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6
별들도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3)
창문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무겁다.
주위를 둘러싼 공기가 왜인지 모르게 모자란 것만 같다.
“잘 어울리는구나.”
“······감사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숨을 들이마셔도 여전히 내뱉기가 힘들었다.
“이건 좀 큰가?”
자신이 보기에는 별반 달라 보이지도 않는 옷의 크기였건만 옥사나는 심각한 일이라도 된다는 듯 표정을 찌푸리며 시녀들에게 뭐라 지시했다.
“가슴을 내미셔야 해요.”
“······.”
그녀의 지시에 따라 시녀들이 블라드에게 달라붙어 시침질을 시작했다.
웃음 파는 창녀들의 짓궂은 어루만짐은 익숙했으나 옷을 다잡는 시녀들의 손길은 영 생소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이거 얼마짜리지?’
그래서 블라드의 생각은 자꾸 다른 곳으로 겉돌고만 있었다.
살로 와닿는 옷감의 감촉이 너무나 부드러웠다.
평생을 거친 옷만 입고 살아왔던 블라드로서는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의 편안함이었다.
“너무 딱 맞추면 안 되겠지?”
“17살이면 아직 성장기니까요.”
“하긴 요제프도 이때쯤 많이 크긴 했어.”
차가웠던 겨울이 지나고 이제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로운 시기, 새로운 기회. 그리고 새로운 옷.
“이 정도면 되겠다.”
그리고 난생처음 겪어보는 사람.
블라드의 품에 맞춘 옷을 본 옥사나는 이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절에 맞는 옷을 입어야 체력이 떨어지지 않는 법이란다.”
가까이 다가와 옷매무새를 만져주는 그녀를 보며 블라드는 자연스레 숨을 멈추고 말았다.
자신이 내뱉는 숨결에 혹시라도 이상한 냄새가 섞여 들어갈까 봐서였다.
“이번 여름이 오면 다른 옷도 맞춰주마. 지금은 일단 거지같은 차림새만 면해보자꾸나.”
“죄송합니다.”
여태껏 블라드는 주둔지에서부터 입었던 옷으로 버텨왔다.
비록 하녀들이 열심히 빨아대어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몸에도 맞지 않고 계절에도 맞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죽은 리만의 것을 뺏어 입은 옷이었다.
사내인 요제프와 자야르가 신경 써 주지 못한 부분을 지금 옥사나가 배려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누가 지금의 너를 보고 뒷골목에서 자랐다 할까. 근사한 귀족 청년 같구나.”
“······.”
옥사나의 말 그대로였다.
지금 블라드는 누가 보아도 당당한 사내의 모습 그 자체였다.
아마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입은 옷이 아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내 받아낸 옷을 입고 있어 그런 것일 테다.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는지 옥사나는 가볍게 손뼉을 치며 웃음 지었다.
“······감사합니다. 옥사나 님.”
옥사나의 미소를 마주 보기 힘든 소년은 괜스레 애꿎은 바닥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들의 목숨을 구해줬는데 오히려 내가 고맙지.”
옥사나는 블라드의 금발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정말 짙은 금발이구나. 귀족들도 부러워할 만한 색이야. 우리 아이와는 또 다른 느낌이구나.”
블라드는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수련에 한창 바쁠 너를 불러 미안하구나. 이제 가보도록 하렴. 남은 옷들은 수선해서 너의 방으로 보내놓을 테니.”
“정말 감사합니다.”
옥사나가 준 옷들을 한 무더기 챙기고 방을 나서려는 블라드.
“저기 놓은 것들도 가져가렴.”
“······네.”
옥사나는 지금에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손으로 문가 옆에 가지런히 놓인 옷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예의를 차릴 줄 알아야 진짜 사내라 할 수 있는 거니까.”
“······.”
블라드는 옥사나가 가리킨 곳을 보고는 귓불이 빨개지고 말았다.
옥사나가 따로 챙겨놓은 것들은 속옷들이었다.
가끔 어머니들의 배려는 너무 깊은 곳까지 불쑥 들어오고 한다는 것을 소년은 잘 모르고 있었다.
※※※※
저물어가는 황혼을 따라 복도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오늘따라 불어오는 바람이 따뜻하다 느낀 블라드였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는 무엇인지 모를 불편함이 번져오고 있었다.
‘적응이 안 돼.’
바예지드 가문의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자신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살이 찌는 느낌이었다.
