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64
이어지는 옛 모습들 (2)
가치 있는 존재는 어디서나 빛나는 법이다.
“저기 있다! 어서 몰아!”
“정말 애먹이는 놈이구만!”
그리고 빛나는 존재는 누구나 탐하기 마련이었다.
“······!”
자신과 닮은 색깔의 밤하늘 아래서 새까만 말 한 마리가 도망치고 있었다.
무리의 대장이라는 의무를 넘겨주고 그날의 기억을 쫓아 소년을 찾아왔으나 빛나는 존재를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탐욕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녀석의 길을 막고 있었다.
불길한 주문을 머금은 올가미들이 새까만 말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사방에서, 곳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는 세계의 지평선에서 우리가 된다.
더 넓어진 세계는 더 높아질 가능성을 보장하겠지만 그날 자신과 같이 데스웜과 대적했던 소년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렇기에 새까만 녀석은 오직 혼자서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히이이힝-
떠오른 달 아래서 새까만 말이 내 짖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
화창한 여름 하늘 아래서 건초를 가득 실은 달구지 하나가 초원을 지나가고 있었다.
밀짚모자를 푹 눌러쓴 노인과 그의 옆에서 하품 짓고 있는 소년.
그리고 그들을 달구지에 태운 채 말을 몰고 있는 긴 턱의 청년까지.
자그마한 달구지 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들의 모습은 기사라던가 검이라던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어디까지 간대요?”
“바르나까지.”
“그런데 그냥 이렇게 누워있어도 되는 거예요?”
“알아서 찾아온다잖냐.”
일행은 현재 바르나로 향하는 상행의 뒤를 조용히 쫓아가는 중이었다.
증언에 따르면 유령마로 추정되는 말은 재빠를 뿐만 아니라 마차나 달구지에 사람이 타고 있을 때면 항상 멀리서 지켜보며 확인한다고 했었다.
“확실한 의도가 있는 녀석이지. 분명 평범한 말은 아닐 거다.”
“······.”
노인의 말을 들으며 블라드와 고트의 머릿속에는 저절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안개 낀 마을, 목 없는 사내. 그리고 그가 타고 있던 유령마.
어쩌면 불길한 흔적이 자신들을 따라 쇼아라까지 온 게 아닐까 싶어 영 찜찜할 뿐이었다.
“하늘 좋구나. 바람도 불고.”
둘의 걱정과는 별개로 라문드는 유유자적하게 움직이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실려있던 건초 하나를 빼어 물고는 장난스럽게 질겅이기 시작했다.
“오러 쓴지가 얼마나 됐다고?”
“한 석 달 됐나. 아니 넉 달인가······.”
“데어마르에서부터 뽑아낸 거고?”
“네.”
“으음.”
노인은 밀짚모자의 틈 사이로 비치는 소년의 등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 이곳으로 나온 목적은 정체 모를 말을 조사하는 것이었지만 솔직히 찾아내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라문드가 쇼아라에 머무는 가장 큰 이유는 눈앞에 있는 소년이었을 뿐이니까.
말을 찾기 위해 수색하는 며칠 동안 블라드의 옆에 있으면서 살펴보고 판단하고 그리고 기특하면 뭐라도 좀 가르쳐볼 요량이었을 뿐이었다.
“석 달이면 좀 빠르네.”
“뭐가요.”
소년의 물음에 라문드는 밀짚모자를 벗고는 블라드와 눈을 마주쳤다.
“깨우친 시기에 비해 오러가 진해. 정작 그러면서도 본인의 색을 못 찾은 게 신기하긴 하다만.”
“······.”
오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블라드는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노인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자야르와 목소리는 언제나 기본기를 강조할 뿐 소년에게 오러에 대한 가르침은 크게 내어주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 깨우치며 앞으로 나아갔을 뿐이었다.
“오러는 곧 심상의 구체적인 구현이지. 색깔을 찾지 못했다는 건 아직 너의 세계가 특정되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고.”
“색깔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요?”
라문드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를 보며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래도 너무 많이 알려주면 안 되겠지.
자야르가 나름대로 생각해놓은 방향이 있을 테니까.
“좀 더 너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 봐라. 너무 숨기지만 말고.”
“그게 무슨 말인지.”
블라드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라문드는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입을 열었다.
“네 안에 세계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장치를 하나 만들어봐라. 기사들은 그걸 열쇠라고 부르는데.”
“열쇠요?”
처음 듣는 단어에 블라드의 눈이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말을 하나라도 주워들으려는 소년의 모습이 라문드는 기특해 보였다.
“별건 아니고. 너 여태까지 봐왔던 기사들이 오러 쓰는 거 봤냐?”
