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9
기억 속의 나무 (1)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준비되었소.”
기사들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 요제프와 기사들.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종자인 블라드는 그들과 함께 들어갈 수 없었다.
“······.”
요제프의 흩날리는 망토와 함께 닫히는 홀의 문.
아직 저곳은 블라드에게 허락된 장소가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소년에게 허락된 것은 그저 자그마한 것들 뿐이었다.
‘지루함의 연속이네.’
저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지 알 수 없었으나 블라드는 이곳에서 꼼짝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였다.
자신의 시간을 본인의 의지대로 쓸 수 없는 것.
그것이 어딘가에 묶인 자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슬픔이기도 했다.
‘둘러라도 볼까.’
잠시 처량한 감상에 젖을뻔한 소년은 고개를 흔들며 대신 새로운 장소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었다.
묶인 몸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까운 곳을 살펴보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한 열 걸음 정도쯤은?
낯선 곳, 낯선 장소에 들어서면 블라드는 항상 주위를 기웃거리고는 했다.
정확히는 탈출구를 찾아놓는 습관 때문이었는데 언제 어디서나 목숨은 스스로 챙겨야 하는 뒷골목 부랑아의 본능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바예지드 저택보다는 작네,’
들어오면서부터 느낀 것이지만 데어마르의 저택은 작았으며 또한 오래되어 보였다.
어쩌면 권세 높은 백작 가문의 저택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뒷골목에서 살아왔던 블라드의 판단으로도 이곳은 그리 큰 저택은 아니었다.
비록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어 그런 느낌은 덜하긴 했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관리를 소홀히 한다면 금세 멋진 폐가가 되어버릴 것만 같은 그런 곳이었다.
‘꼭 그렇지도 않나 보네.’
그러나 블라드의 눈에는 보이고 있었다.
복도 구석구석 쌓여가는 먼지들이.
한참 어지러운 시기임을 말해주듯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조금씩 균열이 번져가고 있었다.
“흠흠.”
“······.”
같이 대기하고 있는 시종의 헛기침 소리로 대략 움직여도 되는 반경을 잡아낸 블라드는 그때부터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을 거닐며 이곳의 분위기를 익히기 시작했다.
복도는 좁고 구불구불한 것이 길을 잃기 딱 좋으며.
곳곳에 색이 다른 벽지들을 보아하니 가까운 시일에 액자 같은 것을 떼어낸 것으로 보이고.
늙은 하녀가 낑낑대며 양동이를 드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사용인들을 해고한 것 같다.
‘돈이 없나 보네.’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그런 것들을 통해 블라드는 이곳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레몬으로 유명한 영지인 이곳은 지금 자금상의 문제가 있다.
‘허탕 치는 거 아냐?’
자세히 말해주지 않아 속사정까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요제프가 이곳까지 직접 왔다는 이야기는 무언가를 얻어가기 위함일 것이다.
아버지인 페테르 바예지드에게 보고 할 수 있으며 자신의 실적을 쌓을 수 있을 만한 그런 것들을 말이다.
그러나 블라드가 봤을 때는 적어도 반짝이는 금화는 구하기 힘들 것 같아 보였다.
‘뭐 알아서 하겠지.’
어차피 자신은 종자일 뿐.
같은 배를 타고 있으나 엄연히 역할이 다르니 거기까지는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경 쓸 자격도 없긴 했지만.
그렇게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을 때쯤.
[웅-웅웅웅-]허리에 차고 있던 검이 짧은 검명을 내며 블라드를 부르고 있었다.
“흠.”
누가 보았을까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린 블라드는 시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검을 잡아야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블라드가 장식 없는 검을 잡은 순간.
[내가 여기 와 본 기억이 있는 것 같다.]“······오.”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
“여기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요제프 바예지드 님.”
“피의 부름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정당한 혈족의 위기라면 당연히 응해야지요.”
이곳 가장 높은 곳에 앉아있는 여인.
“······.”
처연한 물빛 머리를 가진 젊은 여인이 오직 가주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요제프를 응대하고 있었다.
