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38
휴가 같지 않은 휴가 (1)
바예지드 백작령의 주도(主都)인 스투르마.
그곳에 있는 거대한 저택에서 머리가 반쯤 하얘진 남자와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순례자의 일행이 저희 스투르마를 지나친다고 합니다.”
“마중해야겠는가?”
페테르의 질문에 조언자 라그무스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조용히 지나쳐 용의 흔적을 보고 가신다고 하더군요.”
“매우 고전적이군.”
라그무스의 말을 들으며 페테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신의 목소리들이라니.
실로 오랜만에 신실한 순례자들을 보는구나.
“······그들 모르게 챙겨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자격이 있는 것들은 마땅히 누릴 권리가 있다.
페테르의 성향과 성격을 잘 알고 있던 라그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하겠노라 대답했다.
“그리고 내 둘째 아들과······블라드.”
그리고 여기 또 다른 자격 있는 자들이 있었다.
다행이게도 이들은 자신의 안에 있는 자들이었으니 무엇을 챙겨준다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훌륭하게 일을 마쳤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늙은이의 가슴조차도 뛰게 만드는 단어가 보고서에 들어있더군요.”
“음.”
라그무스의 말을 들으며 페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드마스터의 첫 번째 규율.
매우 오랜만에 듣는 그리운 단어에 페테르는 진심을 담은 미소를 지었었다.
“요새같이 기사를 귀하게 키우는 시기에는 보기 힘든 장면이었을 텐데.”
“그 자리에 있으셨다면 정말 좋으셨겠지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페테르는 라그무스의 말에 동의했다.
기사란 귀중한 존재이며 또한 많은 자원과 투자가 필요한 전략 병기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가문들은 처음부터 검증된 고귀한 핏줄, 혹은 특출난 재능을 지닌 자들을 선별해 기사를 만들기 위한 엘리트 교육을 펼쳐왔다.
철저하게 관리되는 원석들.
그렇기에 소드마스터의 규율이 필요할 정도의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치닫지 않는 젊은 기사들과 어린 종자들.
몇몇 오래된 기사들은 그 사정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시대가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날 데어마르에서는 시대를 역행하는 한 줄기 빛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낭만 같은 것일 테다.
“좋아할 사람들이 몇몇 있겠군.”
“바예지드의 황금세대가 떠오르는군요.”
“늙은이들이 병아리를 위해 과자를 들고 오겠군.”
페테르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의자에 깊숙이 등을 묻었다.
“그렇다 해도 내 아들놈의 것이니 그 녀석의 허락이 필요하겠지.”
“그렇게 하신다면 요제프 님께서 좋아하실 겁니다.”
“······고민이 많군.”
페테르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숨을 헐떡이고 있길래 조금만 있으면 포기할 줄 알았더니 기어이 진흙탕을 뒤져 빛나는 것 하나를 주워왔다.
“고민이 많아.”
승리하기 위해서 진흙탕을 구르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 자신의 둘째 아들을 생각하며 페테르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어 갔다.
너무 못난 것들도 고민이지만.
너무 잘난 것들도 고민이었다.
결국에는 단 하나를 선택해야 할 테니까.
※※※※
“왜 계속 왼쪽 눈을 깜빡이고 있어? 돌멩이라도 들어간 거냐?”
스투르마로 돌아와 처음 하는 자야르와의 수련.
그곳에서 블라드는 부푼 꿈을 안고 자신의 성과를 확인하는 데 주력하고 싶어 했다.
“······내가 되지도 않는 거 하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그리고 그것은 스승이 가장 하지 말라는 행위이기도 했다.
소년은 방금 자야르가 내건 규칙을 무시했다.
“커억!”
블라드는 갑자기 달려드는 하늘을 보며 크게 구르고 말았다.
방금 얻어맞은 자야르의 일격은 언제나처럼 매서운 것이었으나 배려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일어나라.”
“끄으응.”
너무나 아프게 들어온 일격에 블라드는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나 자신을 바라보는 자야르의 눈을 보며 서둘러 자세를 고쳐잡았다.
분노든 열정이든 혹은 기대감이든 언제나 불타는 것들로 소년을 대했던 자야르.
“데어마르에서 어설픈 반격기를 성공하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나? 내가 말하는 것들은 무시해도 될 정도로 우스워진거냐?”
