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55
안개의 마을 (1)
그녀의 긴 머리는 푸른 빛으로 시작되었으나 검은색으로 끝났다.
걸음걸이는 누구보다도 매끄러웠으나 정작 땅에는 닿지 않았다.
굳게 닫고 있는 가슴은 더는 누구도 품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울 뿐이었다.
그녀는 죽음과 함께 찾아왔다.
“······정말 그렇게 하면 내 아들을 살릴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남작님.”
지친 남자, 울고 있는 여인.
그리고 죽어가는 아이.
남자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절망에 물들어있었다.
그는 새까만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하겠소. 부탁합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남작님.”
절망이라는 존재는 사고처럼 찾아와 우리의 삶을 갉아먹고는 한다.
그것도 가장 빛나는 부분만을 골라서.
우트만 남작은 본디 냉정한 사람이었으나 절망이라는 존재는 그의 빛나는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의 점점 꺼져가는 숨결과 그의 아내가 내뱉는 고통스러운 울음이 그렇게 만들었다.
“너무 고통스러워하지 마세요.”
우트만 남작은 물기 어린 눈으로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비록 창백했으나 미소만큼은 누구보다 포근한 여인이 남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께서 모든 곳을 바라볼 수 없으시기에 저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절망에 빠진 남자는 구원을 바라고 있었으나 결국 신의 손길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그저 죽음과 함께 찾아온 여자만이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저택의 창문을 세찬 비바람이 때리고 있었다.
※※※※
세찬 바람과 함께 빗방울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비 가릴 곳 하나 없는 산등성이를 지나고 있던 일행은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구름이 심상치 않은데.”
그레고리의 말대로 아직 시간은 낮이었으나 비구름이 하늘을 가려 깜깜한 밤과도 같았다.
이 비와 어둠을 뚫고 더 나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케이드!”
“······저곳으로 가시죠!”
눈이 좋은 케이드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저 멀리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름치고는 앙상한 나뭇잎을 가진 나무였지만 아무것도 기대지 않은 채 비를 맞는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벼락같은 걸 맞지 않겠지?”
“맞는다 해도 지금은 가셔야 합니다.”
괜스레 불안한 마음에 그레고리가 한마디 내뱉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가만히 서서 비를 맞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심상치 않은 날씨에 일행은 어쩔 수 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야영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날씨 지랄 같구만.”
비바람을 뚫고 무사히 나무 밑으로 도착한 일행은 재빨리 몸에 묻어있던 물기를 털어내고는 곧바로 타고 왔던 말들을 근처에 묶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어느새 주변을 가린 비구름들이 마치 출렁이는 파도처럼 하늘을 뒤덮고는 굵은 빗방울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레고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마차를 가져와서 다행이군.”
굳이 가져오려 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마차가 필요한 사람이 일행 중에 있었다.
이번 임무를 생각하면 거추장스러운 짐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일행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야영 준비를 할까요?”
“그래라.”
마부이자 잡부로서 임무에 동행한 고트가 부지런히 움직이며 마차에 실려있던 야영 장비를 꺼내기 시작했다.
마차 지붕을 기둥 삼아 기름 먹인 천을 연결하고 그것을 줄에 연결해 땅에 박아넣으니 금세 그럴싸한 천막 하나가 완성되었다.
지금도 주위에서 세차게 들이치고 있는 빗방울 정도는 충분히 가려줄 만한 천막이었다.
“아쉽네요.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였는데.”
고트를 도와 천막을 친 블라드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저 멀리 보이는 빛을 바라보았다.
마치 어둠 속을 홀로 밝히고 있는 횃불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인간들의 흔적이 그곳에 있었다.
“인생이라는 게 언제나 계획처럼은 되지 않는 법이지.”
오늘 안에 마을에 들어가겠다는 계획은 어긋나고 말았으나 술을 마시고 말겠다는 계획만큼은 지키고 싶었던 그레고리는 품에 있던 자그마한 술병을 열어젖힌 뒤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조금은 괜찮잖아. 날도 서늘한데.”
