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31
명예로운 결투 (1)
블라드는 손으로 벽을 따라 훑으며 걷고 있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거친 벽돌을 느끼며 블라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들으려는 듯 쫑긋 귀를 세웠다.
“······.”
예민한 청각.
블라드는 호르헤도 인정했던 그 청각을 이용해 무언가를 찾는 중이었다.
창- 차창-
상대편 기사들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 몸을 풀고 있는지.
“여기 있었네.”
알리시아 하이날이 자신의 명예를 대신해 줄 세 명의 기사들을 모았듯이 그녀를 부정한 출생이라 고발한 엔드레 또한 자신의 인맥을 이용하여 기사들을 모았다.
인맥과 영향력을 이용한 명예 결투의 전초전.
그리고 가로막힌 벽 저편, 서로가 닿지 않는 곳에 모든 것을 결정지을 그들이 있었다.
“흡!”
블라드는 손을 통해 파악한 벽의 모난 곳을 붙잡으며 날렵하게 위로 튀어 올랐다.
3m는 가뿐히 뛰어넘을 것만 같은 벽의 높이였으나 블라드에게 이 정도의 벽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하게.
남의 것을 훔치던 그때 그 느낌으로.
마치 도둑고양이 같은 몸놀림으로 벽을 뛰어넘은 블라드는 옷을 툭툭 털어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정원을 거닐었다.
누가 보았다면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사람인 줄 알 정도로 태연한 모습이었다.
챙- 채챙-
‘저기군.’
블라드는 병장기가 맞부딪히는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요제프는 블라드에게 이곳에 있는 기사들의 면면을 보아두라 지시했었다.
비록 목소리의 요청을 먼저 따랐던 블라드였으나 요제프의 명령을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실제로 보고 싶기도 했었으니까.
여태껏 블라드가 보아온 기사라고 해봤자 한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일 뿐이었다.
창녀들의 기사 호르헤.
푸른 달빛의 기사 고딘.
애꾸눈의 자야르.
‘보르단 경도 기사긴 하지.’
그리고 기사 같지 않은 기사 보르단까지.
여러 가지 의미로 기사들과 인연이 깊었던 블라드로서는 자신이 동경하는 세계를 엿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빛나는 것을 찾아 움직이는 것은 소년의 오랜 버릇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음.’
기사들의 감각을 속일 자신까지는 없었기에 블라드는 너무 가까이는 다가가지 않기로 했다.
다만 타고난 시력을 통해 먼발치에서 훔쳐보고 있을 뿐이었다.
요제프의 말처럼 무언가를 보고 느끼기에는 그 정도면 충분할 테니까.
저 앞에서 두 명의 기사가 서로 검을 맞대고 있었다.
격렬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몸을 충분히 풀 수 있을 정도의 몸놀림으로.
내일 있을 결투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대검.’
블라드에게 가장 먼저 보인 기사는 거대한 덩치와 함께 그 덩치에 맞먹을 정도로 큰 대검을 휘두르는 기사였다.
비록 오타르만큼은 아니었으나 검은 피부를 지닌 것으로 보아 적어도 흑인 계열의 혼혈 같아 보이는 기사였다.
멀리서 보고 있었음에도 느껴지는 대검의 기세가 매서웠다.
‘검과 방패.’
그리고 그와 상대하는 기사.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르는 검은 피부의 기사와는 다르게 단단하게 방어태세를 굳힌 기사는 착실하게 대검을 흘려내며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경험 없는 블라드가 보더라도 방패술 쪽에 장점이 있는 기사 같았다.
“쉽게 뚫기 어려워 보이지?”
“······!”
블라드는 옆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누구······!”
“쉿!”
재빨리 블라드의 입을 틀어막는 누군가.
반항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입을 틀어 잡힌 블라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붙잡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와서 들킬 생각이야?”
익살스러운 카이저 콧수염을 가진 남자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는 남자였으나 블라드는 오히려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뭐가 이렇게 빨라!’
방금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그의 손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제압당해버렸다.
“특등석을 찾은 걸 보니 감은 있어 보이는데 우리 그냥 조용히 바라보자고.”
카이저 콧수염의 남자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자야르 경의 종자씨.”
“······누구십니까.”