젊고도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입고 있는 옷이 무거워 보였고 앉아있는 자리가 버거워 보이는 것은 요제프만이 느낀 감상은 아닐 것이다.
“부디 옥사나 님에게도 안부를 전해주세요.”
“물론입니다.”
서로 피를 섞은 사이.
모계의 핏줄을 따라 8촌을 훌쩍 넘은 사이이기는 했지만 알리시아와 요제프는 그런 관계였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해도 그리 가깝지는 않은 그런 관계였으나 서로가 원하는 것이 일치하고 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은 사실 명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저의 아버지이신 바예지드 백작님은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남은 것은 알리시아 님의 결정뿐입니다.”
짧은 예의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요제프를 보며 알리시아는 잠시 눈을 감고 말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오늘따라 짙어 보였다.
“······.”
책임감, 두려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
그것들에 밀려 알리시아가 서서히 흔들리고 있을 때쯤 옆에 있던 노(老)기사가 조용히 그녀의 손을 붙잡아주었다.
“······저는 이미 결정했습니다.”
모두가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검을 바쳐준 늙은 기사를 보며 알리시아는 결심을 다잡았다.
나는 이곳의 주인이다.
나는 나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백작님이 원하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알리시아의 말에 요제프는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것으로 자신이 계획한 일에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결투에서의 승리가 저에게 주어진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물빛 머리의 여인은 당당한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약속뿐인 이 상황에서 그녀는 아직 대가를 받지 못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알리시아의 발작과도 같은 발언에 요제프는 그저 여유 있는 미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바예지드 가문의 검은 언제나 승리를 약속해왔습니다. 알리시아 님.”
요제프의 말과 함께 애꾸눈의 기사가 조용히 검을 손에 가져다 댔다.
“······.”
여인을 지키는 늙은 기사를 바라보면서.
비록 한 쪽밖에 남지 않은 눈이었으나 그 안에 담겨있는 기운은 수백 개의 눈빛을 부술 수 있는 그런 기세를 품고 있었다.
기사는 기세로서 자신의 승리를 약속했다.
지키려는 기사와 가져가려는 기사.
내어줘야 하는 여인과 약속해야 하는 청년.
이 저택 가장 넓은 홀 안에서, 네 사람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혀들어 갔다.
※※※※
“그녀를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군.”
“위태로워 보였지만 그래도 중심은 잡고 있었습니다. 여장부로서의 기질이 보입니다.”
“내가 봐도 그렇다.”
요제프는 복도를 걸으면서 알리시아와의 대면을 생각했다.
다급한 구원요청으로 보아 이미 궁지에 몰려있다 생각했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한 줌의 주도권은 놓지 않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요제프는 아무 말 없이 따라걷는 보르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획했던 대로 만약을 준비해두시오.”
“네. 요제프 님.”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맞는 쓰임새가 있다.
그것이 요제프가 검으로서는 반푼이조차 안되는 보르단을 데리고 다니는 이유이기도 했다.
자야르가 요제프에게 마련된 응접실의 문을 열자 그곳에는 블라드가 홀로 일행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셨습니까.”
“그래. 지루했겠군.”
요제프는 응접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군.”
그렇게 말하는 요제프의 눈가에는 시커먼 눈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일주일이 넘는 여행이었고 거기에 쉴 틈도 없이 알리시아와의 기싸움을 벌였다.
몸이 약한 요제프로서는 꽤나 무리한 상황이었기에 지금부터는 안정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블라드.”
“네 요제프 님.”
그러나 스투르마에서 이곳 데어마르까지 온 것은 어디까지나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방금의 대화로 본래 의도했던 이득을 확정 지었으니 이제는 소소한 이득도 돌봐야 할 차례였다.
“너는 지금부터 자유롭게 움직여라.”
“혼자요?”
“그래. 고트라는 녀석을 데리고 다녀도 좋다.”
요제프는 블라드를 향해 허락된 만큼 자유롭게 다니며 많은 것을 봐두라 지시했다.
“물론 결투 당일에는 자야르를 보조해야겠지.”
“저야······뭐 그래 주시면 좋죠.”
요제프는 자신의 명령이 잘 이해되지 않는지 머리를 긁적이는 소년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가 주신 옷 위에 아버지가 주신 갑옷을 입은 소년.
