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45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 (1)
“이 정도면······하이날 가문의 문장같아 보이나?”
오렌지빛이 감도는 햇살 아래서 초록 머리의 여인이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찌푸리는 여인의 인상을 따라 콧등에 얹어놓은 작은 안경이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시녀가 들어 올려주는 책을 자세히 살펴본 옥사나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천에 바늘을 가져다 대었다.
“이런 거 처음 만들어 봐. 사실 나도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가 만드시는 것만 봤었거든.”
“그만큼 귀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집중하기 위해 찌푸린 콧등과는 다르게 옥사나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가는 귀중한 전통 중 하나.
그것이 지금 고귀한 여인의 손끝에서 다시금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됐나?”
옥사나의 손끝에서 서서히 형체를 갖춰가는 하얀색의 나무.
야트막한 언덕 위에 심어진 하얀색의 나무가 고급스러운 자수의 모습으로 검은색 천 위에 새겨졌다.
“그러면 이제 다음 문장을 새겨주면 되려나.”
“여기······.”
“그건 됐구나. 머릿속에 확실히 박혀있으니.”
가문들의 문장이 그려진 책을 펼치려는 시녀를 제지한 옥사나는 새로운 실을 바늘에 꿰었다.
옥사나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녀가 지금 새기고 있는 자수는 그녀가 모를 수 없는 가문의 문장이었으니까.
다시금 찌푸려지는 인상 속에서 바늘 끝이 이리저리 휘둘러지고 있었다.
새롭게 꺼내든 천위에서 옥사나의 손끝으로 세워져 가는 굳건한 성벽.
그리고 그 위에 떠 있는 검 하나.
그것은 바예지드의 문장이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 모든 것이 멈춰있는 것만 같은 옥사나의 응접실.
햇살 사이로 보이는 자그마한 먼지들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공간에서 응접실 중앙에 홀로 꼿꼿이 세워져 있는 깃발 하나가 있었다.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채 오직 흰색의 배경만이 가득할 뿐인 깃발.
깃발이 머금고 있는 흰색의 배경은 마치 소년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세계와도 같은 색깔을 비추고 있었다.
노인과 소녀가 건네준 장식 없는 검.
사제가 증명해 준 신분패.
고귀한 레이디가 자신의 이름을 새겨 건네준 손수건.
그리고 가문의 문장들이 새겨질 흰색 깃발까지.
모두가 소년의 뿌리를 이뤄줄 것들이었다.
모두가 소년이 이뤄낸 것들이었다.
※※※※
해가 떨어진 초원의 밤.
아무리 여름에 가까워지는 날씨라 할지라도 아무것도 없이 뻥 뚫려 있는 초원의 밤은 아직은 추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기사들은 마차와 수레들로 벽을 세우고는 그 안에서 야영할 준비를 마쳤다.
야영하기 위해 준비하던 분주한 시간이 끝나고 잠시간의 휴식 시간이 찾아오자 기사들은 기사들대로 사제들은 사제들대로 모여 자신들만의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
그들 모두의 모습이 반가웠지만, 어디에도 동질감을 느낄 수 없는 소년은 아무도 없는 곳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는 자그마한 모닥불을 피워올렸다.
스르르릉-
곳곳에서 들려오는 사제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블라드는 장식 없는 검을 꺼내 들었다.
모닥불에 비치는 검의 표면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비록 상처들로 인해 모닥불에 반사되는 빛들이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었지만 말이다.
‘너도 고생 많이 했구나.’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색을 바라보던 블라드는 숫돌을 꺼내 장식 없는 검에 가져다 대었다.
스윽-스윽-
정성스레 장식 없는 검을 돌보는 소년의 모습은 저 앞에서 기도하는 사제들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어쩌면 소년은 장식 없는 검과 함께 기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소년과 검이 떠나온 곳에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숫돌로 검을 가는 소리가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우러졌다.
