드레스는 하얀색이고 그래?”
“어머 세상에!”
귀신의 인상착의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블라드를 보며 제미나가 그만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나 방금 소름 돋았어.”
블라드의 말이 정확하다는 듯 안 그래도 제미나의 큰 눈이 더욱 동그래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블라드는 괜스레 머리를 긁적이며 제미나가 건넨 그림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음?”
이제야 동이 트기 시작하는 스투르마의 성벽 위.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는 방 안에서 신녀의 계시를 해석하던 블라드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
지금 손님들이 잔뜩 모인 바예지드의 저택은 그야말로 사교의 장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대륙 곳곳에서 모인 귀족들과 사신들.
평소라면 도저히 만나기 힘든 지금의 기회에 이미 눈치 빠른 몇몇은 새로운 인맥 형성에 여념이 없었다.
“오오. 블라드 아우레오 경······.”
그리고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바로 새로운 소드마스터인 블라드.
그러나 수없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무심히 헤쳐나간 블라드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갈 뿐이었다.
‘어머니를 한 번 보고 가줬으면 좋겠다. 너라면 분명 기뻐하실 테니까.’
“······.”
떠들썩한 1층과 2층을 지나 손님에게는 개방되지 않은 3층까지.
그곳까지 올라온 블라드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보며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여전히 햇빛은 밝네.”
종자였던 시절에는 항시 시종들이 드나들던 복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밖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고요한 곳이 되어 있었다.
킁킁.
계단에서 복도로 발을 내딛기 전, 블라드는 몸 이곳저곳에 코를 대며 자신에게 냄새가 나는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자신에게 냄새가 나는지도 몰랐던 뒷골목의 소년.
그러나 한여름에도 겨울옷을 입고 다니던 그 소년에게도 이곳의 귀부인은 항상 웃음을 지어주고는 했었다.
“······블라드 님?”
“오랜만이에요.”
조용히 옥사나가 있는 방 앞에 선 블라드는 그곳에 있는 낯익은 하녀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옥사나 님을 뵈려고 왔습니다.”
“아아.”
옥사나의 친정 가문에서부터 따라왔다던 중년의 하녀는 한눈에 블라드를 알아보며 함박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지 뭐예요. 너무 근사해지셔서요.”
“감사합니다.”
크게 지은 웃음이었으나 조용한 방 안의 분위기가 의식된다는 듯 하녀의 입에서는 조금의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너무도 오랫동안 웃지 않았기에 차마 나오지 않는 목소리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안에 기별을 넣어야 하니까.”
오늘 들릴 것이라고 말은 해놨으나 레이디들에게는 언제나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 사정을 익히 짐작하고 있던 블라드는 아무도 없는 응접실에 서서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
본래 방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다.
넓은 방이었으나 보이는 가구나 장식은 소박한 곳.
그러나 이 응접실이 텅 비어 보이지 않는 것은 지금 내 발치까지 와닿는 오렌지빛 햇살이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블라드 님?”
“아······. 네.”
그 빛과 함께 웃어주던 귀부인이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주는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블라드는 곰팡이가 핀 것 같이 눅눅했던 자신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화사해지는 것만 같았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블라드.”
“······.”
그러나 오늘 보이는 그녀의 미소에는 그때 보았던 화사함 대신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듯한 비구름이 걸려 있었다.
툭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그런 짙고도 어두운 비구름이었다.
“······죄송합니다. 진작에 찾아뵈었어야 하는 건데.”
“아니다. 아니야. 이리 가까이 오렴.”
침대에 앉아 이리 가까이 오라 손짓하는 옥사나의 손이 마른 나무처럼 메말라 있었다.
먹지 못했고, 병들었고, 그리고 지쳐 있기에 메말라 버린 여인.
어렸을 적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았던 마지막 모습처럼 비쩍 말라버린 옥사나를 보며 블라드는 그만 혀를 꺼내 입술을 훑고 말았다.