“······.”
무리의 대장이 술을 마시겠다는데 일개 조원으로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야영의 마지막 준비를 하기로 했다.
“나뭇가지라도 좀 주워오겠습니다.”
“젖어서 불이 잘 안 붙을 텐데.”
“그래도 한번 붙여봐야죠.”
마차 반대편으로 천막 하나를 더 세워 임시 마굿간을 만들고 있는 고트와 혹시라도 수상한 것이 없는지 주변을 살피고 있는 케이드.
그 사이에서 그레고리처럼 술을 마시며 노닥거릴 수만은 없었던 블라드는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들을 모으며 모닥불을 피울 준비를 했다.
“······이 녀석들이라면 될 거다. 속이 비어있거든.”
“감사합니다.”
비를 맞으며 근처를 뒤지던 블라드의 옆으로 어느새 케이드가 다가와 일을 거들어주기 시작했다.
일개 종자의 일을 기사가 거들어주는 모양새였지만 케이드는 그것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아 하는 듯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딱히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그때는 고마웠다.”
“······저도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블라드와 케이드는 비록 정식으로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안면은 있는 사이였다.
지난해 겨울, 바르나에서 모집했던 몬스터 토벌 때 둘은 같은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몸은 괜찮으십니까?”
“차라리 어디 하나 잘리는 게 낫겠더군.”
케이드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블라드에게 답했다.
자신의 아이를 찾으며 검은 눈물을 흘리던 여인.
자야르가 없는 도중 요제프를 지키기 위해 주둔지에 남아있었던 두 명의 기사는 그녀의 공격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만약 그때 소년이 목소리의 세계를 빌리지 않았다면 지금의 케이드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보니까 내가 인원을 잘 선별했어. 기사랍시고 이런 거 안 하고 뻗대는 놈들도 많거든.”
명령도 하지 않았건만 자연스럽게 할 일을 찾아 움직이는 사내들을 보며 그레고리가 술병을 기울였다.
“계속해서 지금처럼만 가자고. 여기서부터 우리는 기사가 아니라 용병이니까.”
그레고리의 말에 일행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임무였다.
당당히 자신들을 내보이기보다는 몰래 잠입하여 마을 내부를 들여다보는 임무.
만약 지금 일행이 가고자 하는 마을이 바예지드 백작령 안에 속해있는 곳이었다면 당장 병사들을 동원해 조사해보았겠지만, 이곳은 우트만 남작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마을이었다.
행적은 찾았으나 확실한 증거를 갖추지 못한 요제프로서는 여기까지가 지원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눈앞에 목적지를 놔두고 야영을 시작한 일행은 내일을 기약하며 체력을 보존하기로 했다.
세차게 부는 바람 소리, 천막을 때리는 빗소리.
겨우 불을 붙인 모닥불을 바라보며 블라드는 망토를 휘감았다.
질 좋은 울로 만들어낸 망토는 모닥불의 열기를 받아들이며 블라드의 몸을 덥혀주고 있었다.
“왜 그렇게 실실 웃고 있냐?”
“별일 아닙니다.”
“쯧, 싱겁기는.”
블라드는 지금 망토를 덮은 채 편히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괜스레 웃고 말았다.
지금 이 모습을 옥사나가 봤다면 뿌듯해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밤 같은 낮이 지나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아니었으나 그녀가 준 애정만큼은 확실히 이해했던 블라드는 모닥불의 온기를 받으며 몸을 뉘였다.
그 겨울날 들려왔던 슬픈 울음소리가 이곳에 없기를 바라면서.
※※※※
회색빛 돌들로 세워진 마을.
한 차례 비가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서는 자욱한 물안개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야를 짙게 가리는 안개를 보며 그레고리는 혀를 차고 말았다.
“뭐라도 튀어나올것만 같군.”
“······.”
