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57
높은 언덕, 거대한 골렘, 그리고 날개의 가장 끝에 매달려 있는 자신.
태어나 지금만큼 하늘에 가까워 본 적 없던 키하노는 서늘하게 느껴지는 위쪽 공기에 정신이 나가버린 듯 그만 실없이 웃고 말았다.
“이제 내려간-다!”
“끄으으아!”
그러나 날개 없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추락하기 마련.
가장 고점에 달해 있던 날개가 다시금 땅을 향해 내려오기 시작하자 키하노는 다시금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부유감에 배꼽 아래쪽이 터질 듯 간지러워졌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방금처럼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을 수만은 없는 순간이었다.
쿵! 쿵! 쿵!
저 아래서 울리는 골렘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그 말은 즉, 그만큼 지면에 가까워졌다는 소리.
이미 착지에 세 번이나 실패해 아찔한 활공을 느끼고 왔던 키하노는 더는 혓바닥으로 구름을 맛보고 싶지는 않았다.
“꽉 잡으라구요!”
날개 끝에 매달려 있던 키하노의 눈이 빛났다.
그 날카로운 눈빛은 오직 적절한 순간을 찾아낸 검사만이 낼 수 있는 눈빛.
“······!”
돌고 있는 날개와 골렘의 무릎이 가장 가까워진 순간, 그 순간을 노린 키하노가 날다람쥐처럼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들려오는 개구리의 비명이 있었지만 키하노의 신형은 이미 다음 착지 지점을 향해 날아가는 중이었다.
“윽! 익! 으익!”
웬만한 담력이 있지 않고서야 움직이는 골렘에서 뛰어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난이도는 마치 무너져 내리는 건물에서 잔해들을 밟고 내려오는 수준과 맞먹을 테니까.
“아직! 땅은 아직이냐!”
“보면 알 거 아니에요!”
“나 지금 눈 감았단 말이다!”
그러나 지금 키하노는 자신이 봐두었던 지점들을 밟아가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땅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유려한지 나귀를 탄 채 따라오던 얀조차도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 정도였다.
“이제 마지막!”
오직 골렘의 구동 방식을 완벽히 이해했기에 취할 수 있는 유려한 움직임.
그 움직임을 따라 물 흐르듯 내려온 키하노가 어느새 초원을 향한 마지막 도약을 시도하고 있었다.
“으악!”
“꽤액!”
비록 마무리는 좋지 않았지만.
쿵쿵거리며 떠나는 골렘의 뒤로 비탈진 언덕길을 키하노가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키하노 님! 괜찮으세요!”
“······.”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기도 힘들 정도로 키하노의 안색은 엉망이었다.
세찬 바람 때문에 사정없이 뻗쳐오른 갈색 머리는 덤.
그러나 자신의 발이 땅에 닿은 것을 확인한 키하노는 부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추스르고는 얀을 향해 손짓했다.
“배낭에서 물약 하나만 꺼내와 봐. 녹색빛 나는 거 있어.”
“이거요?”
“그래. 그거.”
얀이 꺼내온 유리병에는 보기에도 불길한 녹색 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병을 건네받은 키하노는 망설임 없이 뚜껑을 따고는 입에 흘려 넣을 뿐이었다.
“크으! 콜록콜록!”
진득히 농축된 솔잎의 맛이 키하노의 혀를 괴롭혀댔다.
입에서부터 퍼져나오는 그 향이 어찌나 강했는지 죽은 듯 뒤집혀 있던 앤드류도 감았던 눈을 뜰 정도였다.
“······그런데 쟤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그렇게 약물의 힘으로 정신을 차린 키하노가 본 것은 콘수에그라로 돌진하고 있는 골렘의 모습.
마치 마을을 부술 듯 달려드는 골렘에게서는 지금도 들려오는 정령들의 울음소리가 있었다.
“아무래도 거인이 뭔가 화가 났나 봐요. 왠지 눈도 시뻘건 게.”
“눈이 아니라 창문이겠지.”
정령들의 분노어린 소리에 사태를 파악한 키하노가 재빨리 앤드류를 불렀다.
“영감님! 정신 차려요!”
“으으으······. 여기가 어디야.”
“빨리 정신 차리고 아까 말한 대로 준비 하시라구요!”
빨리 정신을 차리라는 듯 앤드류를 흔들어 댄 키하노가 검집을 추켜 매고는 언덕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커다란 발자국이 새겨져 있는 콘수에그라의 언덕.
아까까지만 해도 푸른 풀들이 가득한 곳이었겠지만 골렘이 지나간 자리에는 온통 시커먼 흙더미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키하노 님? 다시 골렘한테 가는 건 아니시죠?”
