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36
주어야 할 것과 받아야 할 것들 (2)
한 번의 한숨과 한 번의 바라봄.
“손님들은 다들 떠났나요?”
알리시아는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를 보며 간신히 또 하나의 한숨을 삼킬 수 있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남아있는 그 나무는 언제나 알리시아에게 위안을 주고는 했으니까.
“바예지드 가문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떠났습니다.”
“······떠나간 그들에게 경고 한마디조차 제대로 못 한 것이 너무나 원통하네요.”
명예로운 결투는 끝났다.
명예롭게 시작한 것은 아니었으나 마무리만큼은 화려하게 빛났으니 명예로운 결투라 해도 괜찮을 것이다.
“엔데르도 빠져나갔나요?”
“······유보니까요. 사제를 통해 교회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엔데르는 결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명시하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함과 동시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그 요청이 정당하다 교회가 판단함에 따라 알리시아는 엔데르가 데어마르를 빠져나갈 때 까지 어떠한 보복도 감행할 수 없었다.
“마음이 구겨지는 것만 같아요.”
“······.”
알리시아는 엔데르는 물론이거니와 그와 같이 자신을 몰락으로 밀어 넣으려 했던 기사들까지도 고이 보내주어야만 했다.
자존심을 넘어서 영혼에까지 상처가 생기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같은 어지러운 시기에 명분이라는 것은 창이자 방패가 되는 것이었으며 게다가 알리시아는 아직 데어마르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뭐든지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후일을 기약하시죠. 알리시아 님.”
“요 며칠간 제 몸속에 따뜻한 피 대신 뜨거운 분노가 흐르는 것만 같아요. 던칸 경.”
그렇기에 쓰린 독을 삼키는 심정으로 다들 고이 보내주어야만 했다.
정당한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어야만 했기 때문에.
군림하는 자는 권한만큼의 책임과 의무를 져야만 하는 법이었으니까.
“레몬의 작황은 어떤가요?”
“그리 좋지 못합니다.”
비록 근래 큰 시련을 맞아 쉼 없이 흔들려왔던 알리시아였으나 그녀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그녀는 데어마르의 내정을 돌보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비록 속은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갈수록 생산량이 떨어지는군요······.”
알리시아는 인상을 쓴 채 다시 한번 창밖에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증조부 시절에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나무.
그 나무는 하이날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나무였으며 알리시아의 아버지가 계실 적에는 매년 봄마다 흐드러지게 꽃이 폈던 나무였었다.
비록 지금은 점점 앙상해져만 가고 있어 꽃을 피우기는커녕 죽어가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데어마르를 감싸는 기후가 점점 차가워지고 레몬의 생산량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레몬 산지로 유명한 데어마르의 명성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차라리 보리밭을 더 늘릴까요?”
“······조금 더 지켜보시는 것은 어떠실지.”
한 영지의 경제를 지탱하고 있던 산업구조를 바꾼다는 것은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게다가 내부의 항쟁으로 힘을 소모한 하이날 가문에 있어서는 매우 부담되는 결정임이 틀림없었다.
“후······.”
산과도 같은 시련을 치워냈더니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알리시아는 답답한 심정에 결국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응?”
순간, 그녀의 눈에 반짝이는 화려한 금색빛이 맺혔다.
창 너머에서 이리저리 날뛰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었다.
“······던칸 경.”
“네. 알리시아 님.”
창밖의 모습을 살피며 알리시아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보통 기사들은 다들 말을 탈 줄 알아야 하지 않나요?”
“말을 타지 못하면 기사라 할 수 없을 겁니다. 검만큼이나 중요한 덕목이기에.”
“아······.”
안타까운 한숨인지 아니면 짓궂은 감탄사인지 모를 소리가 알리시아의 얇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역시 신께서는 모든 것을 나눠주지는 않으시네요.”
“······자야르 경의 고민이 느껴지는군요.”
잠시 창밖의 풍경을 보며 눈앞에 수많은 고민거리를 잠시 외면한 알리시아는 실로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저 멀리 보이는 저택의 정원에서 마치 로데오를 하듯 휘청거리는 소년의 모습이 그녀에게 안식을 주고 있었기에.
용케 버티고는 있었으나 기어이 소년이 말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
“······비싼 말이면 된다며?”
“저번에는 분명히 탔는데······.”
지친 말과 땅바닥에 굴러 엉망이 된 소년과 그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마구간지기.
그들 모두가 안대를 만지작거리는 기사를 보며 주눅 들어있었다.
“비싼 말이면 할 수 있다며?”
“좀 더 비싼 녀석이어야 하나······.”
뻔뻔한 블라드의 대답에 참고 있던 분통이 터지고만 자야르는 지체 없이 자신의 종자를 후려갈겼다.
“컥!”
