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63
이어지는 옛 모습들 (1)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스투르마.
그곳의 주인인 페테르 바예지드는 앞에 놓인 멋들어진 갑옷을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요제프 님의 보고에 따르면 라문드 경이 지금 쇼아라에 도착해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 있는 종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고 하는군요.”
“그렇군.”
기사 라문드가 스투르마에 처음 돌아왔을 때를 생각하며 페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대 가주의 기사였던 라문드는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쉽게 대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곳에 있는 종자들의 상태를 보고서는 한숨을 쉬며 돌아갔으니 페테르로서도 뒷맛이 씁쓸했던 상태였다.
“그나마 면을 세웠다고 해야 하나······아니면 이것밖에 안 된다고 한탄을 해야 하는 건가.”
라그무스는 점점 날카로워지는 페테르의 눈빛을 보며 말을 아꼈다.
본래 바예지드는 기사들뿐만 아니라 유망한 종자들을 키워내는데도 일가견이 있는 가문이었다.
한숨을 쉬며 돌아갔다는 라문드는 그 시절 종자에서부터 시작해 기사까지 다다른 인물이었으니 지금 종자들의 수준을 보고는 마치 바예지드의 옛 모습이 무너진듯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보아왔던 바예지드는 이렇지 않았을 테니까.
“시대가 달라졌지 않습니까.”
“시대가 달라졌다 해도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이 있지.”
고작 늙은이의 투정으로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라문드의 따끔한 충고는 분명 페테르에게도 와닿는 것이 있었다.
“내가 너무 북부의 유망주들을 소홀히 한 모양이군.”
그동안 외부에서의 영입을 확대했기에 기사들의 질은 높아졌으나 정작 종자들의 수준은 낮아지고 있었다.
이 말은 곧 바예지드의 색깔이 옅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분명 페테르가 고민을 해 봐야 할 부분이었다.
“······.”
햇빛에 반짝이는 갑옷.
고민하고 있던 페테르의 시선이 저절로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북부 교구인 산 로지노에서 보낸 갑옷이었다.
그 갑옷과 함께 딸려온 짤막한 편지에는 갑옷을 보내는 사정과 함께 낯익은 소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인상 깊었던 모양이군.”
“산 로지노라는 외부의 인정까지 받았습니다. 본래 교차검증이라는 것만큼 신뢰성을 주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페테르는 라그무스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 로지노의 성기사들과 옛 시대의 기사인 라문드 경의 선택까지.
“쇼아라로 보내주어야겠군.”
“그렇습니다.”
바예지드의 옛 전통은 다행히도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페테르는 비록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크게 안심하고 있었다.
스투르마의 단단한 성벽은 그런 전통들과 함께 쌓아 올려진 것이었으니까.
※※※※
“끄으······.”
블라드는 앓는 소리와 함께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아직 미묘하게 남아있는 두통에 블라드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고 말았다.
“여긴 어떻게 왔냐.”
이마에 걸쳐져 있던 축축한 수건으로 보아 정신을 잃었던 동안 누군가가 자신을 간호했던 모양이다.
‘마음에 안 드는 노인이랑 한판 붙었었고······.’
블라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침대에 걸터앉아 어제 일을 떠올려보았다.
마치 술에 취한 듯 중간중간이 끊겨 있는 기억이었지만 그래도 블라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강렬한 기억들이 있었다.
빛나는 이마.
반짝반짝 빛나던 주제에 흉악한 위력을 가지고 있던 이마였다.
“······그게 되네.”
세상은 넓고 기인은 많다 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오러로 강화한 노인의 이마는 차라리 벽에 부딪히는 게 나을 정도로 단단했었다.
“그렇게도 쓸 수 있어요?”
[사람의 재능이라는 것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법이니까.]끝까지 봤다는 말은 안 하는 것으로 보아 목소리도 그런 모습은 본 적이 없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기억에 있었는데 잊어버리고 말았다거나.
“······뭐 그 정도는 했으니까 지금도 대접받고 사는 거겠죠.”
[그렇지. 분명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일 거다.]블라드는 목소리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뿐만 아니라 정체도 쉽사리 알려주지 않는 노인이었지만 블라드도 눈치를 통해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래된 바예지드의 기사.
그리고 지금은 은퇴를 한 채로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는 사람.
아마 기사만이 할 수 있는 어떤 의식 중 인 것만 같은데 아직 종자일 뿐인 블라드로서는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어.”
“······노크를 하고 들어와 좀.”
정신을 차린 블라드가 침대에서 일어서자마자 방문을 거칠게 열며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가뜩이나 작은 키에 옷더미를 잔뜩 들고 있어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소녀였다.
“노크할 손이 있어야 두드릴 거 아냐.”
제미나는 짜증 난다는 듯 들고 있던 옷더미들을 침대 위에 쏟아 넣었다.
전부 블라드가 입고 다니던 옷이었다.