다시금 장비를 추스르는 키하노를 보며 얀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이미 키하노의 눈빛은 굳게 결심한 듯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도 한 명 정도는 나서줘야지.”
“네?”
얀은 들을 수 없었겠지만 지금도 키하노의 귓가에는 어린 정령들이 부르짖는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그 소리에 깨어나기 시작하는 키하노 안의 어린 소년.
상처를 통해 이어진 정령들의 세계는 이미 키하노에게 있어 나의 세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누구라도 한 명 정도는 대신 나서줘야 한다고.”
누구라도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할 자리에서, 어린 가능성을 위해 대신 검을 휘둘러 주기를.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던 그때를 기억하기에 키하노는 이번만큼은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이거 가지고 있어.”
“키, 키하노 님? 키하노 님!”
새하얀 종이 뭉치를 건네고는 거대한 풍차를 향해 달려가는 키하노.
그의 등 뒤로 얀의 애타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미 키하노는 마을이 있는 곳을 향해 내달리는 중이었다.
“······이게 뭔데요.”
그렇게 언덕 위에 홀로 남은 얀은 키하노가 건네준 종이 뭉치를 들여다보았다.
온갖 그림들이 어지러이 적혀져 있는 그것은 사몬테의 풍차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말해주는 설계도.
그 설계도를 내려다보던 얀은 가장 밑 부분에 있는 새빨간 글씨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긴······ 급 제동 장치?”
마을을 향해 폭주하고 있는 사몬테의 풍차.
그 풍차를 막기 위해 키하노가 푸르른 언덕을 내달리고 있었다.
들고 있는 검은 작고 상대해야 하는 적은 거대하나 지금 키하노에 왼쪽 눈에 깃든 것은 분명 잊고 있었던 나의 세계.
맞닿은 세계를 통해 스며들어 오는 별빛을 따라 키하노 안에서 울고 있던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키하노 외전- 라만차의 키하노
쿵! 쿵! 쿵!
발을 옮길 때마다 지축이 뒤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먼 곳에 있었음에도 느낄 수 있는 발밑의 진동.
그러나 그 진동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새하얀 공포가 새겨지고 있었다.
“저, 저놈이 마을로 간다!”
“······마을에는 아이들도 있는데!”
투를레크 남작령에서도 구석진 곳에 있는 콘수에그라는 한적한 만큼이나 지금 같은 위기를 겪어본 적이 없던 마을이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마을을 향해 뛰어갔지만, 여전히 굼뜰 수밖에 없는 그들의 반응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골렘에 비한다면 너무나도 느린 것이었다.
“사르누스 님! 도와주세요!”
“골렘을 막아주세요! 저 거인이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댈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완벽함에서 태어난 용.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 사르누스를 향해 도와달라 간절히 외치기 시작했지만 정작 용의 푸른 눈동자는 애원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조종이 불가능한가?”
“네? 아니 꼭 그렇지는······.”
“솔직히.”
어떻게든 변명을 주워섬겨보려 했던 사몬테였으나 어째서인지 사르누스의 앞에서만큼은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사르누스의 세계는 올려다볼수록 거대해지는 세계.
마땅한 지배자이기에 거칠 것 없는 그의 눈빛은 도무지 거역할 수 없는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렇기에 힘없이 내뱉고 만 실패였다.
마지막 남은 기회마저 날려버린 사몬테는 처참한 절망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으나 정작 대답을 들은 사르누스의 표정에는 옅은 미소가 새겨지는 중이었다.
“차라리 잘됐군.”
“네?”
자신을 향해 애원하는 사람들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골렘.
그것이 콘수에그라를 향해 성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나 사르누스의 실험은 아직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어차피 남부 수인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골렘 아닌가. 여기서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
어린 정령들의 비명을 집어삼키며 일어선 골렘은 처음부터 파괴를 위해 태어난 것이었다.
그렇기에 사르누스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골렘에 대한 완벽한 제어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짓밟을 수 있느냐였을 뿐.
“그, 그렇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완벽한 용이 지배하는 이 세계는 그야말로 티끌 하나 없어야 하는 세계.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마땅히 지워야 할 오점에 불과할 뿐.
그저 앞에 있는 목표만을 내다보는 사르누스의 세계에는 지금 들려오는 마을 사람들의 아우성도, 아프다고 울부짖는 정령들의 비명도 전혀 닿지 않고 있었다.
“음?”
그러나 오직 단 한 사람. 사르누스의 세계까지 닿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용들조차 경계해야 할 정도로 찬란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던 사내.
그 사내가 지금 언덕 밑을 뛰어 내려가며 골렘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금방 멈춰줄 테니까!