“봤죠.”
“그 사람들이 그냥 오러를 쓰디?”
“······그럼 다르게 쓰나요?”
“관찰력이 좀 부족하구만.”
라문드는 건초더미에 등을 기대며 소년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생각해봐라. 오러를 불러일으키기 전에 특정한 행동 같은 걸 취하지는 않든?”
“행동?”
블라드는 노인의 말을 듣고는 눈썹을 찌푸리며 고심하기 시작했다.
다른 기사들이 오러를 불러일으킬 때는 언제나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제대로 볼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라문드의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몇몇 장면들이 있었다.
“검이랑 방패를 부딪치고······.”
자신을 오러의 길로 이끌어줬던 기사 파블로.
그는 검과 방패를 부딪치며 소년을 향해 이름을 물었었다.
아직도 그때의 울림이 블라드의 귓가에 생생할 정도였다.
“음 그리고?”
데스웜을 벤 루트거 바예지드.
활화산 같았던 그는 손가락으로 검을 튕겼던 것 같았다.
멀리서 보았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리고······.”
그리고 푸른 달빛의 기사 고딘.
소년이 맨 처음 보았던 오러의 주인.
“······검에다 입을 맞추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까요?”
“그럴 수 있지. 특정한 행동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강렬하게 떠올리는 거지.”
열쇠란 그런 것이었다.
자신의 심상 세계를 크게 열어젖히는 도구이자 의식 같은 것이었다.
“저는 그냥 쓰는데요.”
“그래서 허접하잖아.”
라문드의 대답에 블라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다른 기사들의 오러와 비교해서 자신의 오러는 미약한 빛을 낼 뿐이었으니까.
“때가 되면 자야르가 어련히 알려주었겠지만, 지금 미리 생각해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다.”
세계를 크게 열어젖히는 의식.
자신의 세계가 굳건히 자리 잡은 기사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었기에 아직 소년이 사용하기에는 먼일일지도 몰랐다.
저 멀리 보이는 또 다른 기사들의 경지를 느끼며 블라드는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손을 올려보았다.
[숙여라!]“숙여!”
“······응?”
순간 갑작스레 들려오는 경고들을 들으며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터엉!
“엥?”
멍청한 소리를 내며 들려오는 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린 블라드.
그곳에는 파르르 떨리는 화살을 붙잡고 있는 라문드의 모습이 있었다.
“일이 쉽게 풀리지가 않는구만.”
밀짚모자 사이로 비치는 라문드의 눈빛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습격이다!”
“마적단이다! 모두 경계해라!”
나아가던 행렬이 멈춰서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소리.
그리고 언덕에서 날아드는 화살들이 있었다.
“달구지를 엎어라!”
“어디로요!”
라문드는 재빨리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특정하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말 띄워놔! 그놈 도망 못 가게 꼭 붙잡고 있어라. 마부야!”
“네? 네!”
라문드는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음에도 재빨리 상황을 판단하고는 블라드와 고트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기민한 대처에 블라드와 고트는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들어 갈 수 있었다.
“뭐죠? 마적단인가?”
“······그놈들보다는 더 골치 아픈 녀석들인 것 같다.”
블라드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적어도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사내들이 언덕 위에 말을 타고 서 있었다.
생소한 형태의 가죽옷과 머리 형태, 얼굴까지 꽉 채운 문신.
그리고 쉴 새 없이 질러대는 기묘한 함성까지.
“야만인들이다.”
“야만인들이요?”
예상치 못한 단어가 라문드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블라드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콰직-!
순간, 블라드의 옆으로 꽂히는 화살 하나가 있었다.
“······.”
저 멀리 언덕에서 활을 들고 있는 야만인 사내.
블라드는 그 사내와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았다.
짐승과도 같은 눈빛의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
매캐한 연기와 함께 타오르는 마차, 목이 터질 듯 외쳐대는 용병들의 고함소리.
“젠장!”
그리고 날아오는 화살들.
땅바닥에 꽂혀 부르르 떨리는 화살을 바라보던 블라드는 재빨리 달구지를 엄폐물 삼아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야만인이 왜 여기 있어요?”
“······.”
북부의 사람들이라면 북쪽 저 너머에 살고 있다던 야만인을 모를 수는 없을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한 채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블라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여기는 바예지드 백작령인데요? 아무리 멀리 나왔다 해도 쇼아라에서 고작 하루거리에요.”
“그러게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곳은 바예지드 백작령이라는 것이었고 보통 야만인들이 출몰하는 곳에서 훨씬 남쪽에 떨어져 있는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경험 많은 라문드조차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듯 입술을 깨물며 고민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굳이 바예지드 백작령까지 내려올 이유도 이득도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일은 벌어졌고 지금은 대책을 강구해야만 할 때다.