지금 그의 눈에는 차가운 실망감이 감돌고 있었다.
“······.”
기대하지 않으면 애초에 실망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소년에게 있어 실망감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어른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소년의 가슴을 아프게 찔러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자야르는 간결한 동작으로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억지로 하는 것이라면 오지도 말고 나 없이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찾지도 마라.”
“······.”
평소와는 다르게 욕지거리 하나 없는 말이었으나 블라드는 차라리 욕을 먹는 것이 나을 것만 같았다.
멸시와 모멸, 그리고 하찮은 존재에 대한 조롱 같은 것들은 너무나 익숙했기에 아프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 자야르가 보여주는 실망감만큼은 소년의 가슴 깊숙한 곳을 헤집고 있었다.
얼음 같은 소년의 심장을 깊게 찌를 수 있는 것은 따뜻한 바늘의 끝이었으니까.
블라드는 따뜻한 것에서 비롯된 차가움을 느끼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가봐라.”
“······네.”
한번 결정한 것은 쉽게 되돌리지 않는 자야르의 성정을 잘 알고 있던 블라드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수련은 끝났다.
그것은 어설프게 오러에 의지하려 했던 소년의 태도 때문이었다.
소년은 조급함을 이기지 못했다.
[기본기부터라니까.]“······.”
목소리의 말을 들으면서 블라드는 침울하게 장식 없는 검을 집어넣었다.
[나라도 화를 냈을 거다.]자야르는 블라드가 오러를 발산한 직후부터 소년을 매우 민감하게 다루고 있었다.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분명 소년이 쌓아 올린 것들은 빛나면서도 대견스러운 것들이었으나 그것이 자리 잡은 곳은 바닷가의 모래사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언제든 큰 파도에 휩쓸려 사라질지 모르는 단단하지 못한 것들.
자야르는 소년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꺼내 보고 싶었을 뿐이라구요.”
[가능성의 발현이었을 뿐이다. 어서 잊는 것이 너에게도 좋아.]그리고 목소리 또한 소년의 그런 상태에 대해 걱정하는 중이었다.
모든 기사는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오러를 사용할 줄 모르는 기사들은 수준이 낮은 자들인가?
그것 또한 아니었다.
오러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다른 기사들에 비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의 발현일 뿐.
그것을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고 실전에서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만 진정으로 오러를 사용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검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오직 단단한 기반 위에서만 훌륭한 꽃이 피는 거다.]“······.”
그러나 목소리는 이해하고 있었다.
한창때의 소년이 빛나는 검을 손에 잡았는데 당연히 휘둘러보고도 싶겠지.
누구라도 그럴 테지.
[자야르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라. 네가 마땅치도 않았다면 화를 내지도 않았을 사람이다.]“알았어요.”
그러니 자신의 말을 이해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야 꽃을 피운 소년이 수없이 다가올 유혹들을 견디고 하늘을 향해 똑바로 고개를 들기를.
씁쓸한 기분이 위장을 타고 올라왔지만 블라드는 입술을 찌푸릴 뿐 주저앉지는 않았다.
오늘의 수련은 어차피 글렀고 텄고 하여튼 망했다.
망했으니 별수 있겠는가.
일단은 잊어야지.
좌절의 통 속에서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소년은 거짓된 감정에 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곳에서나 세상은 한 번 주저앉는 자에게 친절히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무릎까지 꿇리려 주저앉히는 것이 이 세상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온 소년은 세상의 그런 냉혹한 면을 잘 알고 있었다.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네.”
블라드는 금발 머리를 험하게 흐트러뜨리며 식당으로 나아갔다.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장식 없는 검을 차고 백작 부인이 준 셔츠를 입은 채 식당으로 들어오는 종자.
“······.”
“······.”
한 달에 가까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블라드에게 돌아온 반응은 어쩔 수 없는 침묵과 그리고 자그마한 경의였다.
소식 빠른 몇몇 종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가문을 통해 블라드가 데어마르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전해 들었다.
그렇기에 이곳에 있는 모두는 지금 있는 종자 중 가장 귀하고 뛰어난 사람이 누가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문의 위세가 좋고 나쁘고 신분의 격차가 높고 낮음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의 골목 싸움은 끝났다.
딛고 있는 세계가 다른 단 한 명의 등장으로서.
