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34
명예로운 결투 (4)
“어이 후배. 너무 쳐다보지 마.”
버레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힘 빠진 목소리로 블라드에게 말했다.
“저기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쳐다보기만 해도 기분 나빠하거든.”
“······.”
소년 또한 알고 있었다.
버레이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겨우 길 하나 차이지만 우리는 자격이 없다 이거지.”
“무슨 자격?”
벽에 기댄 채 단검으로 나뭇조각을 조각하던 버레이는 한쪽 입술을 치켜들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자그마한 분노와 함께 어찌할 수 없는 처량함이 깃들어있었다.
“뭐든지 다 모자라잖아.”
“······우리가 뭐가 모자란 데.”
버레이는 블라드의 대답에 쿡쿡거리며 대답했다.
“뭐, 부족만 한가, 자격도 없지, 태어날 때부터 그랬잖냐. 다 알면서 그래.”
“······.”
소년은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길 너머에 있는 번듯한 건물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곳에는 반짝임과 웃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뒷골목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소년은 언제나 그것이 고팠다.
※※※※
터엉-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블라드의 귓가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자격이 없다.”
아른슈타인의 기사 파블로.
방패술로 유명한 기사인 그가 자신의 방패를 내던지는 소리였다.
“너는 내 이름을 들을 자격이 없어.”
“······.”
파블로는 자신의 방패를 내던지며 선언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겠노라고.
“자격 없는 네놈이 올라온 순간부터 이것은 명예로운 결투가 아니다.”
종자와 기사의 싸움이라니.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 일이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일의 당사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사제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든 다 무시해도 좋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써서 있는 힘껏 덤벼봐라. 죽이려 들어도 좋다.”
요제프는 알리시아의 명예와 자신의 기회를 살리기 위해 파블로의 명예를 짓밟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분노는 모두 블라드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
사제조차도 감히 제재하기 힘든 스산한 기운에 블라드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뭐가 부족한데?”
“······뭐?”
당돌하다 못해 당당한 블라드의 태도에 파블로는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기사 대 종자의 싸움임에도 겁을 먹기는커녕 녀석의 푸른 눈동자는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으니까.
명예롭고 고귀하며 또한 빛나는 것을 손에 쥔 남자.
너에게 묻고 싶다.
“내가 너희랑 다른 게 뭔데.”
왜 항상 좋고 아름답고 빛나는 것들은 너희같이 잘난 놈들만 독차지하는 거냐.
나는 그것이 싫다.
“······양쪽은 자, 자리로 돌아가서······.”
사제의 제지에도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친 채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눈으로 통하는 대화.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동등한 기세를 갖춰야 하는 것이었지만 소년은 해내고 있었다.
자격 없는 곳에서 태어났을지언정, 아무것도 아닌 채 끝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당신이 먼저 말했어. 뭘 해도 된다고.”
“······바예지드가 격이 떨어졌군.”
저놈은 미쳤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이다.
“싹을 잘라주마.”
저런 녀석이 커봤자 기사의 명예에 누만 끼칠 것이 뻔하다.
그러니 이곳에서 확실히 밟아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어서······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시오. 제발.”
오늘 너무나 버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제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간절한 부탁에 두 사람은 전장의 끝을 향해 걸어갔다.
“신실한 녀석이로군.”
“기본은 갖췄어.”
그곳에서 검을 든 채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년을 보며 사람들은 블라드가 기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상황이라면 신의 은총을 빌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소년은 신에게 기대지 않았다.
[버티는 것이 목적이라면 나는 도울 수 없다. 몸을 빌리면 10분은커녕 10초도 안 되어서 쓰러질 테니.]‘······.’
블라드에게는 목소리라는 비장의 수가 있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십 분이 지난 후에는 무리하지 말고 기권해야 한다. 저번에는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으니.]“어차피 도움 바랄 생각 같은 거 없었어요.”
