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48
그럴 리가 있나.
지금 들려오는 숨소리만 해도 잔뜩 긴장한 듯 억눌려 있는데.
그것도 저 앞에 있는 두 여자가 서로 속닥거릴 때마다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이 여기까지 들려오는데 말이다.
“루트거 바예지드 님 입장하십니다!”
때마침 들려오는 집사장의 목소리와 함께 홀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스투르마의 성벽을 본떠 만들어 커다랗고도 단단해 보이는 바예지드의 문.
그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방금까지만 해도 소란스러웠던 홀이 쥐죽은 듯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
훤칠한 키에 곧은 어깨.
거기다 예장용으로 차려입은 화려한 갑옷까지.
문이 열린 그곳에는 평소에 보이던 모습과는 달리 진중한 자세로 서 있는 루트거가 보이고 있었다.
“굉장히 낯설어 보이네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홀의 가장 높은 곳, 오직 가주만이 앉을 수 있는 그 자리에서 페테르가 조용히 손짓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시작될 계승식을 알리는 손짓이었다.
“이제 네가 알던 루트거가 아니라 바예지드 백작이 될 테니 말이다.”
어깨 위에는 가문의 이름을 얹고 등 뒤에는 대대로 지켜왔던 영지를 업는다.
그렇기에 무거워진 루트거는 이제 예전에 알던 그 모습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터.
그렇게 의무와 책임을 짊어지려 앞으로 나아가는 루트거를 보며 블라드의 눈빛이 어쩐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리 올라오도록 해라. 바예지드의 아들아.
루트거가 계단을 밟고 올라갈 때마다 페테르와의 사이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하는 페테르 바예지드.
왼손에는 가주의 망토를, 오른손에는 검을 들고 있는 그는 자신을 향해 올라오는 아들을 보며 이리오라는 듯 양팔을 크게 펼치고 있었다.
-망토를 둘러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계단을 오르며 닿은 곳.
마침내 올라선 바예지드의 가장 높은 곳에서 루트거는 아버지가 손수 둘러주는 망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두른 이 망토는 의무를 상징하는 것. 이제 너의 등에는 네가 책임져야 할 수많은 영지민들이 올라탔음을 잊지 마라.
영주란 땅을 다스리며 영지민을 돌봐야 하는 존재.
그렇기에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의무는 지금부터 루트거의 등을 무겁게 짓누르게 될 것이다.
-검을 들어라.
이윽고 전해지는 또 하나의 물건을 향해 루트거가 손을 뻗쳤다.
그것은 오직 가주만이 휘두를 수 있다는 바예지드 가문의 보검.
아버지의 아버지서부터 전해져 왔다는 이 검은 바예지드에서 오직 단 한 사람만이 들 수 있는 물건이기도 했다.
-지금 네가 든 검은 가주로서의 책임을 상징하는 것. 이제부터 너는 너의 명예가 아닌 가문의 명예를 위해 검을 휘둘러야 한다.
루트거라는 개인이 아니라 바예지드라는 가문을 위해서.
이 검을 받아든 루트거는 지금 이 순간부터 본인의 이름 대신 가문의 이름을 앞선 채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나 페테르 바예지드는 여기 계신 여러분들을 증인 삼아 선언합니다.
건네야 할 모든 것을 건네주었기에 이제는 계승식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순간.
이제는 가주의 자리에서 내려가야 하는 페테르가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귀빈을 향해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루트거 바예지드가 가문을 이을 다음 대의 가주가 되었음을!
여태껏 넓디넓은 홀에서 들려온 소리라고는 오직 페테르가 루트거에게 전하는 말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난 지금만큼은 마치 홀이 터져나갈 듯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짝짝짝짝-!
쉽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귀빈들의 박수 소리가 지금도 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세대에서 세대로. 가장 오래된 용이 날뛰던 그 험한 시대에서도 결국 전할 수 있었던 바예지드의 깃발을 축하하는 소리.
그러나 블라드는 이 요란한 박수의 향연 속에서도 저 위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수고했다.”
오직 용의 피를 타고난 블라드였기에 들을 수 있는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그 소리는 아들을 껴안은 아버지의 입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곳까지 올라오느라 정말 수고했다.”
