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67
레이디 제미나 (2)
히이이힝-
가지고 있는 세계가 선명할수록 경계는 명확해진다.
새까만 녀석이 가지고 있던 초원의 색깔만큼이나 인간들이 둘러 쳐놓은 성벽의 경계는 명확했다.
“······.”
색깔이 선명한 소년과 말은 여전히 다른 세계들과 섞이기 어려운 존재들이었다.
블라드와 새까만 녀석은 인간의 경계 아래 서서 쇼아라의 성벽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
“왔냐.”
라문드는 술잔을 기울이며 저 아래서부터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년을 향해 말했다.
아직 문을 열지 않는 여관에서 손님이라고는 오직 노인과 소년뿐.
조용히 울려 퍼지는 라문드의 목소리는 작게 말했어도 소년에게 충분히 닿고 있었다.
“효과는 좀 있더냐.”
“조금은요.”
노인의 물음에 블라드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답했다.
“그 야만인 놈이 허튼 걸 알려주지는 않았나 봐요.”
“뭐, 초원의 일은 야만인 놈들이 제일 잘 알 테니까 말이다.”
그 말과 함께 술잔을 들이켜는 라문드의 시야로 붉은색의 꽃다발이 비치고 있었다.
장미꽃.
보기만 해도 화사해 보이는 꽃다발 한 묶음이 소년의 손에 들려있었다.
“말 주제에 취향 한 번 확실하지.”
“이거 따라 움직인다잖아요.”
야만인들의 추격을 피해 마침내 쇼아라로 돌아온 그 날, 블라드는 새까만 녀석의 거부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인간들이 바글거리는 성벽 안으로 들어가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녀석의 행동에 블라드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당황하고 있을 때, 얼굴에 문신을 가득 새긴 야만인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 녀석은 붉은색을 좋아한다고.
자신의 머리를 묶은 붉은색의 끈을 가리키며 말이다.
“야생마들이 덩굴장미를 따라 움직이는지는 몰랐네요.”
“나름 본능에서 찾아낸 방법이겠지.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테니.”
야생마들은 풀을 뜯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추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얼어붙은 초원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내어주지 못할 테니까.
그런 야생마들에게 있어 따뜻한 기운에 따라 몸을 펼치는 덩굴장미는 생존과 직결된 신호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요걸로는 모자란 모양이네요.”
블라드는 테이블에 장미 꽃다발을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붉은색이 많을수록 좋겠죠?”
“그렇지.”
“클수록 좋고.”
“대는 소를 겸하는 법이지.”
“······거기에 움직이기까지 하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말을 마친 블라드는 시선을 돌려 저 아래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붉은색을 바라보았다.
자기 몸보다도 더 큰 이불을 짊어진 채 끙끙거리며 움직이는 붉은 머리 소녀.
블라드가 알고 있는 붉은색 중 가장 화려한 색깔이 저 아래에 있었다.
“저 정도면 충분히 장미라 할 만하지.”
블라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라문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요즘 사이 안 좋아 보이던데 말이다.”
“원래 그런 사이예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소년을 보며 라문드는 안타까운 듯 혀를 끌끌 차댔다.
가끔은 너무 가까이에 있어 소중한 줄 모르는 존재들이 있었다.
“원래 그런 사이가 어디 있어. 이놈아. 다 그렇고 그런 사이뿐이지.”
그러나 블라드의 시선은 여전히 제미나의 붉은 머리에만 닿아있을 뿐 노인의 한탄과도 같은 충고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 볼게요.”
며칠이 지난 지금도 새까만 녀석은 성벽 밖에서 소년을 기다리며 침울하게 서 있었고 그 녀석이 없으면 블라드는 또다시 기약 없는 달구지 생활을 해야만 한다.
자신을 쇼아라 밖으로 내보낸 준 소녀가 이번에는 새까만 녀석을 안으로 들여와 주길 바라면서 블라드는 내려놓은 꽃다발을 들고서 제미나를 향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다급한 몸놀림으로 소녀에게 다가가는 블라드를 보며 라문드는 끌끌 혀를 찰 뿐이었다.
