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8
데어마르에서 온 초대장 (2)
숲으로 둘러싸인 하얀색의 저택.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저택의 뒤편으로 야트막한 언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나무 한 그루와 비석들.
불어오는 봄바람이 여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앉아만 있었다.
“······.”
자그마한 비석 옆에 앉아 무릎을 끌어모으고는 조용히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어났으며 자라온 곳.
앞으로도 자신이 살아가야 할 곳.
그리고 마땅히 자신의 것이어야 할 곳이었다.
여인은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는 투명한 눈물이 맺히고 시야는 점점 뿌예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저택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여인의 눈물은 밑으로 흐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존재를 숨겼을 뿐이었다.
흘렸어야 할 슬픔과 함께.
슬퍼해야 할 시간은 끝났다.
누구에게나 그런 때는 온다.
※※※※
“아 요즘 따라 심장이 자꾸 제멋대로 뛰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몸을 풀고 있는 블라드의 옆에서 고트가 괜스레 나뭇잎을 씹으며 대답했다.
“병 아냐?”
“모르겠네. 갑자기 그러네. 이상하게 집중도 잘 안 되고.”
“봄바람이라도 들었나.”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 걸지도.”
성의 없는 물음에 성의 없는 대답.
하지만 별 상관없었다.
어차피 둘은 그저 입을 움직이고 싶어서 대화하는 것뿐이었으니까.
“얼마나 남았냐.”
“마부 말로는 3일은 더 가야 한다는데.”
“너는 마부 아니야?”
“나는 마부 조수.”
비록 마차에 앉은 채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한창 혈기 넘치는 소년에게는 지루한 것일 수밖에 없는 여행길이었다.
“이제 출발한다!”
“출발한대. 대장”
“어이구-우.”
블라드는 노인이나 낼법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근데 그거 하몽인지 뭔지 나도 한 조각만 주면 안 돼?”
“그거 이제 내 거 아냐.”
블라드를 향해 자그마한 목소리로 묻는 고트였지만 블라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어갈 뿐이었다.
“그러니까 네 거일 때 한 입 줬으면 얼마나 좋았냐······.”
고트는 블라드의 대답에 씹던 나뭇잎과 함께 가슴 속 서운함을 내뱉었다.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했고 날씨는 화창했다.
일행은 봄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
도시 데어마르.
하이날 남작 가문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도시.
위치는 중부에서도 북쪽에 속해있어 바예지드 가문이 있는 스투르마에서도 날씨만 좋다면 마차를 타고도 일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역시 레몬이 유명하지.”
“레몬은 남쪽에서 자라는 과일 아닌가요?”
“그래서 수요가 있는 거야.”
레몬을 생산할 수 있는 최북단 기후에 걸쳐 있는 이 도시는 주된 사업으로는 레몬 생산이 있었으며 그것을 2차 가공하여 만드는 제품들이 나름 알려진 곳이었다.
“남들이 레몬을 팔 시기쯤에 수확해서 시장에 물량이 없을 때쯤 팔아치우거든. 비록 기후 때문에 많은 양을 수확하지는 못하지만, 시기를 노리는 그 안목만큼은 훌륭했다 할 수 있지.”
“오오.”
그렇게 해서 팔 수도 있구나.
같은 품목이라도 그렇게 해서 가치를 높일 수가 있구나.
하몽을 저며내던 블라드는 요제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말이 많은 요제프와 같이 있는 것은 가끔은 곤혹이기는 했지만, 그가 말로 내뱉는 지식과 견문들은 블라드에게 있어서 훌륭한 자양분이 되고 있었다.
“과일을 맛보기 힘든 북부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마운 도시이지. 게다가 모든 것의 중심인 중부 지역으로 나아가는 관문 중 하나이기도 하고.”
하몽을 잘라내는 블라드의 손끝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을 이어가는 요제프.
“북부인들에게 있어서 그만큼 중요한 도시라는 거다.”
“······.”
블라드는 그의 검은 눈동자 안에서 붉은색의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빨리 잘라라.”
