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74
소년이 만들어 낸 선택지 (1)
“얼굴 좀 들어봐.”
블라드는 자신의 얼굴을 억지로 치켜드는 도로테아의 손길에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별수 없는 일이었다.
“얼굴에는 그리지 말지.”
“목 없는 시체라도 되고 싶은 거야?”
“그래서 투구까지 썼잖아.”
“너 내가 반말하지 말라고 그랬지.”
갑옷 빼곡히 새겨진 붉은색의 각인들.
그것만으로 모자라 보였는지 도로테아는 블라드의 얼굴에 자그마한 붓을 가져가 들이대고 있었다.
강철공의 기사들이 마법 횃불을 들고 있듯 린드부름이 뿜어낼 냉기를 막기 위한 도로테아의 방책이었다.
“왜 나한테만 이러는데.요?”
“네가 가장 나중까지 달릴 거니까.”
옆에서 블라드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루트거의 기사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별수 없잖냐. 네 말이 제일 빠른걸.”
“바예지드 최고의 용 몰이꾼이시니 이 정도는 감당하셔야지.”
점점 붉게 물드는 소년의 몰골이 우스웠는지 옆에 있던 기사들이 우스갯소리를 건네왔다.
“다시 한번 말한다. 여기 지도를 봐라.”
도로테아가 소년의 얼굴에 각인을 새기는 사이 루트거의 부관이 꾸깃한 지도를 펼치며 손가락으로 표시된 지점들을 꾹꾹 눌러대었다.
“강철공의 기사들과 우리는 여기 있는 지점까지 녀석을 몰고 오는 게 한계일 거다. 그러니 이 지점부터는 네가 치고 나간다.”
부관이 가리키는 지도 위에는 수없는 선들이 그려져 있었다.
용을 유인하기 위해 고민했을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전까지는 기사들의 뒤에서 바람을 피하는 거다. 체력을 유지해.”
“알겠어요.”
계속해서 말해왔던 작전개요였지만 루트거의 부관은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네가 여기 있는 이 지점까지만 끌고온다면 숨어있던 루트거님이 달려 나오실 거다. 그와 동시에 위에서 볼코프님의 투창도 날아오겠지.”
부관의 말에 블라드는 시선을 돌려 저 앞에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등 뒤에는 짧은 투창들을 가득 짊어진 강철공의 기사. 투창의 볼코프.
오러를 다양한 방법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은 라문드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아예 투척 무기에 오러를 실어 보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과연 세상은 넓고 기인은 많은 법이었다.
“그러니 이 계획에서는 네 역할이 제일 중요한거다.”
“그 말은 벌써 백번은 더 들은 것 같아요.”
양쪽에 언덕에 의해 병의 목처럼 갑자기 좁아지는 지형.
쉽사리 돌아나갈 수 없는 곳까지 이끌고만 오면 땅에서는 루트거가 린드부름의 전진을 틀어막고 언덕 위에서는 볼코프가 투창을 날린다는 계획이었다.
만약 블라드가 계획한 지점까지 린드부름을 끌고 오기만 하면 토벌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 질문.”
“없는데요.”
“뭐라도 해. 그냥.”
작전의 중심에 서 있음에도 대담한 태도를 잃지 않는 소년을 보며 루트거의 부관은 오히려 자신이 애가 닳을 지경이었다.
“······우리가 성공하면 저 사람들은 안 죽어도 되죠?”
“당연하지. 물론이지.”
블라드의 물음에 부관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소년의 시선 끝으로 용살 기사단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땅바닥에 주저앉고 있는 야만인들이 있었다.
미끼란 필요할 때 구해와서 쓰는 것이 아니다.
미리 잡아놓고 가져다 쓰는 것이 미끼의 제대로 된 사용법일 것이다.
그렇기에 미르셰아는 린드부름을 유혹할 미끼들을 미리 잡아다 두었다.
블라드는 저 뒤에서 분노를 참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있는 아게를 바라보았다.
신령스러운 말을 쫓아온 부족장의 아들이자 바예지드의 사람들을 습격한 무도한 야만인.
그러나 그의 행동에는 부족원들을 살리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나.”
그리고 지금 용살 기사단에게 붙잡혀 차가운 눈밭 위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미끼들은 자신들을 부다아트 족의 부족원이라 했다.
만약 북부의 사람들이 실패하게 된다면 그들의 피와 비명이 린드부름을 유혹하는 함정이 될 것이다.
크아아아아-!