[······그래.]목소리의 도움은 훌륭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온전히 빛나기 위해서는 오직 자신만의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할 수 있을까요?”
[해봐야 알겠지.]블라드도 긴장하고 있었지만, 목소리 또한 긴장하고 있었다.
소년은 가능성이 충만했으나 그것을 다듬을 시간이 없었다.
최선을 다해 지도했으나 실전을 겪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소년의 앞에 있는 것은 기사.
“준비되었나? 쇼아라의 블라드?”
그것도 오러를 다룰 줄 아는 진정한 기사였다.
“······네.”
준비 자세로 끌 수 있는 시간은 이제 다했다.
남은 것은 검과 검의 맞부딪힘 뿐.
“좋다.”
사제는 양측이 준비되었음을 확인하고는 뒤로 물러나 양손을 치켜들었다.
“오늘의 태양 아래 신께서 허락하셨소이다!”
사람들은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흥미진진한 눈으로 결투장을 바라보았으나.
“······!”
어느새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어야 할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단기접전에 특화된 결투사의 검술.
그것은 언제나 선공을 가져가는 것을 즐겨하는 소년의 성정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흐압!”
패도적임과 동시에 직선적인 움직임.
자신을 가로막는 것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당당한 움직임.
그렇기에 마치 벼락같이 달려드는 블라드의 검에는 일말의 망설임 같은 것 따위는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의도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까앙-!
소년은 의도대로 선공을 가져갔다.
내준 것이든 가져온 것이든 어쨌거나 블라드의 의도는 성공했다.
“······.”
평범한 사람들의 시야에는 잡히지도 않았을 빠른 쇄도였지만 파블로는 어렵지 않게 블라드의 검을 막아내었다.
‘언제나 다음 수를 생각해라. 한 번 공격하고 죽고 싶지 않으면.’
“······!”
공격이 막혔음에도 블라드는 기세를 잃지 않았다.
자야르에게 배운 것처럼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어지는 연격이 파블로에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검들의 울림이 정확한 간격으로 홀 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공격을 주도하는 소년의 흐름에 따라 결투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 같은 것이었다.
“······.”
비록 선공을 내주고만 파블로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당황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감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타고났군.’
한 번의 부딪힘일 뿐이었지만 파블로는 어째서 요제프가 자신의 상대로 여기 있는 애송이를 내보냈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방패를 들었던 왼쪽을 노려라.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니.]“흐아아!”
목소리의 조언에 따라 강렬한 외침과 함께 파블로의 약점을 파고드는 블라드.
분명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공격이었으나 파블로는 블라드의 검 속에 담긴 번뜩이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소년의 검은 굶주린 늑대와도 같았다.
피 냄새를 맡은 늑대처럼 자신의 약점을 집요하게 물어뜯고 있었다.
굶주림.
그리고 타고난 잔인함.
소년의 검 속에는 그것이 숨겨져 있었다.
‘그래도 이쯤에서 끊어야겠군.’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선공을 내주었지만 이쯤에서 기세를 끊어야 함을 느낀 파블로였다.
그만큼 소년의 기세는 매서웠다.
“뭐 저런······!”
“저 녀석 지치지도 않는군!”
빠르며 급작스러운 블라드의 움직임은 소년이 가지고 있는 금발과 마찬가지로 화려함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매료되었다.
블라드라는 소년이 내뿜는 기세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캉-! 캉! 카-앙!
검과 검이 맞부딪히며 만드는 불꽃들이 요란하게 튀어 나갔다.
“······.”
폭풍같이 몰아치는 블라드를 보며 파블로는 가만히 기회를 기다렸다.
기세는 훌륭했으나 아직 숙성되지 못한 블라드의 빈틈을 노리면서.
“흐읍!”
그리고 틈을 파고들어 내리쳤다.
작은 폭풍 따위는 가뿐히 누를 수 있는 바위 같은 단단함으로.
“······!”
쉴 새 없이 파블로를 후려치던 블라드는 갑작스레 다가오는 무게감에 본능적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콰앙-!
