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72
차가운 심장을 가진 용 (2)
“이번에는 한 달은 걸릴 거야.”
블라드는 그 말과 함께 자그마한 의자를 끌어당기고는 벽에 기대어 검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촛불에 비치는 장식 없는 검은 언제나처럼 소년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흐음. 바쁜 게 좋은 거지.”
블라드의 말에 성의 없이 대답한 제미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깃발을 안아들고는 바느질을 하는 중이었다.
고귀한 귀부인이 박아넣은 문장들의 옆으로 붉은 머리의 소녀가 꿰매어 넣는 문장 하나가 새겨지고 있었다.
“요즘 잘 나가네. 블라드.”
옆에 박혀 있는 문장들과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해 바느질을 하고 있던 제미나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어 앞에 있던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아주머니도 이 모습을 보셨으면 좋아하셨을 텐데.”
블라드는 갑자기 자신의 어머니를 이야기하는 소녀를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제미나는 가끔 이런 식의 맥락 없는 대화로 블라드를 당황하게 만들고는 했다.
“······그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
“아니, 갑자기 생각이 나네.”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블라드의 어머니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몇 없겠지만 제미나는 그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추억을 말할 수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사람.
“나는 우리 엄마는 기억 안 나는데 너희 엄마는 기억이 나더라.”
“······그래?”
소녀가 무심히 내뱉는 말속에서 상처 같은 흔적들이 묻어나고 있었다.
블라드의 어머니는 죽음으로 아들을 놓은 것이었지만 제미나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제미나는 뒷골목의 수많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버려진 아이였다.
“나도 우리 엄마 기억 잘 안나.”
스스로는 돌볼 수 없는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제미나의 말속에서 그 흔적을 발견한 블라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심드렁히 대답할 뿐이었다.
그것이 소녀에게 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려 중 하나였으니까.
“다 됐다.”
블라드의 고민 어린 말을 제대로 듣기는 했는지 제미나는 손을 탈탈 털고 일어나서는 보란 듯 하얀 깃발을 펄럭일 뿐이었다.
“이 정도면 크게 티 안 나지? 백작 부인의 솜씨가 너무 좋았단 말이야.”
소년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하얀 깃발.
그곳에 붉은 머리 소녀가 새롭게 새겨준 문장 하나.
“······멀리서 보면 티 안 나겠네.”
산 로지노의 문장이 촛불에 비쳐 반짝이고 있었다.
블라드가 무심한 척 제미나를 배려했듯이 제미나 또한 평소와 마찬가지인 모습으로 위험한 곳으로 나아가는 블라드를 배려했다.
용이라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위험한 존재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옆방에 있는 경험많은 노기사가 단단히 채비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겨울에나 오겠네. 그럼.”
“아무래도 그렇겠지. 가을은 빨리 지나가는 계절이니까.”
“그럼 이것도 가져가.”
블라드는 제미나가 아무렇지 않게 침대맡으로 툭 던져낸 천 조각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뭐야.”
“손수건이야.”
깃발만큼이나 새하얀 손수건을 내려다보며 블라드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걸 여태까지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할 일이 없었나 봐?”
“쓰지도 못하는 손수건 들고 다니는 게 불쌍해서 만들어줬더니만.”
제미나의 말에 블라드는 손수건을 쥐어 들고는 자세히 바라보았다.
알리시아의 손수건은 제미나의 말대로 화려한 비단으로 만들어져 있어 실제로 사용하라고 만든 물건은 아니었다.
“순면이야. 여기저기 쓰기 좋을 거야.”
자신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준 제미나의 흔적을 보며 블라드는 가만히 손수건을 손에 쥐었다.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나간 제미나.
오직 혼자만 남은 방에서 블라드는 제미나의 이름이 적힌 손수건을 조심스레 접어 가슴팍에 넣어놓았다.
“······쓰라고 만들었는데 이름은 왜 새겨놔.”
알리시아의 손수건과 함께 잠들 제미나의 손수건은 소녀의 의도대로 될 운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쉽사리 빠지지 않도록 블라드가 흉갑 깊숙한 곳에 박아넣었으니까.
※※※※
하얀 평원이 끝없이 이어지는 설원을 따라 북쪽으로 움직이는 일행들.
일주일이 넘는 전진 끝에 마침내 바예지드 백작령 최북단에 다다른 그들은 목적지인 베른헴 요새에 반나절 정도의 거리를 남겨놓은 상태였다.
야만인들의 남하를 막고 린드부름에 대한 정찰을 하고 있을 그곳에는 루트거가 미리 배치해 놓았던 기사들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분명 너 하나만 달라고 했거든.”
“······.”
“그런데 분명 하나를 내어달라고 했는데 셋을 주었단 말이야. 이게 무슨 뜻일까?”
“······형님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요?”
루트거는 블라드의 자신 없는 대답에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요제프 놈이 나한테 무언가 불만이 있는 게 틀림없어.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하는 루트거를 보며 블라드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요제프가 일부러 그랬을 리는 없었겠지만, 저 뒤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두 사내를 보면 그런 오해를 할 법한 상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야만족의 전사와 바예지드의 노기사.
잘 다룬다면 분명 큰 쓸모가 있겠으나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섞일 수 없는 두 사람을 보며 루트거는 골치가 아플 뿐이었다.
“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진이 빠졌다. 이제부터 저 둘은 네가 관리해라.”
“저는 그럴만한 위치가 안 되는데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거절이었지만 블라드는 요제프만큼이나 눈그늘이 내려앉은 루트거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게는 제쳐두고라도 라문드는 오랫동안 바예지드에서 일해왔던 기사였기에 루트거로서는 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라도 강하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번 열심히 해볼게요.”