※※※※
“제미나.”
“······뭐야.”
조만간 문을 열 여관의 준비를 하느라 바쁜 제미나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블라드를 보며 세모꼴로 눈을 치켜떴다.
“나 바쁘거든.”
“잠깐 내 말 좀 들어봐.”
블라드의 다급한 제지에도 제미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의 일을 해나갈 뿐이었다.
오랫동안 허드렛일을 해온 제미나의 손끝에서 커튼은 제자리를 찾고 침대 시트는 칼같이 정리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은 레이디 알리시아 님께 가서 말씀하세요. 저는 바쁘니까요.”
“······.”
아직도 블라드의 품에서 나온 손수건에 상심해 있던 제미나는 블라드를 무시할 뿐이었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죽을 고생을 다해서 목숨을 구제해줬더니 고작 돌아오는 것이 다른 여자의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이라니.
제미나의 입장에서는 크게 토라질 만한 일이었으니까.
“부탁 좀 하자니까.”
“바쁘다니까. 바쁜 거 안 보이냐고!”
자꾸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블라드를 보며 제미나가 크게 소리를 내지르는 찰나.
“야.”
“······이게 뭐야.”
갑자기 자신의 앞에 드리워진 붉은 꽃다발을 보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거 들고 나 좀 도와줘.”
“······네 부탁은 레이디 알리시아한테 가서 말하라니까.”
“아니.”
블라드는 꽃다발을 든 채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레이디 제미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야.”
“······.”
제미나는 블라드의 입에서 나온 단어를 들으며 그제야 고개를 들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붉은 꽃다발을 건네는 푸른 눈동자의 소년.
무엇하나 시선을 떼기 힘든 색깔들 속에서 제미나는 애써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무슨 일인데.”
레이디 제미나라는 말을 들어서가 아니었다.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제미나는 블라드의 말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이거 들고 나랑 어디 좀 가자.”
자신이 쥐여준 꽃다발을 든 채 점점 얼굴이 새빨개지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가 웃음 지었다.
붉은 머리, 붉은 꽃다발, 그리고 붉어지는 얼굴.
붉어질수록 좋다.
이 정도면 분명 그 녀석도 좋아할 테지.
그렇게 생각하며 블라드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다 업보지. 쯧쯧.”
4층에 있는 난간에 기대서 술잔을 홀짝이고 있던 라문드는 혀를 끌끌 차며 블라드가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앞에 상황에 정신이 팔린 블라드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몰랐겠지만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라문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꽃을 피워낸 자는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라문드의 눈에는 시선을 피하려 애쓰는 소녀의 얼굴에서 빨갛게 달아오른 장미꽃 한 송이가 보였다.
※※※※
간수가 쥐여준 횃불을 들고 앞으로 나서는 요제프와 자야르.
어두컴컴한 감옥 안에서 창살을 앞에 두고 두 사내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서로의 세계를 가르고 있는 창살 앞에 선 두 사람.
횃불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요제프의 짙은 눈그늘을 더욱 어둡게 만들어내었다.
“도시의 시장께서 야만인 따위를 보러 오시다니 이것 참 영광이로군.”
“부디 내가 이곳까지 내려온 보람이 있기를 바란다.”
창살 안에서 이죽거리고 있는 아게였지만 요제프는 그의 도발 따위에는 흔들리지 않은 채 자신의 할 말을 내뱉었다.
“너희가 말을 따라 내려온 진짜 이유를 알고 싶다.”
아게는 나이에 맞지 않게 깊은 요제프의 눈동자를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냉정함이나 위엄을 억지로 내보이려는 자들은 많이 보아왔으나 진실로 속에 그것들을 품고 있는 사람은 몇 보지 못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쇼아라의 시장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임에도 그것들을 갖추고 있었다.
“필요했기 때문이었지.”
“나는 지금 그 필요에 대해 묻고 있다.”