“끄억!”
그와 동시에 땅바닥에 내려꽂히고 말았다.
얼마나 센 기세로 얻어맞았는지 넘어지자마자 몸뚱이가 바로 튀어 오를 정도였다.
‘끄아!’
분명 검으로 막았으나 마치 단단한 돌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만 같은 얼얼함에 블라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막았으나 막지 못한 일격.
흘려내지 못했기에 모든 충격을 고스란히 흡수하고만 블라드였으나 몸에 익힌 감각으로 재빨리 낙법을 시도한 후 서둘러 뒤로 물러나 간격을 벌렸다.
“끄으으······.”
생각한 것이 아닌 몸이 반응하는 몸놀림.
자야르와의 실전과도 같은 연습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정신 차려라!]‘······으으.’
연습 중 자야르가 내질렀던 검들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지만 파블로는 분명 그와 다른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돌로 얻어맞은 것 같아.’
고작 한 번 막았을 뿐인데 온몸이 욱신거리고 있었다.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무겁기 그지없는 일격에 블라드는 자연스레 위축되고 말았다.
“재주는 다 부렸나?”
“······.”
앞에 있는 파블로의 기세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명예롭지 못한 결투에 선 것도 모자라 볼거리까지 제공하고만 파블로는 더는 시간을 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온다.]비록 방패를 들고 있지 않았지만 파블로의 기세는 산과도 같았다.
‘······어디로!’
[간격을 지배하려 하고 있다. 어디로든 움직여야 한다!]검 하나만으로도 단단한 방어태세를 만들어 낸 파블로는 언제나 그래왔듯 태산과도 같은 발걸음으로 천천히 블라드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진심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블라드에게는 영광인 일이겠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난감한 전진일 뿐이었다.
[어떻게든 흘려야 한다.]‘그게 말이 쉽지!’
단기접전과 일격필살로 정의할 수 있는 목소리의 검술은 지금 상황에서는 쓸 수 없는 것이었다.
‘발놀림.’
지금은 또 다른 스승인 자야르의 물결 같은 움직임이 필요했다.
소년은 머릿속으로 자야르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다가오는 파블로의 공격에 대비했다.
쾅-!
“끄아!”
그러나 대비한다 할지라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검을 든 지 얼마 안 되는 블라드로서는 파블로라는 거대한 벽을 흘릴만한 경험도 실력도 없었다.
쾅-!
콰앙-!
검과 검이 맞부딪혔다기에는 믿을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블라드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위태로운 후퇴에 알리시아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소년이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다.
[정신 차려라!]목소리가 계속해서 정신을 일깨우고 있었지만, 너무나 큰 충격에 블라드는 거의 제정신을 놓고 만 상태였다.
만약 이것이 결투가 아닌 대련이었다면 이 정도 버틴 것만 해도 이미 충분한 선전이었으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러나 소년은 이곳에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올라온 것이 아니었다.
증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안 돼!’
블라드는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어떻게든 다가오는 검을 향해 장식 없는 검을 들이밀었다.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것이었다.
콰앙-!
그러나 희미한 의지로 내뻗은 검은 소년에게 어떤 기회도 제공해주지 못했다.
끼이이익-
방금의 부딪힘으로 블라드는 결투장의 끝까지 주욱 밀려나고 말았다.
“커억!”
블라드의 입에서 선홍빛의 피가 쏟아져 나왔다.
억지로 검을 붙잡은 손아귀는 이미 찢어진 지 오래였고 입술을 따라 흘러내리는 침방울이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과 섞이고 있었다.
“훌륭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의 명예를 무시한 요제프에게 잔뜩 화가 나 있던 파블로였으나 블라드와 검을 맞대고 나서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훌륭한 녀석이었다.
감히 자신에게 대들만한 자격을 갖춘 애송이었다.
정식으로 결투를 하기에는 아직 이르긴 했지만.
