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37
주어야 할 것과 받아야 할 것들 (3)
불청객들은 모두 떠나고 이제 저택에 남아있는 손님들은 오직 요제프의 사람들 뿐.
진정한 손님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은 오직 북부에서 온 바예지드 뿐이었으니 알리시아는 그들이 떠나는 날에 맞추어 환송식을 마련해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크게 연회라도 베풀어주고 싶었지만 하이날 가문은 이제야 겨우 깨어진 균열을 맞추는 시기.
그 사정을 알고 있던 요제프가 미리 살짝 말을 흘림으로써 알리시아는 부담 없이 지금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바예지드의 종자인 쇼아라의 블라드는 알리시아 님 앞으로 나오시오.”
아직 붕대를 감고 있는 던칸의 부름에 따라 소년은 조금은 당황한 모습으로 앞으로 나섰다.
요제프나 자야르. 둘 중 누구에게도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릎을······아니 왼쪽. 그렇지, 꿇으시면 되오.”
던칸의 고갯짓을 보며 엉성하게나마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는 블라드.
여전히 순진해 보이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알리시아는 짓궂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괴롭혀보고 싶었으나 자리가 자리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쇼아라의 블라드. 당신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겠지요.”
오직 알리시아와 던칸만이 상의한 자그마한 수여식에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의 명예를 지켜주었고 사기극으로 점철된 결투를 밝게 비춰주기까지 하였으니 어떠한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고 할지라도 모자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야르를 빌린 대가는 이미 넉넉하게 치렀다.
그러나 소년에 대한 대가만큼은 직접 넘겨주고 싶은 것이 알리시아의 심정이었다.
그만큼 극적이었으며 감사했으니까.
알리시아는 자신의 품 안에서 고이 접어둔 손수건 한 장을 꺼냈다.
보랏빛 천에 금실로 무언가가 수놓아진 손수건.
겉으로만 보아도 흐트러짐 없이 빛을 반사하는 것이 아주 고급의 비단으로 만든 손수건임이 틀림없었다.
“기사는 아니었지만, 기사보다 더 명예로웠던 그 날의 당신에게 제 이름을 맡기고 싶습니다. 쇼아라의 블라드.”
“······!”
하이날의 가신들이 소년에게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을 건네주는 알리시아의 모습에 경악하고 있었으나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요제프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리시아가 어떠한 의도로 블라드에게 손수건을 건네려 하는지 눈치챘기 때문에.
머리가 좋은 여자다.
바예지드와 하이날의 관계를 블라드라는 유망주를 공유함으로서 증명하고자 하는구나.
감사함을 표시함과 동시에 이득도 가져가려 하는 그야말로 최선의 발버둥이다.
‘그렇다면야.’
요제프는 자신도 모르게 갑작스레 마련한 수여식에 불만을 표시할 만도 했으나 적어도 손해가 되는 일은 아니었기에 이 일이 진행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만약 조금 후에 어떤 일이 발생할 줄 알았다면 당연히 말렸을 테지만.
“······.”
자신에게 손수건을 건네려는 알리시아를 보며 블라드는 생각했다.
‘귀족이 주는 것은 받아야 한다. 그것이 예의다.’
자야르가 했던 이 말은 블라드의 머리 깊숙한 곳에 박혀있었다.
‘또 얻어맞을 수는 없지.’
바예지드 저택에 처음 도착했을 때 루트거가 건넨 땅콩을 받지 않아 얼마나 곤욕을 치렀던가.
그러니 지금의 손수건도 받지 않으면 분명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자야르에게 또 얻어맞을지도 모르고.
“감사합니다. 알리시아 님.”
그렇기에 받기로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따라 공손하게 두 손으로.
“······!”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었기에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손수건을 두 손으로 받아든 블라드를 보며 알리시아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
점점 얼굴이 빨개져 가는 물빛 머리의 여인을 보며 블라드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쯤.
“그거, 그러면. 그러는 거 아닐세.”
그녀의 옆에 있던 노(老)기사 던칸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지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고.
“아, 아아. 그렇군. 몰랐겠어.”
요제프조차 탄식을 내지르며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뒷골목에서 자라왔던 소년은 귀족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잘······쓰겠습니다?”
고작 손수건으로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 블라드는 그저 멀뚱히 눈알을 굴릴 뿐이었다.
레이디 알리시아의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
레이디가 자신의 명예를 상징하는 손수건을 건네주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검 끝에 매달아 주는 방법.
그리고 손에서 손으로 건네주는 방법.
블라드는 방금 후자의 방법으로 그녀의 이름을 받았다.
※※※※
데어마르를 벗어나 스투르마로 돌아가는 길.
“······.”
마차 안에 앉아있는 요제프는 아까부터 계속 피식거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황당함이었다. 물론 나의 잘못이 크겠지만.”
“······죄송합니다.”