남자는 블라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품 안에서 자그마한 말린 과일을 꺼내 건네주었다.
“먹으면서 보자고. 원래 좋은 볼거리에는 음식이 필요한 법이지.”
“······.”
블라드는 별수 없이 남자가 주는 말린 과일을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자에게서 벗어날 만한 방법이.
교묘하게 퇴로를 모두 틀어막은 남자를 보며 블라드는 쉽사리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그의 허락이 없이는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기세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기운을 다루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는 뜻이지. 경거망동하지 마라.]목소리가 말하기를 쉽사리 수준을 가늠하기 힘든 자라 할 정도였으니 블라드는 일단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비싼 것 좀 드시지.”
“흐흐. 돈이란 게 쓰면 쓰는 대로 써지는 거라.”
제압당해 있으면서도 대담하게 자신에게 농을 거는 블라드를 보며 카이저 콧수염의 남자는 맘에 들었다는 듯 말린 과일 하나를 더 건네주었다.
“역시 들은 대로 힘이 좋아.”
“콜린 경 말인가요?”
실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간단한 신상명세 정도는 이미 요제프를 통해 파악해 둔 블라드였다.
“괜히 흙멧돼지라 불리는 게 아니야. 저기에 걸리면 뼈도 갈라질걸?”
“동의합니다.”
어차피 도망도 못 치는 거 맞장구나 쳐주기로 한 블라드였다.
자신을 어찌할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하고도 남을 실력의 사람이었으니까.
“저는 상대하고 있는 기사가 더 대단해 보이네요.”
“아. 파블로 말인가.”
카이저 콧수염의 남자는 말린 과일을 오물거리며 대답했다.
“중부지역의 유망가문인 아른슈타인의 기사지.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는 유형의 기사야.”
“왜요?”
어느새 스스럼없어진 블라드를 보며 남자는 웃음 지었다.
“재미없거든. 방어 일변도라.”
“아아.”
기사들로 단단히 진형을 굳혀 벽을 만드는 것이 특징인 아른슈타인 가문답게 기사 파블로는 그런 특징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방패술은 인정하지. 엔간한 것들은 다 흘려낼 줄 알거든.”
“음.”
누군지는 몰라도 견문이 넓다.
어쩌면 행운일지도.
“그럼 나머지 기사는 어떻게 보세요? 한 명이 더 있잖아요.”
내심 그를 통해 나머지 한 명에 대한 정보도 알아내려 했던 블라드였으나.
“······.”
어느새 카이저 콧수염의 남자는 사라지고 만 뒤였다.
[사람이 오는 것 같다.]“젠장.”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기척도 내비치지 않은 채 바람과 같이 튀어버렸다.
아무런 기척 없이 사라진 남자만큼은 아니었지만, 위험을 감지한 블라드는 재빨리 자리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높은 벽을 뛰어넘어서 알리시아가 지정한 구역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 블라드.
“세상에 왜 이렇게 괴물들이 많아······.”
간신히 돌아오는 데 성공한 블라드는 벽에 기대어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걸리지 않았다는 안도의 한숨이기도 했지만, 또다시 맞닥뜨린 거대한 벽에 대한 한숨이기도 했다.
“기사였겠죠?”
[그랬겠지. 마법사는 아니었으니까.]아마 기사였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실력이니까.
“그 정도는 해야 기사가 되는 거예요?”
[보르단 경도 기사이기는 하지.]“아니······.”
왜인지 힘이 빠져버린 블라드는 목소리가 내뱉은 어처구니없는 말에 대답하기보다는 그저 가만히 뒷머리를 벽에 기댈 뿐이었다.
“기사라고 다 같은 기사가 아니잖아요.”
보르단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소년은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푸른 달빛의 기사.
쇼아라에서 막 뛰어나온 우물 안 개구리였을 시절에는 반드시 뛰어넘고야 말겠다는 목표였으나 넓은 세상으로 나온 순간부터 블라드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스스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에 차마 입 밖으로 내뱉기 어려운 목표를 생각하며 블라드는 괜스레 발로 땅을 찰 뿐이었다.
아직 입속에 남아 있는 마른 과일의 단맛이 괜히 껄끄러웠다.
※※※※
다음날 정오.