저 멀리 하얀색으로 물든 지평선 너머로 몰락한 용이 내지르는 포효가 들리기 시작했다.
“좋아. 여기 봐!”
루트거의 부관은 손뼉으로 기사들의 주위를 집중시킨 채 고개를 돌려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그의 신호에 검은 머리의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라!”
출발 신호와 함께 말머리를 돌리는 용 몰이꾼들.
“······.”
블라드는 각인이 새겨진 투구의 면갑을 내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과 눈을 맞췄다.
기도하기 시작하는 도로테아.
자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루트거와 라문드.
그리고 저 멀리서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자신을 보고 있는 용살 기사단의 미르셰아까지.
“가자 누아르.”
히이이잉-
소녀가 지어준 검은색의 이름을 단 말이 발굽을 박차기 시작했다.
새까만 말의 꼬리 뒤로 하얀색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
이틀 전, 베른헴 요새.
흔들리는 촛불이 비추는 하얀색 종이 한 장이 있었다.
“이름은 블라드. 나이는 17세. 출생지는 바예지드 백작령의 쇼아라입니다. 특이사항으로는 슬럼가 출신이라고 합니다.”
“흐음. 그래?”
수정구를 통해 보고된 사항을 들으며 미르셰아는 눈썹을 찌푸렸다.
“쇼아라. 쇼아라라.”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보자마자 느낄 수 있었던 심장의 박동.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미르셰아는 본능과도 같은 예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소년을 둘러싼 정황들이 미묘하게 그의 판단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너무 낮은 곳에서 태어났어.”
“······.”
될성부른 씨앗은 어디에서나 꽃을 피우기 마련이라지만 소년을 둘러싼 배경은 낮다 못해 가혹해 보일 지경이었다.
과연 이런 곳에까지 고귀한 씨앗을 퍼트렸을까?
“모르겠군.”
책상 위 놓여 있는 북부의 지도.
그리고 지도 위에 펼쳐져 있는 종이 한 장.
미르셰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블라드의 신상명세가 적힌 종이를 똑똑 두들겼다.
그러나 아무리 미르셰아가 손가락으로 재촉해도 잉크로 쓰여진 보고서는 소년에 대한 더 이상의 정보를 내어주지 못했다.
“이것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어.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은데.”
좀 더 확실한 정보를 원한다는 미르셰아의 말에 부관의 표정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잠시 주저하던 부관은 얼음보다 시린 미르셰아의 눈빛을 보며 주저하던 대답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블라드라는 소년이 외부에서 한 활동은 파악할 수 있었지만 쇼아라 내부에서의 동향은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왜지? 북부에 가장 많은 간자들을 뿌려놓았을 텐데.”
부관의 보고에 미르셰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야 서부 쪽의 인물들이 날뛰는 시기였지만 본래만 하더라도 왕실과 중앙이 가장 신경 쓰던 지역은 북부였었다.
강철공 티무르 바라노프를 중심으로 강렬한 지역색을 통해 똘똘 뭉쳐 있는 북부는 언제라도 제국의 범위에서 떨어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쇼아라에 새로운 시장이 부임한 후부터는 저희의 눈이 모두 감겼습니다. 최근에 있던 실종사건을 명분 삼아 도시를 확실하게 통제하는 데 성공한 모양입니다.”
요제프는 비록 검을 들 수 없는 사람이었으나 그 누구보다도 검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검의 끝은 날카로워야 하며 어디든지 뻗어나갈 수 있도록 유연해야 한다.
하나의 사건을 명분 삼아 날카롭게 뻗어나가는 요제프의 영향력은 끊임없이 쇼아라를 장악하고 먹어 치우고 있었다.
“······바예지드의 형제 둘이 아주 유능하군.”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부관을 보며 품에서 담배를 꺼내든 미르셰아는 촛불을 당겨 불을 붙였다.
곧 그가 내뿜는 진한 연기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둘 다 유능한데 올라갈 수 있는 곳은 하나뿐이라······.”
똑.똑.똑.
미르셰아가 책상을 두들기는 소리만이 방 안을 울리고 있었다.
승자는 원하는 것을 얻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특히나 귀족 간의 계승 경쟁에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루트거와 요제프는 태어날 때부터 피할 수 없는 전장에 세워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건 좀 흔들어볼 수 있겠어.”
아무리 똘똘 뭉쳐 있는 북부라 할지라도 비집고 들어갈 틈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미르셰아에게는 그 틈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후-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북부의 지도가 미르셰아가 내뿜는 담배 연기에 휩싸여 뿌옇게 흐려 보였다.
