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59
하늘을 향해서 (2)
지쳐버린 유스티아를 뒤에 두고 케이드가 다시 한번 화살에 시위를 매겼다.
피슉-!
날아가는 화살과 함께 그의 손끝이 터져나갔다.
당기는 시위에는 이미 붉은색 핏방울들이 매달려 있었지만 케이드는 활을 당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레고리에게 조금이라도 틈을 만들어줘야만 했으니까.
금발 아이를 놓쳐버린 여인들이 방향을 돌려 그레고리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유스티아가 혼신의 힘을 다해 쳐놓은 결계 밖에 있던 그는 교회에 맴도는 악의를 오롯이 혼자서 받아내야만 했다.
“평소에도 이렇게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레고리는 바예지드 가문의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사람이었고 단단한 만큼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여인들의 검은 손아귀는 그의 갈색 오러에 조금의 상처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진짜 너무 엿 같은 걸 많이 봤어. 네놈 면상까지 합해서 말이다.”
여인들의 방해 속에서도 그레고리가 유스티아의 축복이 담긴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어쨌거나 이것을 내려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부디 내가 보낸 금발 소년이 아이들을 구해냈기를 바란다.
“마지막까지 쪼개는구만.”
“하십시오.”
들소와도 같았던 그레고리의 일격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거짓된 사제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는 죽음으로 끝날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어디 대가리가 날아가도 그 말을 지껄일 수 있는지 보자.”
그레고리의 말이 웃겼던지 거짓된 사제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사내가 내뱉는 웃음이 뒤섞여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래! 끝까지 웃다가 가라!”
축복으로 빛나는 그레고리의 검이 세차게 휘둘러지고.
스걱-
망설임 없는 휘두름에 웃고 있던 사내의 목이 베어지며 제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
저주의 주체였던 남자가 침묵하자 곧 우는 여인들의 움직임도 동시에 멈추고 말았다.
군세를 무너뜨리려면 지휘관을 잡아야 한다.
도박과도 같았던 그레고리의 판단은 성공했다.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는 사내의 목을 본 그레고리는 긴 한숨을 내쉬며 허물어지듯 제단의 계단 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니미럴, 오늘 참 빡빡하구만······.”
지금의 일격을 위해 모든 힘을 소진한 그레고리가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 있던 술병을 꺼내 들었다.
오늘만큼은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도 괜찮을 것이다.
그레고리는 지금의 승리를 위해 많은 것을 짊어졌으니까.
쇼아라로 돌아가 책임져야 할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그레고리는 술병을 들이켰다.
방금의 일격으로 기사들은 승리했고 그들은 승리의 순간을 만끽할만한 자격이 있었다.
굴러떨어진 그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그러고 보니 오늘의 미사에서 포도주가 빠진 것 같습니다.”
“······뭐?”
지친 미소로 서로를 마주 보던 일행들은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당황하고 말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에게도 술 한 모금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일행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굳어버린 듯 멈춰버렸다.
방금 베어낸 사제의 목.
제단 아래 굴러다니던 그의 입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레······고리 님!”
누구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기괴한 상황에서 케이드가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레고리의 등 뒤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무언가를 보았기에.
케이드는 서둘러 화살통을 뒤져보았으나 잡히는 것은 오직 공허함뿐이었다.
그레고리의 등 뒤에서 서서히 일어서고 있는 자.
그는 목이 없었다.
“듀라한······.”
유스티아가 경악한 눈으로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단 밑으로 굴러떨어진 남자의 창백한 얼굴이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써왔던 얼굴이라 정이 들었는데 말입니다.”
목 없이 일어서는 시체와 몸 없이 말하는 머리.
그 기괴한 광경을 보는 유스티아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목 없는 기사 듀라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기사.
“이제 다 모인 것 같군요.”
몸 없는 머리가 하늘을 바라보고.
목 없는 몸이 두 팔을 크게 치켜올렸다.
어느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콰가가강-!
세차게 내리는 비와 무섭게 내려치는 천둥.
발밑에는 자욱한 연기, 머리 위에는 꾸물거리는 먹구름이 가득했지만, 소년은 미끌거리는 종탑의 장식물을 붙잡고는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저곳에 있을 아이들의 숨결을 붙잡고 있는 문양을 떼어내기 위해서.
“크윽!”
잠시 디딜 곳을 놓친 블라드의 발이 허공에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블라드는 이를 악물고 버텨내었다.
다시금 발을 디디고 손을 뻗고.
