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6
검에 묻은 핏방울 (1)
갑옷을 입은 남자가 바위에 앉아 검을 닦고 있었다.
지나가던 몬스터라도 잡았는지 그의 검에는 시뻘건 피가 묻어있었다.
“나이는 못 속여. 이젠 겨울바람이 뼛속까지 들어오는데.”
늙었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얼굴에 새겨진 흉터와 주름은 그가 살아온 세월과 환경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음?”
묵묵히 검에 묻은 피를 닦던 남자는 고개를 멈추고는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이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꽤 그럴싸한걸.”
저 멀리에서부터 들리는 자그마한 소리.
그것은 뻐꾸기 소리였다.
만들어진 길 너머 앙상하게 마른 나무들 사이에서 뻐꾸기가 울고 있었다.
“멍청한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쯧쯧 혀를 찬 중년의 남자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길을 벗어나 뻐꾸기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뻐꾹-뻐꾹-
사람이 다가감에도 뻐꾸기는 자리를 옮기지 않고 계속해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누군지 몰라도 이제 그만해라. 내가 왔으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갑옷을 입은 남자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스탕가 님이십니까?”
그러자 아무도 없던 것만 같은 숲속에서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래. 내가 스탕가이기는 하지.”
스탕가라 불린 남자는 마뜩잖다는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네가 블라드라는 놈이냐?”
“네.”
블라드가 뒤집어 쓰고 있던 후드를 벗자 스탕가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내자가 뒷골목 출신이라고 하더니 꼴에 머리는 금발에 눈은 푸른색이구나. 누가 보면 귀족 출신인 줄 알겠어.”
“······여기 보스가 보낸 편지요.”
스탕가의 말을 들은 블라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디 보자······.”
천천히 편지를 읽어내리는 스탕가의 흉터가 기묘하게 일그러져 갔다.
블라드는 그런 스탕가의 표정을 쉽게 읽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웃는 것 같기도 다르게 보면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좋아. 나의 자랑스러운 선배께서 눈앞에 꼬맹이를 따라가라고 하시는군.”
“맞아요.”
예측할 수 없는 남자다.
뒷골목에서 태어나 사람을 보는 감각이 예민해 질 수밖에 없던 블라드는 스탕가를 그렇게 평가했다.
“따라오세요.”
블라드가 스탕가를 평가하는 동안 스탕가 역시 눈앞의 애송이를 평가하고 있었다.
일부러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음에도 자신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넘기는 금발의 애송이.
‘호르헤가 좋아할 만한 놈이로군.’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다듬어 볼 만한 가치는 있어 보이는 애송이였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기사가 아닌 그저 목적지에 일찍 도착하고 싶을 뿐인 여행자였다.
‘여기서 한 방 먹여야겠군.’
앞으로 길을 편히 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앞이라고 괜히 뻗대고 있는 어린놈의 머리통을 적당히 주물러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하······내 앞에 있는 놈이 아무래도 멍청한 놈인 것 같은데 제대로 안내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길 안내할 정도는 돼요.”
“아닌 것 같은데?”
볼멘소리로 불만을 표시하는 블라드를 보며 스탕가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한겨울에 여름 철새 소리를 내는 놈이 머리가 좋을 리가 있나.”
“······아.”
블라드는 스탕가의 말을 들으며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가던 중간에 여기가 아닌가 봐 하면 죽여버린다. 멍청아.”
당황해하는 블라드를 보며 스탕가는 자신의 한 방이 유효했음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
기사.
뒷골목의 소년이라도 울림을 느낄 수 있는 단어.
자격이자 명예이며 존재를 증명한 자만이 지닐 수 있는 기사라는 명칭을 가졌던 존재가 바로 옆에 있었다.
“뭘 자꾸 힐끗힐끗 쳐다봐.”
“······뭐 보면 닳아요?”
“길이나 잃지 마.”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는 눈 감고도 아는 길이예요.”
“눈 감아 봐 그럼.”
“······그 정도로 잘 안다는 이야기죠.”
