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33
명예로운 결투 (3)
알리시아 하이날.
전대 가주의 딸이며 첩에게서 태어난 엔데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당성을 부여받은 사람.
또한, 그녀의 피는 중부의 가문인 샤자드와 연결된 것이기도 했다.
알리시아의 조모에서부터 시작된 샤자드의 피는 두 가문 사이의 이어진 굳건한 신뢰를 뜻하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귀족들이 행하는 정치라는 개념은 인간성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피는 푸른색이었으니까.
“선언해 주십시오!”
샤자드는 저 멀리에 있는 핏줄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이득이 더 중요하다 판단했다.
엔데르가 그것을 약속했기에.
미래를 내다보는 가주라면 감히 약속할 수 없는 것들까지 내어주겠노라 말했기 때문이었다.
샤자드는 그 대답을 받아들였고 명예를 모르는 기사를 알리시아에게 내주었다.
알리시아는 속았으며, 바예지드는 농락당했다.
이 승부는 명예롭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명예롭지 못한 전장 안에서 조용히 일어서는 자가 있었다.
바예지드 가문의 요제프.
중부의 가문들이 더럽힌 이 결투에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북부의 대표자가 되어버린 청년.
그가 무겁게 일어섰다.
“이 상황에 관해 서로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잠시간의 말미를 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비록 큰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침묵으로 가득한 홀 안에 퍼지기에는 충분한 소리였다.
요제프의 말속에 담긴 분노를 알아들은 사제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연신 땀을 닦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사제님.”
새까맣게 타오르는 요제프의 눈동자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저 아래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
엔데르 하이날.
“알리시아 측 기사가 기권했소! 요제프 님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 결투는 끝났소이다!”
“지금 이게 명예로운 결투가 맞습니까?”
잿불은 식어있지만, 그 안에 뜨거운 것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 요제프의 목소리가 그랬다.
“당신들이 정한 결과를 그저 받아들일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습니다.”
비록 검은 들지 못했지만, 요제프의 몸 안에도 바예지드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흉폭한 바예지드의 피가.
“내가 이 상황에 대해 납득하기 전까지는 결투는 끝낼 수 없습니다.”
“······.”
요제프의 단호한 선언에 눈치 빠른 사람들이라면 느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그동안 심상치 않았던 중부와 북부가 격돌하는 시작점인 것을.
“어떻게 납득을······시켜드리면 되겠소이까?”
승리를 바로 눈앞에 둔 엔데르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외치고 있었지만, 그 기세는 점차 잦아들고 말았다.
짙은 눈그늘을 가진 남자의 눈에서 새까맣게 타오르는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에.
‘바예지드······.’
자신을 바라보는 요제프의 새까만 눈을 보며 엔데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북부는 반드시 갚는다.
그것이 명예든 혹은 치욕이든 간에.
“결투를 속행하게 해주시오.”
요제프는 생각했다.
최선은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최악만은 피해야 한다고.
“알리시아 님의 명예를 기권패로 더럽힐 수는 없소.”
증명조차 못한 명예.
그것은 불명예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치욕적인 것이었다.
그렇기에 요제프는 어떤 식으로든 이 자리에서 결투를 끝맺음하는 것을 선택했다.
어설픈 중지는 치명적인 명분을 내주게 될 것이며 제대로 마치지도 못한 결투는 알리시아를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오직 확실한 패배만이 차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야만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테니까.
“······주베르 경을 대리할 자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요청을 받아들이겠소이다.”
요제프는 엔데르의 말을 들으며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너구리 같은 자는 이미 자신과 알리시아가 마땅한 기사를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노렸군.’
알리시아는 더는 기사를 내놓을 수 없으며 자신은 오직 두 명의 기사만을 데려왔다.
다른 영지에 초대받아 올 때는 너무 많은 기사나 병사들을 데려오지 않는 것이 귀족 간의 불문율이었으니까.
그것을 노린 뼈아픈 외통수였다.
“······엔데르 님의 말처럼 대리할 자를 세우신다면 결투를 속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둘의 말을 듣고 있던 사제는 옳다구나 하는 마음으로 엔데르가 하는 말을 주워섬겼다.
결투를 속행하려면 당연히 대리자가 있어야 할 터.
그것이 없다면 애초에 성립되지도 않을 제안이었다.
“······.”
요제프는 사제의 말에 고개를 돌려 알리시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창백한 얼굴로 뛰어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알리시아는 방금의 일격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대로 끝나고 만다면 그녀는 자신의 명예를 증명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있습니다.”
요제프는 넋이 나가버린 알리시아를 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잘 됐다.
내가 짠 판은 아니지만, 기꺼이 올라주리라.
“대신할 사람이 있습니다.”
결투는 명예로운 것.
그렇기에 스스로 자격을 증명한 자 이거나 혹은 명예로운 자에게 자격을 위임받은 사람만이 명예로운 전장에 올라설 수 있었다.
“누구입니까?”
명예는 내가 대신한다.
그렇다면 검을 대신 들어줄 자는 누구인가?
“······.”
요제프는 가만히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자신의 검인 자야르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바예지드는 기권을 선택한 샤자드 가문의 주베르를 대신하여 새로운 결투자를 올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요제프의 발언에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누구를 내보낼 것인가?
“나, 바예지드 가문의 요제프는 알리시아 님의 명예를 대신할 대전사로.”
알리시아 대신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요제프.
그의 손가락이 누군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를 세우겠소.”
“······!”
