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41
달 없는 밤 (1)
고요하기만 한 아침의 수녀원.
창을 통해 비치는 햇살이 회색빛 돌로 만들어진 식당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바예지드 가문에서 이름을 날리는 종자가 있대.”
“데어마르에서 오러를 뽑아냈다며?”
비록 우중충한 회색빛 돌로 만들어진 수녀원이었으나 아직 수녀가 되지 못한 어린 소녀들의 지저귐 때문인지 분위기 자체는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수녀원 내부에 돌고 있는 소문 또한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종자가 엄청나게 잘생겼다는데?”
“금발에 푸른 눈이래. 어쩌면 귀족 출신일 수도.”
어린 소녀들의 분홍빛 상상을 자극하는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기에.
‘금발?’
잔뜩 웅크린 채 바닥에 솔질하던 붉은 머리 소녀는 옆에 있는 소녀들이 하는 말에서 그리운 단어를 들었다.
“젊은 나이에 오러까지 뽑아냈으니 분명 기사님이 되시겠지?”
“나중에 북부를 대표하는 기사가 될지도 몰라.”
‘······그럼 아니겠다.’
혹시나 싶어 귀를 쫑긋 귀울인 제미나였으나 이윽고 들려오는 허황된 이야기에 관심을 끊고 말았다.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기사를 꿈꾸던 소년.
분명 블라드와 가까운 단어들이 들려오고 있었으나 그 모든 것들이 합쳐서 들려오는 순간 가능성이 확연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뒷골목에서 겨우 빠져나간 그 녀석이 벌써 저렇게 잘나갈 리가 없지.
그저 건강히 살아만 있다면 좋을 텐데.
툭-
금발 소년을 생각하며 잠시 미소 짓던 제미나.
소녀의 옆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야 빨간 머리.”
“······.”
한참 떠들고 있던 소녀 중 한 명이 제미나에게 다가와 자신이 들고 있던 솔 하나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남은 건 네가 다 해. 우리가 이 정도까지 해줬으면 됐지?”
“그래 맞아. 너는 후원금도 안 내고 있잖아. 공짜로 밥 먹는 주제에.”
“그날 받아준 것만으로도 평생 일하며 갚아야지. 오히려 기회를 주는 우리한테 감사하라고.”
한 방 먹였다는 듯 꺌꺌 대며 웃는 소녀들.
그러나 제미나는 딱히 반응하지 않은 채 묵묵히 할 일을 다 할 뿐이었다.
‘맞는 말이지.’
소녀들의 말이 맞았으니까.
이곳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후원금을 내줄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그날 수녀원에서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인 것도 사실이었다.
적어도 지금보다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너는 여기서 평생을 보내야 하잖아. 나가서 할 것도 없고 딱히 꺼내줄 사람도 없으니까. 그러니 미리 여기 일에 익숙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
이 또한 맞는 말이었다.
제미나는 이곳에서 나간다 해도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둥지가 깨어진 것은 소년만이 겪은 비극은 아니었기에.
누군가와 마찬가지로 뒷골목에서 꿋꿋이 살아남은 소녀는 이런 괴롭힘이나 따돌림에 굴할 사람은 아니었으나 일단은 참아보기로 했다.
“그럼 우리 간다.”
“점심 전에는 다 해놔!”
평소의 성격같이 행동했다가는 수녀원에서 쫓겨나고 말 테니까.
그랬다가는 그날 밤 자신들을 위해 희생해준 마담 마르셀라를 볼 면목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미리 배워놓기를 잘했네.”
창관에서도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던 제미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식당에 홀로 쪼그리고 앉아 바닥을 닦아낼 뿐이었다.
그러나 닦아내도 닦아내도 지워지지 않는 그 날의 기억이 있었다.
자신들을 수녀원 담장 안에 밀어넣고 정작 본인은 머리채를 잡힌 채 어둠 속으로 끌려가던 여인의 모습이 그랬다.
그녀를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됐는데.
“흑······.”
그래서 소녀는 더욱 힘주어 솔을 밀어대었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밀어내고 싶었으니까.
커다란 눈 속으로 다시 눈물을 잡아 삼키는 소녀.
아직 채 자리 잡지 못한 소녀의 붉은 머리가 어깨 위에서 어설프게 찰랑거리고 있었다.
※※※※
“너 진짜 오러 써 본거는 맞아?”
“······.”
낭랑한 목소리였으나 정작 듣는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그리 반가운 소리는 아니었다.