영주의 망토도, 가주의 검도 내려놓았기에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페테르 바예지드.
그렇기에 이제야 온전한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그가 루트거를 껴안으며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내가 있는 이곳까지 오느라 정말 수고했노라고.
※※※※
“정말 보기 좋더라고요.”
계승식 끝난 밤, 화려한 연회가 열리고 있는 바예지드의 저택.
이곳에 모인 모두가 지금을 기다렸다는 듯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지금의 블라드는 귀족들이 있는 연회장이 아닌 어둠이 짙게 깔린 텅 빈 복도를 걷는 중이었다.
“물려받는다는 게 어떤 느낌일까요? 도통 상상이 안 되네.”
앞에서 걷고 있는 자야르와 함께.
지금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걷고 있는 둘은 각자 술병 하나씩을 든 채로 요제프의 집무실이었던 곳을 향해 걷는 중이었다.
“하긴, 드라굴리아의 유산이 상당하긴 할 테지. 못 받아서 아쉽겠군.”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갑작스레 드라굴리아의 이름을 꺼내는 자야르의 말에 산통이 깨졌다는 듯 블라드의 표정이 불손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뭐랄까. 아버지가 아들한테 물려주는 그런 거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 감각에 블라드가 이리저리 손짓하고 있었지만 정작 보아야 할 자야르는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 건 부모 멀쩡한 사람도 경험하기 쉽지 않아. 애초에 빚이나 안 물려주면 다행인 세상이다.”
“그런가요.”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하고 싶으면 네가 하나 만들면 될 일 아니냐.”
끼익-
살짝 돌린 문고리에서 듣기 싫은 쇳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조금은 녹이 슨듯한 그런 소리였다.
“물려받는 경험은 못 해도 물려주는 경험은 충분히 할 수 있잖아.”
끼이이익-
어두울 것이라 예상했지만 밤에 보는 요제프의 집무실에는 푸른 달빛이 가득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달빛이 머무는 집무실의 모습은 예전에 보았던 광경과는 달리 온통 낯설게 느껴질 뿐이었다.
“······여긴 변한 게 없네요.”
“변한 게 없기는. 가구란 가구는 죄다 천으로 둘러놨는데.”
이제는 주인이 없어 차갑게 먼지만 쌓여가던 요제프의 집무실.
그러나 몰래 찾아든 두 명의 손님 때문인지 지금 이곳에는 훈훈한 예전의 색이 조금이나마 입혀지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 한잔하는 거예요?”
“······그래. 원래는 나 혼자 하려고 했지만.”
딱히 이렇게 하자고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방 안에 들어선 블라드와 자야르는 버릇처럼 예전에 있던 위치에 서 있는 중이었다.
블라드는 손님용 테이블 앞에, 그리고 자야르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요제프의 책상 옆에 서서.
그렇게 예전처럼 서 있는 블라드가 우스웠는지 자야르가 피식 웃고 말았다.
“말도 못 타던 놈이.”
“그때는 제가 용인 줄 몰랐으니까요.”
“맨날 같은 종자들이나 쥐어패고 사고나 치고 다니던 놈이.”
“그거야······.”
잠시 옛 추억을 떠올린 자야르가 여전히 변명을 주워 담는 블라드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년이었던 시절부터 보아 와서 그런지 아직도 이 녀석이 컸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애송이였던 시절을 거쳐 이제는 소드마스터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부러운 게 그렇게 많아?”
“······.”
“옜다. 받아라.”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직 자야르의 눈에는 블라드가 모자라고 또한 어려 보일 뿐이었다.
“술이요?”
“그거 그래 봬도 비싼 거다. 무려 50년은 더 묵힌 거니까.”
지금 블라드에게 건넨 술은 자야르가 특별히 아끼며 보관해 온 술이었다.
옥사나와 함께 바예지드로 오기 전, 오스카르 가문의 자야르였을 때부터 보관해왔던 그 술은 그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술이기도 했다.
“그렇게 귀한 술을 저한테 줘도 되는 거예요?”
“물려받고 싶다며.”
“아니 그래도······.”
“이제 됐지? 그러니까 술이나 따 봐.”
장식장에 있던 천을 걷어내고 그곳에 있는 술잔을 꺼낸 자야르가 블라드를 향해 팔을 뻗었다.
