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47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 (3)
페테르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나무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나무함.
화려하다 해야 할지 기괴하다 해야 할지 모를 문양이 새겨진 나무함이었다.
“······라브노마 백작 가문만이 오직 서부에서 맹약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가문이었습니다.”
“이해합니다.”
안드레아를 비롯해 많은 사제들이 페테르의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 땅의 주인에게 많은 부담을 지워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기사들을 내어드리겠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성의로 맹약을 지켜드리리다.”
페테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사제들에게 말해주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지원을 해주겠노라고.
맹약의 증거인 용의 흔적을 옮기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이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준비가 될 때까지 손님의 자격으로 편히 있도록 하시오.”
고개를 숙이며 나가는 사제들을 보며 페테르는 그제야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저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서부지역의 지배자이자 맹약의 수호자였던 라브노마는 무너졌다.
그리고 사제들은 무너져가는 라브노마의 저택 안에서 옛 맹약을 끄집어내 자격 있는 자에게 향하는 중이었다.
“······.”
어찌할 수 없는 답답한 마음에 페테르는 잠시 걸음을 옮겨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곳에는 무겁기만 한 이곳의 공기와는 다르게 반가운 모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깃발이군.”
마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자그마한 깃발 하나를 매단 채.
페테르가 젊었을 적만 해도 자주 볼 수 있었던 깃발이었다.
“조금 쉬고 가도 되련만.”
“몸이 달아올랐겠지요.”
라그무스의 대답에 페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소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스로의 주인이 된 기사(Knight Banneret)들만이 들고 다닐 수 있는 깃발을 든 소년이 저택을 떠나고 있었다.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고향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
※※※※
오늘도 어김없이 쇼아라의 뒷골목을 헤매는 소년이 있었다.
뒷골목에서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는 사람들이긴 했지만, 소년은 그들보다는 조금 더 안 좋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다.
새까만 피부.
멸시와 차별의 대상인 검은 피부를 지니고 태어난 소년은 쇼아라의 가장 어두운 곳이라 불리는 뒷골목에서조차도 무시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이거 뭐 어디서 작업할 곳도 없고.”
검은 피부를 지닌 소년 네드.
눈을 떴으니 일어나야 했고 일어났으니 뭐라도 좀 먹어야 할 테지만 요즘 쇼아라의 분위기는 어디가서 한 끼 얻어먹기도 팍팍한 것이 현실이었다.
‘옛날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네드는 가만히 눈을 굴리며 뒷골목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동냥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녀석들은 아예 나자빠져 힘없이 눈알을 굴리고 있을 뿐이었고 그나마 일거리를 가진 사람들은 밤새워 일하고 있음에도 홀쭉해져 가는 볼을 보며 한숨지을 뿐이었다.
모두가 피를 빨리고 있었다.
황금을 탐하는 돈벌레한테.
“옛날이 좋았지······.”
나이에 맞지 않는 한탄을 하면서 네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어느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사람이 궁할 때는 언제나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이제 저기서 소매치기라도 했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지.’
네드가 보고 있던 건물은 장미의 미소였다.
무뚝뚝한 보스와 사람 좋았던 마담이 있었던 창관.
그러나 이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팔려 가고 말았다.
언제나 듣기 좋은 음악과 함께 창녀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장미의 미소는 지금은 그저 처량한 신음소리와 불한당들의 고함만이 가득한 곳일 뿐이었다.
이제 저곳에서 소매치기를 하다 걸린다고 할지라도 네드를 구해줄 금발 소년은 없었다.
‘음?’
옛일을 기억하며 현실을 한탄하고 있던 네드의 눈으로 뒷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보였다.
돈 좀 있어 보이는 뚱뚱한 남자와 용병 같아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쌓여있는 욕망을 해소하러 왔는지 곧장 창관이 있는 거리로 향하는 그들을 보며 네드가 혀를 살짝 내밀었다.
“······잘하면 되겠는데.”
용병처럼 보이는 사람이 경호원인 것 같아 보였지만 이 정도라면 위험을 감수할 만했다.
걸려도 죽지만 않으면 된다.
언제까지나 형에게 의지하며 살 수는 없으니까.
‘······.’
굶주림과 조바심이 어린 소년의 판단력을 흩트리고 있었다.
천천히 두 남자의 뒤를 쫓는 네드.
곳곳에 튀어나와 있는 잡동사니들로 능숙하게 몸을 숨기며 천천히 다가가는 소년의 모습은 충분히 칭찬해줄 만한 움직임이었다.
‘지금.’
하지만 네드는 언제 누군가가 그랬듯이 소매치기로 먹고살 실력이 안 되는 녀석이었다.
“······.”