내리는 비와 세찬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감에도 이를 악물고는 저 높은 곳을 향해 팔을 뻗는 소년.
소년은 자격 없는 자였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무도 없다면 내가 한다.
누구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한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조금만······.”
어느샌가 문양 바로 밑까지 다다른 블라드는 마지막 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무릎 한번을 핀다면.
벽을 잡고 있던 손을 뻗는다면 다다를 수 있는 그런 위치였으나.
그러나 세상은 소년이 하늘에 떠 있는 별을 움켜잡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것 하나 붙잡기가 그렇게 힘이 들었다.
[피해라!]“······!”
목소리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는 흉험한 기세가 있었다.
황급히 몸을 뒤틀며 공중으로 뛰쳐나간 블라드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며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댕—
마치 선이 그어진 듯 예리하게 잘려 나간 종이 마지막 단말마를 내지르며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무너지는 종탑과 함께.
콰가가강-!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둥처럼 교회의 가장 높은 곳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젠장!”
무너지는 종탑을 피해 땅으로 떨어져 내린 소년은 재빨리 몸을 뒤로 물리며 튀어 오르는 파편을 피해내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기에 큰 충격을 받을 만도 했지만, 흰 뱀의 가호가 소년을 지켜주었다.
가까스로 위험 범위에서 벗어난 블라드는 재빨리 장식 없는 검을 뽑아 들었다.
멀쩡한 건물이 스스로 무너져 내렸을 리가 없었으니까.
“훌륭하군요. 제가 보아도 멋진 착지였습니다.”
몰아치는 먼지 속에서 누군가가 블라드를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으며 블라드가 이를 악물었다.
“너 이 새끼.”
어느새 종탑 위에 있던 불길한 문양을 붙잡은 누군가가 보였다.
“사람 새끼 아닐 줄은 알았어.”
마치 조롱하듯 블라드를 향해 박수를 치고 있는 목 없는 사내.
그러나 소년은 눈앞에 남자를 보며 경악하는 대신 검을 치켜들었다.
해야 할 곳에 있었지만, 한 뼘이 모자라 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거 내놔.”
“······.”
그러나 목 없는 사내는 더는 블라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어느샌가 다가와 새파란 안광을 내뿜고 있는 말에 올라타려 했을 뿐이다.
목 없는 사내.
뼈만 앙상히 남은 말.
그들의 모습은 죽음과도 같았다.
“그거 내놓으라고!”
그러나 소년은 그들을 향해 뛰쳐 드는 것에 망설이지 않았다.
의외성을 가져오는 속도로 달려든 블라드는 목이 없는 사내를 향해 장식 없는 검을 내질렀다.
카가가강-!
마치 벼락과도 같은 움직임이었으나 목 없는 사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검을 들어 소년의 일격을 막아낼 뿐이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각도로 검을 비틀어 소년을 압박하고 있었다.
“······!”
[관절을 기이하게 비틀고 있다. 각도를 예측하지 마라!]살아있지 않기에 허락될 수 있는 움직임으로 소년을 후려치는 목 없는 사내.
터엉-! 텅-! 텅-!
그럼에도 블라드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의 일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예측할 수는 없었으나 볼 수는 있었으니까.
소년의 타고난 동체 시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자야르에게 배운 반격기가 작렬하고 있었다.
“흐아아!”
있어야 할 곳에 있다면 해라.
해야 할 자리에 서 있다면 해라.
위대한 기사 소드마스터가 허락했으니.
“······.”
방금까지만 해도 형편없이 뒤로 물러나고 있었으나 어느새 돌격할 자세를 잡는 소년을 보며 목 없는 기사가 두 손으로 검을 잡았다.
진심을 다해야만 눈앞의 소년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너무 달려들지 마십시오. 동류에게 보내는 저의 호의가 언제 사그라질지 모릅니다.”
“내가 왜 네놈의 동류냐!”
“······당신한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해하지 못할 말을 지껄이는 목 없는 기사였으나 소년은 오직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전진할 뿐이었다.
“너무 느리지 않습니까.”
“······!”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목 없는 사내의 움직임은 이미 소년의 속도를 아득히 상회하고 있었다.
반격기로 쳐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 들어오자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어깨를 가져다 댔다.
소년의 판단에 목소리조차 경악하며 소리를 내질렀지만 곧이어 보이는 광경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끄가가각-!
검과 갑옷이 만나며 튀어 오르는 불꽃.