고요한 침묵과 함께.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요제프의 손가락 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으며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인물.
그렇기에 명예로운 전장에 뛰어들 수 있는 오직 단 한 사람.
기사 자야르의 종자인 쇼아라의 블라드.
“어······.”
요제프의 손가락 끝에 서 있는 금발 소년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저 눈을 깜빡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중부와 북부가 맞부딪히는 최초이자 최전방인 곳에 소년이 서 있었다.
※※※※
블라드의 정체를 확인한 엔데르는 입에 거품을 물며 부당함을 항의했다.
“그는 기사가 아니오! 자격이 없습니다!”
“명예 결투는 꼭 기사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검을 들고 있는 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상대는 기사요! 기사를 상대로 종자를 올리는 것은 아른슈타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
“당신들은!”
엔데르의 말을 끊으며 요제프가 강하게 발을 굴렀다.
그리고는 분노로 타오르는 불덩이를 입에서 내뱉었다.
“당신들은 바예지드 가문의 명예를 생각하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인가!”
주인 된 자는 고개를 숙이고 찬탈자는 굶주린 침을 흘리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얕은수로 바예지드를 농락해!”
오직 홀로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북부의 명문 바예지드 가문의 요제프뿐이었다.
요제프는 이곳에 있는 자 중 가장 명예로운 피를 품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명예는 내가 보증하오!”
그리고 누군가의 명예를 보증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대리자를 교체하겠습니다. 받아들여 주십시오.”
“어, 음······.”
요제프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그가 보증한다면 종자가 아니라 한낱 마구간지기라도 결투에 응할 수 있을 테니까.
“동의, 동의하십니까?”
그러나 명예 결투라는 장은 어디까지나 서로 간의 동의가 있어야 만 성립이 가능한 것이었다.
엔데르는 잠시 뒤에 있던 기사들과 눈을 맞추고는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라도 하셔야겠다면 알겠소이다.”
한낱 종자 따위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설마 저기 있는 애송이 녀석이 종자가 아닌 기사라 할지라도 아른슈타인의 파블로는 쉽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
“저희 측은 요제프 님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럼 결투를 진행하지.”
애초에 기울어진 판이었다.
그러나 요제프는 방금 그 판을 비틀었다.
비록 블라드라는 쐐기로 만든 자그마한 비틂이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애초에 승리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시간만 벌면 돼.’
요제프는 이곳 데어마르에 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 왔다.
그리고 바예지드의 요제프라는 사람은 언제나 최악을 대비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소년이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다.
“음. 흠. 으음.”
[진정해라 블라드.]갑작스레 맞닥뜨린 상황 앞에서 블라드는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제가, 지금, 결투해요?”
“그렇다.”
“그것도 기사랑?”
“그렇다니까. 숨 들이쉬어라.”
자야르는 블라드의 가죽 갑옷을 조이며 최대한 단단히 무장시키는 중이었다.
기사가 종자를 수행하는 진귀한 모습에 사람들은 자연스레 블라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죽진 않겠죠?”
“최악의 최악이라면 내가 난입하마.”
“그냥 최악은요?”
“······.”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갑옷의 끈을 조이는 자야르를 보며 블라드는 가만히 검을 다잡았다.
언제나 그래왔었지만 결국 믿을 것은 자신뿐인 것 같았다.
“블라드.”
“요제프 님.”
어느새 귀빈석에서 뛰어 내려온 요제프는 거칠어진 숨을 억지로 참으며 블라드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하실 필요까지는······.”
“십 분만 버텨다오.”
“······오.”
남들이 보기에는 가혹한 전장으로 올라서는 종자를 격려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둘 사이에는 긴밀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준비한 것이 있다. 네가 버텨주면 할 수 있다.”
“······십 분이면 되겠습니까?”
블라드는 알고 있었다.
요제프가 그저 분노에 휩쓸려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닌 것을.
“더 버텨주면 좋지.”
요제프의 대답에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늙고 뚱뚱하며 언제나 욕을 먹던 기사가 보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빚진 것도 있으니까요.”
“누구한테?”
블라드는 요제프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가장 높은 곳에 홀로 앉아 있는 여인에게 눈을 맞췄다.
쉴 새없이 흔들리는 물빛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십 분 정도는 최선을 다해 버텨보겠습니다. 가능하다면요.”
“조심해라.”
맥락이 맞지 않는 대답이었으나 블라드가 평소에도 혼잣말을 자주 하는 것을 알고 있던 요제프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줄 뿐이었다.
이 녀석이 짊어지기에는 과도한 무게다.
충분히 긴장할 만도 하다.
블라드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물빛 머리의 여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하녀라 착각했던 것도 미안했고 부모님 묘에 몰래 들어갔던 것도 미안하다.
그리고 말 안 해줘서 고맙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겠다.
“양측의 대리자는 올라오시오!”
기사에게 중요한 것은 주군의 명령이 첫 번째요 자신의 명예가 두 번째니.
블라드는 요제프의 명령과 알리시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버거운 짐을 지는 것에 동의했다.
“······후.”
비록 빌린 것이었지만 빛나는 명예를 짊어진 소년은 떨리는 발걸음과 함께 전장으로 올라섰다.
그 모습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아군도 적군도 그리고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조차도.
세계가 소년을 지켜보고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입니다.”
쇼아라의 블라드.
신실한 사제가 신의 허락 아래 세계에 적어준 그 이름.
소년은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고했다.
오늘, 소년은 빛날 자격을 갖췄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검을 들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