스르릉-
“좀 편하게 가나 했더니.”
블라드는 역시 자신의 인생은 뭔가 꼬인 것이 틀림없다며 투덜거리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라문드 역시 검을 뽑아 들고는 고트에게 지시했다.
“마부야. 말에 안장을 앉혀놔라. 저놈들한테 대응하려면 말이 있어야 한다.”
라문드는 이미 어찌하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 생각 중이었다.
그의 이마에 깊게 새겨진 주름들이 지금의 상황이 녹록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몇몇 전사들을 제외한다면 감히 기사까지는 상대하지는 못할 녀석들이다. 야만인들 특유의 기동력만 죽이면 돼.”
야만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말과 함께한다고 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뛰어난 기병이라 말하는 라문드의 말에 블라드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말과 관련된 영역은 소년이 가지고 있는 뼈아픈 약점 중 하나였으니까.
“잘 들어라! 우리도 너희 모두를 죽이고 싶지는 않다!”
한참 화살을 날리며 행렬을 위협하던 야만인들은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 우렁찬 소리를 내지르며 압박하며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통행료만 낸다면 목숨은 살려주마!”
“······.”
고요해진 사람들 속에서 상인처럼 보이는 남자가 손을 들고는 외쳤다.
그는 이 행렬을 이끌고 있는 상단의 상단주였다.
“통행료를 지불하겠습니다! 공격을 멈춰주시오!”
마치 항복선언과도 같은 상인의 말을 들은 야만인들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를 원하시······.”
“가지고 있는 짐 전부!”
당황한 표정을 짓는 상단주를 보며 야만인들의 대장이 크게 외쳤다.
“맨몸으로 떠나라! 손에 뭐라도 쥐고 있는 놈들은 그게 저승길 노잣돈이 될 거다!”
행렬을 빙글빙글 돌며 큰소리로 미리 승리를 자축하는 야만인들.
야만인들의 도를 넘는 요구에 상인들은 당황하고 말았고 상행을 보호하기 위해 고용되었던 몇몇 용병들도 흔들리는 눈빛과 함께 입맛을 다실뿐이었다.
과연 짐을 놓고 떠난다 해도 저들이 얌전히 사람들을 보내줄까?
“······저 새끼들 맘에 안 드네요.”
“나도 좋아해 보려고 노력해봤는데 그게 안 되더라.”
일행 중 그 누구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고 가끔은 태풍처럼 몰아닥치는 시련을 묵묵히 감내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말 잡으러 왔다가 이게 뭐야.”
블라드도 일이 이렇게 흘러가리라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지금 다가오고 있는 야만인들도 일행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블라드는 가만히 왼쪽 눈을 감은 채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준비해라.”
“네.”
은퇴한 기사와 기사가 되고 싶은 소년.
둘 다 현직 기사는 아니었을지라도 들고 있는 검에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다만 그 힘이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말 고삐를 붙잡고는 뛰쳐나갈 준비를 하는 라문드와 달리 블라드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저들이 행렬에 다가오는 단 한 순간.
그것이 말을 타지 못하는 소년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일 것이다.
“후우······.”
블라드는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남자들을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러나 소년이 가지고 있는 약점은 단순히 말을 타지 못한다는 것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히이이잉-!
뭐가 있다-!
말들이 놀랐어!
“젠장!”
조용히 야만인들을 기다리고 있던 블라드는 갑작스레 멈춰서는 그들을 보며 일이 글렀음을 느꼈다.
결국, 그동안 제어하지 못했던 기이한 기세가 소년의 발목을 크게 붙잡고 말았다.
“나가라! 지금!”
“빌어먹을!”
의도한 만큼 다가오지도 못했고 저들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더는 기다릴 수 없으니 검을 휘두르려면 오직 지금뿐이었다.
비록 늙은 몸이었으나 말을 박차며 번개처럼 뛰쳐나가는 라문드.
그의 온몸은 이미 반짝이는 오러로 뒤덮여 있었다.
“저것들은 뭐야!”
“말을 돌려! 거리를 벌려라!”
심상치 않은 기세로 달려드는 두 명을 보며 야만인들이 뒤로 물러나려 하였으나 이미 라문드는 그들의 지척까지 다다랐다.
“네 이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야만인들을 잡아 세운 라문드가 매섭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평생을 바쳐 지켜온 땅을 어지럽히는 녀석들이었으니 일말의 자비도 필요 없을 터.
그의 오래된 검 위로 붉은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오러다!”
“왜 여기에 기사가!”