“키하노······. 프라우센.”
용이 있으라 한 자리에 없었던 남자. 키하노 프라우센.
그러나 있어야 할 자리에 있기 위해 뛰고 있는 그는, 예전에 보았던 소년처럼 빛나고 있었다.
※※※※
쿵! 쿵! 쿵!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진동만으로도 내장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언덕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던 키하노는 조금도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마을이야!’
굳이 정령들의 원망 어린 소리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사몬테의 풍차는 마을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분노 어린 외침을 내질러대는 골렘이 마을까지 닿게 된다면 어떠한 상황이 펼쳐질지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검을 빼든 키하노가 재빨리 골렘의 발치까지 따라 붙었다.
당장이라도 밟힐 듯 위태로운 거리였지만 빛나는 키하노의 눈은 내려오는 골렘의 발등을 침착하게 노려볼 뿐이었다.
쿵!
“하나!”
쿵!
“둘!”
불가능한 목표라도 해낼 수 있다 믿은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그 어떤 적수 앞에서도 두려움에 떤 적 없던 사람이었다.
쿵!
“······셋!”
그러나 현실을 입어버린 나는,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아버린 나는 어린 시절 꿈꾸었던 사람이 아닌 그저 초라한 키하노일 뿐.
그런 나를 다시 빛내기 위해 키하노가 골렘의 발등 위로 뛰어들었다.
콰앙-!
“끄으으!”
얼굴로 튀어 오르는 흙더미가 매섭고,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날카로웠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견디기조차 힘들 악조건.
그러나 손을 끝까지 놓지 않은 키하노는 올라가는 골렘의 발등과 함께 점점 부상하고 있었다.
세계 안에서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이 점점 하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긴급제동장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사몬테의 제동장치는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는 왼쪽 무릎에.
두 번째는 허리 중앙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지금도 흉악한 기세로 돌아가고 있는 날개의 회전축에 있었다.
“일단 무릎부터!”
골렘의 발등이 최고점에서 올라서자 키하노가 재빨리 위를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발을 내딛기 위해 아주 잠깐 멈춰 있는 그 순간.
그러나 오직 이 짧은 순간만이 키하노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크윽!”
지난날의 나를 반성한다.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멈춰 있었던 나를.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시간은 키하노에게 잠깐의 틈을 만들어주고 있었으니 이제 마지막 남은 그 순간마저 놓칠 수는 없었다.
“으아아압!”
지면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내려가는 왼발에서부터 키하노가 뛰어 올랐다.
그야말로 디딜 공간 없이 모든 것을 걸고 뛰어오른 도약.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도약이었으나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공중에 멈춰 있던 키하노의 앞으로 골렘의 무릎이 내려오고 있었다.
콰앙-!
“큭!”
어디선가 뿌려진 파편들이 키하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선명한 핏줄기를 남겼음에도 키하노가 웃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바라왔던 것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찾았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작은 표시.
간신히 무릎에 매달린 키하노의 앞으로 빨간 점으로 표시된 제동장치가 보이고 있었다.
“우리 잠깐 멈춰서 이야기 좀 해볼까?”
역수로 쥔 키하노의 검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 멀리서 바라보는 사르누스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그런 빛으로.
“흐아압!”
콰직-!
어두운 내부 속에 숨겨져 있던 자그마한 톱니바퀴 하나.
무릎의 움직임을 관장하던 톱니바퀴가 키하노의 검 끝에서부터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
쿠르르르릉!
갑작스런 골렘의 주춤거림에 언덕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그 육중한 몸놀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새까만 흙더미를 내보이고 마는 콘수에그라의 언덕.
바로 옆 언덕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경악에 찬 탄성과 함께 입을 틀어막고 말았지만 걔 중 몇몇 사람들은 골렘에게서 보이는 자그마한 반짝임에 주목하고 있었다.
“저게 뭐야?”
희뿌연 흙먼지 속에서도 반짝이는 이질적인 빛 하나.
날쌘 움직임으로 골렘의 무릎에서부터 허리까지 올라간 그 빛이 지금 크게 외치고 있었다.
-이제 좀 멈춰 봐라!
“······사람, 사람이다.”
“어떻게 저기에 사람이?”
크오오오오-!
전혀 움직이지 않는 왼쪽 다리에 발목이 잡혀버린 골렘이 큰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나 웅장한 그 울림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지금도 쉴 새 없이 검을 내려치고 있는 키하노의 모습이었다.
“······키하노! 기사 키하노다!”
“프라우센의 키하노! 우리 여관에 있던 키하노!”