“다 알고 있단다. 네가 그동안 바빴다는 걸.”
“······.”
“내 아들이 못다 한 일을 하려고 그동안 열심히 해왔다는 것도.”
요제프가 죽은 지 이미 2년이 지난 시간이었다.
그러나 옥사나는 마치 그 일이 어제 있었다는 듯한 말투로 요제프의 이름을 꺼내고 있었다.
“도망쳤던 흑마법사들은 다 해치웠니?”
“······북부는요. 북부는 거의 다요.”
“용혈공 아래서 이간질하며 사람들은 가르던 자들은?”
“이번에 브리간테스에서 원탁회의가 있을 거예요. 거기서 그동안 갈라졌던 사이들을 메꿀 생각이에요.”
각자의 시대에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짊어져야 하는 의무가 있는 법.
어느 시대는 자유, 또 어느 시대는 영광을 위해.
그리고 지금 시대의 우리는 그동안 퍼져 있던 독들을 마셔야 하는 세대라 말한 사내가 있었다.
“그래. 열심히 했구나. 블라드.”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명을 태워서 세상에 퍼져 있던 독들을 불태우려 했던 요제프.
그런 그의 유지를 이어가는 블라드를 보며 옥사나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다행이구나. 다음의 아이들은 너희처럼 고생하지 않아도 되겠다.”
검은 머리도 아니었고 창백한 안색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허약하지도 않은 눈앞의 블라드.
자신의 아들과는 단 하나도 닮은 모습이 없는 블라드였지만 그럼에도 그를 바라보는 옥사나의 눈빛은 요제프를 보는 것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역시 잘 먹여 놓으니 보기가 좋구나. 딱 벌어진 어깨가 아주 사내다워.”
“······감사합니다.”
그러나 침대 맡에 고개를 숙인 블라드는 차마 그녀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에게 어머니가 되어줄 수 있었으나 나는 그녀에게 하나뿐인 아들이 되어줄 수 없었으니까.
점점 시들어가는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기 창밖에 누워 있는 요제프뿐이라는 것을 지금 고개 숙인 블라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
“······이럴 때는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구름이 꾸물거리는 하늘 아래서 블라드가 조용히 위스키병을 열고 있었다.
뒤쪽의 저택은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했으나 이곳만큼은 전혀 딴 세상이라는 듯 고요할 뿐인 자그마한 정원.
그 정원 안에 있는 요제프의 묘비 앞에서 조용히 술을 따르던 블라드는 저 뒤에 보이는 기사들의 위령탑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간 사람들만 편한 것 같단 말이죠. 남아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힘든데.”
그레고리, 라그무스, 아게······. 그리고 이름은 모르지만 그날 사르누스를 향해 함께 싸웠었던 수많은 기사들.
위령탑에 새로이 적힌 그 이름들을 위해서도 위스키를 들어 올린 블라드는 뒤쪽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기척에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그들이 못다 한 일을 해주는 것이 남아있는 자들의 소임이겠지.”
“마커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곳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얼굴에는 온통 흉측한 흉터가 가득한 사내였다.
“그래도 여기 있는 기사들은 운이 좋은 편이지. 이 세상에는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는 사람들이 훨씬 많으니까.”
옆에서 들려오는 마커스의 말에 블라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의미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그럴 거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안드레아 교황께서 감사하다고 전해달라시더군. 이번에 해치운 녀석들이 꽤 골치를 썩였던 모양이야.”
“그런가요?”
그렇기에 지난 2년간 블라드는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아직 남아있는 잔재들을 해치우는 데 주력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을 현혹하는 흑마법사들을 해치웠으며 또 어떤 때는 아직 남아있는 드라굴리아의 추종자를 베어 내었다.
그렇게 쉴새 없이 움직였던 것은 지금 앞에 있는 이름들을 헛되이 만들지 않기 위한 블라드만의 발버둥 같은 것이었다.
“또 남아있는 녀석들이 있나요? 이번 계승식이 끝나면 한 번 둘러볼까 하는데.”