이제야 사정을 알게 된 블라드는 마차에 올라탄 순간부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할 말이 없는 실수였기에.
“저번에 땅콩도 그렇고 대체 너는 뭘 받을 때마다 그렇게 난리를 부리는 거냐?”
마차와 나란히 말을 타고 달리던 자야르는 기다렸다는 듯 블라드에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냥······주길래.”
“무릎까지 꿇고 있었는데 그걸 굳이 엉금엉금 기어가 두 손으로 받아 챈 이유가 뭐야?”
“······귀족이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으니까?”
“하아······.”
자야르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말 위에서 크게 탄식을 내지르고 말았다.
애초에 몰랐다는 데 뭐라 할 수가 없고.
자신이 하라는 대로 했다고 하니 그것 또한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본인의 속만 타들어 갈 뿐이었다.
무엇을 하나 제대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고통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자야르는 이제야 깨닫고 말았다.
“그냥 앞으로 귀족들한테 뭘 받을 때는 나를 먼저 봐라! 알겠냐!”
“······.”
자야르의 호통에 블라드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레이디의 이름이 적힌 손수건을 받는다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명예를.
또 하나는 사랑을.
명예를 받는 검사는 검집을 내밀어 여인이 직접 손수건을 매달아 건네준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건네주는 경우도 있을 만큼 담백한 행위이기도 했다.
그러나 손에서 손으로 받는 경우라면 달랐다.
그것은 오직 정인(情人)을 위한 응원의 의미였으니.
“이 근방 음유시인들은 당분간 밥벌이 걱정은 없겠군.”
요제프는 요근래 가장 오랫동안 웃고 있었다며 얼얼해진 얼굴 근육을 손으로 피기 시작했다.
“뭐 어쨌거나 준기사의 위치에 오른 것을 축하한다.”
“준기사요?”
블라드는 요제프의 말에 들어가 있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되물었다.
“그래, 너는 고귀한 귀족인 레이디 알리시아의 명예를 받은 남자니까. 적어도 그녀의 이름이 통하는 곳에서는 기사와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거다.”
기사라니.
기사라니!
방금까지만 해도 의기소침해 있던 블라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푸른 눈동자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뭐 이제야 막 남작이 되었으니 그녀의 이름으로는 데어마르 정도에서나 인정받을 수 있겠지.”
“아아······.”
그래서 기사가 아니라 준기사라 하는구나.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것만 같던 감정들이 급속히 식어 들어갔다.
‘하긴 이렇게 쉽게 될 리가 없겠지.’
그동안 본의 아니게 굉장한 기사들만을 만나왔던 블라드였기에 지금 자신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준다고 할지라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은 아직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서 있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쩝.”
블라드는 괜히 아쉬운 마음에 알리시아가 건네준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럽게 와닿는 감촉이 꽤나 만지기 즐거웠다.
“받을 때는 실수로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의미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절대로 그 손수건은 잃어버리지 말도록 해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블라드의 순수한 질문에 요제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오직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거다. 네가 두 손으로 받음으로써 그런 일이 되어버렸지.”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겠네요.”
요제프의 대답을 들으며 블라드는 알리시아가 준 손수건을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다.
취급을 소중히 해야 하는 물건을 받은 것은 난생처음이었기에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뭐 마무리는 황당하긴 했지만 네 덕분에 일이 잘됐으니 이제 이건 필요 없겠군.”
요제프는 블라드의 앞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어 흔들었다.
깨알 같은 글씨들이 쓰여 있는 종이였다.
“다시 한번 너의 수고에 감사하마. 덕분에 일이 복잡해지지 않았어.”
“이것이 무엇입니까?”
블라드의 물음에 요제프는 이제는 쓸모없어진 종이를 건네주었다.
사건의 본질을 설명해줌과 동시에 소년이 어떤 위치를 맡고 있었는지 알려준다.
이것은 요제프가 블라드를 위해 해주는 수업 같은 것이었으며 또한 나름의 포상이기도 했다.
“결투에서 질 경우를 대비한 물건이지.”
“······아.”
요제프가 건네주는 종이를 받으며 블라드는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요제프는 십 분만 버텨 달라고 했다.
자신이 준비한 일이 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차······용증?”
하벤 덕분에 글자 정도는 깨우친 블라드가 더듬거리며 종이에 쓰인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그래도 용케 글자를 배운 것은 칭찬하마.”
“감사합니다.”
블라드는 요제프의 칭찬에 대답하며 차용증에 적힌 맨 밑의 서명란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내렸다.
‘알리시아?’
돈을 빌리는 사람은 알리시아 하이날.
액수는.
‘일만 골드!’
경악할 만한 액수를 발견한 블라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건너편에 앉아있는 그의 주군은 까맣게 웃고 있었다.
“결투에서 졌을 경우 그녀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실제로 빌리지는 않았지만 말이지.”
블라드에게서 종이를 빼든 요제프가 설명을 이어갔다.
