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46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 (2)
성벽의 도시 스투르마.
그곳의 주인인 페테르 바예지드는 라그무스가 전해준 전보를 붙잡으며 한숨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라브노마 백작이 무너졌다라.”
페테르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 어루만지며 눈을 감고 말았다.
그동안 서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가이다르 백작 가문이 그만한 힘이 있었던가?”
“서부의 가문들이 연합했다고 합니다. 중과부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왕실은 어째서 가만히 있었지?”
“······저희로서는 중앙의 일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송구스럽다는 듯 말하고 있었으나 라그무스 또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북부는 그 어떤 지역보다 자신들만의 색깔이 강한 곳.
확실히 벽을 세웠기에 왕실이나 중앙권력에서 뻗어오는 영향력에서 자유로웠으나 그만큼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었다.
“······한 나라의 백작 가문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그것도 맹약을 지키는 가문일진대.”
아무리 제국이 헐거워지는 난세라 할지라도 지켜야만 하는 선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시작된 급류는 여태껏 세워놓았던 규칙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여태껏 억지로 틀어막은 만큼 거친 모습으로.
“······난세(亂世)로군.”
페테르는 지금의 전보를 통해 자신이 어떤 시대 속에 서 있는지 여실히 깨달았다.
새롭게 힘을 쥔 자들에게는 과거에 세워놓은 규칙이나 전통들이 자신들을 옥죄는 사슬과도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서부의 질서는 재편되었다.
오랫동안 서부의 지배자였던 라브노마를 무너뜨린 가이다르 가문에 의해서.
라브노마 백작 가문의 몰락은 어쩌면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첫 번째 봉화일지도 몰랐다.
“······이런.”
한참 상념에 빠져 있던 페테르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를 향해 다가갔다.
추적추적 내리는 늦은 봄비와 함께 저택으로 들어오고 있는 마차의 행렬.
저택으로 들어오는 순례자들을 보면서 페테르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순례자들이 아니었군.”
교회의 문양을 높게 든 채 바예지드 저택으로 들어오는 자들.
용의 흔적을 보기 위해 북부의 강철공(强鐵公)에게 간다던 그들은 순례자들이 아니었다.
오래된 맹약을 들고 온 피난민들이었다.
※※※※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블라드는 짐을 옮기고 있었다.
차가운 봄비 속에서 소년이 내뱉는 입김이 하얗게 올라오고 있었다.
‘분위기 묘하네.’
어젯밤까지만 하더라도 나름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웃음을 나누던 일행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갑작스레 결정된 강행군과 함께 행렬의 분위기는 굳어지고 그와 동시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예정보다 하루 더 일찍 스투르마에 도착한 블라드는 삼엄한 경비 속에서 사제들이 가져온 짐을 옮기는 중이었다.
“조심, 조심!”
“시종들은 빠져라. 이건 우리가 든다.”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자 블라드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기묘한 문장이 새겨져 있는 거무튀튀한 나무함이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소년의 시선을 잡아끄는 나무함이었다.
두근-
그러나 블라드는 관심이 가는 나무함에서 고개를 돌리며 서둘러 자리를 옮길 뿐이었다.
데스웜의 사체에서 흐르는 핏물이 비와 함께 섞여 흐르고 있었으니까.
‘영 안 맞나 봐.’
가슴이 뛰는 것은 아마도 피 냄새 때문일 것이다.
가끔 특정한 음식이나 향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자신의 경우에는 데스웜의 피가 그런 것이 아닐까.
“수고했다.”
바예지드 저택의 홀(hall) 앞까지 짐을 옮긴 블라드는 고개를 숙인 채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발자국만 더 걸어가면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거리였지만 블라드에게 허락된 곳은 여기까지였다.
조용히 수고했다 말하며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안으로 들어가는 루트거와 그의 기사들.
검은색 나무함을 둘러싼 채 그들을 뒤따르는 사제들까지.
모두가 그동안 함께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소년은 마지막까지 그들과 함께 할 자격이 없었다.
‘······.’
그들이 걸어 들어가는 틈을 따라 블라드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보았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공간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분함을 담아서.
“······!”
그리고 그곳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바예지드 가문에서 가장 높은 곳.
블라드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감히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거대한 세계가 이미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페테르의 존재감에 완전히 얼어버린 블라드는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시선을 피하지도 못한 채 굳어있었을 뿐이었다.
자격의 유무로 경계를 가르는 홀의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
“나는 가 볼게.”
“그래라.”
포틀리도 나름의 기대가 있었던 모양인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블라드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데스웜이라는 훌륭한 사냥감을 잡았으니 나름의 포상이나 자그마한 연회 정도는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스투르마로 돌아온 두 명의 종자들.
그러나 그들은 늦은 봄비가 전하는 무거운 느낌과 함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가는 포틀리의 뒷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찬밥신세라 할지라도 그나마 불러주는 사람이 있는 블라드가 조금 더 나은 처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블라드는 복도를 걸어가며 아까 잠깐 마주쳤던 페테르의 눈빛을 생각했다.
‘기억이 안 나네.’
강렬한 첫인상인 것만은 분명했지만 정작 눈에 남은 모습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페테르의 생김새보다는 그가 보여준 존재감만이 소년의 뇌리에 남아있었으니까.
“흠흠.”
굳이 기억하지 못한대도 상관없겠지.
백작님의 생김새야 지금 만나려 하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을 것이 분명하니까.
“저 왔습니다. 요제프 님.”
“들어와라.”
요제프의 집무실 앞에서 자신이 왔음을 알린 블라드는 익숙한 몸짓으로 문을 열었다.
비록 바예지드의 영광스러운 홀은 블라드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지만, 요제프의 집무실만큼은 기꺼이 품을 내주었다.