바로 뒤에서 다가오는 검은 소년을 눈치챈 용병이 자연스럽게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점점 살기가 짙어지고 있었지만 네드는 느끼지 못했다.
집중력은 좋았으나 시야가 넓지 못한 것이 네드의 단점이었다.
뚱뚱한 남자에게 다가가려는 네드.
그런 네드를 보며 검을 뽑으려는 용병 사내.
다가오는 파국 속에서 오늘도 또 다른 끝이 뒷골목에 떨어지려는 순간.
“여전히 병신같이 구네.”
따악-!
순간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누군가가 있었다.
용병이 예측하지 못하게 사각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어와 바람같이 빠져나가는 사내.
“억!”
네드는 얼얼해진 뒤통수를 부여잡고는 빠른 걸음으로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를 보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금발.
거기다 눈에 익은 걸음걸이까지.
“뭐야?”
그러나 네드는 그 모습에서 예전 장미의 미소에서 초를 팔았던 소년의 모습으로까지는 옮기지는 못했다.
그렇다 하기에는 너무나 당당하고 커 보이는 사람이었으니까.
“아 놓쳤네.”
오늘의 사냥감을 놓친 대신 내일의 태양을 얻게 된 소년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외마디 욕설을 내뱉을 뿐이었다.
방금 자신의 뒤통수를 후리고 지나간 금발 남자를 향해서.
※※※※
황혼이 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그때서야 희미한 불빛을 밝히는 가게들이 있었다.
그중에 한 곳.
화려한 꽃을 파는 가게 중에서도 특히 사내들이 몰려들고 있는 곳이 있었다.
예전에는 장미의 미소가 그랬었지만 지금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창관에 쏠려있었다.
“어이 여기!”
“다음에는 나야! 나랑 놀자고!”
“돈 많은 놈이 임자지! 마르셀라! 날 위한 술을 만들어 봐!”
“······.”
남자들이 벌건 눈을 밝히며 소리 지르고 있는 바(bar)의 뒤편에서 한 여인이 화장을 다듬고 있었다.
예전에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풍성한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점점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녀의 머리는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미 화려한 화장이나 장신구로 가릴 수 없을 만큼 시들어가고 있었으나 어쩌면 상관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한때 뒷골목의 상징이었던 그녀를 갖기 위해서 지금도 사내들은 욕망에 물든 금화를 내던지고 있었으니까.
“마르셀라. 준비됐으면 빨리 나가야지?”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여인이 마르셀라의 뒤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녀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매캐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받아야 빚이 청산되지. 안 그랬다가는 몸이 삭아서 떨어져 나갈 때까지 여기서 못 나갈 텐데.”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년 여인은 주름 하나하나에 독을 새겨넣은 것만 같은 미소로 그녀를 비웃었다.
“······.”
충고를 가장한 비웃음이었으나 마르셀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분노, 슬픔, 혹은 공포.
자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등 뒤에 있는 여인에게는 달콤한 술과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 당당한 모습이 언제까지 가나 보자.”
자신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중년 여인은 등 뒤에서 마르셀라의 턱을 쓰다듬으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마르셀라는 그저 티 없이 웃어주었을 뿐이었다.
“오래 사세요. 마담.”
“······.”
마르셀라는 꺾이지 않았다.
다만 짓밟혔을 뿐이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준비실을 나서는 마담을 보며 마르셀라는 다시 화장을 계속했다.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한 줌의 분을 더 끼얹는 것을 선택했다.
마르셀라는 고작 몸 파는 창녀 주제에 자신이 너무 높은 곳까지 올라갔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 쇼아라의 뒷골목은 추락하는 사람들을 위해 언제든지 진심 어린 박수를 쳐줄 자들이 가득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했지.”
오직 마르셀라만을 위해 준비된 공간에서 그녀가 자신을 위해 슬프게 웃어주었다.
비록 추락의 아픔으로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졌을지라도 그녀는 이곳 뒷골목의 승리자 중 한 명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 사람이었으니까.
심지어 파멸하는 방법까지도.
“안 나올꺼야!”
앙칼진 마담의 외침에 마르셀라가 억지로 웃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매력 대신 억지 화장으로 덧붙인 화려함을 달고서.
“마르셀라!”
“여기! 여기 내 금화를 가져가!”
화려한 조명 아래서 그녀가 등장하자 사내들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마르셀라는 가만히 지정된 자리에 앉아 눈앞의 사내들을 지켜보았다.
욕망에 지배되고만 가엾은 짐승들이 저곳에 있었다.
“······.”
요리는 할 줄 알았지만, 술은 만들 줄 몰랐던 그녀 앞으로 수많은 술병과 잔들이 놓여 있었다.