“내버려 두면 내가 알아서 빨아둘 텐데 오지랖은.”
“손님. 이것도 다 저희 여관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랍니다.”
제미나는 친절해 보이려 노력하는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블라드를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하얘 보이는 제미나의 치아가 소년은 괜히 불길해 보였다.
“손님은 비싼 4층에 머물고 계신 귀한 손님이시니까요. 이 정도는 저희가 다 해드려야 하는 부분이죠.”
“······.”
블라드는 제미나가 지금 하는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닌 것을 알았다.
마르셀라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장미의 미소는 그녀의 의지에 따라 창관이 아닌 여관으로 탈바꿈하는 중이었다.
호르헤의 부재로 생겨나고 만 삶의 분기점에서 마르셀라는 최선을 다해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었다.
“나 아직 그만한 돈이 없는데.”
“너는 공짜라잖아. 여기 있어 주는 것만으로 도움이 된다고.”
마르셀라는 소년에게 안락한 쉴 곳을 내어주고 소년은 마르셀라에게 자신의 이름값을 빌려준다.
“나 하나 가지고 되겠어?”
“그거야 마르셀라가 판단할 부분이지.”
조직 간의 항쟁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던 블라드로서는 고작 자신 하나로 그들을 억제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지만, 마르셀라가 보았을 때는 충분히 통할 만했다.
쇼아라의 시장이자 바예지드 가문의 둘째 아들이 감싸고 도는 인재니 다른 곳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이 도시 안에서만큼은 충분하다 못해 남을 이름값일 테니까.
“식당으로 와. 마르셀라가 점심 준비해뒀다니까.”
바쁜 듯이 방을 나서던 제미나는 아차 하는 표정과 함께 돌아오더니 블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요걸 빼먹었네. 받아 가세요 기사님.”
“아직 기사 아니라니까. 괜히 어디서 가서 그런······.”
제미나에게 한마디 해주려 했던 블라드였으나 그녀가 건네주는 손수건을 보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만들어졌으며 금색 자수로 누군가의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이었다.
“제가 보기에는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님이 확실하신데요.”
“이건······어쩔 수 없었던 거거든.”
블라드는 가능하다면 자세히 설명하고 싶었지만, 억지 미소를 짓고있는 제미나를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고 지금은 오해를 풀 만한 상황이 아
니었다.
“머리카락까지 자르면서 검을 쥐여 보낸 보람이 있네요. 아주 출세하셨어요.”
“그건 고맙다고 생각······.”
쾅-!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닫고 나가버린 제미나를 보며 블라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으쓱거렸다.
“······하고 있었지. 항상.”
블라드는 소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미나는 레이디 알리시아라는 존재가 데어마르의 여남작이며 자신이 받은 손수건이 복잡한 정치적 계산을 통해 건네진 것까지는 모를 것이다.
어쩌면 알았다 할지라도 지금과 같은 반응이 변함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림질까지 했네.”
블라드는 추웠던 겨울날, 소녀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헌신을 기억하며 침대 위에 놓인 옷들을 바라보았다.
귀부인이 전해준 옷 위로 느껴지는 붉은 머리 소녀의 손길이 따뜻했다.
“······.”
블라드는 제미나가 건네준 옷을 갈아입으면서 오랫동안 밖으로 목을 빼내지 않았다.
몸에 닿는 옷감의 느낌은 달랐지만, 소녀가 전해주는 온기만큼은 예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돌아오길 잘했다.
블라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목을 빼냈다.
※※※※
“미안하다니까.”
“······.”
“하나 사주마. 그럴싸한 거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그런 것이 있는 법인데······.”
언제나 호르헤가 아침을 먹던 그 식탁에 앉아 스프를 떠먹고 있던 블라드.
그러나 그리워했던 마르셀라의 스프를 먹고 있었음에도 소년은 쉽게 인상을 풀지 못했다.
마치 시위라도 하듯 굳이 입고 있는 망가진 가죽 갑옷이 소년의 인상을 그렇게 만들었다.
“이거 마음에 들었던 거거든요.”
“······그렇지. 훌륭한 갑옷이지.”
소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노인은 그저 앞에 놓인 수프를 휘저을 뿐이었다.
바예지드 가문에서 유망한 종자에게만 내어주는 가죽 갑옷은 아까 소년의 말처럼 돈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그런 물건이었다.
노인 또한 어렸을 적 그 갑옷을 받으며 느꼈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할 지경이었으니까.
“그럼 나랑 같이 이따 시청이라도 가자.”
“왜요.”
퉁명스러운 소년의 대답에 먹고 있던 스프 그릇을 집어던지고 싶은 노인이었지만 꾹 참아내었다.
본인이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사실이었고 힘을 제대로 조절 못 해 소년을 상처입혔으며 게다가 바예지드의 갑옷까지 터트리고 말았으니 지은 죄가 크다 할 수 있었다.