“말을 내뱉을 때는 언제나 생각이라는 것을 해라!”
자야르의 일격에 다시 한번 땅바닥을 구르는 블라드였으나 이제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해진 낙법으로 곧장 자세를 회복할 수 있었다.
“분명히 저번에는 탔거든요. 고트가 몰긴 했는데.”
“네, 네. 자야르 님. 분명히 탔었습니다.”
자신들은 잘못이 없다는 양, 앵무새처럼 옹알거리는 두 녀석을 보며 자야르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붙잡은 채 고민에 빠져들어 갔다.
‘이건 심각하다.’
말을 타지 못한다길래 직접 가르치면 될 줄 알았더니 문제는 이 녀석이 아니었다.
히이이잉-
소년의 말처럼 정말 말이 문제였다.
정확히는 말들이 블라드만 보면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마치 두려운 것을 앞에 두고 있다는 듯이.
심지어 자신의 말조차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합니까?”
“······내일도 하지 말고.”
자야르의 대답에 블라드는 불만스러운 눈빛을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뭐?”
“······.”
타고난 성정인지 아니면 자라온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가지고 있는 향상심과 승부욕이 강한 소년은 얻어맞거나 말거나 어떻게든 기마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솔직히 말해서 이대로는 도저히 면이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러를 사용할 줄 아는데 말은 타지 못한다?
이것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이란 말인가.
“그러면 말 타는 것은 언제 배웁니까.”
“일단은 유보다.”
“여기에 와서 참 많이 듣는 단어네요.”
“불만이냐?”
“조금은요.”
도저히 자신의 앞에서 겁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 종자를 보며 자야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루기 어려운 녀석이라 생각하면서.
“스투르마에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오늘은 이만한다.”
제 할 말을 내뱉고 단호히 돌아가는 자야르를 보며 소년과 마구간지기는 그저 씁쓸한 기분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말들이 싫어하는 것 같은데.’
갈수록 악화하는 상황을 보며 속이 복잡해지는 것은 블라드도 마찬가지였다.
“얘로도 안되면 어떡하냐?”
“······소 같은 걸 타보는 건 어때? 걔네는 말보다는 둔감한 녀석들이라.”
이 새끼가.
고트의 어이없는 대답에 블라드가 푸른 눈알을 부라렸다.
“입이 뚫려있다고 지껄이면 그게 다 말이야?”
자신에게 소를 타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 고트를 보며 블라드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말할 때는 생각이라는 걸 좀 해.”
“······방금 어디서 들어본 말 같기는 한데.”
자야르에게 받은 화를 자신에게 풀어내는 흉악한 녀석을 보며 고트는 재빨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참아주고 받아주마.
나는 너한테 크게 걸었으니까.
······참을 수밖에 없기도 하고.
“대장, 나는 그럼 마구간으로 갈게. 너한테는 불친절해도 이 말께서는 굉장히 귀한 분이시거든.”
“둘 다 꺼져버려. 내 앞에서 사라져.”
히이이잉-
이제야 블라드에게서 떨어질 기미가 보이자 자야르의 말은 기뻐하며 이빨을 드러내며 웃기 시작했다.
“······.”
비록 스승의 말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며 얄미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간다! 몸조리 잘하고!”
푸히히힝-
뒤에서 블라드가 이를 갈거나 말거나 자야르의 말과 바예지드의 마구간지기는 매우 기쁜 발걸음으로 블라드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대체 뭐가 문제야!”
블라드는 둘의 뒷모습을 보며 분통을 터트리며 땅을 걷어차고 말았다.
꾸중을 들을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자야르에게 부탁했건만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기세가 너무 드센 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런 부분은 인간들보다는 동물들이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는 하지.]목소리의 대답에 블라드는 검을 짚으며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기세를 다루는 방법을 알아야지.]“알려줘요.”
[심상 세계를 다루는 방법의 하나기에 결국은 오러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알아야 기세도 제어할 수 있을 거다.]“······.”
목소리의 대답에 블라드는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비록 그날의 결투장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워낸 블라드였지만 의식적으로 오러를 사용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르고 있었다.
제대로 불러내기도 힘들었을뿐더러 설사 불러냈다 할지라도 미약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실전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숙달과 수련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걷기도 전에 뛰지 말라 했던 자야르의 말을 생각해라. 모든 일은 조급해해서는 안 된다.]“알았다구요.”
검술이나 오러나 결국 기본기를 다져야 한다는 두 스승의 말을 곱씹으며 블라드는 먼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더는 여기서 뭘 할 수가 없으니 마지막으로 한번 가보기나 해야겠네.”
한참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려는 소년은 꼭 자야르와 목소리에게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요제프 바예지드.