지금부터 이곳의 진정한 대장은 새롭게 굴러들어온 돌인 금발 소년이었다.
“왔어?”
“나 없는 동안 맞고 다녔냐?”
“아니, 아니야. 아무도 안 때렸어.”
포틀리는 식판에 담겨 있는 음식보다도 더 높이 쌓여있는 소시지들을 내밀며 블라드를 맞이했다.
“겁나 그리웠다. 이 고기들이.”
“많이 먹어.”
블라드는 포크를 들지도 않은 채 맨손으로 소시지들을 집어 들었다.
짭짤한 육즙과 함께 우울한 감정을 넘기는 데 성공한 블라드는 실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지.”
데어마르에 있을 때는 레몬소스로 만든 샐러드니 건강식 빵 같은 것들을 먹어왔었다.
분명 귀한 손님들을 위해 알리시아가 특별히 내놓은 것들이었고 요제프 또한 그것들을 매우 기꺼워하기도 했었지만 블라드로서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맛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맛이 없었다.
성장기 소년에게 고기만큼 맛있는 것은 없을 테니까.
“역시 맛은 짠맛이랑 단맛이지.”
“맞아. 그것이 진리지.”
블라드는 포틀리의 진심 어린 동조를 들으며 소시지를 크게 한 입 베어 물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
다들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알아?”
“대충은······.”
포틀리는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혹시라도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이 대가를 바라는 얄팍한 호의로 비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래.”
블라드는 손에 묻은 육즙을 빨아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종자들의 태도를 보니 왠지 모르게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앉아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그나저나 이번 휴가 때는 뭐할 거야?”
“휴가?”
포틀리의 입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튀어나오자 블라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몰랐어? 종자들은 이번 주에 다들 휴가를 받았어. 일 년에 두 번 정도 있는 정기휴가인데.”
포틀리를 포함해 이곳에 있는 모든 종자는 귀족 가문은 아닐지라도 귀한 집에서 보내온 자식들이었다.
그런 종자들을 세심히 다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기에 바예지드 가문은 쌓여있는 긴장과 피로를 풀 겸 종자들에게 정기적인 휴가를 주고는 했다.
“······나도 휴가가 있나?”
그러나 블라드는 갈 곳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운 곳은 있었지만,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각오를 해야 할 테니까.
잠시 멍한 눈빛이 된 블라드를 보며 포틀리가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집에 갈래? 우리 아버지가 정식으로 초청하고 싶으시다는데?”
“너희 집?”
집이 먼 몇몇 종자들은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는 대신 친구의 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또 다른 인맥의 장을 형성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한 번도 친구를 데려가 본 적이 없어서······.”
“실적이 없었구만.”
블라드는 포틀리의 사정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맥이라도 쌓으라며 어떻게든 종자로 밀어 넣었건만 돌아오는 것은 씁쓸한 소식뿐이었으니.
그렇기에 지금 세간이 주목하는 금발 소년에 대해 칸노르 가문의 가주가 가지는 관심은 비상했다.
가주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아비의 입장에서도 블라드라는 소년을 꼭 보고 싶어 하는 포틀리의 아버지였다.
“우리 집은 손님 대접은 확실히 하거든.”
“음.”
블라드는 포틀리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긴장의 연속이었던 데어마르에서의 임무였다.
이제는 소시지 말고 갓 구워낸 고기도 먹고 싶기도 했고.
“말을 찾는다며?”
“응?”
그리고 포틀리는 블라드가 고기 말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말했다시피 우리 집은 목축업과 축산업을 주로 하거든. 그 분야에서 북부 최고의 가문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근방의 말들은 우리가 수배할 수 있어.”
“······오.”
제법이다.
이것은 거절하기 힘들다.
“휴가가 있는지 물어나 보고······.”
“자야르 경의 말보다 혈통 좋은 녀석들도 몇 있다는데.”
“달라고 할게. 아마 받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야 요제프가 알아서 구해다 줄 테지만 미리 봐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남에게 받는 것보다 직접 보고 마음에 맞는 녀석을 찾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이고.
“윽!”
블라드는 장하다는 듯 포틀리의 뒤통수를 쳤다.
“좋아.”
포틀리가 당황해하거나 말거나 블라드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이것은 뒷골목에서 친한 사람들끼리만 쓰는 인사이기도 했으니까.
소년은 오랜만에 옛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