어서 잔을 따라보라는 손짓이었지만 그러나 블라드는 히죽 웃으며 방금 받았던 술병을 뒤로 돌릴 뿐이었다.
“······이렇게 비싼 술을 지금 마시기는 좀 아깝고.”
은근슬쩍 품 안에 집어넣는 모습이 어쩐지 쉽게 꺼내 들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일단 제가 가져온 술부터 마시면 안 될까요?”
“······나 그 술 마시려고 20년은 기다렸다.”
“앞으로 한 20년 정도 더 묵히면 맛이 더 좋아지겠네요.”
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애착이 생겼는지 술병을 숨기는 블라드의 손짓이 단호해 보였다.
“일단 오늘은 제가 가져온 술부터 먹을까요?”
“지금 안 먹을 거면 다시 가져와.”
“이것도 비싼 거예요. 아까 주방에서 몰래 슬쩍한 건데.”
은근슬쩍 술잔을 더 꺼내온 블라드는 자야르에게 술잔을 따르며 말했다.
“그런데 자야르. 혹시 낚시할 줄 알아요.”
“낚시? 낚시는 갑자기 왜?”
지금 건네는 술잔은 자야르를 위해서.
다시 따르는 술잔은 나를 위해서.
“아니. 제가 낚시를 할 줄 몰라서요. 라문드 님도 본인이 화전민 출신이라 낚시는 잘 모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지금 따르는 술잔은 요제프를 위해서.
그렇게 세 잔의 술잔을 따른 블라드는 자야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배워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낚시 같은 게 어디 가서 마땅히 배울 곳도 없고.”
“낚시는······. 나도 잘 모른다.”
“아 그래요. 이거 아쉽네.”
잘 모른다는 자야르의 말이 아쉬운 듯 블라드가 혀를 내둘렀다.
들어 올린 술잔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자야르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하기 시작했다.
“빙어 낚시 정도는 할 줄 알지.”
“빙어 낚시?”
“그런 거 있잖냐. 얼은 호수에다가 구멍 뚫고 하는 거.”
천천히 술잔을 흔들던 자야르가 창가로 걸어갔다.
언제나 환하게 비치던 햇빛 대신 지금은 푸른 달빛이 비치는 밖을 내다보기 위해서.
“그거라도 배우고 싶으면 다시 한번 오던가.”
겨울에 다시 오라는 자야르의 뒷모습을 보며 블라드가 웃고 있었다.
무언가를 물려받고 싶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싶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
그 말을 정확히 이해한 자야르를 보며 블라드는 남아있던 술잔을 경쾌하게 털어 넣기 시작했다.
외전- 소년과 소녀
복도를 수놓았던 붉은 융단이 치워져 있었다.
시든 꽃잎 몇 개만이 남아있는 장식대에는 빈 항아리만이 놓여 있었고.
화려했던 연회가 끝난 바예지드의 저택, 이제는 손님들이 모두 떠나가고 없는 고요한 그곳.
이제는 지저귀는 새소리만 찾아드는 그곳을 블라드가 홀로 걷고 있었다.
“······.”
본인 또한 떠나갈 채비를 마쳤는지 이미 얇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 블라드였다.
그렇게 이른 아침, 푸르스름한 새벽의 빛깔을 밟으며 블라드가 나아간 곳은 이 저택의 안주인인 옥사나 바예지드가 있는 방이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아직 동도 트지 못한 아침이었지만 방의 주인은 이미 깨어나 있었다.
아니, 어쩌면 깊은 기침에 잠들지 못한 채 밤을 새웠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블라드를 맞이하는 옥사나의 미소만큼은 여전했다.
“······이제 가니?”
가만히 누워있어도 괜찮으련만 옥사나는 굳이 베개를 받친 채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아마 떠나가는 블라드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네. 이제 돌아가 보려구요.”
그러나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완연한 그녀의 병색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마치 양초를 바른 듯 하얗게 터 있는 옥사나의 입술을 보며 블라드는 힘없이 웃고 말았다.
“그래. 떠나려면 일찍 가야지. 북부의 날씨는 도통 종잡을 수 없잖니?”