“고맙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차라리 엉겨 붙기라도 할 수 있는 블라드가 더 나은 대안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루트거가 봤을 때 블라드를 대하는 라문드의 태도는 분명 말랑한 면이 있었으니까.
“용케 감옥에서 안 죽고 기어 나왔구만.”
“영감도 여태까지 용케 안 죽고 살아계시네. 옆에만 있어도 흙냄새가 나는데 말이지.”
“허허허. 가는 건 순서가 없는 법인데 말이지.”
지금도 들려오는 야만인과 노기사의 날 선 소리에 루트거가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블라드가 손을 들고는 일행을 제지했다.
“잠깐만요.”
벌써부터 효과가 있구나.
과연 시키길 잘했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루트거였으나 블라드의 제지는 루트거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나온 것이었다.
“······저 앞에 뭐가 있는 것 같아요.”
“음?”
그 말을 들은 루트거는 긴장된 눈빛으로 블라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하얀색 눈만이 끝없이 이어지는 북쪽의 설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저 너머를 가리킨 블라드는 굳은 표정으로 루트거를 바라보았다.
“앞장서봐라.”
북쪽으로 향하는 요 일주일 동안 블라드는 민감한 감각을 여지없이 보여주고는 했다.
청각, 시각, 후각, 그리고 미묘하게 감도는 날 선 기운까지.
이번에도 그런 감각을 통해 특이사항을 발견했으리라 생각한 루트거는 블라드의 보고를 쉬이 넘기지 않았다.
“요란하게도 날뛰었군.”
“······.”
그리고 블라드의 인도에 따라 설원 한 복판에 다다른 일행은 그곳에서 참혹한 광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참한 모습으로 곳곳에 널려있는 야만인들의 시체.
끌고 왔던 말이며 양이며 그리고 사람들까지.
따뜻했을 존재들이 눈 바닥에 누워 차갑게 굳어있는 모습을 보며 아게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이곳까지 내려왔나 보군.”
루트거는 말에서 내려 엎어져 있던 시체들을 뒤집어 보았다.
가슴을 가르는 처참한 상처.
그 상처를 바라본 루트거는 예상과 빗나가는 현실에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다.
“······베였군.”
분명 날뛰는 린드부름에 쫒겨 내려온 사람들 같아 보였지만 그들이 품고 있는 상처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우악스럽게 뜯기거나 터져나간 것이 아닌 날카로운 것에 베인 상처.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상처들을 보며 루트거는 아게를 바라보았다.
“너희 부족인가.”
“······그렇진 않소.”
루트거의 물음에 아게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온통 문신이 새겨져 있는 야만인들의 시체는 언뜻 보기에는 아게의 모습과 흡사했으나 그가 속해 있던 부다아트 족은 아니었다.
“우리 부족은 아니지만, 안면 정도는 트고 지냈던 사이지.”
아게의 부족이 아니라 다행인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야만인들의 남하는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원인에는 린드부름이라는 존재가 있었으니까.
그런 흐름을 따라온 부다아트 족도 분명 이 근방 어디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북부인들이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루트거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라문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가 증오하는 야만인과 북부인들이었지만 어쨌거나 어깨를 맞대고 있는 사이였기에 지금과 같은 극단적인 학살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피로 피를 씻어야만 하는 기나긴 항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두 세력 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베른헴 요새에 있을 루트거의 기사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빠르게 움직이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북부의 경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감지한 루트거는 빠르게 베른헴 요새로 도착해 사태를 파악해 볼 생각이었다.
“······.”
다급하게 말을 재촉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행들.
그러나 블라드는 새까만 녀석의 위에서 가만히 가슴을 붙잡고는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두근-
데스웜을 만났을 때 느꼈던 그때의 심장 박동을 기억하는 블라드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괴이하게 뛰는 가슴을 붙잡고는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소년의 불편한 기색을 감지한 말만이 조심스레 상체를 고정하며 진동을 줄여주려 노력할 뿐이었다.
※※※※
베른헴 요새.
바예지드 백작령의 최북단의 경계를 짓는 군사시설.
백작령이 지니고 세 개의 도시만큼이나 페테르가 신경 쓰고 있는 곳에 다다른 일행은 의아한 표정으로 요새의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깃발이 두 개인데요?”
가장 사정에 어두운 블라드가 베른헴 요새에 나부끼는 깃발들을 보며 물었다.
하나의 깃발은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예지드의 문장이었으나 다른 하나의 깃발은 도통 처음 보는 형태의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왜 저 사람들이 이곳에······.”
그러나 깃발을 알아본 루트거와 라문드 역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해 당황할 뿐이었다.
블라드는 눈을 깜빡이고 있는 라문드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들겼다.
“무슨 깃발인데요.”
“······북부의 깃발이 아니다.”
소년의 물음에 라문드는 미간을 좁히며 입맛을 다셨다.
“중앙의 것이지.”
“중앙이요?”
“그래. 중앙.”
중부지역도 아닌 중앙이라고 말하는 라문드의 말에 블라드는 다시 한번 고개를 올려 나부끼는 깃발을 바라보았다.
불을 뿜고 있는 용의 형상.
“용혈공(龍血公)의 직속 기사단인 용살(龍殺) 기사단의 문장이다.”
깃발에 그려진 불을 뿜고 있는 용의 형상에는 기이한 그어짐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용의 목을 날카롭게 가르는 검로를 형상화한 그어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