※※※※
“저희 때도 결국 사람을 내놓긴 한 것이었죠.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래전 자신의 기억을 끄집어낸 라문드는 팔짱을 끼고서는 침음을 내뱉고 말았다.
“결국 마을을 습격하고 있던 녀석을 잡은 것이었으니 방식만 놓고 보자면 야만인들을 미끼로 세운 용살기사단과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몇십 년 전, 그때도 혹한기를 따라 내려온 린드부름이 한 마리가 있었다.
그 당시 젊은 기사였던 라문드와 바예지드의 기사들은 린드부름이 마을 주민들을 물어뜯느라 정신이 없던 틈을 타 녀석을 토벌하는 데 겨우 성공할 수 있었다.
결국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잡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의 용살 기사단이 취하는 방법과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따라잡을 수 없으니 결국 우리도 함정을 설치해야 한다는 말인데.”
루트거는 머리를 감싸 쥔 채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만약 저희가 용을 잡지 못한다면 그것을 빌미 삼아 이곳에 눌러앉을 수도 있어요.”
도로테아는 마법사이자 루트거의 조언자답게 조곤조곤한 말투로 용살 기사단의 행보를 유추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처럼 만약 용살 기사단에게 처치 기회를 빼앗긴다면 어떤 식으로 명분이 쌓여나갈지 예측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용살 기사단은 용이라는 명분을 방패 삼아 중앙에서의 의도로 움직이는 집단이었으니까.
“지금 우리가 함정을 만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소나 양을 인근의 도시에서 몰아올 생각이라면 그렇습니다.”
고민하는 루트거를 본 부관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야만인들을 잡아 올까요? 아니면 용살 기사단이 잡아온 야만인들을 강탈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빌어먹을.”
부관의 의견에 루트거는 나지막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폭풍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야만인과 북부인들은 어쨌거나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사이이며 그들을 미끼로 삼는다는 발상은 결국 그동안 미묘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둘 사이의 평화를 깨뜨리고 말 것이다.
루트거는 어쩌면 이것이 중앙이 의도하는 결과일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최후의 방법으로 남겨놓도록 하지.”
그러나 루트거로서는 모든 방안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그것이 책임자가 짊어져야 하는 의무였으니까.
“블라드의 말이 빠르다고 하던데······.”
“그 말은 탈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혹시나 싶어 넌지시 건넨 말에 라문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녀석이 말을 안 듣는 놈이라는 건 쇼아라의 모두가 알 정도입니다.”
“흐음. 그 정도입니까?”
“무엇을 상상하시던 그 이상일겁니다.”
여차하면 소문이 자자한 블라드의 말을 빌려 단기필마로 린드부름을 베어볼 요량이었던 루트거였지만 라문드의 강력한 제지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럼 방법이 없는데.”
린드부름은 너무나 빠르기에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런 린드부름을 잡기 위해서는 따라잡기보다는 불러들여야 하며 그것에 가장 알맞은 방도는 먹이로써 유인하는 것일 테다.
“과연 용살의 이름을 달 만한 자격이 있긴 있군.”
루트거는 착잡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용살 기사단은 존재만으로 그에게 난감한 선택지를 강요하고 있었다.
마치 이렇게 하라는 눈앞에 들이대면서 말이다.
“루트거 님.”
마땅한 방법이 없기에 모두가 조용한 집무실 안으로 순간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허락을 받은 기사는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루트거에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지금 요새 밖에서 문을 열어달라 요청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구인데?”
또 다른 불청객일까 싶어 인상을 찌푸린 루트거였으나 그에게 보고하는 기사의 안색은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
빠르게 해가 저물어가는 북부의 설원 속에서 베른헴 요새의 문을 두들기는 사내들이 있었다.
“신원을 밝혀라!”
문지기의 말과 함께 듣고 있던 깃발을 높게 펴든 남자들.
깃발 속에 새겨진 문양은 무언가를 꽉 쥐고 있는 강철의 건틀렛이었다.
“베른헴 요새의 대장에게 전해다오.”
사내들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말총머리의 사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문지기에게 말했다.
지니고 있는 기세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 수 있는 남자였다.
“강철공의 기사들이 왔다고 말이다.”
강철공 바라노프 가문의 기사들.
들고 있는 패가 없기에 고민하고 있던 루트거에게로 그들이 찾아왔다.
볼코프가 등에 꽂아둔 창들이 저물어가는 황혼빛에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