“이게 얇게 발라내야 하거든요.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쯧.”
요제프는 블라드의 설명에 혀를 쯧 하고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자야르 경이 움직이는 건가요?”
“그렇지.”
현재 일행은 하이날 남작가의 도시인 데어마르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곳의 정통한 후계자인 알리시아 하이날에게 초대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위기는 곧 기회지. 그것도 내가 겪는 위기가 아닐 경우는 더더욱.”
그러나 그녀의 초대장은 겉으로는 초대장의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구원요청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귀족들의 세계는 정말 복잡하네요.”
“복잡하게 보면 복잡하고 간단하게 보면 간단하지.”
자야르는 이제야 건네지는 하몽 조각을 낼름 받아들고는 우물거렸다.
“결국 데어마르라는 땅을 가지기 위한 싸움일 뿐이야.”
“그것도 피를 섞은 가족끼리 말이죠.”
“······피 섞인 자들과의 반목은 귀족들의 유구한 전통이지.”
그렇게 말하는 요제프의 얼굴에는 차마 감추기 힘든 씁쓸함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
그 표정을 본 블라드는 그저 얌전히 다음 하몽 조각을 저미는데 집중할 뿐이었다.
누구나 혼자서 짊어져야만 하는 무게가 있는 법이었으니까.
요제프를 영지로 초대한 알리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현재 계승권 분쟁 중에 있었다.
여느 싸움이 그렇지 않겠냐마는 하이날 가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승권 분쟁은 현재 끝도 없는 진흙탕 싸움으로 빠져드는 중이었다.
“그래도 지금 같은 경우는 흔치 않지. 그야말로 가문의 치부를 드러내는 상황이니.”
알리시아의 삼촌인 엔드레 하이날은 자신의 조카가 형님의 피를 이은 자식이 아닌 부정한 관계를 통해 태어난 사람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가 부정한 관계를 통해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알리시아만 사라진다면 다음 대 하이날 남작은 그가 되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전(前) 하이날 남작의 유일한 자식이지만 여자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는 알리시아.
그녀가 눈앞에 있는 곤경들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결국 교회에서 주관하는 명예로운 결투를 통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결국 엔드레가 원하는 방향일 뿐이었다.
“이 기회를 통해 하이날 가문에 빚을 지워둔다. 아버지도 동의하신 생각이지.”
“그렇군요.”
블라드는 마차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자야르를 바라보았다.
알리시아 하이날이 자신의 명예를 맡기기 위해 특별히 초빙할 정도로 뛰어난 기사.
‘대단하네.’
명성과 실력이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대외 활동을 많이 하는 기사는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가 많겠지만 자야르처럼 가문 내부의 일을 중시하는 기사라면 그럴 기회가 별로 없을 것이다.
“뭘 보냐. 눈빛이 무례한데?”
“······.”
자야르는 자신의 종자가 보내오는 수상한 눈빛에 또다시 심사가 뒤틀리고 말았다.
“종자 주제에 모시는 기사는 말을 태우고 본인은 마차에서 편하게 앉아 가는 기분이 어때?”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지금 블라드의 심정이 딱 그것이었다.
괜히 바라봤다.
“수치스럽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지.”
“······.”
다른 종자들을 작살내고 다니기에 어깨 좀 펴고 다녔더니 사실은 말에 올라타지도 못하는 반푼이 녀석이었다니.
아직도 자신을 향해 낄낄거리던 누군가들의 웃음소리가 귀에 어른거리는 것만 같은 자야르였다.
“······말들이 저를 싫어합니다.”
“왜 말들만 너를 싫어할 거라 생각하지?”
“······.”
말을 타지 못하는 기사는 없다.
말을 타지 못하는 종자도 아마 없을 것이다.
지금 앞에서 마차를 몰고 있는 고트조차도 말은 탈 줄 알았다.
“······비싼 말은 탈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비싼 말은 네가 태우고 다녀야지. 너보다 귀한 몸이니까.”