“모든 지위를 잃게 되었을 경우 알리시아는 스스로를 내주기로 했었다.”
알리시아가 엔데르에게 패했을 경우 그녀는 아마 죽고 말았을 것이다.
엔데르의 입장에서는 조금의 싹이라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기에 요제프는 자신이 먼저 그녀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명분을 세워놨다.
그리고 그 명분을 실행할 수 있을 만한 강제력까지도.
“알리시아······님을 굳이 데려올 이유가 있습니까? 결투에 지게 되면 계승권을 잃게 되는 것 알고 있었는데요?”
왠지 이름을 부르면 괜히 애틋해질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소년이 물었다.
“그렇긴 하지.”
요제프는 차용증이었던 종이를 다시 품에 넣으며 말했다.
“그러나 명분이라는 것은 잿더미 속에 숨겨져 있는 불씨와도 같아서 바람만 잘 만난다면 얼마든지 살릴 수 있는 것이거든.”
엔데르가 하이날 가문의 새로운 남작이 되었다 할지라도 알리시아라는 존재가 바예지드의 손에 있다면 큰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명분이란 그런 것이니까.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렇군요.”
조금이나마 귀족의 세계를 이해한 소년은 감탄했다.
어째서 귀족들이 명분을 따지며 살아가는지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그러면 제가 결국 파블로 경과 다시 결투를 붙을 수도 있겠군요?”
“······그래?”
블라드가 방금 배운 바에 따르면 아직 엔데르가 살아있으니 계승권의 불씨는 살아있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아른슈타인의 파블로와 맞붙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요제프에게 물은 블라드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어째서인지 미적지근한 반문일 뿐이었다.
요제프의 반응에 블라드가 의아해할 때쯤 순간 자야르가 창밖에서 불쑥 말을 걸어왔다.
“요제프 님. 신원미상의 인원들이 저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옷 색깔은?”
“검은색 옷에 팔뚝에는 푸른색 스카프를 매고 있습니다.”
자야르의 보고에 요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했다.
“좋다. 신호를 보내봐라.”
“네.”
요제프의 명을 들은 자야르가 보르단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삐이이익-
늙고 뚱뚱한 기사가 호각을 꺼내 있는 힘껏 불기 시작했다.
얇고 가느다란 소리였기에 오직 훈련받은 자들만 알아챌 수 있는 그런 소리였다.
삐이이익-
혹은 청각이 예민한 블라드 정도나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이기도 했다.
“화답이 왔습니다.”
“그래. 결과적으로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말았군.”
“······?”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 블라드가 멍청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을 때.
저 멀리서부터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길목을 지키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다가온 남자들.
“정당한 대가를 받아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요제프 님.”
“수고했군.”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아무런 제지 없이 마차로 다가와 요제프에게 검은색 보따리를 건네주며 물었다.
“이놈입니까?”
“그래.”
“벌써 근방에 소문이 다 나 있더군요.”
“나중에라도 좀 귀여워해 주게.”
처음 본 낯선 사내가 요제프와 스스럼없이 대화하자 대충이나마 아군이라는 것을 눈치챈 블라드였으나 긴장된 표정만은 숨기질 못하고 있었다.
“······.”
이제야 자신만의 세계를 피워낸 블라드.
그렇기에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이 깃든 소년에게 있어 눈앞의 남자는 충분히 경계할만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으니까.
얼굴에 가득 생겨있는 흉터와.
진득히 풍기는 위험한 냄새까지.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방심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같이 가겠나?”
“저희는 좀 더 빨리 복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쉽군. 수고에 감사하네.”
“바예지드의 검으로서 임무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흉터투성이의 남자가 보내는 신호에 따라 검은 옷을 입고 있던 사내들이 정련된 움직임으로 우르르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절도 있는 모양새가 마치 군대와도 같아보였다.
“흐음. 결투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아쉽게 되었다.”
“네?”
한참 바람같이 다가와 갑작스레 떠나는 남자들을 보며 블라드가 정신이 팔려있을 때쯤 요제프는 검은 옷의 남자가 준 보따리를 열어보고는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너의 레이디를 다시 보려면 아무래도 결투 말고 다른 핑계를 대야 할 것 같은데.”
“······.”
블라드는 요제프의 농담 속에 담겨 있는 서늘한 무언가를 느꼈다.
뒷골목에서 익숙히 느끼고는 했던 그런 감각이었다.
블라드는 조심스레 요제프가 건네준 보따리를 열어보았다.
축축한 기운과 함께 느껴지는 익숙한 냄새.
“······그렇겠네요.”
소년이 열어본 검은색 보따리 안에는 귀족의 세계가 담겨 있었다.
냉혹하고.
잔인하며.
또한, 용서 없는 자들의 세계.
바예지드를 농락한 남자 엔데르.
그가 그곳에 있었다.
차마 감지 못한 눈을 부릅뜬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