창가를 통해 조금씩 찾아드는 햇빛이 옥사나의 침대를 향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처음 봤을 때의 그 빛깔처럼 따뜻한 오렌지 빛이었다.
“······.”
그 빛깔 아래서 블라드를 바라보는 옥사나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아름답다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벽 한쪽에 걸어두고 보고 싶은 그런 편안한 느낌을 주는 그림.
“이제 동이 트는구나. 어서 가봐야겠다.”
언제나 보고 싶은 그 그림이 이제는 떠날 때라고 말하고 있었다.
침대 맡에 놓아둔 자그마한 보따리를 두들기면서.
“이제는 계절에 맞춰 옷을 입고 있니?”
한여름에도 겨울옷을 입고 있던 소년이 있었다.
불어오는 여름의 바람에도 여전히 춥다는 듯 잔뜩 웅크리고 있던 소년이었다.
“원래 보이지 않는 곳에 입는 옷이 더 중요한 법이란다. 본래 사람의 품격이라는 건 그런 곳에서 차이가 나는 법이거든.”
“······.”
아마 옥사나가 들고 있는 저 보따리 안에는 블라드가 입을 속옷이며 양말이 가득할 것이다.
어찌 보면 사소한 선물이겠으나 오직 어머니의 시선으로만 챙길 수 있는 그런 선물이기도 했다.
“그 아가씨 이쁘더구나. 제미나라고 했던가. 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아주 보기가 좋았어.”
“감사합니다.”
“······그래.”
서로가 나눌 말은 다 나눴기에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손님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는 옥사나였지만 정작 배웅을 받는 블라드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제가 겨울쯤에 다시 이곳에 올 예정인데요.”
“응?”
그렇기에 다시 돌아선 블라드가 말하고 있었다.
이미 끊어진 대화를 연결하기가 쉽지 않다는 듯 조금은 더듬대는 목소리로.
“낚시를 배우려고요. 빙어 낚시인데, 그게 겨울에만 할 수 있다고 해서.”
“낚시?”
방금의 대화와는 전혀 맥락이 맞지 않는 주제였지만 블라드는 계속해서 말을 이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것은 옥사나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고 싶기 때문에.
가만히 멈춰 있을 그림보다는 나를 보며 웃어주는 그녀가 더욱 그리울 걸 알기 때문에.
“그런 거 있잖아요. 원래 아버지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거. 제가 그런 걸 하나도 몰라서 요즘 배우고 있거든요.”
“······.”
“저번에는 라문드 님한테 농사짓는 법도 배우고, 그리고······.”
블라드의 세계는 실로 다채롭다.
완벽한 용이 되기 보다 빛나는 별이 되는 것을 바라왔던 소년은 그저 하나의 단어만으로 자신이 설명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래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누구에게는 완벽함에서 태어난 용, 또 다른 누구에게는 빛나는 검을 휘두르는 소드마스터.
그러나 지금 옥사나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말하는 어린아이일 뿐.
지금 그 아이가 어색한 눈빛으로 옥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또 물어보러 와도 될까요?”
보따리를 품에 안은 채 움츠려 있는 블라드의 모습은 조금도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옥사나에게만큼은 그러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기에 사납게 자란 난초와도 같은 모습.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을 보며 온통 무채색이 되어버린 옥사나의 세계에 옅은 색깔 하나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래.”
어머니를 잃은 소년과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처로 인해 깨어져 버린 둘의 조각은 꼭 들어맞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꼭 붙어있다면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정도는 될 것이다.
“또 오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또 오라고 말하는 옥사나의 말에 앞에 있던 어린 소년이 환히 웃기 시작했다.
본래 입고 있던 낡은 겨울옷 대신 옥사나가 입혀 준 여름옷을 입고 있는 소년이었다.
※※※※
“마지막까지 있어 줘서 고마웠다.”
손님을 배웅하는 것은 주인 된 자의 도리겠으나 그래도 성문 앞까지 따라 나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떠나가는 블라드의 뒤에는 새로이 바예지드의 가주가 된 루트거와 그의 기사들이 배웅을 하러 따라 나온 참이었다.
“덕분에 내 계승식이 빛났어. 아마 가문의 역사 중에서도 제일 화려한 계승식으로 기록되겠군.”