바예지드 가문의 주인들이 기대를 걸기에 주저하지 않는 소년을 보며 요제프는 입을 열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을수록 좋다. 이곳에는 내가 알아둬야 할 만한 격조 높은 귀족도 없을뿐더러 모두가 날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지.”
이곳 데어마르는 하이날 가문의 도시였지만 단순히 위상만을 따진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 중 바예지드 가문의 적자인 요제프를 따라올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이곳에 있는 모든 자는 알리시아보다도 요제프와 안면을 트기 위해 침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몸이 약한 요제프의 입장에서는 실리가 없을뿐더러 귀찮기도 한 일이었다.
“내가 왜 너를 이곳으로 데려왔을지 생각해봐라. 아직 말도 타지 못하는 너를.”
“······.”
요제프가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은 블라드를 굳이 훈련 중에 빼 온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명예 결투라는 것은 찾아가서 보지 않으면 구경하기 힘든 볼거리다. 게다가 이번 데어마르에서 벌어지는 명예 결투는 단판 결투가 아닌 단체전으로 진행되는 결투지.”
보통의 명예 결투란 각 대리인이 정한 두 명의 검사가 서로 맞붙는 것을 뜻하지만 지금의 경우와 같이 단체전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가문 내부에서 벌어졌으며 확실한 증거 없이 오직 의혹만이 가득한 재판.
게다가 모든 것을 걸고 벌이는 결투이니만큼 이 복잡한 상황을 아우르기 위해 두 명의 하이날은 지금과 같은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그만큼 다양한 배경을 가진 기사들이 지금 이곳 데어마르에 있다. 너는 그들을 보며 느낄 것을 느끼고 와라.”
“알겠습니다.”
열 번 일러주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것이 더욱 가슴에 남을 것임은 당연한 일.
어차피 제대로 키워보기로 한 녀석이었으니 가능하다면 다양한 경험을 통해 블라드의 세계를 넓혀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요제프는 생각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몸도 풀 겸 대련을 해야 하니까 어디 가서 멍청하게 얻어터지지 말고.”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거든요.”
요제프가 당근이라면 자야르는 채찍이었다.
혹시라도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말이었지만 자야르의 입에서는 언제나 가시 하나가 박혀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넌 이미 나에게 신뢰를 잃었어.”
“······.”
방금 날린 일침에 블라드는 고개를 숙이며 풀죽은 모습을 보였으나 정작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자야르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기가 막히게 숙이는군, 더는 할 말도 없게 말이야.’
자야르는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녀석이 비록 겁먹은 척 행동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다른 종자들이라면 눈물이라도 터트렸을 자야르의 기세였지만 블라드는 그 기세를 머리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뿐이었다.
거짓된 위협은 이 소년에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었다.
“좋아. 저녁마다 나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하고 특이동향이 발생한다면 그것 또한 지체없이 말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요제프 님.”
블라드의 행동방침을 지정해 준 요제프는 저녁이 늦었으니 방으로 돌아가 쉬라 말해주었다.
“······.”
자신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는 자야르의 눈빛을 뒤로 한 채 방을 나선 블라드.
익숙하지 않은 복도를 지나 하인들의 방을 향해 걷던 블라드는 잠시 멈춰 섰다.
복도 사이에 나 있는 창을 통해 환한 달빛이 비쳐들었다.
빛을 따라 바라본 그곳에는 저택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었고.
[저 나무가 기억난다.]그 언덕 위에는 앙상하게 마른 가지를 가진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가엾은 목소리는 달빛 아래 서 있는 저 나무가 기억에 있다 말하고 있었다.
완연한 봄이었으나 아직 저녁만큼은 쌀쌀한 날씨.
그러나 블라드는 어째서인지 저기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를 보며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는 가지들이 마치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것만 같아 보였다.
“오랜만에 기도할 곳이 필요하겠는데.”
소년은 그날의 달을 증인 삼아 계약했다.
너는 나에게 검을 주고.
나는 너에게 기억을 준다.
그동안은 받아왔으니 이제는 돌려줘야 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