따뜻한 모닥불의 온기와 오랜만에 느끼는 혼자만의 평화에 소년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왜 혼자서 청승을 떨고 있나.”
“······루트거 님.”
술병 하나를 든 채로 블라드의 곁에 다가온 검은 머리의 청년.
루트거가 블라드가 만들어 놓은 자그마한 모닥불 앞으로 풀썩 주저앉았다.
“왜 혼자 있냐니까.”
“다들 바빠요.”
앞에서 다가오는 모닥불의 열기만큼이나 옆에서 말을 걸어오는 루트거에게서도 따뜻함이 느껴졌다.
“뚱뚱한 녀석은?”
“도로테아가 데려갔어요. 일 시킨다고.”
“안드레아 사제님은?”
“기도하세요.”
소년의 대답에 어깨를 으쓱한 루트거는 들고 있던 술병을 내밀었다.
“한 모금 할 테냐?”
“지금은 검을 손질하는 중이라.”
“또 거부하는군.”
“······.”
한참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기에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요제프의 집무실로 무엇이 날아올지 몰랐다.
“위스키네요.”
“귀족의 술이지.”
목구멍을 넘어가는 나무 향기를 느끼며 블라드는 조금은 묘한 표정으로 루트거를 바라보았다.
지금 소년의 혀끝에 감도는 술의 향기는 요제프가 건네주었던 그때의 술과도 비슷한 향이었기에.
아무리 같은 것을 놓고 다투는 사이라 할지라도 같은 피에서 비롯된 취향만큼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검은 이번에 돌아가면 한 번 손봐야겠군.”
“······그렇긴 하죠.”
루트거의 말에 블라드는 다시 한번 장식 없는 검을 모닥불에 비춰보았다.
실력 없는 대장장이가 뒷골목에서 만든 검.
누군가가 한평생 쌓아온 모든 것을 담아 때려 넣은 검은 여태까지 숱한 적들을 베어왔음에도 아직까지 굳건한 모습으로 주인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응?”
루트거의 말에 무심히 대답한 블라드는 다시 숫돌을 들어 묵묵히 장식 없는 검의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손잡이랑 검신의 결합 부분을 너무 제멋대로 만들었다고. 그래서 만든 사람을 찾아가지 않는 이상 아예 손잡이를 부숴야 날을 손볼 수 있을 거라고 그러더라구요.”
“주인을 닮아 제멋대로인 검이군.”
루트거는 투박하게 생긴 검을 보며 술병을 치켜들었다.
바예지드 가문의 대장장이가 좋게 말해주기는 했지만 결국은 너무 엉망으로 만들었기에 검신을 제외하고는 다 부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아마 그것이 늙은 대장장이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거 만든 사람을 찾아가서 고쳐달라고 해야죠.”
“그 사람이 어디 있는데?”
날카롭게 세워진 검날을 확인하기 위해 블라드가 검을 세로로 치켜들었다.
검날에서 반사되는 붉은색의 잔상이 소년의 눈가를 아프게 비추고 있었다.
잊어서는 안 되는 붉은색 머리카락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쇼아라요.”
“하긴 네가 맨날 쇼아라의 블라드라고 외치고 다니긴 했지.”
루트거가 그것참 잘 어울리는 호칭이라 말하며 위스키를 들이키며 말했지만, 소년은 그저 장식 없는 검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실력 좋은 대장장이가 손봐준다 했었지만, 소년은 거부했다.
이 검에 담겨있는 그 어떤 것도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 검에 새겨진 하나하나가 소년이 쌓아 올린 역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
루트거는 검을 바라보는 소년을 보았다.
많은 감정을 담아 검을 보고 있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가 조금씩 반짝이고 있었다.
이래서 그랬구나.
이래서 내 동생이 그렇게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녔구나.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루트거는 머리를 끄덕이며 술병을 들이켰다.
“······조만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네?”