“그렇게까지 말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웃고 있는 루트거의 뒤로 낯익은 기사 몇몇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케이드와 막심. 그리고 데스웜과 린드부름을 잡을 때 함께 했었던 루트거의 기사들이었다.
“그럼 이제 쇼아라로 돌아가겠군.”
“그렇죠.”
“그곳으로 돌아간 다음에는 어쩔 생각이냐. 또 저번처럼 여기저기로 불려 다니려나?”
빛나는 명예에는 그만큼 치러야 할 값이 있다.
그것은 소드마스터의 이름을 이은 블라드이기에 정당히 치러야 할 명예의 값.
그러나 지금 블라드는 루트거의 질문에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아니요. 이번에는 좀 쉴 생각이에요.”
그 말과 함께 블라드가 옆에 있는 마차를 슬쩍 쳐다보았다.
블라드와 함께 쇼아라로 돌아갈 그 마차에는 혹시 자신에게도 말을 걸까 싶어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제미나가 앉아 있었다.
“······그렇군. 하긴 좀 쉬어야 할 때가 되긴 되었지.”
블라드가 무슨 말을 한다는 지 알아챘다는 듯 루트거의 미소가 환해졌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그래.”
짧은 인사말과 함께 누아르의 등 위로 오르는 블라드를 보며 루트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마차.
기사들의 배웅에 어깨가 으쓱해진 소드마스터의 종자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곧 스투르마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날이 좋구나.”
성문 사이로 비치는 아침의 햇빛이 루트거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렇게 터오는 동을 따라 푸른 초원을 향해 나아가는 블라드의 그림자.
그 그림자를 향해 루트거가 작게 외쳤다.
“언제든지 와라. 바예지드 최고의 용몰이꾼.”
들으라 말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저 앞에 있는 블라드가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비록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흔드는 손이었지만 그 손에는 분명히 알아들었다는 기꺼움이 담겨 있었다.
※※※※
“······오늘은 몸이 좀 어떠시오.”
하녀들을 물리며 조용히 침대로 다가온 페테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옥사나를 바라보았다.
“몸이 좀 나아져야 할 텐데. 그러려면 먹을 것도 좀 챙겨······.”
언제나 업무에 바빠 옥사나를 챙겨주지 못했던 그였으나 이제는 의무에서 해방된 몸.
그렇기에 아침 일찍 들린 페테르였으나 평소와는 다른 광경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드셨군.”
“네.”
이제 막 비웠는지 아직 치워지지 않은 그릇 하나가 옥사나의 옆에 놓여 있었다.
비록 환자를 위해 만든 옅은 수프였으나 그것이 깔끔하게 비어 있는 모습에 오랜만에 페테르의 얼굴에도 기쁜 기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또 온다고 하더라고요.”
“응?”
창밖을 바라보는 옥사나의 얼굴에 떠오르는 아침 해가 비치고 있었다.
“낚시를 배우러요. 겨울쯤에 온다네요.”
내일을 살 용기가 없어 고개 숙이고 있던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하루의 시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밖을 내다보는 그녀를 요제프의 묘비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쓸쓸함만이 감돌던 묘비였지만 오늘만큼은 떠오르는 아침 해를 머금은 채 옥사나를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
스투르마를 떠나 쇼아라로.
그렇게 여름의 초원을 따라 달리던 마차는 어느새 저 옆으로 따라붙는 노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대장. 아무래도 노숙해야 할 거 같은데.”
“그래.”
넓기로 유명한 북부의 초원에서 고작 하루 만에 마을까지 닿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노숙을 해야겠다는 고트의 말에 블라드도 그리고 제미나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초원은 해가 빨리 지네. 쇼아라에서보다 더 빨리 지는 것 같아.”
근처에서 주섬주섬 나뭇가지를 줍던 제미나가 신기하다는 듯 하늘을 보며 말했다.
“별도 금방 뜨고.”
좁디좁은 쇼아라의 뒷골목.
초라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그곳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언제나 조각나 있었다.
건물의 처마에 가려, 손님들을 유혹하는 불빛에 먹혀 언제나 희미했을 뿐인 쇼아라의 밤하늘.
그 조각난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기도 했고.
“헤에.”
그러나 지금, 제미나가 올려다본 초원의 밤하늘에는 이렇게나 많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별들이 가득 빛나고 있었다.
