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69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1)
눈안개가 가득 핀 설산의 한복판.
검은 머리의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눈앞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 죽었군.”
“딱 봐도 그런 것 같네요.”
루트거의 말에 도로테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산이 내뱉는 차가운 숨결 위에 놓여져 바짝 얼어붙고만 몬스터의 사체들.
비록 참혹한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그들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단말마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표정 속에 박혀 있었다.
“순식간에 당했네요. 처음의 녀석은 자기 죽음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요.”
도로테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회색 오크의 사체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움직였네요.”
“······.”
루트거는 도로테아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 보았다.
과연 그녀의 말이 맞았다.
처음의 사체는 앞을 보고 있었고.
중간의 사체는 뒤를 돌아보려 하고 있었고.
마지막 사체는 마침내 뒤를 돌아보았으나 피하지 못했다.
그렇게 주위에 널려있는 오크들의 사체가 어림잡아 50여 구에 가까웠다.
“고개 한 번 돌릴 시간에 전부 다 죽여버렸단 말이로군.”
루트거는 사태를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거대한 것에 부딪혔는지 산산이 조각나버린 회색 오크들의 사체들.
소리 없이 다가왔으며 손쓸 수 없는 틈에 오크들을 짓밟고 지나간 존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죽음만을 남기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루트거는 여기저기 흩어진 오크들의 사지를 내려다보며 짙은 입김을 내뱉었다.
“······요제프의 보고가 맞았군.”
루트거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들어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날카로운 봉우리를 가진 설산은 루트거의 시선에도 자신이 무엇을 품고 있는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소드마스터에 의해 갈가리 찢긴 완벽한 존재는 땅 아래로 추락하며 자신의 피를 세계 곳곳에 흩뿌려대었다.
그리하여 생겨난 몰락한 용의 잔재들.
어떤 용은 날개를 잃고, 어떤 용은 눈을 잃고.
그렇게 용들은 자신이 용이라는 것도 잊은 채 세상 속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완벽한 다리를 지닌 존재 하나가 자신이 용인 것을 깨달았다.
※※※※
“이익!”
넓은 연병장 한가운데서 구슬땀을 흘리며 달리는 금발 소년.
블라드는 양팔, 양다리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묶어놓은 채 쉴 새 없이 달리고 있었다.
히이이힝-
의지는 앞섰으나 무거운 모래주머니에 의해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웃겼는지 새까만 녀석은 블라드의 옆을 따라다니며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너무 신나 보이는 녀석의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거칠게 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거, 이거 언제까지 해요?”
“이제 한계다 싶을 때까지다.”
“아니 왜, 왜 그렇게까지 해요.”
“내가 쓰는 오러를 배우고 싶다며? 그럼 잔말 말고 해라.”
단호한 라문드의 대답에 블라드는 고개를 돌린 채 이를 악물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턱 끝으로 떨어지는 땀방울 하나마다 마음속으로 라문드를 향한 원망을 내뱉으면서.
“······.”
라문드는 블라드가 뛰는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두운 뒷골목에서 태어났고, 화려한 창녀들과 살아왔으며 게다가 쓸데없이 겉모습까지 번지르르한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가지게 되는 편견이라는 것이 있었으나 눈앞의 소년은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그저 밭 가는 소처럼 묵묵히 뛰어갈 뿐이었다.
‘묘하게 성실하군.’
묵묵히 훈련에 임하는 블라드의 모습을 보며 라문드는 안심했다.
적어도 재능 하나만을 믿으며 날뛰는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뛰면서도 생각을 해라! 오러를 몸 안으로 집어넣는다는 상상을 하라고!”
헐떡이며 뛰는 블라드를 향해 큰소리로 외치는 늙은 기사.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무작정 뛰어다니게 하는 것은 언뜻 보면 낡은 방식의 훈련법 같아 보였지만 라문드는 단지 오래된 가치를 신봉하는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훈련 방식은 엄연히 지금 블라드의 상태를 생각하며 짜 맞춰 넣은 것이었다.
소년은 재능과 의지가 있었으나 그것을 풀어낼 검술과 체력이 부족했다.
오히려 뛰어난 신체 능력이 부단히 키워나가야 할 체력 단련을 소홀히 하게 만들었으니 라문드는 그것을 눈치채고 소년을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그때는 어떻게 했냐! 야만족 녀석을 땅으로 끌어내릴 때 말이다!”
한계에 맞닿는 육체는 계속해서 성장하기 마련이었고 힘이 빠져나간 육체는 자연스레 다른 것을 채워 넣으려 시도하기 마련이었다.
라문드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터득한 감각을 이용해 소년의 한계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있었다.
“끄으으으!”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라문드의 고함.
그 고함소리를 들으며 블라드는 다시 한번 왼쪽 눈을 감고는 세계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검으로써 표현되지 못하는 소년의 세계가 갈 곳을 잃은 채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이거 되는 거 맞아?’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연병장을 뛰어다니던 블라드는 목 끝에서부터 피 맛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라문드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고 그 눈빛을 볼 때마다 블라드의 가슴 속에서는 오기와 함께 안도감이라는 것이 퍼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도 되는구나.
내가 아직 할 수 있나 보다.
뚜렷한 목표와 방향이 없는 노력은 헛된 발버둥에 지나지 않겠지만 지금 소년의 옆에는 확고하게 길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고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블라드가 완전히 힘이 빠져버린 왼쪽 발을 땅 위에 내딛는 순간.
“······!”
완전히 힘이 빠져버린 육체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소년의 의지를 채우기 위해 세계 안에 있던 한줄기 색깔을 잡아서 붙들어내었다.