그것도 변명이냐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자야르를 보며 블라드는 조용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볼 면목이 없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자꾸 왜 이러지.’
마치 뜀박질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심장이 마구 날뛰고 있었다.
요 며칠 자주 느껴지는 그런 감각이었다.
‘갈굼을 받아서 그런가?’
앞에서는 요제프가 쉴 새 없이 말을 걸고 옆에서는 자야르가 틈만 나면 갈구는 상황이었기에 충분히 떠올릴 수 있을 만한 이유였다.
정신적인 압박감은 만병의 근원과도 같은 것이니까.
두근- 두근-
블라드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나 이번만큼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응?”
그리고 이상한 울림을 보이는 것은 블라드의 심장 박동만이 아니었다.
“······땅이 울리는군.”
블라드뿐만 아니라 요제프도 흔들리는 진동을 느끼며 점점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움직이기에 느껴지는 그런 진동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전원 정지!”
밖에 있던 자야르도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행렬을 정지시키고는 재빨리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나무가 흔들린다.’
블라드는 창을 통해서 주위에 있는 나무들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숨을 죽이며 긴장하고 있을 때.
드드드드드득-!
굉음과 함께 땅이 마구 울리기 시작했다.
“지진이다!”
“모두 말에서 내려!”
히이이이잉-
발밑에서부터 시작되는 거대한 울림에 예민한 말들이 크게 날뛰기 시작했다.
“젠장!”
땅에서 오는 진동과 더불어 말들의 날뜀으로 마차가 마구 들썩이자 블라드는 재빨리 요제프를 감싼 채 마차의 문을 발로 열어젖혔다.
블라드는 난생처음 경험해보는 상황에 크게 당황하고 있었지만, 본능적인 움직임에 따라 요제프를 마차에서 하차시켰다.
“으아아아!”
“······.”
그리고는 그를 감싸고는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러나 정작 보호받고 있는 요제프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성은 갸륵하다만 너무 당황하지 마라.”
“이거! 지진입니까?”
“아니다. 이건 아마도······.”
드드드드드득-!
요제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땅의 진동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어찌나 세차게 울리는지 가만히 있어도 땅바닥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지진은 난생처음인데!’
아무리 산전수전을 겪어봤던 블라드라 할지라도 처음 겪는 재해 상황에서는 당황할 수밖에는 없었다.
“끝났군.”
“······히이.”
고작 몇 분 안 되는 시간이었으나 진이 빠져버린 블라드는 구르듯 옆으로 움직여 요제프에게서 떨어졌다.
“지진은 처음 겪어보는데요.”
“이건 지진이 아니다.”
“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몸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는 벙찐 목소리를 내었다.
“봐라.”
블라드는 요제프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
저 멀리 보이는 평원에서 땅이 들썩이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두더지가 땅을 파며 움직이면 저렇지 않을까 싶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저 멀리서 움직이고 있었으니 실제로 두더지로 할지라도 엄청나게 큰 녀석일 것이다.
“자이언트 데스웜이다. 서부에서 서식하는 몬스터지만 이맘때쯤에는 먹이를 찾아 중부까지 다다르지.”
“자이언트 데스웜?”
그게 뭐냐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블라드를 보며 요제프는 설명을 해줘야 함을 자각했다.
가능성의 덩어리지만 모든 것이 부족한 소년은 아무리 부어도 부어도 모자란 그릇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용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이 손 쓰기 힘들다는 점에서는 지진과도 같지.”
“용······.”
“정확히는 몰락해 버린 용의 잔재지만 말이지.”
마지막 말과 함께 요제프가 떠나가고 일행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장비들을 점검하는 동안.
“······.”
소년은 그저 가만히 앉아 땅을 들썩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무언가를 보았다.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흙먼지들에 자연스레 눈가가 부예졌으나 소년은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멋지네.”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것.
뒷골목에만 박혀있었다면 평생 보지 못했을 것.
그것이 멀리 떨어져 가는 만큼 블라드의 심장 박동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소년의 세계가 넓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