계속해서 마을을 향해 다가오는 파멸이었지만 주위에 있던 호위 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 장면을 바라보는 사르누스의 눈은 서늘할 뿐이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지만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는 이 순간에도 그들을 위해 해야할 일을 하는 기사가 아직 남아있었다.
“기사 키하노가 골렘을 부수고 있다!”
“오오. 세상에!”
한낱 인간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적.
그런 골렘을 혼자만의 힘으로 막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꿈이겠으나 지금 마을 사람들 앞에는 그런 꿈을 현실로 실현하는 사내가 있었다.
“······이걸로 두 개째!”
턱 끝으로 흐르는 땀이 앞에 있는 빨간 점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너무나 지쳤기에 쥐고 있는 검 끝 조차 흔들리고 있었으나 목표를 향한 키하노의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콰직!
크아아아아!
이로써 두 개째.
허리에 있던 제동장치까지 부서진 골렘의 하체가 더는 움직일 수 없다는 듯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기사 키하노가 풍차를 부수고 있다!
-프라우센의 아들 키하노!
-도시 라만차의 자랑이 지금 우리 앞에 있다!
“······.”
열광하는 사람들의 외침이 키하노를 향해 울려퍼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세계를 지켜주는 기사를 위한 존경과 환호였다.
그러나 그 환호의 뒤에서는 지금도 서늘한 눈을 치켜뜬 용 한 마리가 있었다.
“이제 됐습니다! 사르누스 님!”
여기 있는 용이 아닌 기사를 향해 감사하다고 외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보는 사르누스의 심장이 들끓고 있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몬테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가올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키하노가 제동장치를 건드려서······. 하체는 못 쓰겠지만 이제 상체만큼은!”
“움직일 수 있나?”
사르누스의 감은 왼쪽 눈으로 본 키하노의 세계는 상처 입은 꽃 한 송이.
그러나 상처 입고 좌절한 꽃이라 할지라도 꿈을 꾸는 한 언젠가는 별에 닿을 수 있는 법.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가동해 봐야겠지.”
그 꽃을 보며 고개를 까닥인 사르누스가 사납게 웃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목덜미를 긋고 있는 사르누스의 손가락.
“어떤가?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도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지.”
“······.”
그러나 저 높은 곳에 있는 하늘은 오직 완벽한 용들만이 닿을 수 있는 것.
짓밟았던 가능성이 다시금 제 색을 찾는 모습을 보며 사르누스가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죽여.”
※※※※
“허억! 헉!”
이미 지쳐버린 몸을 이끌며 키하노가 풍차를 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가만히 멈춘 채 마을을 향해 울고 있을 뿐인 골렘이었으나 아직 키하노에게는 해야할 일이 남아있었다.
-아파요! 너무 아파!
-누가 여기서 우리 좀 꺼내주세요!
“······조금만 기다려.”
지금도 풍차의 꼭대기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내 뒤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어린 정령들의 울음 소리.
오직 나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소리를 향해 키하노가 마지막 제동장치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키하노!
“······!”
순간 키하노의 머릿속에서 천둥처럼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심상을 통해 연결된 마법사가 내지르는 경고였다.
-위를 봐라!
너무나 지쳐있었기에 그랬을까.
평소라면 알아차렸을 날카로운 살기가 지금 키하노의 머리 위에서 사납게 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산처럼 높이 솟은 골렘의 오른팔이 키하노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하늘 위에 운석이 떨어지는 듯한 그런 모습으로.
그러나 너무나 늦게 알아챈 키하노에게는 더는 도망칠 길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뛰어라!
순간, 내 다리를 타고 오르는 기이한 감각이 있었다.
맞닿은 세계를 통해 전해진 마법사의 신비였다.
-어서 개구리처럼 뛰라니까!
“······!”
너와 내가 맞닿는 면을 통해 우리는 더 넓어질 수 있다.
그렇기에 넓어진 키하노의 세계는 어느새 앤드류의 다리를 닮아 있었다.
콰아앙-!
내 몸이 부서지는 것조차 상관하지 않은 무시무시한 일격.
사방에 튀어 오르는 잔해에 조종기를 들고 있던 사몬테가 손을 치켜들었지만, 그 손보다도 더 높게 떠오르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러니까 개구리 말고 참새 같은 거나 하라니까!”
폴짝!
개구리의 도약력은 자기 몸체의 20배까지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 뛰어오른 키하노는 그 높아 보이던 풍차조차 내려다볼 기세로 하늘을 향하는 중이었다.
“······내려갈 때는 어떡하라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 세상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키하노.
그 옛날 내가 꿈꾸었던 하늘을 보며 키하노 안에 있던 어린 소년이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
“위치 좋고!”