방금 핀잔을 들었음에도 스탕가에게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호르헤가 전직 기사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미 그에게는 기사보다는 조직의 보스로서의 분위기가 더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옆에 있는 스탕가는 자신이 꿈꿔 왔던 기사로서의 모습을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
긴 장검, 가죽을 덧댄 흉갑, 단단히 동여맨 건틀렛과 절그럭거리는 갑옷 소리.
“은퇴한 기사 처음 봐? 왜 이렇게 자꾸 쳐다봐.”
“이렇게 가까이서는요.”
“촌놈이네.”
“어디서 오셨는데요?”
“다키아에서.”
“거기 완전 촌동네인데.”
“······.”
방금 한 방 먹여놨음에도 자신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는 블라드를 보며 스탕가는 험악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차라리 네가 길을 잃었으면 좋겠어. 한방에 썰어버리게.”
“오늘은 여기서 야영할게요.”
“도시 출신들은 원래 이렇게 싸가지가 없냐?”
스탕가는 툴툴거렸으나 지금 야영을 하겠다는 소년의 판단에는 찬성했다.
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숲속을 헤매고 있었고 해는 숲속에서 더 빨리 지는 법이었으니까.
“능숙하네? 도시 사람 주제에?”
“집다운 집을 못 가져봐서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야영지를 만드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스탕가가 미소지었다.
“기특하게도 내 자리까지도 만들어주는 거냐?”
“호르헤의 손님이니까요.”
“흐음.”
어느새 자리를 깔고는 용케 장작들을 주워와 불까지 피우고 있는 블라드였다.
“먹을 건 없냐?”
“제건 있어요.”
“내 거는?”
“그것까지는 안 챙겨주던데요.”
“······.”
한숨을 내쉰 스탕가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육포를 꺼내 들었다.
반짝이는 갑옷을 입은 자가 가지고 있다기에는 빈약해 보이는 것이었다.
모닥불이 피워 올려지자 블라드는 거기에 육포를 걸어놓았다.
“몰래 움직인다면서 불 피워도 되는 거야?”
“그래서 멀리 돌아온 거예요.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게 걸려도 제가 기사 나리를 데리고 온다는 사실만 안 들키면 그만이니까.”
행적을 들켜도 의도만 들키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선배가 많이 힘든가보구만.”
그리고 스탕가는 블라드의 말을 통해 호르헤의 사정을 짐작해냈다.
“검을 숨긴다는 것은 오직 찌를 때를 위한 것이니까.”
블라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을 통해 긍정했을 뿐이었다.
“······최악의 경우 들켜도 좋으니 무사히 데려오라고만 했어요.”
날카로운 기사의 감각을 처음으로 느낀 블라드는 내심 놀라고야 말았다.
스탕가의 말이 맞았다.
그는 굳이 숨어가며 쇼아라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호르헤가 굳이 스탕가라는 검사를 숨긴 이유는 아마 그 또한 이번의 싸움으로 외팔이 잭의 목숨을 확실히 끊을 생각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사는 검이다.
그것도 아주 날카로운 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날아오는 검은 그야말로 훌륭한 무기나 다름없을 것이니까.
지금은 은퇴했지만 기사 출신이었던 스탕가는 충분히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진짜 혼자만 먹을 거냐?”
스탕가는 자신의 육포와 블라드가 들고 온 육포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네.”
“쓰벌······.”
블라드는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쩝.”
스탕가는 점점 익어가는 육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근데 되게 못 생기게 만들었네.”
“만든 사람이 솜씨가 없어요.”
특이한 육포였다.
포라기 보다는 차라리 고기를 어설프게 뭉쳐놓은 형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입맛을 돌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냄새까지 죽이네.’
불에 구워지며 내는 향기는 고기가 구워지며 내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흐······흐음. 나한테 뭐 궁금한 것 없냐?”
“갑자기요?”
“네가 들고 있는 육포 하나당 내가 질문 하나를 답해주마. 이건 그냥 오는 기회가 아니야.”
“······.”
블라드는 제미나가 만들어 준 육포를 우물거리며 가만히 스탕가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왜 이럴까?
“먹고 싶으면 그냥 하나 달라 그래요.”
“기사 체면이 있지 임마. 본래 기사는 정당한 대가만 받는거야.”
“은퇴했잖아요.”
“그래도 여태까지 해온······.”