목 없는 사내의 검과 소년의 갑옷이 마주치며 미묘하게 각도를 비틀어내었다.
초록색 눈동자의 여인에게서 본 갑주술이었다.
“흐아!”
오직 단단한 판금 갑옷으로만 시전 할 수 있는 기술이었으나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는 흰 뱀의 가호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허용할 수 없는 충격을 강요하는 소년의 움직임에 바예지드의 가죽 갑옷이 비명을 질러댔다.
“······!”
목 없는 사내조차도 잠시 멈칫하며 소년의 분전에 놀라고 말았다.
일격필살의 묘리는 의외성에서 나온다.
보는 것만으로 배우고 듣는 것만으로도 느끼는 소년의 재능은 분명 굳혀진 전장을 의외성으로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으아아아!”
블라드가 감은 왼쪽 눈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와 내가 맞닿는 지평선에서 나는 우리가 된다.
지금도 계속해서 넓어지고 있는 소년의 세계는 채울 것이 필요했고 그것을 바로 맞닿고 있는 목소리의 세계로부터 끌어오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그것을 허락했다.
목소리의 세계는 색이 진한 세계.
몰아치는 폭풍과 뇌우가 가득한 세계.
지금 내려치는 천둥보다도 더욱 굵은 줄기의 번개가 장식 없는 검에서부터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애들은 내버려 두란 말이다!”
방금 탑 위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소년은 그토록 원했던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었다.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던 껍질을 부수는 소리와 함께.
콰가가강-!
목소리가 전수했던 일격필살의 묘리가 방금 소년의 손에서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소년의 검에서부터 하얀 벼락이 내리쳤다.
※※※※
흘러내리는 빗소리만 가득한 교회의 건물 앞.
“끄으으으······.”
온몸을 불태우며 일격을 날렸던 블라드는 입에서 흐르는 가느다란 침방울도 닦아내지 못할 정도로 지치고 말았다.
최선을 다했으나 할 수 없었다.
필살의 각오로 날렸던 벼락과도 같은 일격은 목 없는 기사의 검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소년은 분명 앞으로 나아갔지만 이미 앞서 있는 자에게는 미약한 발걸음일 뿐이었다.
세상은 애써 뒤따라오는 자에게 가혹한 곳이었다.
“동류라 해서 봐주고 있었건만······.”
목 없는 기사의 검에서부터 희미한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소년은 성공한 것일지도 몰랐다.
언제나 여유로운 미소를 짓던 목 없는 자의 세계에 분노라는 균열을 만들어내었으니까.
“크악!”
목 없는 사내의 분노와 함께 저주 실린 검이 소년의 몸뚱어리를 후려쳤다.
온 힘을 소진해 비틀거리고 있었을 뿐인 블라드는 마치 끈 떨어진 연처럼 힘없이 밖으로 튕겨 나갔을 뿐이었다.
쾅-! 콰앙!
근처에 있던 담장을 무너뜨리며 쉼 없이 굴러가던 블라드.
흰 뱀의 가호가 마지막 빛을 발하며 소년을 지켜내었지만, 이것이 끝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년은 별을 잡기 위해 하늘을 향해 기어올랐지만 결국 추락하고 말았다.
모든 시도가 결과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미리 처리하고 가야겠군.”
말에 올라타려다 잠시 멈칫한 목 없는 기사는 이윽고 검을 빼내어 든 채 블라드를 향해 다가갔다.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 심상치 않은 소년이었다.
눈 안에 담고 있는 존재 또한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을 그저 내버려 두기에는 뒤통수가 가려울 것이다.
푸른 달빛의 기사는 그 가능성을 높이 사 소년을 살려주었으나 목 없는 기사는 미리 싹을 잘라두려 하고 있었다.
빛나는 것을 대하는 두 개의 세계는 정반대의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길래 적당히 하지 그랬습니까.”
내리는 비를 맞으며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는 금발 머리의 소년.
그래도 용케 검을 쥐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목 없는 사내의 결심을 확고하게 했다.
이 녀석은 여기서 죽여야 한다.
아무리 자신과 같은 동류를 품고 있다 하더라도.
저주 어린 검에서 흘러내린 빗방울이 블라드의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쏟아지는 비와 함께 목 없는 사내의 검이 블라드의 심장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끼기긱-!
“······!”
그 순간 정신을 잃고 있던 블라드의 손이 움직이며 목 없는 자의 검을 비틀어내었다.
“이건······.”
마지막 발악인가?