그 목소리로 자신을 쉴 새 없이 갈궈댄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지치지도 않나?’
이리저리 흔들리는 달구지 위에서 간신히 자세를 잡고 있던 블라드.
그 옆으로 말을 몰며 끊임없이 말을 거는 여자가 있었다.
“어떻게 오러까지 뽑아냈는데 말을 못 탈 수가 있지? 순서가 바뀌어도 너무 바뀐 거 아냐?”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있을 수도 있지.”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거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 새까만 눈동자. 그리고 쫑긋거리고 있는 새까만 귀까지.
“뭘 봐?”
끌어올린 그녀의 입술 사이로 하얀색 송곳니가 비쳤다.
사람의 송곳니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날카로운 모습.
블라드는 저 송곳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들려오는 시비를 들으며 옆에서 루트거의 기사들이 실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마 자신은 땅콩 사건 이후로 이들에게 찍혀버린 모양이었다.
‘참자.’
그러니 참아야 한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어찌보면 자신이 초래한 일이기도 했으니까.
소년은 이런 비웃음 속에서 평생을 참아왔다.
‘되지도 않는 휴가를 와서 이 모양이지.’
그러나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한숨마저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현재 블라드와 포틀리는 루트거를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휴가를 보내러 왔다는 블라드의 말에 루트거가 같이 매사냥이나 가자며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안 따라오면 요제프 앞으로 땅콩을 두 상자 보내겠다.’
‘······.’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이었으나 전적이 있던 블라드로서는 어쩔 수 없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고기를 잔뜩 먹여준 칸노르 가문의 가주가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도 했고.
그의 입장에서는 포틀리와 루트거를 연결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테니까 말이다.
“수인족들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가?”
“혹시 지금 그거 종족차별이니?”
평범한 하녀 같았으면 닥치라고 조용히 일러라도 줬을 텐데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바예지드의 가주인 페테르의 옆에는 마법사이자 조언자인 라그무스가.
그리고 루트거의 옆에는 그녀가 있었다.
검은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그녀는 마법사였다.
“너무 긁지 마라. 도로테아. 빌려온 녀석이란 말이다.”
“저 자식이 저를 볼 때마다 똥 씹은 표정을 짓는다고요.”
“그렇게 괴롭히면 누구나 그래.”
자신을 대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루트거에게는 검은색 꼬리를 살랑거리며 대답하는 모양새가 블라드의 입장에서는 심히 보기가 좋지 않았다.
‘고양이 같은 년.’
하는 꼴도 그렇고 생긴 것도 딱 자신이 싫어하는 고양이 같아 보여 블라드는 그저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이쯤이면 되겠군.”
“주위가 탁 트여 있으니 어디든지 잘 보일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렇군.”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인지 루트거는 주위를 둘러보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
그저 주위를 살피고만 있었다.
정작 사냥에 쓸 매는 새장에서 꺼내지도 않은 채 말이다.
“저기 보입니다.”
“그렇군.”
마치 무언가를 찾기 위해 쉴새 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루트거와 그의 기사들은 마침내 목표했던 것을 찾았던 모양인지 손가락을 들어 그곳을 가리켰다.
‘음.’
블라드 또한 자연스럽게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살펴보았다.
비록 먼 곳에 있어 가물거리기는 했지만, 그곳에는 초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
사제들이었다.
“순례자의 일행을 보다니 운이 좋군.”
“그렇습니다. 이것 또한 인연일 것입니다.”
‘······일부러 찾아온 것 같은데.’
두런두런 말하는 루트거와 기사들의 대화를 들으며 블라드는 지금의 매사냥이 다른 목적이 있는 나들이임을 깨달았다.
“깃발을 들어라. 우리의 의도를 보여서 불안하지 않게 해라.”
“알겠습니다. 루트거 님.”
루트거가 눈짓을 보내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옆에 있던 기사 하나가 깃발을 꺼내 매 장대에 매달았다.
마치 그러려고 가져온 장대같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천천히 사냥감이나 찾아볼까.”
비록 사냥하겠다 말하고 있었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사냥할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저 아래 보이는 순례자들을 보호하듯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 걷고 있을 뿐이었다.
저 아래서 걷고 있던 순례자들도 루트거가 걸어놓은 깃발을 본 모양인지 자신들도 장대에 깃발 하나를 매달고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대에 높게 매달려 있는 문양.
그것은 블라드의 신분패에 새겨져 있는 문양과 같은 것이었다.