“하루 일찍 왔군.”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 대충은 들었다.”
옥사나가 특별히 자리를 보았다는 요제프의 집무실은 바예지드의 저택에서도 가장 오래 햇빛이 머무는 공간이었다.
블라드는 처음에 이곳에 들어왔을 때는 그 햇빛이 부담되었으나 이제는 나름 익숙해진 상태였다.
“몸은 괜찮나?”
“멀쩡합니다.”
“다행이로군.”
블라드는 담담히 질문하는 요제프와 그의 옆에 서 있는 자야르를 보며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혹시 날아올 질책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순례자들을 노리던 데스웜을 물리치는 데 힘을 보탠 것은 분명 칭찬받을 만한 훌륭한 일이었다.
그러나 요제프 개인의 처지에서는 조금은 불편한 일일 수도 있었다.
결국, 루트거를 도와준 모양새가 되어버렸으니까.
그와 경쟁 관계에 있는 요제프로서는 마뜩잖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왜 그렇게 보지?”
그러나 요제프는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서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블라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질책받지 않았다는 것보다는 자신이 생각했던 요제프의 모습 그 자체였기에 안심한 것이었다.
“몸은 괜찮다니 되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추스르는 것이 좋겠군.”
한참 서류를 뒤적거리던 요제프가 고개를 들어 블라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쇼아라의 뒷골목에 대한 사정은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말이지.”
블라드는 갑자기 뒷골목 이야기를 꺼내는 요제프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직 간의 항쟁은 조직원 모두가 죽거나 항복할 때 끝난다고 들었는데 맞나?”
“······네. 아마도 그럴겁니다.”
블라드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했다.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자신의 가장 여린 부분으로 들어오려 하는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는 조금 움츠러들고 말았다.
“그래서 편지도 보내지 못했었나?”
“무슨 편지 말입니까.”
“수녀원에 있는 자네의 연인에게 말이지.”
“······친구입니다.”
“뭐 어쨌거나.”
블라드의 대답을 들으며 요제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쇼아라에 있는 사람들이 다칠까 봐 제대로 소식조차 보내지 못했던 그간의 사정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야.”
창가로 걸어가 뒷짐을 진 채 잠시 내리던 봄비를 지켜보던 요제프가 입을 열었다.
“배려해주고 싶었지만, 그것을 해결해주기 위해서는 시간과 실적이라는 것이 필요했다. 외팔이 잭이라는 자는 나름 가치가 있는 자였거든.”
블라드는 요제프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무리 뒷골목이라 하더라도 그곳 또한 바예지드 백작령에 속해있는 영역.
외팔이 잭이라는 사람이 뒷골목에서 날뛰기 위해서는 양지에 있던 권력자들과의 연결고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돈벌레라는 이명답게 많은 재력을 지닌 자였으니까.
비록 뒷골목 사람들의 눈물로서 비롯된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
블라드는 가만히 창가에 서 있는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옆에 걸려있는 자그마한 깃발까지도.
그동안 수없이 드나들었던 요제프의 집무실이었지만 여태껏 보지 못했었던 물건이었다.
‘저건?’
직사각형 모양의 하얀 깃발.
여태껏 보아왔던 깃발들과는 조금 작은 모습이 마치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을 것만 같은 크기의 깃발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요제프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너는 훌륭히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했구나.”
그 말과 함께 요제프가 자신의 옆에 있는 깃발을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네가 나를 위해 열심히 발버둥을 쳐줬으니 나 또한 약속한 대로 그에 대해 보답을 해야겠지.”
“······네?”
블라드는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요제프를 보며 아까 보았던 페테르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깃발을 들고 있는 요제프에게서 흘러나오는 기품이 그때의 존재감을 떠올리게 했다.
“······내 할아버지 대의 기사들은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것과 같은 깃발들을 들고 다녔다고 하더군.”
들고 있는 깃발을 오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요제프.
자신은 평생 지닐 수 없는 물건을 보며 요제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의 명예를 상징하는 깃발을 말이야.”
그러나 요제프는 선택한 사람이었다.
검과 깃발을 들 수 없으니 그것을 들고 있는 기사를 쥐겠노라고.
그리고 요제프의 눈앞에 그것을 할 수 있는 소년이 있었다.
“너는 너만의 깃발을 들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자격은 하이날과 바예지드가 보증한다.”
블라드는 놀란 표정과 함께 자신에게 건네지는 흰색 깃발을 바라보았다.
온통 비어있는 것 같이 보였으나 깃발 왼쪽 위에는 자그맣게 두 개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하이날과 바예지드의 문장이었다.
“하, 하지만. 저는 아직.”
“이것을 들고 너의 고향으로 가라.”
“······!”
요제프의 말은 들은 블라드는 벼락이라도 맞은 심정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있었다.
바라왔고 꿈꿔 왔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하리라 마음먹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오늘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레이디 알리시아에게 이름을 받은 자이자 바예지드 가문의 종자인 블라드는 깃발 아래서 당당히 고개를 들어라.”
요제프가 쥐여주는 깃발을 든 채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 소년.
그러나 표정은 멍했을지라도 소년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간절히 바라왔던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너는 그곳에서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던 너절한 것을 베고 진실로 자유로운 모습을 찾아 다시 내 앞으로 와라.”
블라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점점 뿌예져 가는 시선으로 들고 있는 깃발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약속한 대로, 모든 것은 바예지드가 후원한다. 쇼아라의 블라드.”
그날의 계약에서.
소년과 청년은 서로에게 주고받겠노라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지금 소년이 들고 있는 명예로운 깃발 아래 확인되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곳에서 너를 옭아매고 있는 악연을 끊어라.
그리고 너의 것을 되찾아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소년은 들고 있는 깃발을 꽉 붙잡았다.
두 손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