영혼에 붙어 있는 살들이.
“······.”
방에 도착한 블라드는 그제야 깊숙한 곳에 묵혀있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아니야.”
비좁아 터진 방을 보며 블라드는 그제야 안심하고 있었다.
이곳이 내가 있을 자리다.
아직까지는.
들고 온 옷들을 침대에 내려놓은 소년은 옥사나가 준 옷을 벗어 내렸다.
그리고는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용병들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목덜미를 따끔하게 찌르는 거친 천을 느끼며 블라드는 웃음 지었다.
옥사나가 준 멋진 옷을 입기에는 아직 나는 준비되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 밤은 이 옷이 어울릴 테다.
“가볼까.”
방에 들어섰을 때는 쇼아라의 블라드였으나 나설 때의 모습은 뒷골목의 블라드였다.
오늘은 그 모습이 필요했다.
황혼이 지고 있었다.
어둠이 번져 가는 복도를 향해 블라드가 걸어갔다.
익숙한 곳을 향해 들어가는 소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
똑똑똑.
하루 일과가 끝나고 각자 방에서 개인 정비를 할 시간에 누군가가 포틀리의 방문을 두들겼다.
“누구세요?”
블라드의 방보다는 크지만 많은 소시지를 보관하기에는 좁은 방을 열고는 포틀리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블라드?”
“별일 없었냐?”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블라드를 보며 포틀리도 따라서 웃음을 지었다.
아직 친구라 하기에는 모자라지만 그래도 자신을 사람 취급이라도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일이야?”
“너한테 받아 갈 게 있어서.”
“받아 갈 거?”
블라드는 포틀리의 방을 기웃기웃 바라보다가 이윽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손가락을 들어 그곳을 가리켰다.
“저거, 저거 나 줘.”
“저거? 하몽?”
블라드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는 제대로 숙성시킨 하몽이 있었다.
비싼 것이었고 포틀리도 아껴먹는 그런 염장 고기였다.
“저걸 달라고? 통째로?”
“응.”
일과 시간이 끝난 밤에 갑작스레 찾아와 하몽을 달라는 블라드의 말에 포틀리는 의아함과 함께 씁쓸함을 느끼고 말았다.
“······알았어.”
친구는 될 수 없을지 몰라도 그래도 웃음 정도는 주고받는 관계는 되고 싶었다.
하지만 뒷골목에서 왔다는 소년은 자신을 그 정도로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고기나 뜯어 먹을 정도의 사람이었나 보다.
아무리 부유한 집에서 온 포틀리라 할 지라도 5년 동안 숙성시킨 하몽 덩어리를 통째로 내주는 것은 이래저래 부담되는 일이었다.
“······.”
그래도 포틀리는 군말 없이 하몽 덩어리를 내주었다.
내일도 혼자 밥을 먹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혼자라는 외로움과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다는 소외감은 아직 이 시기의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것들 뿐이었다.
“······내가 아는 기사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
“뭘?”
원했던 것을 가져갔으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갈 줄 알았다.
그러나 블라드는 어두운 복도에 서서 포틀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기사는 오직 정당한 대가만을 가져간다고.”
“응?”
“이건 내가 가질 정당한 대가야. 그러니 너무 억울해 마라.”
“으응?”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블라드를 보며 포틀리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에 다른 놈들이 와서 문 두들겨도 열어주지 마. 따라나서지도 말고.”
“무슨 말이야?”
“그냥 그런 줄 알아.”
포틀리는 블라드가 한 말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으나 어디서나 자유롭고 싶어 하는 소년은 이미 복도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조심해.”
포틀리는 촛불 하나 없이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는 블라드를 향해 조심하라 말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그저 한 번의 휘적임 뿐.
점점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블라드의 뒷모습을 보며 포틀리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방문을 잠글 뿐이었다.
철컥-
블라드가 한 말을 되새기면서.
※※※※
오늘은 하늘이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었고 바람 또한 잔잔했다.
게다가 보름달이 뜬 밤이었기에 밤에도 그리 어둡다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빛 밝은 밤 아래서 누군가가 신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끄아······끄아아아.”
“그냥 누워있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머리통을 깨부술 줄 알아.”
위에서 들려오는 으름장에 땅바닥에 쓰러진 종자는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저놈은 정말 머리통을 부술 녀석이었으니까.
