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70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2)
인생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에 오직 혼자서 감내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런 개 같은 명령은 따를 수 없어.”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이 와야만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여태껏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던 껍질을 벗어던질 수 있는 순간이 바로 그때이니까.
보름달이 떠 있는 밤하늘 아래, 차마 앞에 있는 나룻배를 타지 못한 채 울먹이는 드워프들.
비쩍 말라버린 얼굴과 엉망이 된 수염이 그들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건 아니지.”
거대한 덩치의 기사.
칼을 빼든 기사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공포에 떨고 있는 드워프들을 자신의 몸으로 가렸다.
“명령을 무시할 셈이냐. 호르헤.”
“너는 나의 주군이 아니야. 지그문드.”
거대한 덩치의 기사. 호르헤.
그가 매서운 눈빛으로 눈앞의 사내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가이다르 백작님께 충성했고 너는 그분이 아니야.”
“내가 가져온 명령서에는 아버지의 낙인이 찍혀져 있다.”
지그문드는 호르헤의 앞에서 거칠게 명령서를 흔들어대었다.
달빛 아래 비치는 가이다르 가문의 인장은 한치의 조작도 없는 진실이었다.
“······.”
비록 명령서 안에 담겨있는 진의가 어찌 되었든 지그문드가 들고 있는 절차와 명분은 완벽했다.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 기사는 명령을 불복하게 되는 것이며 이는 기사의 맹세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나는 사람이야. 그딴 명령은 따를 수 없어.”
“······.”
그리고 호르헤는 선택했다.
거짓된 명령과 함께 기사의 맹세도 같이 뱉어내기로.
그 말과 함께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르헤의 말에 동조하는 자는 그의 옆으로.
비록 거짓되었다 할지라도 주군의 명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지그문드의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서로의 시선 속에서 기사들은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고딘은 주저하는 심정으로 호르헤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선배는 언제나와 같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고 싶은 걸 해라.”
“······미안합니다.”
“가 봐.”
누가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 속에서 고딘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영광과 명예.
그리고 더욱 빛날 수 있는 세계를 향해.
고딘은 기사였다.
※※※※
“들어와라.”
블라드는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시장실의 문을 열었다.
커튼을 활짝 열어젖힌 창가로 환하게 비치는 오후의 햇살.
그 햇살을 뒤로 한 채 앉아 있는 짙은 눈그늘의 남자와 그의 기사들이 그곳에 있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요제프는 앉은 채로 허리를 세우고는 문을 열고 들어온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근신 명령을 내리고 나서 처음 보는 소년의 모습은 자신에게 대들었던 그때와는 다르게 조금은 진중해져 보였다.
“그동안 바빴다지?”
“······조금은요.”
우물우물하며 대답하는 블라드를 보며 요제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떨 때는 불같이 덤벼들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무겁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영 종잡을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도시에 소문이 자자하더군. 새까만 말도 그렇고.”
소년을 바라보던 요제프의 미소에서 잠깐 장난기가 감돌았다.
“레이디 제미나라던가?”
“······.”
“알리시아 남작이 들으면 가슴을 칠 일이군. 그녀의 손수건은 아직 잘 간직하고 있나?”
제미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블라드는 난처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일이 이렇게 커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으니까.
누군가는 장난삼아 부르는 호칭이었겠으나 분명 레이디 제미나라는 이름은 소년이 쌓아 올린 명성과 함께 쇼아라를 떠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일이 뭐가 있나. 나중에 불똥만 안 튀기게 조심해다오.”
요제프는 천천히 기사라는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소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소년의 이름값은 자신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명예를 대신 증명해줄 정도로 가치가 높아졌다.
그러니 여기서 알려줘야 한다.
언제까지나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까.
“내가 오늘 너를 부른 이유는 무언가를 전해주기 위해서다.”
“······?”
갑작스레 진지해진 요제프의 어투에 블라드는 고개를 들었다.
“그날 우트만 남작령에 있는 마을에서 너는 나의 명령을 저버리고 아이들을 구했다. 맞나?”
“······그렇습니다.”
다시금 그때의 일이 요제프의 입에서 나오자 블라드의 자세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나 요제프는 이미 끝난 일을 다시 들먹여 소년을 겁줄 생각이 없었다.
블라드는 이미 근신으로써 자신의 죗값을 치른 상태였으니까.
“또다시 그때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어찌할 거냐? 이번에도 내 명령을 무시할 거냐?”
갑작스레 그날의 일을 되물어보는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는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서둘러 시선을 돌려 근처에 있던 다른 기사들을 둘러보았으나 그들 모두 미묘한 표정만을 지을 뿐 딱히 무어라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요제프의 질문에는 오직 블라드 혼자만이 생각하고 대답하고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었으니까.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블라드는 입술을 깨물고는 요제프의 물음에 답했다.
또다시 벌을 받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자신은 요제프에게 신의를 바치기로 맹세한 사람이었으니 그의 앞에서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똑같이 하실 거냐고 물으신다면 그렇습니다.”
비록 주춤거리는 몸짓이었으나 눈빛만은 흔들리지 않는 블라드를 보며 요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똑같은 선택을 하는구나.
블라드의 대답은 요제프에게 씁쓸한 기분이 들게 했지만,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모습이 있었기에 소년을 선택한 것이었으니까.
“명예란 남을 비추는 빛이지만 양심은 자신을 비추는 빛이다.”
요제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년을 향해 말했다.
비록 왜소한 육체였으나 흘러나오는 존재감이 자연스레 요제프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게 했다.
“또한, 나아갈 곳을 잃었을 때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이기도 하지.”
방금의 대답으로 요제프는 소년을 확실히 파악했고 소년 또한 자신이 누군지 알았을 것이다.