비록 크기 자체는 작았으나 중앙에 마련된 홀 만큼은 여느 귀족 저택에 있는 것에 꿀리지 않는 하이날 저택.
그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검을 든 기사, 기사를 수행하는 종자, 신을 모시는 사제.
그리고 두 명의 하이날.
알리시아 하이날과 엔데르 하이날.
한때는 삼촌이며 조카였던 두 명이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두 명의 하이날을 중심으로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있는 무리들 사이에서 정갈하지만 매서운 기세가 오가고 있었다.
명예롭지만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결투.
그 결투의 대전사들이 만들어내는 기세였다.
“더 꽉 조여라.”
“네.”
자야르의 종자로서 그를 수행하는 데 여념이 없던 블라드조차 난생처음 느끼는 저릿저릿한 긴장감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눈빛이 사나워지는 중이었다.
“잘 봐둬라. 진심을 담은 기사들의 결투는 쉽게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니까.”
“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요제프와 알리시아의 이름을 건 채 결투에 나서야 하는 자야르였지만 한쪽밖에 남지 않은 그의 눈에서는 그저 평온함만이 감돌 뿐이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만 너 자신이 애송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
“애송이는 걷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다. 뛸 자격 없어.”
세상은 넓고 자신은 작다.
도저히 손쓸 수 없는 강자들을 보고 느끼고 또한 겪고 왔던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초조해하고 있었다.
재능은 있지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고.
목표가 높은 만큼 가야 할 길이 먼 블라드로서는 방금 자야르가 한 말이 가슴 깊은 곳까지 박혀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쉬운 일이 없는 법이다.”
비록 짧지만 블라드에게 있어 지금 가장 필요한 말을 해준 자야르는 마지막으로 안대를 고쳐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봐.”
“네.”
종자로서의 모든 할 일을 마친 블라드가 자야르의 뒤에 서서 대기하려 하는 순간.
“알리시아 하이날 님 입장하십니다!”
시종인지 집사인지 알 수 없는 노인의 목소리와 함께 홀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네.’
지체 높은 귀족인 요제프와 함께하고 있었으나 블라드는 어디까지나 종자의 신분일 뿐.
아직 자신이 몸담고 있는 바예지드 가문의 가주인 페테르조차 만나보지 못했으니 데어마르의 주인인 알리시아 하이날을 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젊다고 하던데.’
젊고 아름다우며 또한 여자이면서 남작인 사람.
그녀를 수식하는 모든 것들은 한참 호기심이 많을 나이인 블라드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모두 예를 갖추십시오!”
이번에 자야르와 같이 명예 결투에 임할 노(老)기사 던칸의 안내를 받으며 화려한 예복을 입은 여인이 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엔데르가 서 있는 쪽에 인물들은 간단히 고개만 숙이거나 아예 예를 취하지도 않았지만, 그녀를 위해 서 있는 자들은 마땅히 이 땅의 주인인 그녀를 보고 예를 갖춰야 할 터.
블라드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려 했으나.
“······이런.”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물빛 머리의 그녀와.
던칸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물빛 머리의 여인.
딱딱하고 냉정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그날 보았던 사람이라 믿기에는 너무 낯설어 보이는 것이었다.
[이제는 귀족 모욕죄까지 추가로군.]“······.”
차마 고개를 숙이지도 못한 채 어설프게 굳어있는 블라드를 향해서 알리시아 하이날의 눈길이 잠시 머물렀다 지나갔다.
그 큰 눈동자에 잠시 금발 소년의 모습을 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홀 안에 놓인 의자를 향해.
이곳 가장 높은 곳에 마련된 단 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가주의 자리를 향해서.
블라드의 당황한 시선과.
엔데르의 사나운 눈빛과.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관심을 담담히 받아내며 물빛 머리의 여인은 있어야 할 자리에 올라서고 있었다.
“결투의 당사자들이 모두 도착했으니 지금부터 절차를 진행하겠소!”
이번 결투를 위해 특별히 중앙에서 초빙한 사제의 말을 시작으로.
“이곳을 바라보는 신이 증명하시며 떠오른 오늘의 태양이 그 증거가 될 것입니다!”
홀의 문이 닫히고.
모든 것을 건 결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명예롭지만 잔혹한 결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