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30
기억 속의 나무 (2)
이어지는 것은 결국 기억뿐이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흔적을 남기는 것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상처처럼 남겨진 흔적들을 보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그 날의 기억들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소년은 어머니의 이름을 담은 기억 하나를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자꾸 잊어만 가나 보다.
“우리 엄마도 이런 거 하나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저택을 통해서만 나갈 수 있는 야트막한 언덕.
목소리가 기억난다 했던 나무의 아래에는 하이날 가문의 가족묘가 안치되어 있었다.
있어서는 안 될 곳 같았지만, 소년은 와야만 했다.
그것이 계약이었으므로.
“······.”
늘어서 있는 하얀색의 비석들을 보며 소년은 어머니를 생각했다.
뒷골목의 독기 속에서 홀로 어린 소년을 보호했던 여인은 결국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예정된 파멸이었으며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비극은 차마 넘기지 못한 독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는 현실일 것이다.
별을 품은 소년은 어머니의 눈물로도 삭히지 못한 독을 먹고 자라왔다.
“관리가 잘 안 되나 보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하얀색의 비석.
이곳에 있는 비석 중에서도 가장 새것 같아 보이는 비석에는 땅바닥에 나뒹굴던 나뭇잎들이 가득했다.
“······.”
소년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손바닥을 들어 비석을 쓸어내렸다.
한 번의 관심이 닿을 때마다 비석은 제 모습을 찾고 잊혀져 가는 이름을 드러내었다.
“땅 주인들한테 인사하는 건 당연한 예의니까요.”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괜히 멋쩍어진 블라드는 방금 한 행동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목소리는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누구나 문득 낯선 행동을 하고 싶어질 때가 있는 법이었다.
“그럼 기도합니다.”
[음.]“실컷 봐두시라고요. 보라는 기사들도 안 보고 이곳에 온 거니까.”
[고맙다.]블라드는 기도하는 리만 때와 마찬가지로 검을 뽑아 들고는 언덕 위 나무를 향해 곧추세웠다.
살랑이는 봄바람이 소년의 금발을 흐트러뜨리고.
하얀색의 비석들이 물끄러미 소년의 기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블라드는 그저 묵묵히 기도를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비록 혹시라도 모를 남의 시선을 의식한 행동이었으나 블라드는 속으로 어린 부제에게 배웠던 기도문을 어설프게나마 따라 하는 중이었다.
이곳을 보니 생각나는 사람을 위한 기도였다.
[······.]블라드의 배려 아래 목소리는 기억 속에 있던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거품처럼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그때는 저 나무가 좀 더 작았던 것 같다.
그때는 언제였지.
누군가와 함께 왔던 것만 같다.
누구였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목소리는 마치 지금 자신이 자욱한 안개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조금만 다다르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억의 끝자락을 찾기 위해 허우적대고 있었다.
[······잠시만 몸을 빌려도 될까?]“잠시라면요.”
그리고 목소리는 자신의 기억을 되찾는 대신 희미한 안개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저 앞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럼.”
블라드는 평소 해왔던 대로 온몸에 힘을 풀고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을 열었다.
그러자 곧 시야가 멀어지기 시작하며 마치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감각 속으로 들어왔다.
[흠.]자신의 세계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야로 보는 세계.
“······저게 뭐야.”
[나를 알아보는 모양이다.]그곳을 통해 보이는 것이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 비석들을 감싸고 있는 나무.
쉬이이익-
그리고 그 나무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것이 있었다.
영롱한 빛깔을 뿜어내는 새하얀 색의 뱀이었다.
[정령이다.]“······.”
나무만큼이나 커다란 하얀색의 뱀을 보며 블라드는 그저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었다.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요새 신기한 걸 너무 많이 보는데.’
데스웜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블라드는 조용히 침을 삼켰다.
자신의 세계에서는 허락되지 않았던 정령이라는 존재.
그것을 지금 목소리의 세계를 통해 보고 있었다.
블라드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겠다는 요제프의 의도는 어쩌면 지금 가장 잘 들어맞고 있는지도 몰랐다.
“절 보는 거 같은데요.”
[네 안에 있는 나를 보고 있다.]나무를 감싸 안은 채 블라드를 내려다보고 있는 하얀색의 뱀.