“나중에 다시 찾아와라.”
파블로는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며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블라드는 진이 다 빠져버린 흐리멍덩한 눈으로 파블로의 일격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고했다.]목소리도, 블라드를 준비시킨 자야르도 그리고 소년에게 명령한 요제프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
이제는 쉬어도 좋을 것이다.
홀 안에 있는 모두가 비록 패배하였으나 분전한 소년을 위해 박수를 보내려 하는 순간.
텅-
소년을 향해 내려치던 파블로의 검이 기이하게 꺾여 들어갔다.
무언가 맥없는 소리와 함께.
“······?”
모두가 지금 눈앞에서 발생한 상황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
맥없이 앉아 있던 콜린이 악몽에서나 들릴법한 소리에 기함하며 일어섰다.
“난 놈이네.”
소년의 분전을 보며 말린 과일을 씹어먹고 있던 주베르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
파블로는 콜린의 비명과도 같은 침묵을 보고 나서야 어째서 자신의 검이 튕겨 나갔는지를 알 수 있었다.
경험 많은 기사인 파블로조차도 단번에 받아들이기 힘든 상식 밖의 일이었으니까.
“······왜, 너희들만······.”
나지막히 들리는 블라드의 목소리에 파블로는 가만히 검을 치우며 눈앞에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나가버렸는지 반쯤은 풀린 몽롱한 눈동자.
마치 기억 속 어딘가를 꿈꾸는 듯한 눈동자였다.
“나도······.”
자격 없는 소년은 언제나 빛나는 것을 갈구해왔다.
능력을 원했고 기회를 바랐으며 자격을 갖추는 것을 꿈꿨다.
빛나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그리고 소년은 지금 자신이 빛날 자격을 갖춘 사람임을 증명했다.
아른슈타인의 기사 파블로의 검을 끊어낸 쇼아라의 블라드.
그는 스승이 보여준 검의 행로대로 반격기를 재현해냈다.
“······나도 거기 있고 싶다고.”
소년의 간절함이 기회와 가르침과 그리고 위기를 만나 천천히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꽃이 피려 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한 화려한 꽃이.
소년의 검이 울고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
야트막한 언덕 위 홀로 나무를 감싸고 있는 하얀색의 뱀.
소년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존재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텅-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하얀 뱀은 저택에서부터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텅-
분명 낯선 소리였지만 그 소리에는 자신이 오랫동안 그려왔던 누군가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뱀은 그 소리에 기꺼워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늘 높이 저 하늘 높이.
“—–!”
그리고 입을 크게 벌리고는 이제는 아무도 듣지 못할 소리를 내질렀다.
외롭디외로운 그 소리는 비록 땅에서부터 시작했으나 오직 하늘만이 알아주는 것이었다.
쏴아아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뱀이 내지른 목소리에 화답한 것들이었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뱀은 만족했다.
그 옛날 자신이 나무에 내려앉았을 때와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기에.
뱀이 부른 자그마한 구름들은 뭉치고 뭉쳐 오늘의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태양을 머금은 구름에서 내리는 비는 봄날에 어울리는 따뜻한 비였다.
오직 소년만을 위한 비였다.
※※※※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다.
텅-
숨조차 내쉬지 못한 채 그저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허억!”
새빨간 핏방울이 흩뿌려졌다.
그것은 소년이 억지로 쥔 손아귀에서 흘러나온 것들이었다.
절대 놓지 않을 듯 단단히 붙잡아놓은 장식 없는 검.
그것을 따라 붉은빛이 흐르고 있었다.
선명한 소년의 의지가 검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지금 보이는 광경에 모두가 경악하고 있었다.
종자인 주제에 기사의 검을 끊어내는 금발 소년의 움직임.
웅-우웅-웅웅
그리고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울고 있는 검의 소리까지.
[······.]이것은 소년의 영혼 속에 있는 목소리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노인의 꿈으로 만들고 소녀의 눈물로 샀으며 소년의 의지로 휘두르는 장식 없는 검이 내는 소리였다.