하늘까지 뛰어오른 키하노를 보며 앤드류가 재빨리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위치가 좋긴 뭐가 좋아요! 저러다 키하노 님 죽겠어요!”
잔뜩 찌그러진 놋쇠 세숫대야 안에서 앤드류가 가만히 눈을 감기 시작했다.
물이 가득 찬 그곳에서 유유히 떠다니는 그를 보며 얀이 다급히 불러대었으나 이미 신비를 향한 앤드류의 손짓은 저 하늘 너머까지 넘어간 뒤였다.
“······맘브리노의 구름들아. 지금 내가 너희들을 부르노라.”
내가 부릴 수 있는 그 어떤 신비보다 강력한 맘브리노의 구름들.
평소라면 할 수 없는 마법이었지만 신묘한 황금투구와 함께한다면 아주 잠깐은 힘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고귀한 이상에 어울리는 것은 푸르른 구름.”
쿠르르릉-!
키하노가 솟아오른 하늘 위로 푸른 구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불가능한 꿈에 어울리는 것은 새하얀 번개.”
콰가가강-!
그와 함께 맺히기 시작하는 새하얀 번개.
갑작스레 몰려든 뇌우가 지금 콘수에그라의 언덕을 하얗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뿌린 색깔들이 세상을 속이리라!”
지금 보이는 모습은 초라한 개구리.
그러나 인간이었을 적 그를 부르던 이름은 위대한 맘브리노의 마법사. 번개를 부르는 앤드류.
“으아아아아!”
정령들이 울고 있는 언덕 위로 세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쩍이는 하얀 번개.
모든 눈물조차 씻어내릴 비와 함께 하늘에서부터 별을 가져온 키하노가 내려오고 있었다.
“이걸로 마지막이다!”
나를 부르는 어린 정령들을 위해 내려온 하얀 번개.
소년이 한껏 품은 그 번개가 키하노의 왼쪽 눈을 불사르며 사몬테의 풍차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콰가가가강-!
꽃이 피고 있었다.
나를 믿었기에 별까지 닿을 수 있었던 소년의 꽃.
용조차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찬란함이 지금 콘수에그라의 언덕을 하얗게 물들이며 풍차의 날개를 꺾고 있었다.
※※※※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무적의 적수를 이기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잘못을 고칠 줄 알며,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하는 것.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그리하여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사의 임무이자 의무이노라.
소설 돈키호테 中
키하노 외전- 또 다른 만남을 위해 (完)
하늘을 찌르듯 오연하게 고개를 들고 있던 첨탑이었다.
그리고 그 첨탑을 향해 매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한 줄기의 벼락.
“흐아아아압!”
콰가가강-!
맹렬한 굉음과 함께 풍차의 머리 부분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마치 폭죽이 터져나가듯 깨어지고 마는 풍차의 파편들.
언덕을 물들이는 수많은 빛의 파편들을 보며 마을 사람들이 놀란 듯 하나둘씩 입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남은 장치는 하나.”
그러나 하늘에서 시작된 낙뢰는 아직 제빛을 잃지 않았다.
부릅뜨고 있는 키하노의 왼쪽 눈은 여전히 하얗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고통스러워하는 어린 정령들을 위해 검을 빼 든 기사 키하노.
그가 하늘에서 빌려온 빛을 품은 채 골렘의 어깨를 타고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크으아아아-!
머리에서부터 시작한 번개의 길이 어깨를 타고 내려와 날개로까지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 길의 끝이 어디로 다다를지 직감한 사몬테가 재빨리 조종기를 휘둘렀으나 이미 한껏 예민해진 키하노의 기감은 골렘의 움직임을 포착한 뒤였다.
-키하노! 다시 온다!
저 위에서부터 날아오는 골렘의 주먹을 보며 다시금 경고한 앤드류.
그러나 이윽고 벌어진 상황에는 그조차도 크게 입을 벌린 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야.”
저 높은 하늘을 향해 골렘의 팔이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잡아채기라도 했다는 듯 거칠게 들어 올려지면서.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이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따라 올리고 말았다.
“끄으으으!”
천천히 들어 올려지는 골렘의 팔 아래에서는 지금도 검을 붙잡은 채 이를 악물고 있는 키하노가 있었다.
콰가가가강-!
마치 거대한 산이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은 느낌.
주먹과 맞닿은 키하노의 검이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불꽃을 튀겨냈지만, 키하노의 팔목만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골렘의 기세를 비틀어내고 있었다.
“흐아아압!”
다가오는 상대의 검을 원으로 그리며 흘려내는 결투사들만의 방어술.
인간과 인간의 대결에서조차 실현하기 힘들다는 그 기술이 지금 사몬테의 풍차를 통해 재현되고 있었다.