“······.”
그러나 다음 목표를 알려달라는 블라드의 말에 마커스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들고 왔던 술병을 꺼내고서는 조용히 근처에 있던 풀밭에 조용히 뿌렸을 뿐이었다.
“너는 아직 젊고, 그리고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마커스?”
자신처럼 이름 없는 자들을 위해 조용히 술을 뿌리던 마커스.
고개를 든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블라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페테르 백작님이 내리신 마지막 명령에 따라 까마귀들은 더 이상 너에게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을 거다.”
“······.”
“이제는 남들 말고 너의 인생을 살아달라는 백작님의 마지막 당부인 셈이지.”
하고 싶은 것이 있고, 되고 싶은 모습이 있기에 빛나던 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별은 놓아야 할 인연들을 놓지 못한 채 조금씩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으니 이제는 새로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릴 때였다.
“이제 당분간은 못 보겠네요.”
“그렇지.”
“그럼 나 하나만 물어볼게요.”
할 말을 마쳤다는 듯 조금씩 멀어져 가는 마커스의 뒤로 블라드가 물었다.
“원래 이름이 뭐예요?”
“······.”
이름 없는 까마귀. 만날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을 소개했던 남자.
그 사람의 정체가 궁금했던 블라드였으나 돌아선 마커스는 조용히 저 뒤에 있는 위령탑을 가리켰을 뿐이었다.
“나도 모른다. 예전의 이름은 저곳에 묻었거든.”
본인을 규정하던 이름을 묻었기에 어떠한 어둠에도 녹아들 수 있었던 남자.
그렇게 마커스라 불렸던 남자는 처음 보았을 때처럼 어느새 기척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나 백수네.”
그렇게 마커스마저 떠나버린 정원에서 홀로 서 있던 블라드.
갑작스레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블라드는 조용히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며 물었다.
“나 이제 뭐 해야 할까요. 요제프?”
세계수의 신녀가 제미나에게 주었던 그림.
오래도록 그 그림을 내려다보던 블라드였지만 이제 그의 옆에는 물어봐도 대답 없는 요제프만이 서 있을 뿐.
쏴아아아-
꾸물거리던 하늘에서부터 기어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블라드는 지금 내리는 비가 마치 자신의 등 뒤를 떠미는 것만 같아 씁쓸한 심정이 들고 말았다.
외전- 이어짐
저물어가는 노을을 등진 채 홀로 밀밭에 서 있는 블라드가 있었다.
들고 있는 괭이로 아직 녹지 않은 땅을 내려치면서.
시간을 조금 거슬러 아직 봄이었던 시절, 그때 당시의 블라드는 라문드의 장원에서 한창 농사일을 배우던 중이었다.
“이것 참 신기한 광경이로구만.”
씨앗조차 뿌리지 않아 그저 흙만 일궈놓은 텅 빈 밀밭이었다.
그곳에서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블라드가 내려치는 괭이 소리뿐.
그러나 요란히 들려오는 소리와는 다르게 지금의 블라드는 그야말로 초보 농사꾼의 어설픔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이었다.
“검 대신 고작 괭이로 바꿔 들었을 뿐인데 이렇게 멍청해 보일 수가 있나.”
“······그 정도예요?”
바로 옆에서 핀잔을 날려대는 라문드를 보며 블라드가 머쓱한 듯 볼을 긁적여댔다.
사실 본인도 슬슬 깨달아가던 참이기는 했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농사꾼의 기질이 없는 것 같다는 사실을 말이다.
“암만 봐도 너는 농사를 지으면 안 되겠다. 적응이고 뭐고를 떠나서 그냥 재능 자체가 없어.”
도시에서 태어나 평생을 흙과 가깝게 지내본 적 없던 블라드.
그러나 그런 사정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블라드의 농사 감각은 도통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냐.”
검을 들고 있을 때는 대륙이 칭송하는 소드마스터.