소년의 검이 울고 있었다.
‘하라고 보여준 것이 아닌데!’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자야르는 자신도 모르게 안대를 매만지며 당황한 모습을 내비치고 말았다.
블라드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갔다 싶으면 어느새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강자들의 흔적을 보았기 때문에.
아직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아가도 나아가도 보이지 않는 끝을 보고 싶어 소년은 어서 빨리 뛰고 싶어 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강한 도약은 오직 단단히 밟아놓은 땅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블라드의 조급증을 잠시 가라앉힐 요량으로 보여준 것이었건만.
‘기본기에 충실 하라고 보여줬건만 벌써부터 써재끼다니!’
저놈은 어느새 자신의 것을 훔쳐 사용하고 있었다.
가르치지도 않은 것을 마음대로 배워 써먹고 있었다.
이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당황하는 스승, 경악하는 군중, 걱정하는 여인.
“······.”
그리고 차악의 결과를 위해 확실한 패배를 선택했던 요제프까지.
각자의 이유가 가진 타당한 침묵 속에서 홀 안에 들리는 것은 오직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뿐.
까앙-!
가느다란 실처럼 가냘프게 이어지는 소년의 검에는 분명 날카로움은 사라졌지만 대신 굳건히 다잡은 의지가 들어차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겠다.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저 빛나는 것들이 있는 곳으로.
“······.”
그렇게 자신을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오는 소년을 보며 파블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끝내려면 언제든지 끝낼 수 있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소년이 보여주는 비틀거림에는 아직 의도라는 것이 섞여 있었으며.
웅-우웅-웅-
그리고 검이 울고 있었기에.
가까이 있기에 더 선명한 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파블로는 소년의 검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설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이것은 전조(前兆)였다.
설마 지금 같은 자리에서 일어날 줄은 몰랐지만, 가끔 어린 씨앗들은 자리를 잡으면 안 될 곳 같은 곳에서도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는 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흡!”
파블로는 기사로서의 의무를 행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로 맹세했기에.
결심을 굳힌 파블로는 있는 힘을 다해 블라드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그것은 소년을 제압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내려침이 아니었다.
끌어내려는 것이었다.
꽃을 피우려는 소년의 세계를.
검의 울음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파블로의 머릿속에는 결투라는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부터 하려는 것은 기사의 의무였으며 또한 영광인 것이니까.
“막아봐라!”
기사가 내지르는 한 번의 내려침마다 소년의 검이 울었고.
소년이 내뻗는 한 번의 반격마다 반짝임이 새어 나왔다.
“······저게 뭐야?”
“검이 빛나고 있는데?”
소년의 검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빛을 보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빛나는 검.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는 기사들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블라드의 스승인 자야르도.
피투성이의 늙은 기사 던칸도.
방금 패배를 맛본 콜린도.
“······보통 난 놈이 아니었구만.”
그리고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주베르조차도.
적과 아군의 구분 없이 모두가.
그들 모두가 기사였기에.
끼이익-
기사들이 밀어내며 만드는 의자의 끌림 소리가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섞이고 있었다.
소년의 검이 빛나고 있었다.
자신만의 색깔을 피우려 하고 있었다.
이 세상 모든 어리고 여린 것들은 꽃을 피울 수 있는 마땅한 자격이 있다.
가능성이란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을 스스로의 세계로 표현할 수 있는 어린것들은 귀한 것이다.
그렇기에 너희는 그 순간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기사이므로.
“방패! 방패를 다오!”
마침내 소년에게서 퍼져나오는 빛을 보며 파블로는 다급하게 외쳤다.
파블로의 다급한 외침을 따라 그의 종자가 방패를 들어 결투장 안으로 던져주었다.
“와라!”
아른슈타인의 파블로.
타앙-!
그가 자신의 검과 방패를 맞부딪히며 크게 소리를 내었다.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부터 시작된 선명한 노란빛이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나는 아른슈타인의 파블로다!”