“키하노······. 프라우센. 네놈이 기어이.”
하얗게 타오르는 키하노의 전신이 마치 별과도 같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잘 알고 있는 사르누스의 눈동자가 거센 파도를 만난 듯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콰득! 콰지지직!
멀리 있는 언덕까지 확연히 들려오는 요란한 파열음이 있었다.
그것은 가동 범위를 훌쩍 넘어버린 골렘의 어깨 관절에서부터 시작된 것.
휘두른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해 처참히 꺾이고 만 자신의 팔을 보며 사몬테의 풍차가 비통한 울음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그렇게 밀쳐낸 골렘의 팔 너머로 보이는 광경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천천히 돌아가며 어린 정령들을 쥐어짜고 있는 풍차의 날개였다.
“이제 보인다.”
감히 할 수 있을까 의심하며 상상으로만 그려봤던 나만의 그림.
그러나 지금 보이는 현실은 분명 내가 그려낸 그림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으니.
“······!”
마지막 순간을 찾아낸 키하노로부터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구름에 닿았던 소년이 하늘에서부터 가져온 별빛과도 같은 색.
그 색을 담은 키하노의 왼쪽 눈이 눈앞에 보이는 날개의 축을 향해 빛나고 있었다.
“흐아아아아!”
아무도 나서주지 않았기에 울고 있던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그들을 위해 뛰어든 별빛 하나가 콘수에그라의 언덕을 빛내며 골렘의 가슴팍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콰직-!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사몬테의 풍차가 딱딱한 석상처럼 굳어가기 시작했다.
미처 회수하지 못한 왼팔을 여전히 하늘을 향해 뻗은 채로.
그리고 굳어버린 팔을 따라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색색의 빛들이 있었다.
“됐다.”
그 빛을 본 키하노가 기껍다는 듯 미소짓고 있었다.
자신의 의무를 다한 채 떨어져 내리는 별 하나와 이제야 하늘을 향해 떠오르기 시작하는 수많은 별들.
서로가 교차하는 그곳에는 여태껏 보지 못했던 찬란한 빛무리가 가득했다.
※※※※
“······저게 오로라라는 건가.”
온갖 잔해들이 널브러진 언덕 위에서 키하노가 힘없이 웃고 있었다.
힘이 다했다는 듯 쓰러져 있는 키하노였지만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지금 머리 위로 비치는 화려한 빛의 물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광경이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네.”
인간들의 손아귀에서부터 해방된 어린 정령들이 기쁘다는 듯 주변을 헤매며 하늘을 자신들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비단이 하늘을 뒤덮는 것만 같은 광경.
외면하지 않았기에 볼 수 있는 오늘의 하늘을 보며 키하노가 자그맣게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잘 가라.”
불을 뿜는 도마뱀, 반짝이는 나비, 손톱만큼 작은 오징어, 그리고 자그마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하얀 뱀까지.
여전히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아이들 많았지만 이미 지쳐버린 키하노는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 알았어. 나중에 또 보자.”
그렇기에 그저 나중에 보자고 말해줄 수밖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볼 수 있겠지.
그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어린 정령들이 알았다는 듯 하늘에서 물결치는 오로라 속으로 하나둘씩 자신들의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올려다보니까 이렇게 좋네.”
그렇게 떠나가는 정령들을 보며 키하노가 웃고 있었다.
외면하지 않았기에 볼 수 있는 오늘의 하늘.
이제야 마주하는 하늘에서는 수많은 별이 키하노를 향해 쉼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
어느덧 여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어느 이름 모를 작은 마을.
콘수에그라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곳 주점에서는 지금 들려오는 소문 때문인지 한참 떠들썩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랬다니까. 진짜 산만한 골렘을 무너뜨렸다니까!
-사악한 마법사가 부리는 골렘을! 용이 아니라 인간 기사가!
-이름이 뭐랬더라. 라만차의 키하노라 그랬던가.
라만차의 기사 키하노.
사악한 골렘을 상대로 마을 콘수에그라를 지켜낸 사내.
너무나도 거대한 광경이었기에 생생하게 전해지고 만 소문은 지금도 마을에서 마을로, 그리고 도시로 향하며 매일같이 키하노의 이름을 드높이는 중이었다.
“아주 큰 일을 냈더구나.”
그러나 정작 소문의 주인공인 키하노는 지금 양 볼에 가득 넣은 빵을 삼키지도 못한 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는 중이었다.
“너 떠나기 전에 내가 뭐라고 했었지?
“······.”
“얌전히 있으라고 했다. 가능하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콘수에그라를 떠나 처음으로 들른 어느 마을.