반짝이는 라문드를 보며 당황한 야만인들이 고삐를 잡아채고는 서둘러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딜 가 이 새끼들아!”
라문드보다는 늦었지만 특유의 기민한 움직임으로 달려나간 블라드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야만인에게 달라붙었다.
[말을 노려라!]목소리의 조언에 따라 말의 무릎을 베어내자 그 위에 타고 있던 야만인이 균형을 잃고는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내려와!”
고통과 공포.
블라드가 주는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말은 기수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날뛰기 시작했고 소년은 그 틈을 노려 재빨리 위에 타고 있던 야만인을 낚아챘다.
“크억!”
“아까처럼 웃어봐! 새끼야!”
볼품없이 달려오게 만든 값까지 합해 장식 없는 검이 번뜩였다.
울부짖는 말과 터져나가는 핏방울.
갑작스레 뛰쳐나온 두 명에 의해 야만인들의 기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돌아가라 블라드! 가서 사람들을 지켜!”
반쯤은 실패한 기습이었지만 두 명의 사내는 자신들의 능력으로 야만인들에게 한 방을 먹이는 것에 성공했다.
“꺄아아악!”
“안돼! 안돼!”
그러나 행렬은 길게 늘어서 있었고 야만인에게 대항하는 사람들은 블라드와 라문드 두 사람뿐이었다.
울부짖는 사람들을 제물 삼아 용병들이 달아나고 있었으니까.
“저 개자식들.”
블라드는 달아나는 용병들을 향해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작 용병에 불과한 그들은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목숨을 걸 이유가 없었다.
“대장!”
그나마 고트가 검을 들고는 분전하고 있었으나 그는 잡기에 능한 사람이었지 검을 다루는 데는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곳곳에서 피와 비명이 난무하고 있었다.
[천천히 영역을 굳혀라. 여기 있는 모두를 지킬 수는 없다.]‘빌어먹을······.’
목소리의 말이 맞았다.
블라드의 검 끝은 쉴 새 없이 치고 빠져나가는 야만인들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차라리 저들과 같이 말을 타고 움직였다면 모르겠으나 블라드는 땅에 붙박혀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내려와서 싸우잔 말이다.
비겁하게 들쑤시고 다니지만 말고.
그러나 마치 소년의 생각을 비웃듯 야만인들은 벌떼처럼 쉴새 없이 행렬 곳곳에 달라붙으며 빼앗고 죽이고 사람들을 상처입히고 있었다.
말과 기동력.
야만인 특유의 전술로 유린당하는 사람들은 그저 단말마와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는 수밖에 없었다.
“엄마······엄마.”
흙바닥에 뒹군 채 엉망이 된 아이를 피투성이의 아버지가 잡고는 감싸 안았다.
그 참혹한 광경을 보며 블라드는 서둘러 라문드를 찾아보았으나 그 또한 어려운 상황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라문드가 끌고 나간 말은 짐말이었으며 그것만으로는 날렵하게 움직이는 야만인들을 잡아 세울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야만인들의 대장처럼 보이는 남자를 뜯어내어 행렬 바깥으로 몰고 나가는 라문드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소년은 또다시 무력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보며 분노하고 말았다.
세계의 모습은 다양하다.
높아서 닿을 수 없고 거대해서 감당할 수 없고 빨라서 붙잡을 수 없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다양한 한계들을 느끼며 블라드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또다시 이렇게 되었다.
히이이잉-
오롯이 혼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순간 속에서 블라드의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
오랫동안 듣지 못했지만 한 번에 알아챌 수 있는 그런 소리였다.
“뭐야 저건!”
“그놈이다!”
“그때 빠져나가더니!”
저 멀리서 시작된 까만 점 하나.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 야만인들을 헤치고 다가오는 존재감이 있었다.
블라드는 지금 달려오고 있는 새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찾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기다!”
높게 치켜든 장식 없는 검에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봐라, 내가 여기 있다.
움직이지 못하는 소년과 올가미를 피해야만 했던 말이 서로를 알아보았다.
“······!”
스쳐 지나가는 새까만 밤이 재빨리 별 하나를 자신의 위로 태웠다.
블라드는 어느새 높아진 시야를 치켜뜨며 자신도 모르게 그날과 같이 손을 내뻗었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공기의 흐름이 말하고 있었다.
“가자!”
히이이이힝-
이제는 달릴 수 있노라고.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된다.
갈 곳 잃었던 장식 없는 검이 똑바로 치켜세워졌다.
소년이 감고 있는 왼쪽 눈에 흐르는 세계.
새까만 말 위에 흐르듯 세워지는 하얀색의 뿔 하나.
서로가 가진 한계의 끝에서 두 개의 세계가 맞닿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