고귀한 피로써 군주의 자질을 보장받은 청년 또한 블라드에게 훌륭한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최악을 생각하며 최선의 것을 탐하려는 그의 움직임은 블라드에게 있어 많은 깨달음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기회와 가능성을 소중히 대하는 요제프의 태도는 분명 소년의 시야를 넓혀주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챙길 건 챙겨보자고요.”
[고맙다.]요제프에게 배운 대로 블라드는 마지막 남은 자유시간을 이용하여 다시 한번 언덕 위 나무로 향하기로 했다.
소년의 세계에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덕을 감싸고 있는 따뜻한 기운 정도는 느낄 수 있었기에.
※※※※
“알리시아 님과 또 마주치지는 않겠죠?”
[집무실에서 이곳이 있는 쪽으로 창이 달린 것 같기는 하던데.]“빨리 가죠.”
알리시아와의 불편한 만남을 피하기위해 블라드는 발을 바삐 움직이며 언덕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분명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임을 자각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으니까.
‘그래도 내가 이 정도까지 해줬는데.’
그리고 설사 발각된다고 할지라도 조금은 뻗대볼 요량인 블라드였다.
소년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알리시아는 차갑게 누워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정도는 들켜도 봐주지 않을까.
그녀의 집무실에서 이곳이 보인다는 말을 들은 블라드는 다시 한번 기도하는 모양새로 나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는 몸에 익고만 자세였다.
“옛 친구인 것 같던데 말 좀 잘해봐요.”
[음. 뱀이 알아보다니. 솔직히 나도 충격적이었다.]목소리는 블라드의 말을 들으면서도 솔직히 자신이 기억을 떠올릴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얀색 뱀이 주는 기운은 분명 낯익은 것이었으나 강렬하게 와닿지 않았기는 때문이었다.
[······그래도 인연은 있었겠지.]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었으니.
목소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년이 뜬 왼쪽 눈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펼쳤다.
다채로운 색깔로 화려하게 꽃을 피운 소년의 세계가 저물고 강렬하게 요동치는 하얀색의 세계가 의식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그 세계는 소년의 세계에 뿌리를 이루고 있는 색깔과 같은 색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얀색의 세계가 온전히 소년의 눈 안에 자리 잡은 순간.
[······!]“······!”
소년과 목소리. 둘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목소리의 세계로 바라본 언덕 위의 나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쉬이이익-
어느새 나무에서 내려와 자신들의 바로 앞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에.
숨결마저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거리였다.
“······친구 맞죠?”
[······그랬으면 좋겠는데.]마치 자신들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나무에서 내려온 뱀은 조금씩 몸을 비틀며 블라드가 서 있는 곳을 감싸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지 않기에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마치 신난다는 듯한 느낌으로 블라드의 몸을 돌돌 마는 중이었다.
“이건 반갑다는 인사죠?”
보이지는 않았으나 분명 존재하는 뱀은 어느새 소년을 빈틈없이 감싸 안은 채 꼬리를 흔들어댔다.
만약 이 상태에서 조금만 힘을 준다면 블라드는 아마 형체도 찾기 힘든 곤죽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소년과 목소리는 놀랐을지언정 위협은 느끼지 않고 있었다.
자신들을 대하는 뱀의 모든 것이 따뜻했으니까.
말로는 통하지 않을 어떠한 감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
소년을 감싸 안은 데 성공한 뱀이 고개를 높게 빼 들고는 이리저리 까딱이고 있었다.
마치 춤을 추는 모습 같았으나 그 큰 몸으로 움직이고 있었음에도 전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이건?”
[정령을 이해하려 하지 마라. 저것들은 세계의 또 다른 모습이니까.]인간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잣대로 세상 모든 것을 해석하려 하지만 필멸자의 가녀린 영혼만으로는 세계를 둘러싼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신이라는 존재에 의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소년조차도 지금 상황에서만큼은 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으니까.
쉬이이익-
춤추는 뱀의 움직임에 맞춰 언덕 위에서부터 무언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환한 낮이었음에도 떠오르는 푸른 빛들은 마치 밤에나 볼법한 반딧불과도 유사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이 뱀에게로 날아오고 있었다.
[······이것들 왜 이러는 거야?]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했던 목소리조차도 지금의 상황에 대해 당황하고 있을 때쯤.
쉬이이익-
뱀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
그와 동시에 소년의 검회색 갑옷이 푸른 반딧불의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블라드는 멍하니 서서 빛나고 있는 자신의 갑옷을 바라보았다.
[가호(加護)다.]목소리의 말과 함께 어느새 자신의 세계로 돌아온 블라드는 앞을 바라보았다.
뱀이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세계에서도 보이고 있었다.
쉬이이익-
소년의 갑옷이 빛나는 것을 보며 웃고 있었다.
소년을 그리고 목소리를 축복해주었다.
자신의 따뜻함으로.
“······.”
블라드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갑옷에서 청량한 레몬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