그곳에서 오랜만에 따뜻한 빵을 뜯고 있던 키하노는 앞에 있는 페드로 때문에 씹고 있던 빵도 넘기지 못한 채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그런데 골렘을 부쉈다고? 그것도 드라굴리아의 후원을 받는 골렘을?”
“혀엉. 내하 다 서며하수······.”
“그것도 모자라서 가두고 있던 엘프한테는 아예 감옥 열쇠까지 주고 왔다면서.”
꿀꺽.
침묵만이 가득한 식탁 위로 누군가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빵을 가득 물고 있던 키하노가 아니라 그 옆에 있던 소년에게서부터 나는 소리.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능청을 떨어대는 키하노와는 달리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어대는 얀에게서는 그야말로 숨길 수 없는 불안이 가득하여 있었다.
“거참 이상하네. 분명히 아무도 모르게 건네줬는데.”
“······.”
이제는 아니라고 변명조차 하지 않는 키하노를 보며 페드로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폭주하는 골렘을 부순 것 정도야 명분이 있었으니 충분히 해결해 줄 수도 있는 일.
그러나 사르누스의 소관 아래 있던 엘프를 제멋대로 꺼내준 것은 아무리 프라우센이라 할지라도 영 골치가 아파지는 일이었다.
“······너 당분간은 수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짤랑!
그 말과 함께 내려놓는 주머니가 꽤나 묵직해 보였다.
아마 이 안에 들어 있는 금화만큼이나 최대한 멀리, 그리고 오래도록 떠나있으라는 말일 테다.
“최대한 빨리 떠나라. 이미 드라굴리아에서 손을 썼다는 말이 있으니.”
떠나라는 말투는 냉정했으나 덧붙인 말에는 동생에 대한 걱정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완벽을 추구하는 드라굴리아에게 이미 두 번의 실패를 안겨주고 만 키하노.
거기다 이제는 예전과는 달리 빛나는 가능성까지 드러내고 있었으니 프라우센의 망나니라는 멸칭만으로는 더 이상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을 터였다.
“하긴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었겠지.”
어린 새들은 언젠가는 둥지를 떠나야만 한다.
그것이 자의가 되었던 타의가 되었든 간에.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날아오르지 못했던 자신의 동생을 보며 페드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
지금 떠나면 언제 보게 될지 모르는 동생이었지만 주점을 나서는 페드로의 뒷모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듯 단호하고도 결연한 모습이었지만 아직 이별이 익숙지 않은 키하노는 그저 떠나가는 그의 뒤를 향해 조용히 형이라 읊조릴 뿐이었다.
※※※※
겨울을 지나, 봄. 그리고 이제는 푸른 나뭇잎이 가득한 여름.
그 계절의 한 가운데를 걷는 기사와 소년, 그리고 한 마리의 개구리는 앞에 놓인 갈림길을 보며 잠시 멈춰 서고 말았다.
“이거 어디로 가지?”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갈라진 갈림길이었기에 목적을 정하지 못한 키하노는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수도로 향하는 북쪽만은 가면 안 되는 것을 알았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단은 내가 아는 마법사가 있는 동쪽으로 가보는 건 어떻겠냐? 내 몸에 대한 정보도 얻을 겸.”
“저는 가능하다면 남쪽으로 갔으면 좋겠어요. 아까 페드로 님도 그러셨잖아요. 용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
앤드류를 위해 동쪽으로 갈 것이냐. 페드로의 조언을 따라 저 멀리 남쪽으로 갈 것이냐.
각자가 합당한 이유가 있는 조언이었기에 쉽게 정할 수 없는 방향이었지만 이윽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부터 들려오는 새소리에 키하노가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거 뭐야?”
어서 날 위해 내릴 곳을 마련하라는 듯 키하노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 새 한 마리.
전서구임에는 분명했지만 평범한 전서구와는 다르게 매서운 날개를 펼치고 있는 녀석은 서쪽 끝에서나 볼 수 있다는 송골매였다.
“······그림?”
혹시나 싶어 내뻗은 팔목 위로 가볍게 내려앉은 송골매.
과연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두텁게 매달아 놓은 연통 안에는 흔히 있을 편지가 아닌 누가 보냈는지 모를 그림 한 장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이게 뭐예요. 키하노 님?”
“나도 모르겠는데.”
나는 모르겠다는 듯 날개를 정돈하는 송골매를 보며 키하노가 머리를 긁적여댔다.
“그래도 낯익은 그림체인데.”
한참을 그림을 내려다보던 키하노는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이 어딘지 낯설지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땀 한 땀 그려 넣은 붓질은 그야말로 장인의 손길.