일행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블라드는 재빨리 달구지에서 뛰어내려 도로테아의 근처에서 벗어났다.
상대할 수 없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니까.
“어우. 멀미 나.”
“괜찮아. 블라드?”
마차도 아닌 잔뜩 흔들리는 달구지를 타고 와서 그런지 계속해서 가슴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토할 것 같아?”
“그렇지는 않고.”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 블라드는 목소리가 말해주는 대로 근처에서 풀잎을 하나 뜯어 입에 물었다.
[이 풀도 기억해둬라. 미약한 각성효과가 있거든.]‘진짜 뭐하던 사람이지.’
목소리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블라드는 새삼 놀랄 때가 많았다.
그가 가진 지식이나 식견은 요제프나 자야르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훌륭히 교육받은 귀족과 경험 많은 기사보다도 뛰어난 식견이라니.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목소리의 정체는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 생각한 블라드는 쓴맛이 나는 풀을 씹으며 저 아래 있는 탁 트인 초원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풍경만큼은 마음에 들었으니까.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탁 트여 있는 초원.
블라드는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지는 풍경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응?”
순간,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는 블라드의 시야로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어떤 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것들이었다.
두근-
“야생마 무리로군.”
루트거도 그것들을 발견했는지 눈을 찌푸리며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야생마 무리에게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멋진 광경이기는 했으나 루트거의 입장에서는 반갑지는 않은 것들이었다.
무언가를 호위하는 데 있어 갑자기 등장하는 돌발상황만큼 부담되는 것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왜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지?”
“······그렇습니다. 이맘때의 야생마 무리라면 오히려 북쪽으로 올라갈 텐데요.”
기사의 말이 맞았다.
날이 풀려 초원의 풀이 가득해지는 시기라면 초원의 동물들은 남쪽이 아닌 북쪽을 따라 올라가기 마련이었다.
이제야 막 고개를 내미는 어린 새싹들이 그곳에 있을 테니까.
그러나 야생마 무리는 북쪽이 아닌 일행과 순례자들이 있는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전력 질주를 하며.
두근-
야생마 무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블라드의 심장도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흐음······.”
블라드는 언젠가 느껴봤던 감각 같다고 생각하며 루트거처럼 언덕 위에 서서 뛰어오는 야생마 무리를 바라보았다.
생명력 넘치는 모습들.
불끈거리는 근육과 거침없이 초원을 내달리는 야생마들의 모습은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에게 감탄을 자아낼만하게 하는 것이었으나.
“······.”
지금 이곳에서는 야생마들을 보며 감탄하는 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것들이 어디로 움직이나 살펴볼 뿐이었다.
“점점 순례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움직임이 기이하게 급박합니다. 마치 뭔가에 쫓기고 있는 것만 같은······.”
두근- 두근-
멋대로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블라드.
“······?”
눈이 마주쳤다.
비록 형체조차 가물거릴 정도로 먼 곳에 있었으나 블라드는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는 무리의 대장 같은 녀석과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았다.
온통 새까만 녀석.
애초에 시선이 마주칠 수도 없는 거리였으나 분명 둘은 시선을 교환했다.
“······.”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었으나 블라드는 마치 그 녀석이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 느낌이었다.
“루트거 님!”
야생마들의 모습에서 수상한 기색을 감지한 기사 중 하나가 서둘러 땅을 짚고는 다급하게 루트거를 찾았다.
“무슨 일인가?”
“땅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두근-
시선을 마주한 소년도 알 수 있었다.
야생마들이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쿠르르르르르–
기사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지진과 같이 땅이 흔들리고.
저 앞에서 그 진동에 놀란 순례자들의 무리가 주저앉고 말았다.
크아아아아아-
지진과 함께 초원의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거대한 함성.
땅이 새까맣게 갈라지고.
그곳에서 입을 벌리고 있던 거대한 것이 튀어나왔다.
히이이잉-
기어이 따라잡히고만 현실에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던 새까만 녀석이 비통한 울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데스웜입니다!”
사나운 이빨에 의해 처참히 찢겨나가는 야생마들.
마치 비처럼 쏟아지는 가엾은 것들의 핏물들.
“······!”
소년의 심장만큼은 쉼 없이 쿵쾅거렸으나 전신을 맴돌고 있는 것은 뜨거운 피가 아닌 서늘한 감각이었다.
야생마의 무리는 도망치고 있었다.
도와달라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