분명 정신을 잃고 있었으나 저절로 움직이는 손을 보며 목 없는 사내가 당황하는 동안.
[애들은 건들지 말라고 아까 이 녀석이 말했잖냐.]비척거리며 일어서는 소년의 모습이 있었다.
장식 없는 검에 기대어 일어선 소년.
아니, 소년이 아닌 그가 한쪽 눈을 감은 채 일어서고 있었다.
그가 뜨고 있는 왼쪽 눈에서 새하얀 번개가 일렁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건져낸 작은 별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만은 안다.
존재의 기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지켜야 할 의무만은 영혼 속에 깊게 각인되어있었으니.
나는 오직 그것만을 위해 존재해왔다.
※※※※
첫 번째 맞부딪힘까지는 대결이었으나 두 번째부터는 분노가 되었고 그 다음부터는.
[겨우 이따위 실력으로 뭐라도 된 듯 날뛰었단 말이냐!]그저 폭력일 뿐이었다.
쉴새 없이 휘둘러지는 폭력의 정점 속에서 목 없는 사내는 크게 당황하며 뒷걸음질 칠 수밖에는 없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먹고 살아왔던 목 없는 사내는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먹히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쾅-! 콰앙! 쾅!
장식 없는 검을 통해 선명하게 몰아치는 섬광을 보며 목 없는 자는 실로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했던 감정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두려움.
지금도 터져나가는 사제복과 저 멀리 나가떨어져 있는 유령마의 존재가 잠시 후에 찾아올 자신의 모습이 될 것만 같아 그는 두려웠다.
[어린 것들의 피를 빠는 쓰레기 따위에게 해줄 말은 없다.]목소리의 왼쪽 눈에서 요란하게 몰아치는 폭풍우가 지나치고 있었다.
자비가 없는 뇌우(雷雨)였다.
[그러니까 죽어라.]순간 세상이 하얘졌다.
목 없는 기사는 적어도 그렇게 느꼈다.
저기 온다.
하얀색의 괴물이.
사나운 이빨을 치켜뜬 채로.
나를 먹으러 온다.
하얀색의 번개로 만들어진 사나운 짐승이 목 없는 기사를 향해 곧장 달려들고 있었다.
내리는 빗방울들조차도 그를 적시지 못할 것 같은 속도로.
‘왼쪽인가! 아니면?’
목 없는 기사는 찰나의 순간 속에서도 수십 번을 망설이며 몸을 움찔거렸다.
목소리가 내딛는 발걸음에는 수십 가지의 가능성이 담겨있었다.
문제는 그 가능성 하나하나마다 자신의 파멸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난폭하게 다가오는 운명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오른쪽!’
어디로 튀어 나갈지 모르는 목소리의 움직임에 목 없는 기사는 최선을 다해 반응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서늘함뿐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 느리니 마니 지껄인 거였나?]“······!”
사나운 짐승이 어느샌가 다가와 목 없는 남자의 등 뒤에서 스산한 입김을 내 불었다.
감히 네놈 따위가 내가 아끼는 가능성을 조롱하다니.
콰아아앙-!
“끄아악!”
분노를 담은 검으로 사정없이 목 없는 사내를 내려치는 목소리.
너무나 강한 충격에 땅바닥에 꽂히다 못해 튕겨 나와버린 목 없는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쾅-! 쾅-!
공중에 뜬 채로 수십 번은 베어지고 만 목 없는 사내는 죽음보다 더한 공포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커헉!”
죽음에서 자유롭고 고통조차 거부한 목 없는 사내는 지금 육체가 아닌 영혼을 잡아 뜯는듯한 목소리의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존재가 세상에 있단 말인가.
여태껏 자신이 상대해왔던 그 어떤 적들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목소리를 보며 목 없는 사내는 손을 허우적댈 뿐이었다.
[내놔라!]비 내린 진창에 형편없이 널브러진 목 없는 사내를 향해 하얀색의 짐승이 입김을 내뿜으며 들이닥쳤다.
[당장 내놓으란 말이다!]“흐아아악!
조금 전 소년이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은 목소리는 사정없이 목 없는 사내를 후려치고 있었다.
검과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목 없는 자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메마른 파편들이 힘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뿌드드득-!
“끄아아악!”
목소리는 검으로 비틀고 주먹으로 부숴대며 목 없는 사내의 품 안에서 아이들의 숨결을 찾아내고 있었다.
약한 세계는 먹히기 마련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