마치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옮긴 것만 같은 생생한 그림 속에는 분명 예전에 한 번 보았던 누군가의 그림과 닮아 있었다.
“콘수에그라······.”
어두컴컴한 감옥에서 보았지만 눈앞이 밝아지는 것만 같던 콘수에그라의 정경.
그 그림을 그렸던 백금발의 여인을 떠올린 키하노는 그제야 지금 들고 있는 그림이 누가 그린 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앤드류.”
“응?”
“엘프들의 도시가 어느 방향에 있죠?”
“알브헤임 말이냐? 그곳은 서쪽에 있지.”
오라고 하는 곳도 없고 딱히 갈 곳도 없었던 키하노에게로 찾아든 전서구 한 마리.
인생의 갈림길 앞에 있을 때 계시처럼 다가온 그 그림을 보며 키하노가 서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우리 서쪽으로 가볼까요.”
“서쪽? 서쪽은 갑자기 왜?”
여태껏 말하고 있던 남쪽도 동쪽도 아닌 갑자기 서쪽으로 가자고 말하는 키하노.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한 앤드류와 얀이었지만 이미 키하노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했다는 듯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잘됐네. 어차피 검도 망가져서 새로 하나 장만하려고 했던 참이었는데.”
골렘과의 결투는 격렬했고 그로 인해 키하노의 검은 잔뜩 이가 나가버리고 말았다.
어찌 보면 영광의 상처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기사에게 있어 검이란 언제나 함께해야 할 귀중한 동반자와 다름없는 존재.
“들어보니까 드워프들이 그렇게 검을 잘 만든다고 하잖아요. 사실 예전부터 드워프들이 만든 검을 가져보고 싶었거든요.”
엘프들의 숲인 알브헤임을 지나가면 드워프들이 있는 뮈르크헤임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검은 모두 하나같이 명검이 아닌 것이 없다지.
“그런데 키하노 님.”
“음?”
“이 그림 되게 신기하네요. 여기 좀 보세요.”
그렇게 걷기 시작한 서쪽으로 향하는 길.
한참을 그 길을 걷고 있던 얀이 갑작스레 눈을 밝히며 키하노에게 엘프 여인이 그린 그림을 들이대었다.
“처음에는 밤하늘을 그린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배낭에 넣으라고 건넨 그림이었지만 아무래도 흥미가 동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세히 보면 보이는 또 다른 풍경들이 그 안에 숨겨져 있었으니까.
“여기, 여기 보시면 뭔가 보이지 않아요?”
마치 새까만 밤하늘을 그린 것만 같은 그림 한 장.
그러나 유심히 바라본 그림에는 밤하늘이 아닌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 보시면 이거 아무래도 도시 같죠?”
“오. 그렇네.”
“작아서 잘 보이지는 않는데 이 별 주위가 엄청 복잡해 보이는 게 무슨 골목길 같은 느낌이 나지 않아요?”
마치 밤하늘처럼 보이는 그림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어두운 도시를 그려놓은 그림.
그곳 구석에 박혀 희미한 빛을 내는 작은 별의 모습에 키하노는 어째서인지 자꾸 시선이 끌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신기한 그림이네. 별을 하늘이 아니라 땅에다가 그려놨어.”
밤하늘에 있지는 않았어도 자기가 별이라 말하는 것 같은 자그마한 별이 그곳에 있었다.
작았지만 가장 빛나고 있는 황금색 별.
어딘가 애쓰는 듯한 그 모습이 가여웠던 키하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녀석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주고 말았다.
“이게 뭘까.”
키하노는 몰랐으나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은 아주 먼 훗날에 보게 될 광경.
그러나 아직은 닿지 않을 그 인연을 향해 키하노가 천천히 발을 옮기고 있었다.
높디높은 밤하늘에 있지는 않았어도 홀로 빛날 줄 아는 그 별을 향해서.
그렇기에 지금 내딛는 발걸음은 아마 만남으로 향하는 발걸음일 것이다.
키하노 외전 (完).
작가 후기
독자 여러분. Q10입니다.
오늘 원고를 마지막으로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는 완결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여러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블라드와도, 그리고 키하노와도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끝이 났기에 보내줘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유료화를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글이었습니다. 그만큼 성장세가 더뎠고 실제로 그만두려고도 했던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무사히 완결을 지었고,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적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독자님들께서 만들어 주신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한 완결이었습니다. 이별로 끝나는 완결이 아닌 또 다른 만남으로 향하는 지금의 마무리가 여러분이 원하는 결말이었기를 바랍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별은 담백할수록 좋은 거겠죠.
키하노가 블라드를 향해 다시금 떠나갔듯이 저 Q10도 다시 여러분들을 만나기 위해 여기서 인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