“사람 하나 잡는데 14명은 너무하잖아. 뒷골목 양아치들도 이렇게까지는 안 해.”
“입 닥쳐!”
보름달이 환히 밝히는 저택 내 자그마한 공터에서.
소바닌은 등에 벽을 지고 서 있는 금발 소년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 기세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 새끼야.”
“무서워서 오줌 싸겠네.”
사방에 포위되어 있었으나 블라드는 여유로운 미소만 흘릴 뿐이었다.
“들어와. 내가 얌전히 여기까지 나와줬는데 너희도 그 정도는 해줘야지.”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손바닥을 까닥거리는 블라드를 보며 이곳에 있는 모든 종자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둘러싸고 있었으나 오히려 둘러싸인 느낌이었다.
단 한 명대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의 대치였으나 기묘하게도 기세는 홀로 서 있는 블라드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다들 알고 있었다.
한 번에 뛰어 들어가면 아무리 잘난 척하는 저 녀석도 어쩔 수 없으리라는 것을.
“으으으······.”
“소바닌······.”
그러나 지금 땅바닥에 누워있는 다른 녀석들의 모습이 그것을 주저하게 했다.
모양새가 처참하기도 했고 쓰러져 있는 위치가 심히 어지러워 한 번에 달려들기도 애매하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시체로 쌓은 성벽 같은 모습이었다.
“씨이-발!”
자기 뜻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자 소바닌은 거친 함성을 지르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더 많잖아!”
더 많은 숫자.
더 좋은 환경.
그리고 더 좋은 조건에서 자라난 도련님들이 뒷골목에서 올라온 개 한 마리를 둘러싼 채 애처롭게 짖고 있었다.
“저 새끼가 계속 날뛰도록 내버려 둘 거야?”
“그, 그치만.”
“내버려 둘거냐고!”
소바닌이 아무리 눈을 부라리며 소리쳐도 종자들은 누구도 쉽게 앞으로 나서려 하지 못했다.
옆에 있는 소바닌의 기세보다도 앞에 있는 녀석의 기세가 더 강렬했으니까.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
달빛도 비춰주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환히 타오르는 푸른 눈동자가 있었다.
“저 새끼가······.”
그 눈동자는 종자들이 무리와 홀로 떨어져 있을 때 찾아와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댄 것이었다.
아직도 그때의 공포가 가시지 않은 소바닌의 애송이들은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간다 새끼들아! 따라 들어와!”
겁먹은 양 떼처럼 쉽사리 움직이려 하지 않는 동료들을 보며 소바닌은 별수 없이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들어가!”
소바닌이 앞장서 달려들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종자들이 허겁지겁 뒤따르며 블라드에게로 뛰어 들어갔다.
“오늘 피 좀 터지겠는데.”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종자들을 보며 블라드는 옷을 갈아입고 오기를 잘했다 생각하고 있었다.
옥사나가 준 옷은 이런 녀석들 따위에게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이었으니까.
“이 새끼 진짜 죽여버린다!”
웃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약이 바짝 오른 소바닌은 있는 힘껏 달려들기 시작했다.
“······!”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흐르지 않는다.
분노에 휩싸여 맹렬히 뛰어들고 있는 소바닌에게는 단 한 순간일 뿐이었겠으나 그의 뒤를 따라가는 종자들에게는 수없이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순간이었다.
블라드의 푸른 눈을 마주 본 순간 종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하고 말았다.
“······그렇지.”
누군가가 의도했던 대로 종자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달려드는 소바닌과 멈춰서는 종자들의 간격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한 번만 걸리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바닌은 블라드의 비웃음을 보며 더욱 분노를 끌어올릴 뿐이었다.
힘을 잔뜩 실은 목검.
그것에 한 번만 걸리면 아무리 저 녀석이라도······.
“······!”
그러나 블라드에게 달려들던 소바닌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말았다.
그저 한번 휘청였을 뿐인데 블라드의 신형이 어느새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출렁이는 물결과 같은 몸놀림이었다.
파악-!
목표를 잃은 목검이 매섭게 땅바닥을 파헤치고.
튀어 오른 흙들이 얼굴을 매섭게 때릴 때.
“너 사람은 죽여보고 그런 말을 하냐?”
소바닌의 귓가에 속삭이는 섬뜩한 목소리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그 목소리는 웃고 있었다.
“이 새······.”
빠악-!
“컥!”
순간의 번뜩임.