어쩌면 이곳에 흑마법과 관련된 자들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던 일행들은 조심스레 길을 따라 말을 몰 뿐이었다.
아직 아침이어서일까 아니면 날씨가 좋지 않아서일까.
마을의 꽤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음에도 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점점 더 도시의 분위기를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저 앞에 여관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만.”
그다지 큰 마을이 아니어서인지 중심부로 들어와서야 겨우 여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여관이 있는 것 자체가 다행인 일인지도 몰랐다.
“들어가자고.”
말과 마차를 이끌고 여관으로 들어간 4명의 남자들.
삐걱거리는 마차 소리와 함께 그레고리가 여관의 문을 열었다.
“주인장 있소?”
“······꽤 일찍 오신 손님들이로군.”
“어제 비 때문에 마을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오지 못했지 뭐요. 따끈한 수프라도 한 접시 주시오.”
그레고리가 용병인 척 여관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블라드는 안쪽 부엌과 연결된 통로에서 빼꼼히 고개만을 내놓고 있는 소녀를 보고 있었다.
“······.”
자신의 무릎에도 오지 않을 어린아이.
3살일지 4살일지, 아직 한참 귀여울 나이대의 소녀.
마치 제미나의 어렸을 적을 떠올리게 하는 소녀를 보며 블라드는 살며시 손을 흔들어주었다.
살이 통통히 오른 아이의 분홍빛 볼이 조금 더 붉어진 것만 같았다.
“······요즘 근처에서 흉흉한 일이 너무 많아서······.”
“날씨 때문에라도 며칠은 머무를 생각인데 우리를 이렇게 보낼 거요? 식사도 여기서 해결할 생각인데.”
그레고리와 여관 주인이 가격을 가지고 흥정하는 동안 블라드는 천천히 여관을 거닐며 주변을 확인하고 있었다.
오랜 버릇에서부터 비롯된 행동이었으나 아이는 자신에게서 눈을 뗀 블라드가 영 마땅치 않았는지 조금씩 몸을 기울이며 일행이 있는 곳으로 딸려 나오기 시작했다.
여관 한가운데 화로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커다란 솥 하나.
안에 들어 있는 것의 정체는 모르겠으나 좋은 냄새가 나는 솥을 보며 블라드가 입맛을 다실 때쯤.
[블라드······, 블라드!]평소에는 조용하던 목소리가 다급하게 소년을 불러세웠다.
‘무슨 일이에요?’
블라드가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자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이 맞는 것 같다.]침울한 말투와 함께 목소리는 고개를 돌려 블라드에게 다가오고 있는 소녀를 보라 했다.
목소리의 조언에 따라 조용히 고개를 돌린 블라드.
“······.”
블라드가 서 있는 화로의 반대편에서 어느샌가 밖으로 나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무언가 부끄러웠는지 의자 뒤에서 숨어서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는 누가 보아도 깜찍한 모습이었지만.
[내 세계를 빌려주마.]그 모습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블라드는 긴장된 마음으로 자신의 왼쪽 눈을 열었다.
‘······!’
한쪽 눈을 감은 블라드를 보며 자신에게 눈짓이라도 하는 건가 싶어 활짝 미소를 짓는 소녀였지만 블라드는 오히려 그 미소를 보며 등 뒤에서 다가오는 서늘함을 느꼈다.
[저주다.]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으로 본 세계에서 소녀는.
소녀의 목은 마치 시체와도 같은 검은 손아귀에 붙들려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소녀의 목을 비틀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젠장.’
블라드는 지금의 광경에서 지난 겨울날 들었던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서둘러 목소리의 세계를 감았다.
댕-댕-댕-
시간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축축한 마을 한가운데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경건하게 들려야 하는 종소리였으나 블라드는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끈적한 안개와 같이 느껴졌다.
목소리의 세계를 닫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블라드는 방금까지만 해도 검은 손아귀에 붙들려 있던 소녀의 목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린 소녀의 목에는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교회의 문양이 새겨진 목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