봐도 봐도 영롱한 그 모습에 빠져들었다는 듯 제미나는 들어 올린 고개를 쉽게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제미나.”
“응?”
“여기 좀 와 봐.”
그렇게 잠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제미나는 옆에 들리는 블라드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왜?”
고트가 피운 모닥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소리를 따라 걸어간 제미나는 누아르의 고삐를 붙들고 있는 블라드를 볼 수 있었다.
“인사하고 싶대.”
“응?”
“누아르가 너한테 떠나기 전에 인사하고 싶대.”
지금 내려앉은 밤하늘과 잘 어울리는 검은 말이었다.
너무나 잘 어울려 저 멀리 보이는 별들 속으로 녹아내릴 것만 같은 그 말이 지금 제미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인사를 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자신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누아르를 어루만지며 제미나가 물었다.
그러나 정작 대답해야 할 블라드는 그저 저 멀리 있는 언덕을 향해 고개를 까닥일 뿐이었다.
“누아르도 이제 돌아가야 할 때라는 뜻이야.”
별빛이 내려앉은 초원의 언덕.
그곳에는 예전에 보았던 야생마의 무리가 서 있었다.
이제는 여행에서 돌아올 때라는 듯 블라드 옆에 있는 누아르를 바라보면서.
“보내? 이렇게 갑자기?”
“지금이 딱 좋은 때야.”
갑작스러운 이별에 당황해하는 제미나였지만 블라드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이 누아르가 차고 있던 마구를 벗기기 시작했다.
내가 앉았던 안장을 벗기고, 얼굴을 감쌌던 고삐를 벗기고, 그리고 대신 들어주었던 짐을 내려놓고.
“그동안 고마웠다.”
그렇게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초원의 아들을 향해 블라드가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인사 다 했어?”
“응? 으응······.”
“그럼 이제 가라.”
너와 내가 맞닿은 세계의 경계에서 우리는 좀 더 넓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네가 발을 디딘 세계는 이곳 초원이고 나의 세계는 저곳에 있는 도시였으니 이제는 헤어져야 할 때였다.
“돌아보지 말고.”
슬쩍 떠미는 손이 아쉽다는 듯 자꾸 돌아보는 누아르였으나 블라드는 그저 팔짱을 낀 채 바라볼 뿐이었다.
이별은 담백할수록 좋다.
누군가가 한 그 말을 실천하는 블라드를 보며 누아르가 인사를 건네듯 조심스레 투레질을 하기 시작했다.
“······간다.”
떠날 때는 망설임 가득한 걸음이었지만 언덕이 가까워질수록 보폭이 넓어지는 누아르.
그렇게 이제는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향해 뛰어가는 검은 말을 보며 제미나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주인을 닮아서 그런가. 쟤도 뒤 한번을 안 돌아보네.”
이별의 빈자리가 아쉬운지 제미나가 자연스럽게 블라드의 옆으로 붙고 있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
그렇게 떠나가는 누아르를 보며 나란히 선 블라드와 제미나.
꼭 붙어있는 그 모습이 마치 예전 대장간 앞에서 보았던 아이들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니잖아.”
그렇게 떠나가는 누아르를 보며 블라드가 품 안에서 그림 한 장을 꺼내들었다.
제미나의 눈에도 익숙한 그 그림은 세계수의 신녀가 주었던 그림이었다.
“지금 보니까 이 해바라기. 이거 꽃잎이 네 머리카락 색이랑 닮은 거 같아.”
“그래?”
어린아이가 그린듯한 그 그림 안에는 금발의 남자와 붉은 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웃고 있는 그들 사이에 피어 있는 자그마한 꽃 한 송이까지.
굳이 그 꽃에서도 웃는 얼굴을 그려 넣은 것은 어째서일까.
“고마워. 제미나.”
“응?”
밤바람이 춥다는 듯 다가오는 제미나의 어깨를 블라드가 감싸 안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제미나가 놀란 듯 쳐다보았지만 블라드는 여전히 누아르가 올라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예전처럼. 허름한 대장간 위에 매달려 있던 장식 없는 검을 바라보았던 그때처럼.
“그때 나를 믿어줘서.”