그러나 지금 괭이를 들고 있는 모습은 뭐든지 어설픈 초보 농사꾼이었으니, 그 간극을 보기가 영 괴로웠던 라문드는 그만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왜 갑자기 농사를 짓고 싶어진 게야.”
라문드가 꺼내든 수통에서 전해지는 알싸한 향기가 있었다.
굳이 저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노골적인 주향(酒香)이었다.
“······지친 거냐? 그래서 좀 쉬고 싶어?”
“그런 건 아니구요.”
블라드는 라문드의 반응에 일이 텄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곧바로 괭이를 내던진 블라드가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생각해 보니까요,”
“생각해보니까?”
“제가 할 줄 아는 게 도둑질, 소매치기, 아니면 칼질 뭐 이런 거밖에 없더라고요.”
옆에서 들려오는 블라드의 목소리에 라문드가 잠시 움찔하고 말았다.
부모도 없이 홀로 어두운 뒷골목을 헤매던 소년.
그저 살아남기 위해 걸어왔던 그간의 길에는 온통 차갑고, 날카로운 것들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런 것만 아는 인생은 조금은 부끄럽달까.”
남에게 상처입히는 기술밖에 모르는 나는 아무래도 부끄럽다.
남들은 영광스러운 소드마스터라고 칭하지만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전 시대의 소드마스터인 키하노는 그저 검술만으로 나라는 사람을 이끌지 않았다는 것을.
“별 시답지도 않은 소리를. 소드마스터가 검밖에 모르는 게 뭐가 부끄러워?”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조금은 타박하는 듯한 라문드의 말에 블라드는 그만 실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는 항상 소드마스터이고 싶지는 않거든요.”
남들이 보았을 때는 빛나는 소드마스터이겠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일 수 있는 나였다.
누군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친구, 또 누군가에게는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
그리고 지금의 라문드에게는 영 어설퍼 보일 뿐인 농사꾼인 것처럼.
“혹시 또 알아요? 저한테 검 말고 다른 걸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지.”
소드마스터였던 키하노는 그저 그가 가진 모습의 일부였을 뿐.
오히려 블라드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언제나 나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노력했던 이름 모를 목소리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블라드가 키하노에게 배운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일격필살의 검술이 아닌 세상을 대하는 삶의 자세 그 자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배워두는 거예요. 저도 나중에 누군가에게 대답해 줄 게 있도록요.”
그리고 블라드도 키하노의 그런 면을 닮고 싶었다.
황제나 기사나 아닌 그저 어른의 모습으로 나를 이끌어주었던 키하노의 면을.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지금의 블라드는 그동안 놓치고 살았던 삶의 경험들을 주워 담으며 세계를 넓히는 중이었다.
※※※※
성대하게 열린 계승식이었다.
빛나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사열해 있고 대륙에서 모인 귀빈들이 축하해 주는 그런 화려한 계승식.
어쩌면 여태껏 북부에서 열린 모임 중 가장 화려한 순간일지 모르는 지금의 모습에 블라드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귀족이 모여있는 모습은 태어나서 처음 봐요.”
“······그래?”
“사실 저 여기는 두 번째거든요. 기사 작위 받을 때랑 그리고 지금.”
묘하게 들뜬 듯한 블라드의 모습에 자야르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지금 보이는 블라드의 모습은 일종의 경고와도 같은 것.
종자였던 시절, 끊임없이 사고를 치고 다니던 블라드를 기억하는 자야르는 지금 같은 상태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알리시아 남작은 왜 저 자리에 있는 거죠?”
대륙의 주목을 받고 있기에 공들여 준비한 바예지드 가문의 계승식이었다.
그런 계승식에서 귀빈들의 작위와 위치에 따라 앉을 자리를 잡아 놓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그렇기에 지금 블라드는 제미나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알리시아를 보며 의아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불안해 보이는군.”
“전혀요.”
“제발 부탁이니까 평정심을 유지해.”
“저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한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