아게의 성의 없는 대답에 횃불을 들고 있던 자야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맨 처음에는 너희 부족의 전통이나 의식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니더군.”
요제프는 라문드를 비롯해 야만인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자들에게 자문을 구했었다.
그리고 요제프의 질문에 그들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에게 있어 야생마들을 부리는 것은 오히려 금기시되는 사항이라 들었다. 맞나?”
“······.”
모든 세계는 가장 빛날 수 있는 각자만의 영역이 있다.
검을 든 자는 전장에서, 곡괭이를 든 자는 농토에서.
그리고 달려야만 빛날 수 있는 야생마들은 푸른 초원에 있는 것이 가장 어울릴 것이다.
야만인들은 그런 원칙을 존중하는 사람들이었다.
“금기시되는 사항을 깨고, 강철공의 영역을 넘어서 이곳 바예지드 백작령에까지 이른 진짜 이유를 묻기 위해 이곳에 왔다.”
말을 마친 요제프는 이제는 네 차례라는 듯 입을 다문 채 그저 아게를 바라볼 뿐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기묘한 기세.
아게는 눈앞의 요제프를 바라보며 어쩌면 이 자가 자신의 물음에 답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게 또한 제국의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여기까지 잡혀 오는 동안 생각했다.”
흔들림 없는 요제프의 눈빛에 여태까지 편한 자세로 앉아 있던 아게가 천천히 일어서며 창살 앞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이곳으로 잡혀 온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지.”
어둠 속에서 다가온 아게는 두 손으로 창살을 붙잡은 채 요제프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었다.
물려고 하는 개는 짖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숨을 죽이며 기회를 엿볼 뿐.
“나와 나의 부하들이 부족의 금기를 어기면서까지 초원의 아들을 부리려 했던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아는 가장 빠른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요제프는 문신 가득한 아게의 눈빛을 보며 생각했다.
길들여지지 않는 소년의 눈빛과 닮았다고.
“너희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그것이 무슨 말이지?”
요제프는 아게의 눈빛에서 천천히 끓어오르는 분노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자신뿐만 아니라 북부 전체를 향하고 있었다.
“용이 미쳐 날뛰고 있다.”
“······?”
갑작스레 날아온 말에 요제프가 의아함을 느끼는 사이 창살 안에서 초원의 늑대가 포효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얌전했던 용이 미쳐 날뛰고 있단 말이다!”
창살 안에 갇힌 아게의 눈동자는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오직 아게 혼자만이 쌓아 올린 것은 아니었다.
제국에 의해 변방으로 내몰리고 끊임없이 배척받으며 살아가던 야만인 모두가 쌓아 올린 것이었다.
“너는 이곳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다.”
아게가 내뿜는 기세에 자야르는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 정도의 기세였다.
“용의 조각들을 어떻게 한 거냐.”
인간의 수장을 보며 으르렁대는 초원의 늑대.
그리고 늑대를 제압하려 한 발 나간 애꾸눈의 기사.
그 둘 사이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짙은 눈그늘의 사내는 아게의 말속에서 숨겨져 있던 불길한 징조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용이 미쳐 날뛴다.
부족장의 아들이 금기를 어기면서까지 미쳐 날뛰는 용을 막기 위해 말을 찾아 내려왔다.
그것도 제국의 영역 깊숙한 곳까지.
요제프의 새까만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를 쓰러뜨렸던 금발 소년을 데려와다오.”
“이유는.”
뜨거운 분노를 뱉어낸 아게는 이번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창살에 머리를 기대었다.
“가장 빠른 용을 따라잡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신령한 피를 이어받은 초원의 아들뿐이니까.”
몰락한 용의 잔재들.
세상 곳곳에 흩어져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어떨 때는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두려움의 근원이기도 했다.
완벽했던 용의 피라는 것은 그만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의 영역에서만 끝날 일은 아닐 거다. 그렇지?”
“······.”
흔들리는 횃불 아래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두 남자.
둘은 어두운 감옥 안에서 더는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