태어난 겨울을 지나, 이별을 한 봄.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만남을 기다릴 여름까지 이어진 소년의 여행.
그 여행의 시작은 아마 붉은 머리의 소녀가 쥐여 주었던 검에서부터 시작된 것일 테다.
“이제 같이 돌아가자. 쇼아라로.”
발끝은 진창에 있었어도 함께 별을 바라보던 소년과 소녀.
그리고 이제는 서로를 바라보는 둘의 위로 초원의 별똥별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높디높은 밤하늘에 있지 않더라도.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떨어져 있더라도.
스스로가 빛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별이니까.
모두가 빛날 수 있는 별이니까.
그러니 다시 만날 그때까지 안녕.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 (完).
※※※※
모두가 깊게 잠든 새벽.
하늘 위에 있는 별들조차도 잠들어 있을 깊은 밤,
그 밤하늘 아래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사내를 깨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님. ······노 님.”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은 듯한 어린 소년의 목소리.
그렇기에 깊은 잠에 빠진 사내를 깨우기에는 조금은 박력이 모자란 듯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앗! 따거!”
“일어나시라고요!”
아마 벌침이 쏘이면 이런 느낌일까.
갑자기 느껴지는 통증에 화들짝 놀란 사내가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쉬잇-!”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내를 향해 조용히 하라 손짓한 소년이 마구간 밖을 빼꼼히 내다보기 시작했다.
양손에 소중히 감싸 쥐고 있는 자그마한 개구리와 함께.
“한참 찾았잖아요! 아니 왜 멀쩡한 방을 놔두고 마구간에서 자고 있어요?”
“······여기 마구간이야?”
자신이 어디서 누웠는지도 모르는 얼빠진 사내.
아마 잘생긴 얼굴만 아니었다면 누가 보아도 한숨이 나올듯한 그런 한심한 모습이었다.
“어쩐지 따듯하더라.”
다급해 보이는 소년의 모습과는 다르게 아직 잠이 덜 깬 사내는 주위에 있는 짚들을 그러모으며 다시 자리에 눕기 시작했다.
춥다는 듯 어깨까지 웅크리는 모습에 소년이 들고 있던 개구리마저 어이가 없다는 듯 볼을 부풀려댔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구요! 우리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해요!”
“······뭐라는 거야. 그냥 좀 이따가 이야기하면 안 되겠냐.”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다시 드러누운 사내의 모습에 복장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쳐대는 소년.
그러나 이윽고 어수선해지는 주위 분위기에 숨을 죽이고 말았다.
-어디 숨어 있는 거냐!
-여기 있는 거 다 알고 있다! 어서 나오지 못해!
“음?”
고래고래 지르는 모양새가 누가 들어도 험악한 목소리였다.
게다가 주위 상점들을 부수기라도 하겠다는 듯 있는 힘껏 문을 박차대는 소리까지.
옆에 있는 소년과는 다르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그 분위기에 이제 막 드러누운 사내가 두 눈을 끔벅이기 시작했다.
-키하노 프라우센! 이 빌어먹을 난봉꾼 같으니!
“엥?”
기름에 젖은 횃불이 타는 냄새가 매캐하다.
주위에서 짖는 사냥개들의 소리는 매섭고.
그러나 정작 사내를 당황케 하는 것은 자신의 이름 뒤에 붙어있는 난봉꾼이라는 단어였다.
콰직-!
이제야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서둘러 일어서는 사내였지만 이미 대비할 시간은 늦고 말았다.
“여기 숨어 있었구만.”
이제야 찾은 사내를 보며 누런 이를 힘껏 들이미는 남자.
번들거리는 대머리가 인상적인 그가 이제 막 옷을 추스르는 사내를 보며 웃기 시작했다.
“찾았다. 키하노 프라우센.”
여전히 얼이 빠져 있는 사내와 이제는 다 틀렸다는 듯 울상을 짓고 있는 소년.
그리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 모자 쓴 개구리까지.
“······저는 왜 찾으시는지?”
이건 먼 옛날의 이야기.
전설적이지도 위대하지도 않은 그런 이야기.
그렇지만 모든 것의 시작인 이야기는 바로 이곳, 간판도 제대로 달리지 않은 초라한 여관의 마구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