블라드는 진창 같은 뒷골목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기준을 정해놓았고 그렇기에 반짝이는 별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준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양심이 될 것이다.
“너는 너의 길을 찾았으니 부디 이 갑옷이 너의 양심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요제프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옆에 세워져 있던 천을 걷어내었다.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갑옷.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비치는 빛을 보며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이건······.”
“산 로지노에서 보낸 갑옷이다. 철제 갑옷을 가장 많이 다루는 집단이니만큼 다양한 기술이 녹아 있는 갑옷이지.”
블라드는 요제프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 터져있는 자신의 가죽 갑옷을 내려다보았다.
애처롭게 찢어져 있는 흉터 하나하나에 여태껏 자신이 걸어왔던 길이 새겨져 있었지만, 이제는 소년을 지켜줄 수 없는 갑옷이었다.
“가봐라.”
여태까지 조용히 응접용 테이블에 앉아 있던 라문드가 머뭇거리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언제까지고 깨어진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을 수는 없다.
블라드라는 존재는 더는 바예지드가 주목하는 가능성이라는 말만으로 온전히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으니까.
“네.”
햇빛이 비치는 갑옷을 향해 소년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하고 싶은 일을 했고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런 소년의 발버둥을 산 로지노가 증언했다.
이곳에 있는 기사들이 증인 삼아서.
산 로지노가 내어준 갑옷을 입은 소년.
반짝이는 소년의 흉갑 한편에는 성기사들이 증언한 그 날의 문구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기사라는 문구가.
※※※※
“역시 북부에서는 강철공과 바예지드의 기사들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요즘 들어 우트만 남작가의 기사들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인다는 말이 있긴 한데······.”
촛불을 밝힌 집무실 안.
가이다르의 기사와 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고딘이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말해봐라.”
“네.”
고딘의 지시에 부관이 여태껏 조사해놓았던 기사들의 명단을 읊기 시작했다.
“강철공 바라노프 공작가문의 기사 슈반덴, 미하일, 바스트로······.”
“바예지드 백작 가문의 기사 안탈라스, 루트거, 아고스······.”
고딘은 귓가에 들려오는 기사들의 이름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로마노브 가문을 몰아낸 가이다르는 이제는 명실공히 서부의 패자가 되었으며, 이제 그들의 시선은 서부가 아닌 다른 지역을 향해 있었다.
“바예지드 가문은 바뀐 이름들이 없군.”
“바예지드 백작의 아들인 루트거를 제외하고는 딱히 눈에 띄는 자들이 없습니다.”
강철공의 가문인 바라노프에는 새로운 이름들이 속속들이 출현하고 있었지만 바예지드는 몇 년 전 보고받았던 그때의 이름들과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세대교체에 실패한 모양입니다.”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예지드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은 고작 보고서 한 장 따위로는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예전의 자신처럼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기사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바예지드에는 조금 특이한 동향이 있습니다.”
“말해봐라.”
과연 이것까지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부관은 눈빛으로 재촉하는 고딘을 보고는 보고서에는 적혀있지 않은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
“기사는 아니지만 바예지드의 종자 중 두각을 드러내는 소년이 있다고 합니다.”
“이름은.”
부관은 잠시 머릿속을 헤집어내고는 가라앉아 있던 이름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블라드라고 합니다. 출신지는 바예지드 백작령의 쇼아라입니다.”
“······.”
고딘은 부관의 말을 듣고는 눈썹을 찌푸리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분명 기억에 있는 이름인데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어마르의 명예 결투에서 맨 처음 등장한 소년인데······영 믿을 수 없는 소문들 뿐이라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관이 블라드의 이름을 내뱉는 것을 주저한 이유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오러를 뿜어냈다고는 하는데······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오러? 종자가?”
부관의 보고를 듣고 있던 다른 기사들이 콧방귀를 뀌며 웃고 말았다.
기사도 아닌 어린 녀석이 벌써 오러를 뿜어냈다는 소문을 믿는 것보다 수집해 온 정보들이 잘못되었다는 판단이 더 신빙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쇼아라······블라드······.”
그러나 고딘은 기사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가만히 눈을 감고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뿐이었다.
낯설지 않은 도시의 이름을 읊조리자 하얀 벌판에서 만났던 금발 소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모닥불 옆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던 소년.
난생처음 오러라는 것을 본 소년의 푸른 눈에는 별과 같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알았다. 다들 지금의 이름들을 숙지하도록.”
지그문드 백작의 새로운 기사단장인 고딘.
그의 명과 함께 가이다르의 기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단장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블라드, 블라드라.”
고딘은 의자에 앉아 목을 젖히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당돌한 녀석이었지.
가능하다면 데려오고 싶었지만, 운명과도 같은 인연이 둘을 갈라놓았었다.
비록 오러를 뿜어내었다는 바예지드의 종자가 자신이 보았던 소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고딘은 그저 추억 속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뿐이었다.
“하고 싶은 걸 해라.”
소년의 이름과 함께 떠오른 또 한 명의 사람.
고딘은 그날 밤 호르헤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을 입에서 굴리며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그때 만약 자신이 호르헤를 따라갔더라면 어땠을까.
“······그랬을 리가 없지.”
고딘은 씁쓸한 미소와 고개를 내저었다.
선택의 기로에서 고딘은 호르헤가 아닌 지그문드를 향한 선을 넘었다.
걸음을 옮겨 그 선을 넘는 순간 고딘은 자신이 누군지를 깨달았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까지도.
“그놈은 잘 살고 있나.”
아무도 없는 집무실 안에서 고딘이 부르는 조용한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푸른 눈의 소년이 저 멀리서 자신을 불렀을 때 냈던 소리.
끝나가는 여름에 맞는 뻐꾸기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