뿌리 내린 나무만큼이나 거대한 모습이 오히려 현실감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
그러나 블라드는 거대한 존재감을 내뿜는 뱀을 보면서도 어떠한 압박감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아마 하얀 뱀이 그렇게 의도한 것일 테다.
“내려오는데요?”
천천히 나무를 타고 내려와 비석들을 스쳐 지나가며.
쉬이이익-
뱀은 천천히 블라드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블라드는 낯선 것이면서도 거대한 것을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위협적인 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있었다.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뱀의 영롱한 두 눈은 그것을 확신하게 하고 있었으니까.
둥글게 휘어진 뱀의 눈동자는 반가운 누군가를 맞는 집주인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하얀 색의 뱀이 다가오고.
서로의 눈이 마주치고.
비석들을 감싸 안은 나무가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마치 봄기운처럼 따뜻한 기운이 언덕에 가득 흐르고 있었다.
멋진 세계였다.
“누구세요?”
그러나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응?”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블라드는 그만 오른쪽 눈을 뜨고 말았다.
쉬이이익-
그렇게 자신의 세계로 돌아왔다.
“어?”
방금까지도 자신의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던 하얀색의 뱀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한 번의 깜빡임으로 목소리의 세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자신의 세계로 돌아온 블라드는 마치 꿈이라도 꾼 듯한 느낌이었다.
“누구신가요? 이곳은 하이날 가문의 사람이 아니면 들어오면 안 되는 곳입니다.”
“······.”
블라드는 아직 초점이 잡히지 않는 왼쪽 눈을 비비며 뒤를 돌아봤다.
“음.”
[흠.]겨우 초점이 잡힌 시야의 끄트머리에는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물빛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평생 화려한 창녀들을 보아왔던 블라드조차 작은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이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부르겠어요.”
“아 저는 그······.”
블라드는 아직 완벽히 돌아오지 않은 정신을 다잡으며 다음 할 말을 생각해내고 있었다.
평소라면 청산유수와도 같이 변명을 내뱉었을 테지만 지금의 블라드는 이해하기 힘든 광경을 본 직후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
그리고 그 모습은 자연스럽게 블라드를 세상 물정에 익숙하지 않은 소년의 모습을 연출하게 했다.
근사한 머리 색과 호감 가는 얼굴, 그리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순진해 보이는 행동은 물빛 머리 여인의 경계심을 조금씩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기도를 하러 왔습니다.”
“기도?”
“기도를 올리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여전히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는 여인을 보며 블라드는 재빨리 품을 뒤져 자신의 신분패를 꺼냈다.
“그리고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기사 자야르 님의 종자거든요.”
“흐음.”
여인은 블라드가 건네는 신분패를 받아 들어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조작의 흔적이 없어 보이는 교회의 신분패.
새로 만든 것 같아 보였지만 정교하게 새겨진 교회의 문양은 확실히 정상적으로 발급받은 신분패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심코 돌려본 신분패의 뒷면.
‘응?’
여인은 그곳에서 특별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신분 보증인이······사제 안드레아?’
신분패의 뒷면에 적혀있는 이름은 근방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사제 안드레아였다.
주교로 임명되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세속의 명예 대신 고난의 현장을 찾아다닌다는 명망 높은 사제.
그리고 그가 보증하는 소년.
물빛 머리의 여인은 당황한 눈빛으로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이 신분패는 귀족의 핏줄보다도 귀한 것이었으니까.
“······좋아요. 수상한 사람은 아니군요.”
“아. 감사합니다.”
블라드는 여인이 돌려주는 신분패를 다시 소중히 품에 넣었다.
소중한 것을 귀하게 대하는 그 모습이 소년의 순진해 보이는 면모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블라드는 생각했다.
귀족들의 무덤가에 서 있는 지금의 행동은 분명 무례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 있는 이 여자가 괜히 잘못 입이라도 열었다가는 요제프가 곤란해질지도 몰랐다.
왜 그랬냐 물어보면 뭐라 대답하기도 마땅치 않을 테고.
“도와드릴까요?”
“네?”
“이곳의 하녀 아닌가요? 무덤가를 돌보려고 온 거 아니에요?”