파블로의 외침이 홀 안에 가득 울렸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그는 소년을 보며 자격이 없다 했다.
이 전장은 명예롭지 않으며 이것은 결투가 아니라 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했다.
“너의 이름을 말해라! 소년아!”
그러나 지금의 그는 방패를 든 채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자격을 갖췄으며 충분히 명예로워진 소년을 향해서.
“나는······.”
점차 꺼져가는 정신 속에서 블라드는 희미해지는 기억을 따라 걷고 있었다.
어두운 뒷골목을 지나 빛나는 별이 달려 있던 대장간을 앞을 걸어서.
지금은 부서진 자신의 둥지를 건너 빛나는 것들이 가득했던 그곳으로.
길 하나의 차이.
그것을 따라 빛과 어둠이 갈리고.
손에 쥘 수 있는 기회의 유무가 갈리며.
태어난 곳에 따라 인생이 선택되고 마는 그런 갈림길.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여태껏 가보지 않았던 곳을 향해 소년이 발을 내디뎠다.
반짝이는 곳을 향해.
태어날 때는 자격 없는 곳에서 태어났으나 걷는 곳은 빛나는 곳을 향해 걷는 소년아.
너는 너의 자격을 증명했다.
그러니 외쳐라.
“······나는 쇼아라의 블라드다.”
소년의 자그마한 외침과 함께 장식 없는 검이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검을 든 세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새로운 꽃이 피고 있었다.
“—-!”
하늘에서 소년을 위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록 어린 씨앗은 독이 가득 찬 더러운 진창 아래 뿌리내렸으나 위를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별을 품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이곳에서 빛을 피워낼 수 있었다.
“와라! 쇼아라의 블라드!”
이제 막 피어난 세계와 단단한 세계가 부딪히며 만들어 내는 강렬한 빛이 홀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 빛과 함께 마침내 피어난 한 송이의 꽃.
소년이 만들어 낸 꽃의 뿌리는 강렬한 하얀색.
소년이 만들어 낸 꽃의 줄기는 유연한 초록색.
그리고 소년이 피워낸 꽃잎의 색깔은.
“흐아아아아!”
처연한 달의 푸른색.
파블로가 만든 성벽으로 푸른 달빛이 안겨 들어왔다.
명예를 빌린 소년은 오늘 달을 띄웠다.
쇼아라의 블라드.
오늘 새로운 세계가 꽃을 피웠다.
※※※※
“······수고했다.”
파블로는 자신의 품 안에 들어온 소년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비록 눈은 하얗게 돌아가 있었으나 끝내 자신의 검을 놓지 않은 소년을 향해서.
끝까지 부여잡은 소년의 검 끝을 따라 붉은 피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정을 아는 자들은 이제 막 세계를 일깨워낸 소년에 대한 경의를.
모르는 자들은 갑작스레 환히 빛난 소년의 검에 대해 조금씩 입을 열고 있을 때쯤.
“오러······오러다!”
오직 눈앞에 고깃덩이에 심취해 있는 찬탈자가 큰소리로 외치며 홀의 중앙으로 뛰쳐나왔다.
“결투에서 오러 사용은 금지요! 쇼아라의 블라드는 실격입니다!”
이익에 급급한 자들은 눈앞에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도 그 꽃이 지면 맺힐 열매를 생각한다.
엔데르의 모습이 딱 그 짝이었다.
엔데르의 외침에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몇몇 사람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오러, 오러였구만.”
“종자가 오러를?”
“바예지드의 종자 아닌가.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갑옷 색깔도······.”
소년의 검에서부터 시작된 빛의 정체를 알게 된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거리며 방금 봤던 광경에 대해 열을 올리고 있을 때쯤.
“······,”
조용히 귀빈석에서부터 내려오는 남자가 있었다.
비록 아무런 말 없이 내려오는 그였으나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만한 존재감이었으며 마땅한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바예지드 가문의 요제프.