“도련님한테 다시 네 쓸모를 보여야 할 거 아니냐. 근신 일주일 끝났다고 개판 쳐놓은 네 평가가 돌아오겠어?”
틱틱대던 블라드는 노인의 말을 듣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분명 떨어진 평가를 올리는 데는 성과를 들고 가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요제프가 노인을 대하는 태도가 극진한 것으로 보아 그의 말을 따른다 해도 잘했으면 잘했다 했지 못했다 하지는 않을 것 같고.
“그러니까 나랑 일 하나 같이하자. 보고는 후하게 올려주마.”
“무슨 일이요?”
“자야르나 보르단 녀석한테 달라고 하면 뭐라도 하나 정도는 내주겠지.”
“······빵 썰어드릴까요?”
물러설 때와 나설 때를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소년을 보며 노인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너 근데 그때는 왜 그랬어?”
“언제요?”
“······빵이나 썰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소년을 보며 노인은 혀를 쯧쯧 찰 뿐이었다.
‘다루기가 쉽지 않겠어.’
영악하기까지 한 소년을 보며 요제프가 썩일 속을 생각하니 가련해지는 노인이었다.
“그래도 터트린 갑옷값은 주셔야 해요.”
“······.”
그러나 지금 당장 그 영악한 소년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었으니 노인은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
블라드는 근신 명령 때문에 차마 시청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있는 마구간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몸은 괜찮아?”
“좀 쉬니까 나아졌어.”
“여기 올 때까지 하도 골골대서 걱정하고 있었지.”
그곳에서 이제는 쇼아라의 마구간지기가 된 고트가 블라드를 맞이해주었다.
“너는 할 만하냐.”
“나쁠 게 뭐 있나. 돈 많이 줘, 밥 많이 줘, 자는 곳도 좋아. 게다가 이번에는 특별 수당도 나올 거 아냐.”
“······얼마 받는데?”
블라드의 질문에 고트는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아무리 우리 사이라도 그런 거는 물어보는 거 아니야.”
“사기꾼 새끼.”
봉급을 많이 받는다는 고트의 말에 블라드는 괜히 부아가 치밀어오르고 말았다.
블라드의 정식 신분은 종자였으며 바예지드 가문에서 종자라는 위치는 기사들의 조수이자 수련생 같은 것이었다.
다시 말해 블라드는 여태까지 요제프가 따로 쥐여주는 용돈 정도를 제외하고는 따로 봉급이라는 것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대장은 이거저거 많이 받았잖아. 갑옷이라던가 옷이라던가.”
“······.”
그러나 고트의 말처럼 블라드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옥사나와 요제프가 소년에게 지원해 준 유형, 무형의 지원들은 고작 금화 정도로는 잴 수 없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니까.
당장 자야르의 종자라는 위치만 하더라도 어느 가문에서는 수백 개의 금화를 싸 들고 찾아올지도 모를 기회였다.
“요즘 뭐 별일 없어?”
“들어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건네진 질문에 대수롭지 않은 듯 솔로 말 등을 쓸던 고트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블라드에게 귓속말을 했다.
“소문이 있긴 있어.”
“······그래?”
악어와 악어새 같은 두 명의 관계는 여전히 유효했다.
고트의 속삭임을 듣는 블라드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밤에 경비를 서던 경비병들이 이상한 걸 봤다는 거야.”
“말해봐.”
확실하지 않은 소문이라 말하기는 했지만 고트가 전하는 말에는 분명 짚이는 것이 있었다.
“새까만 말이 저 멀리서 자꾸 성문을 보고 있대. 뭔지 싶어 다가가면 어느샌가 사라져 있다는거야.”
“말?”
블라드는 어째서 고트가 귓속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안개 짙은 마을에서 보았던 광경 하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목 없는 사내가 유령마 같은 걸 타고 그랬었다며.”
“······그랬지.”
어두운 밤 쇼아라를 지켜보고 있는 새까만 말.
그리고 확인하려 해도 너무 재빨라 다가갈 수 없었다는 말.
고트의 추측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조심하라고. 아직 근신 중이잖아.”
고트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근신이긴 한데 어쨌거나 일은 할 것 같네.”
“응?”
“너도 준비해 놔.”
“으응?”
블라드는 양손에 허리를 짚으며 저 앞에서 다가오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거의 다 벗겨져 가는 노인의 이마를 빛내고 있었다.
“이놈아 가자!”
“이름 부르시라고요.”
일거리를 하나 잡아 왔다며 웃고 있는 노인.
그 노인이 움켜쥐고 있는 종이에는 새까만 말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특별 수당 더 받아서 좋겠네.”
“아니······.”
짓궂은 표정을 짓는 소년을 보며 고트는 들고 있던 솔을 양동이에 집어 던지고 말았다.
“얼마 쉬지도 못했는데!”
“나도 그래.”
고트의 달콤한 휴식을 깨부순 블라드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말을 타지 못한다면 말을 모는 사람을 타면 된다.
그것이 소년이 내린 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