거칠게 폐를 파고드는 딱딱한 느낌에 소바닌은 제대로 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곧이어 턱을 향해 매서운 일격이 날아들어 왔다.
“흡!”
겨우겨우 막아낸 일격이었으나 블라드는 그것마저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계속해서 파고들어 오고 있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연격.
그러나 그 속에는 블라드라는 사람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날카로운 기세가 가득했다.
한 번만 베여도 온몸 가득 독기가 퍼질 것만 같은 그런 기세였다.
‘미친!’
소바닌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고작 검 잡은 지 두 달도 안 되었다는 놈이!’
대련할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블라드를 보며 소바닌은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렇지. 상대방을 네가 만든 간격 안에 가두는 거다.]“······.”
토벌대에서의 블라드는 그저 잔뜩 힘을 모은 일격을 날리는 데 그친 수준일 뿐이었다.
그러나 자야르와 목소리의 훈련을 거치면서 점차 성숙된 블라드는 이제 전투에서 조금이나마 자신만의 흐름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
겉보기에는 그리 티가 나지 않는 차이였겠지만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있는 사람이라면 블라드가 또 다른 단계로 올라섰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커억!”
지금 얻어맞고 있는 멧돼지는 아직 다다르지 못한 그런 경지로.
‘이대로는!’
사방에서 짓쳐들어오는 공격에 소바닌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흐름을 뒤틀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블라드에게 목검을 들이밀려는 순간.
‘어?’
그저 블라드가 들고 있는 목검이 번뜩였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생각과 함께 세상이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땅이 달려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째서?’
블라드의 검은 이미 일개 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었다.
일격필살의 묘리는 의외성에서 나온다.
그리고 의외성이란 예측할 수 없는 저 너머에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지금과 같이.
쿵-
큰 소리와 함께 소바닌의 육체가 끈 떨어진 연처럼 넘어가 버렸다.
“으······으!”
쓰러진 채 몸을 추스르려 애쓰는 소바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밤하늘에 떠 있는 달 하나와.
“이 꽉 물어.”
그리고 그 달을 가리며 불쑥 튀어나온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
달빛이 만드는 역광에 가려져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으나 소바닌은 블라드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승자는 위에 패자는 아래에.
승자는 모든 것을 갖는다.
퍼억-!
끄아아-!
목검이 한 번 번뜩일 때마다 누군가의 피가 튀어 올랐다.
차마 삼킬 수 없는 구슬픈 비명과 함께.
광기마저 느껴지는 블라드의 매타작에 주위에 있던 종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크으······히이이······.”
“······너는 앞으로 나랑 눈 마주치지 마라.”
아픔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바닥에서 벌벌 떨고 있는 소바닌을 향해 블라드가 침을 내뱉었다.
떨어져 내리는 침이 소바닌의 뺨에 차갑게 달라붙었다.
“통통이도 건들지 말고.”
“으으······.”
굴욕적인 처사였음에도 소바닌은 그저 본능적으로 블라드의 눈빛을 피하려고만 했다.
‘정말 죽이려고 했어!’
난생처음 맞닥뜨린 짙은 살기에 소바닌은 그저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정말 사람을 죽여본 적 있는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그런 살기였으니까.
“후······.”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굳은 목을 풀었다.
소바닌에 대한 복수는 방금 끝났다.
그리고 받아 간 하몽의 대가 또한.
소소한 것들이었지만 해야만 했고 또한 하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다음 누구야.”
해야 할 것들을 했으니 이제는 마음껏 날뛰어도 된다.
블라드가 고개를 들자 땀에 전 금발이 보름달을 받아 반짝였다.
“누구냐니까.”
“······.”
피 묻은 목검을 든 블라드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그러나 블라드의 물음에 감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럴 거면서 나한테 왜 그랬어.”
대장을 잃고 기세마저 꺾여버린 종자들은 그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안 들어오면 내가 가지 뭐.”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블라드가 달빛이 비치는 곳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삶이란 투쟁의 연속이다.
뺏어야만 먹을 수 있고 이겨야만 숨 쉴 수 있는 곳에서 태어난 소년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오늘도 어둠 속에서 헤매며 지치지도 않을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해야만 하는 또 다른 복수들을 위해서.
“······훌륭하군.”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종자들의 비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누군가가 있었다.
피가 터져나가는 전장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과 마찬가지로.
달빛을 받은 소년의 목검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