고귀한 피를 지닌 자가 자신의 종자를 안고 있는 기사 앞에 섰다.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저의 종자를 위해 기사의 의무를 행한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제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따라 올라온 자야르에게 블라드를 넘긴 파블로는 요제프와 맞춰 고개를 숙였다.
“사제님.”
블라드의 껍질을 깨는데 최선을 다해 준 파블로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한 요제프는 고개를 돌려 조용히 사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러였습니까?”
“그, 그렇습니다.”
사제의 대답에 요제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실격이다.
이번 결투의 규칙은 살상을 피하기 위해 오러를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요제프는 차가운 눈동자로 저 앞에서 침을 흘리고 앉아있는 찬탈자를 보며 물었다.
“신성한 결투의 규칙과 소드마스터의 규율 중 어느 것이 더 상위의 개념입니까?”
“······아아, 역시.”
요제프의 물음에 올 것이 왔다는 듯 사제는 이마를 짚으며 탄식을 내질렀다.
소드마스터.
검의 주인.
오직 시대가 인정한 단 한 명만이 가질 수 있는 명예로운 칭호.
그리고 인류 역사상 단 한 명만이 지녔다는 그 명예로운 칭호가 달린 규율이 있었다.
기사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저 따위가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결투를 주관하던 사제는 마치 항복 표시라도 한다는 듯 두 손을 들며 말했다.
“소드마스터의 규율은 명예이자 의무이며 또한 왕권과 관련된 것입니다. 신의 뜻을 따르는 저로서는 감히 결정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렇습니까.”
사제의 대답에 요제프는 미소 지었다.
이것으로 되었다.
“엔데르 하이날.”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어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엔데르는 요제프의 부름에 대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요제프는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엔데르를 보며 생각했다.
시간을 벌어달라 했더니 기회를 만들어 왔구나.
차악을 선택하고자 했으나 차선의 결과를 들고 왔구나.
그러니 나는 네가 준 이 기회를 꼭 살려보겠다.
“결투는 유보(留保)요.”
요제프의 대답에 엔데르의 얼굴에 말라가는 진흙처럼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유보(留保).
실격도 아니고 패배도 아니며 그렇다고 기권도 아닌 단어.
요제프는 지금 결투에 관한 결과를 미루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규율과 규칙이 맞물렸소.”
짙은 눈그늘의 남자가 그림자만큼이나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무엇이 우선한다 말할 수 없으니 나는 지금의 일을 교황청과 왕실이 있는 수도에 보고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파블로는 기사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방패를 들었다.
그가 방패를 든 순간부터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명예로운 결투가 아니었다.
소드마스터의 규율.
기사가 되기 위해 그 규율을 따르겠다 맹세한 파블로는 오늘 그 옛날 누군가의 의도대로 새로운 세계를 깨우는 데 이바지했다.
명예가 우선인가 의무가 우선인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없을 것이다.
그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는 고귀한 자들은 이곳이 아닌 제국의 수도 브리간테스에 있었다.
“그곳에서 명확한 결정이 날 때까지 오늘의 결과는 유보할 것을 제안합니다.”
멍청하게 벌어지는 엔데르의 입.
지금부터 그 입에서 어떤 말이 쏟아져 나온다 해도 상관없다.
요제프는 입에 물고 있는 명분을 절대 놓을 생각이 없었으니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고 자신 또한 예측하지 못했던 소년이 만들어준 소중한 기회였으니까.
※※※※
이 세상 모든 어리고 여린 것들은 꽃을 피울 수 있는 마땅한 자격이 있다.
가능성이란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을 스스로의 세계로 표현할 수 있는 어린것들은 귀한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마땅히 그 순간을 보호해야 할 것이다.
명예로운 검을 든 모든 자는 건국왕이자 소드마스터인 나 프라우센의 이름 아래 맹세하라.
너희들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그것이 나의 첫 번째 규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