“이름.”
“······스탕가.”
“나이.”
“42세······야 임마.”
“왜 여기까지 왔어요?”
블라드에게 날아오는 두 개의 육포를 붙잡은 스탕가는 곧바로 날아오는 날카로운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허(虛) 속에 실(實).
영특한 놈이라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나름 날카롭기까지 한 녀석이었다.
“뭐 성공하지 못한 기사의 말로랄까······.”
스탕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나뭇가지에 육포를 꿰며 대답했다.
“성공?”
“육포 하나 더.”
이번에는 블라드가 표정을 구기며 들고 있던 육포를 건네주었다.
“땅이란 중요한 거야. 디딜 수 있는 기반이며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버팀목이지.”
“장원을 말하는 거예요?”
“······뭐 그렇지.”
블라드도 알고 있었다.
기사들의 최종 목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장원이라는 것을.
기사를 평민이 아닌 그 무언가로 만들어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장원이었으니까.
“귀족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기사가 귀족 사회로 나아가게 해주는 발판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귀족이 되고 싶냐고?”
그러나 블라드의 질문을 들은 스탕가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불 속으로 육포를 집어넣을 뿐이었다.
“그냥······나는 나의 정당한 대가를 받고 싶었을 뿐이야.”
일렁이는 모닥불의 불빛이 스탕가의 얼굴에 기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
미묘하게 굳어지는 스탕가의 표정을 보며 블라드는 지금 자신이 넘어서는 안 될 선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선을 넘으면 안 된다.
누구나 침범받기 싫은 자신만의 세계가 있는 법이니까.
“알았어요. 그럼.”
분위기를 환기하고 스탕가의 표정도 풀어줄 겸 블라드는 평범한 소년의 모습을 연기해보기로 했다.
“오러를 다룰 줄 알아요?”
“흐흐. 인제 보니 겉멋만 든 놈이었구만.”
블라드의 질문에 스탕가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모든 기사라고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야. 그리고······.”
“그리고?”
“다룰 수 있다 해도 실전에서 쓰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거든.”
“그래서 쓸 수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블라드는 자신이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소년은 진심이었다.
기사. 오러.
소년이 꿈꾸는 것이 두 단어에 깃들어있었으니까.
“다 가져가요.”
“뭘?”
“육포요.”
블라드는 스탕가가 다른 말을 할까 서둘러 육포가 담겨있는 주머니를 넘겨주었다.
“기사는 정당한 대가만을 가져간다. 애송아.”
“그럼 좀 뺄까요?”
블라드의 말에 스탕가가 재빨리 주머니를 낚아챘다.
“가끔은 기분 낼 필요도 있지.”
씩 웃는 스탕가를 보며 블라드는 자신의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볼 수 있다.
기사들의 정수인 오러를.
그것을 보기 위해서라면 제미나가 손수 만든 육포 따위는 아깝지 않다.
반짝거리는 블라드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스탕가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좋아 잘 봐라.”
블라드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스탕가가 굽고 있던 육포를 받아들었다.
스르르릉-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스탕가가 검을 빼 들었다.
잘 손질되어 있는 검은 매끈했고 또한 조용히 뽑혀 나왔다.
마치 정숙한 여인이 수줍게 내미는 손과도 같았다.
“왜 왼쪽 눈을 감아요?”
“영혼 속에 있는 나만의 세계를 끌어올려야 하거든.”
“······?”
알 수 없는 말이었으나 블라드는 그저 지켜보기로 했다.
스탕가가 일어서고 있었기에.
모닥불을 앞에 두고 달빛 아래 선 기사.
그러나 두 개의 빛 앞에 있다 할지라도 그의 존재감은 가려지지 않았다.
기사 스탕가.
그는 스스로 빛을 낼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봐라. 애송아.”
스탕가가 그의 검에 입을 맞추며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과의 대화였으며 또한 자신의 세계를 현실로 끌어오는 주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와.”
그러자 곧 그의 검에서 푸른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희미하고 옅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달빛을 머금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블라드라 할지라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스탕가만의 세계였으며.
또한 오러라 불리는 것이었다.
“진짜 멋진데요.”
세계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무언가가 일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