달리면서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던 그때의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와 소년의 허벅지에 닿았고 순간적으로 소년의 근육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마치 화살을 쏘아 보내는 시위와 같이.
“악!”
순간 시야가 앞으로 잡아 당겨졌다.
적어도 블라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갑작스레 자신을 앞질러 나가는 블라드의 도약에 새까만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낙법을 시도해라. 안 그러면 다친다.]“으으으!”
자신도 예상 못한 움직임에 블라드는 잠시 공중에서 허우적대고는 바닥을 우당탕 굴러대었다.
소년의 추락과 함께 흙먼지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
라문드는 그 모습을 보고는 가슴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한숨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기쁨과 허탈함, 그 중간쯤에 있는 한숨이었다.
“······하라고 시킨 거긴 한데 그걸 바로 해버리는구만.”
아끼는 것을 내어줄 때는 아쉬움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라문드에게 있어 평생을 갈고 닦아 만든 강체술(强體術)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으아! 쥐 올라왔어요! 쥐!”
히이이힝-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허벅지를 붙잡고는 바닥을 구르는 블라드.
그런 블라드의 옆으로 다가와 감히 자신을 앞질렀다며 씩씩거리며 콧김을 내뱉는 새까만 녀석.
그러나 라문드는 그 난리를 보면서도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걸어갈 뿐이었다.
늙었다 할지라도 쉽사리 놓을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
아무도 없는 테이블에 블라드가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바로 앞에는 마르셀라가 만들어 놓은 저녁이 차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숟가락 하나도 들기 힘든 상태였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아침에는 자야르와의 지도 대련.
점심에는 라문드와의 오러 훈련.
그리고 저녁에는 목소리와 대화하며 오늘의 성과에 대한 토론까지.
한 명의 가르침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상황이었고 블라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육체가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블라드가 받아들여야 하는 스승의 가르침은 세 가지였으며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세계들이었으니까.
“여어. 대장. 잘 지냈어?”
“······꺼져.”
블라드는 계단을 올라오며 자신을 향해 웃음 짓는 고트를 항해 으르렁거렸다.
“내가 웬만하면 대장 말을 듣고는 하는데 지금은 꺼질 수가 없어요. 요제프 님이 앞으로 여기서 지내라고 했거든.”
고트는 힘없이 허우적거리는 블라드에게 미소 지으며 테이블 옆으로 자신이 챙겨온 짐들을 내려놓았다.
“말이 있는 곳에는 마구간지기가 있어야 하는 법이잖아.”
“······.”
역시 그때의 녀석과는 뭔가 인연이 느껴졌다며 너스레를 떠는 고트를 보며 블라드는 씨익 웃어주었다.
“그래?”
혼자만 개고생하는 것은 억울하다.
그러나 둘이서 같이 한다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겠지.
갑갑한 곳이 싫다며 마구간을 두 번이나 뛰쳐 나간 새까만 녀석을 생각하며 블라드는 어깨를 으쓱대었다.
“힘내라.”
“응? 으응.”
자신을 향해 기묘한 미소를 짓는 블라드를 보며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드는 고트였다.
블라드는 마치 굳어있기라도 한 듯 뻑뻑한 고개를 애써 돌려 반대편에 앉아 있는 제미나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날아온 선물들을 정리하며 목록을 작성하고 있는 제미나.
비록 며칠 전의 화려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지만, 귓가에 달린 귀걸이만큼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귀걸이 하나 사줄까?”
“이거 비싼 거야.”
“근데 마르셀라 거잖아.”
“이제는 내 꺼야.”
마르셀라가 내어준 드레스와 장신구들로 새까만 녀석을 끌어왔던 소녀.
간절히 원한 일을 해결해주었기에 뭐라도 하나 해주고 싶은 블라드였지만 제미나는 냉정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제대로 된 봉급도 못 받는 주제에 남의 귀걸이 신경 쓰지 말고 돈이나 열심히 모으시지.”
“용돈은 받고 있거든.”
“하!”
용돈을 받는다며 당당히 지껄이는 블라드를 보며 제미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거 알아? 지금 영감님이 여기서 지내는 값은 다 네 앞으로 달리고 있다는 거?”
“······왜?”
생각지도 못한 말이 제미나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블라드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몰라. 그 정도는 네가 내야 한대.”
“왜!”
“나도 몰라!”
제미나는 빽하니 소리를 지르고는 블라드를 향해 여태껏 적어놓았던 장부를 퍽 하니 밀쳤다.
“아무튼 지금 너는 빚쟁이야! 그거 알아두라고!”
겨우 용돈 받는 거로 만족하지 말라는 듯 눈을 흘기고는 계단을 내려가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의 시선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왜?”
흔들리는 블라드의 시선만큼이나 제미나가 적어넣은 장부에는 삐뚤거리는 글자들이 가득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소년만큼이나 소녀 또한 뒤를 따라가려 애쓰는 중이었다.
※※※※
“흥. 겨우 귀고리 따위로 빚을 갚으려 하다니 어림도 없지.”
히이이힝-
제미나는 1층에 마련되어 있는 마구간으로 내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새까만 녀석을 향해 당근을 내밀었다.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오구오구 잘 먹는다.”
제미나가 내어준 새빨간 당근을 씹으며 새까만 녀석이 기분 좋다는 듯 투레질을 해댔다.
“그래. 이거 먹고 나 좀 도와줘. 알았지?”
제미나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다는 듯 새까만 녀석이 고개를 끄덕여댔다.
마르셀라는 말했었다.
기사를 잡아 세우려면 기사가 타고 있는 말부터 잡아채라고.
전직 쇼아라의 장미가 해주는 조언을 들으며 제미나는 각오를 다졌다.
그저 소년의 뒤를 지켜만 보는 것으로 끝내지 않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