소년이 반문했지만 루트거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간절히 바라면 누군가는 알아주는 법이지.”
“······?”
“여태까지 네가 잘살아왔다는 뜻이다.”
블라드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루트거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위스키의 알싸한 향뿐이었다.
“나는 내일 일을 준비해야겠군.”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돌아가는 루트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블라드.
“······.”
루트거가 떠나 다시 홀로 남은 모닥불 앞에서 블라드는 낡은 천에 기름을 먹여 마무리 손질을 하기 시작했다.
숫돌과 기름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검의 상처들이 안쓰러웠지만 언젠가는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장식 없는 검과 소년은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으니까.
소년이 조용히 결심한 초원의 밤.
저 위에 있는 언덕에서 밤하늘만큼이나 새까만 말이 모닥불에 앉아 있는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작은 빛이었지만 말은 소년이 만들어내는 색깔이 참 마음에 들었다.
※※※※
다음 날 아침.
푸른 초원을 달리고 있는 마차들.
그리고 마차들의 행렬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는 야생마 무리.
인간과 자연의 무리가 어우러져 초원을 달리는 모습은 분명 보기 힘든 광경일 것이다.
마차 안에 타고 있던 사제들도 그리고 마차를 호위하며 달리고 있던 기사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이었고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는 광경을 눈에 담기 위해 모두가 함께 달리고 있는 야생마 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금발 소년도 마차 창틀에 팔을 괴고는 가만히 밖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가슴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이상한 기분에 블라드는 괜스레 입술을 이리저리 찌푸리고 있었다.
블라드는 알고 있었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라는 것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듯이 새까만 녀석도 무리를 이끌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녀석이었으니까.
히이이힝-
무리에서 가장 앞서 달리고 있던 새까만 녀석이 투레질하며 서서히 멈춰서고 있었다.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던 대장이 정지하자 자연스레 멈춰서고마는 야생마 무리들.
여기까지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곳은.
점점 멀어져 가는 새까만 녀석을 오랫동안 담기 위해 블라드의 고개가 자연스레 옆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마중이라도 하듯 언덕 위까지 올라와 저 아래서 달리는 일행을 지켜보는 야생마들.
밤하늘보다 새까만 녀석의 눈동자가 소년의 푸른 눈동자를 가득 담고 있었다.
“······잘 가라.”
이별을 이야기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소년은 멋쩍게 손을 들고는 흔들어주었다.
누가 보기 부끄럽다는 듯 조그맣게 흔들어주는 작별 인사였지만 새까만 녀석은 볼 수 있었다.
히이이잉-
앞발을 치켜들며 행렬을 배웅하는 달 없는 밤.
마치 흔들어주는 손에 맞추어 앞발을 드는 것 같은 모습에 블라드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마차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깊게 교감했던 새까만 녀석.
인연의 깊이라는 것은 단지 같이했던 시간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별을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게.”
소년의 앞에 앉아 있던 사제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저 말일뿐이에요.”
“하하. 사람은 솔직해지기가 참 어렵지.”
안드레아는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성경을 펼쳐 들었다.
“우리의 삶은 이별과 만남의 연속일지니, 이별의 눈물로 흘리는 씨앗은 언젠가는 만남의 기쁨으로 돌아오리라.”
“······.”
소년은 사제가 읊어주는 성경 구절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적어도 자신을 위로해주려 꺼내든 말임을 눈치채고 있었다.
“내가 보아도 정말 멋진 인연이었으니 언젠가는 또 만나게 될걸세.”
“너무 늦으면 다른 말을 찾아야 해요.”
“그것 또한 인연이겠지.”
블라드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멋진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소년은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데스웜을 뒤에 매달고 푸른 초원을 달렸던 그때의 느낌.
여태껏 살아왔던 인생 중에서 가장 후련하고 강렬한 색깔들이 넘치는 그런 경험을 가져갔으니까.
휴가는 끝났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