그래서 블라드는 이 여인의 입을 막아보기로 했다.
작은 호의를 베풂으로써.
블라드의 말에 알리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충격이었다.
난생처음이기도 했고.
‘감히!’
귀족가의 영애이자 이제는 가주의 위치에 있는 그녀에게 있어 지금 블라드가 하는 행동은 분명 무례하다 못해 경을 칠 행동이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블라드가 지금과 같은 행동을 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니, 오히려 눈치가 너무 좋았기에 지금과 같은 실수를 하고 만 것이었다.
알리시아는 지금 하녀들이나 입을 법한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양손에는 비석을 닦을만한 양동이와 도구들이 들려있는 중이었다.
실제로 블라드의 말처럼 부모님의 비석을 관리할 요량으로 이곳에 올라온 것이기 때문이다.
의지할 곳 없는 알리시아가 유일하게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기에 누가 봐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차림새였다.
“사실, 제가 미리 좀 치우긴 했어요. 나뭇잎들이 쌓여있어서.”
“······치웠다구요?”
부모님의 비석을 조금이나마 치웠다는 블라드의 말에 알리시아는 잠시 분노를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이 왜 남의 부모님 비석을 치워준단 말인가?
“땅 주인분들께 인사하는 게 예의인 것 같기도 해서.”
“아······.”
알리시아는 블라드의 말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일단 소년이 풍기는 분위기가 꽤나 그럴싸한 데다 지니고 있는 신분패의 존재가 신뢰를 더 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따라 언덕의 느낌이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알리시아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 느낌이 소년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도와드릴게요.”
“응?”
알리시아는 자신의 양동이를 뺏어 들어 비석을 향해 올라가는 블라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디서 많이 일해본 모양인지 능숙한 손놀림으로 잡초를 뜯고 비석을 닦는 금발 소년.
마치 자기가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과장된 몸짓을 보며 알리시아는 그만 실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래서 부탁인데, 오늘 일은 그냥 조용히 넘어가면 안 될까요? 자야르 경이 오늘 일을 알면 나는 얻어맞고 말 거에요.”
“······닦는 거 봐서요.”
새초롬히 고개를 돌리는 알리시아를 보며 블라드는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쁜 것들은 꼭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단 말이지.’
화려한 창녀들과 함께 살아왔으며 마담 마르셀라라는 유명한 미인을 매일 보아왔던 블라드였기에 바로 옆에 알리시아가 있었음에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요제프와 자야르에게 오늘 일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고 그렇기에 그저 열심히 비석들을 닦아낼 뿐이었다.
뒷골목에서 쓰던 방법들은 더는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적어도 낮의 태양이 떠오른 시간에는 말이다.
“말 안 할게요.”
“진짜 고맙습니다.”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블라드와는 다르게 알리시아는 블라드를 굉장히 신선한 느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에게 일체의 호의나 호감을 표시하지 않는 모습.
하녀로 착각 받았던 방금의 충격적인 일까지.
블라드라는 사람은 알리시아에게 있어서는 태어나 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
아무 말 없이 부모님의 비석을 닦아내는 낯선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알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풀리고 있었다.
안식을 얻기 위해 올라온 언덕에서 알리시아는 실로 오랜만에 그동안 쌓여있던 불안감을 풀어낼 수 있었다.
소년의 금발이 조금씩 물드는 황혼빛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멋진 색이었다.
※※※※
저물어가는 황혼과 함께 알리시아와 언덕을 내려가던 블라드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만 같은 느낌에 뒤를 돌아봤다.
“······?”
그러나 그곳에는 말끔히 닦인 비석들과 언제나 그곳에 있었을 것만 같은 나무가 서 있었을 뿐이었다.
만약 블라드가 자신의 세계가 아닌 목소리의 세계를 통해 그곳을 바라봤다면 조금은 다른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기억들이 여전히 가슴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쉬이이익-
나무를 감싸 안은 하얀색의 뱀.
그리고 점점 어두워져 가는 언덕을 밝히며 뱀을 향해 다가오는 반짝이는 반딧불들.
오늘 누군가의 세계에서는 밤하늘이 아닌 야트막한 언덕에서도 자그마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