사실 아무 상관 없는 것들이었다.
가장 비싼 값을 부른 사내에게 술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녀가 들려준 술잔을 든 사내는 오늘의 승리자가 되어 마음껏 시들어가는 꽃의 향기를 맡는다.
그것이 전부일 뿐인 공간이었으니까.
“여기! 여기! 나는 1골드!”
“1골드로 무슨! 나는 2골드다!”
“여기 돈 모아서 해도 되나? 우리 둘이 합쳐서 3골드 내겠소!”
악다구니를 치는 사내들의 함성을 들으며 마르셀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앞에 있는 수컷들이 금화를 내던지고 있었으나 저들이 뿌리는 금화는 그녀의 발치에도 닿지 못할 것이다.
외팔이 잭이 억지로 채워놓은 빚의 사슬이 그녀를 얽매고 있었으니까.
방금까지 마르셀라를 비웃던 창관의 마담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록 시들어가는 꽃일지라도 황금색 꿀을 만들어내는 그녀가 참으로 기특했다.
“그럼······.”
마담이 긴 담뱃대를 집어 들고는 가장 비싼 값을 부른 사내에게 마르셀라를 낙찰하려 할 때.
“100골드.”
아무도 없는 계단 아래서 조용히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돌리고 말 정도로 너무나 선명하고 힘 있는 목소리였다.
“······뭐?”
“100골드 내겠소.”
끼이이익-
마담의 놀람과 함께 낡은 계단의 판자를 밟으며 누군가 올라오고 있었다.
“······!”
귓가로 들려오는 삐걱거리는 소리에 마르셀라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며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장미의 미소에 파멸을 가져왔던 남자가 밟고 왔던 소리를 들으며 마르셀라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끼이이익-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그녀였지만 그날의 기억이 주는 상처만큼은 아직도 마르셀라의 영혼에 깊숙이 박혀 상처를 헤집고 있었다.
“······손님, 100골드라고 하셨나요?”
창관의 마담은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사내에게 되물었다.
방금까지도 욕망에 헐떡이던 남자들 또한 너무나도 큰 액수에 입을 벌린 채 갑작스레 난입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당당한 걸음걸이로 올라온 사내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마르셀라가 앉아 있는 자리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올 뿐이었다.
“여기서 주문하면 되나?”
“······그렇습니다만.”
비록 터무니없는 액수를 외쳤지만, 마담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못했다.
일단은 풍기고 있는 분위기가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이 사나웠고.
‘돈은 있어 보이는데?’
무엇보다 사내가 걸치고 있는 검은색의 망토나 가죽 갑옷이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 정도면 적어도 어딘가의 귀족 청년이거나 잘나가는 기사임이 틀림없었다.
100골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10골드는 너끈히 낼 수 있는 사내 같아 보였다.
그렇다면 시들어가는 꽃을 안을 자격은 충분할 것이다.
“······메뉴판을 드릴까요?”
“됐어.”
이미 이곳의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능숙한 손놀림으로 마담을 제지한 청년은 자신의 앞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창관의 마담은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의아해하고 말았다.
사내가 짓는 미소 어디에서도 욕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저 슬픈 미소일 뿐이었다.
“······여기를 떠나고 나서도 항상 이것들이 그리웠었는데.”
갑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사내에게서 이해하지 못할 단어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구운 소시지랑 블랙 푸딩, 그리고 해시브라운에 하얀 밀빵······.”
술을 주문해야 하는 곳에서 아침 식사를 주문하고 있는 사내를 보며 모두가 당황하고 있었다.
‘미친놈인가?’
이곳의 주인인 마담조차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으니까.
“······!”
그러나 마르셀라만큼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금 앞에 있는 사내가 내뱉은 단어들은 그리운 것들이었으니까.
그녀가 꿈꾸던 풍경에서 언제나 등장해왔던 음식들이었다.
“······호르헤가 늘 먹던 것으로 부탁해요. 마르셀라.”
그녀가 호르헤를 위해 언제나 준비해주었던 식단이었으니까.
마르셀라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마치 꿈결같이 들려오는 낯익은 소년의 목소리.
혹시라도 눈을 떠 눈앞의 현실을 봤을 때 자신이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아아.”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천천히 눈을 뜬 마르셀라.
그녀의 입술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희뿌예진 시선 사이로 찬란히 흐드러지는 금발이 보였다.
“내가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마르셀라.”
쓰고 있던 후드를 벗는 사내에게서 찬란한 황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이곳에 있는 자들이 욕망으로 내뱉는 더러운 금빛 따위가 아니었다.
호르헤가 주워오고 마르셀라가 씻겨놓았던 그 날의 소년이 가지고 있던 색이었다.
2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