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75
소년이 만들어 낸 선택지 (2)
“너무 어려 보이던데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볼코프는 몰이꾼들의 뒤를 쫓아가는 금발 소년을 보며 루트거에게 물었다.
가진바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미묘하게 균형이 맞지 않는 육체가 소년의 그릇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인선이었습니다.”
“저 소년이 말입니까?”
나이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오직 경험과 실력, 그리고 쌓아온 업적만이 임무의 성사를 결정짓는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이미 땅속에 있던 데스웜도 끄집어 내봤던 녀석이죠.”
“······데스웜을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 린드부름을 향해 나아가는 몰이꾼 중에서 블라드만한 인재는 없을 것이다.
루트거는 이번 사냥을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최고의 용 몰이꾼을 데려왔다.
“그렇다면 당연한 결정이겠군요.”
볼코프는 루트거의 말을 듣고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 세대 바예지드 가문에서는 오직 루트거만이 눈여겨볼 만한 인재인 줄 알았더니 한 명이 더 숨겨져 있었다.
“이제 저희도 움직이죠.”
“알겠습니다.”
강철공에게 보고할만한 또 다른 특이사항을 머릿속에 새겨넣은 볼코프는 투창을 들고는 협곡의 위쪽으로 향했다.
“······.”
루트거는 계획한 위치로 움직이기 전에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용살 기사단의 단장 미르셰아.
그의 푸른 눈동자가 떠나가는 북부의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여태껏 머금고 있던 비웃음 대신 진중한 눈빛으로 눈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어린 용 몰이꾼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린드부름의 지금 모습은 폭주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모든 생물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행동 양식이 있으며 그것은 린드부름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러나 구축해놓았던 자신의 영역을 내팽개치고 추위를 따르는 습성까지도 무시한 채 무작정 남하하고 있는 린드부름의 모습은 마치 어떠한 목적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저 앞에 있소.”
“뒤로 돌아갑시다.”
이곳에 있는 무리 중 가장 먼저 린드부름의 토벌을 시작한 강철공의 기사들은 그동안 린드부름을 집요하게 추적해왔다.
루트거 또한 아게를 통해 포로로 잡혀있던 야만인들이 가진 정보를 끄집어내어 린드부름의 위치를 파악해 낼 수 있었다.
두 기사단은 서로가 가진 정보를 통해 린드부름이 있는 위치를 파악해내었고 이제는 그곳에서 하얀 용을 끄집어낼 차례였다.
“다들 준비해라!”
말을 몰고는 크게 돌아가 쉬고 있던 린드부름의 뒤를 잡는 데 성공한 기사들은 큰 소리와 함께 하얀 용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르르르-
한참 단잠에 빠져 있던 린드부름은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무리 몰락한 용의 잔재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본능적인 판단은 할 수 있는 법이었다.
반짝이는 갑옷.
그리고 불타오르는 나무 막대기.
크아아아-!
평소에 먹이로 삼던 야만인들이 아닌 아픈 기억을 주었던 반짝이는 인간들임을 파악한 린드부름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집요하고 위협적이었으며 결국 자신의 비늘을 떼어내었던 그때의 투창을 기억하고 있던 린드부름은 기사들을 대적하기보다는 일단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시간이 갈수록 점차 지성의 그것을 닮아가는 본능적인 판단이 린드부름을 그렇게 행동하게 했다.
“이런.”
블라드는 곧장 달려들지 않고 오히려 상황을 살피는 듯한 린드부름의 모습을 보며 조금은 놀라고 말았다.
사람의 기척만 들리면 이빨을 들이대었던 데스웜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두근-
지금 뛰어오르는 심장만큼이나 지능적으로 움직이는 린드부름의 모습은 소년에게 놀람을 안겨주고 있었다.
“움직인다!”
“양옆을 틀어막아!”
이미 한 번 린드부름을 놓친 전적이 있던 강철공의 기사들이 이를 악물고는 재빨리 린드부름의 양옆으로 다가가서는 마법 횃불을 들이대었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린드부름을 놓치면 이 흉악한 녀석이 어디로 들이닥칠지 말이다.
바예지드는 몰랐으나 바르노프는 알았기에 강철공의 기사들은 더욱 이를 악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부터 기사들의 오러가 퍼져 나오고 그 기세를 흡수한 횃불의 불꽃이 위협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
또다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기사들을 보며 린드부름은 차가운 숨결을 머금었지만, 그것을 뱉어내기에는 시간도 상황도 용이하지 않았다.
그아아아-!
차가운 숨결을 내뱉기보다는 고르기로 한 린드부름은 일단 빠른 움직임을 통해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충분히 가속만 된다면 여기 있는 기사들 정도야 얼마든지 떨쳐낼 수 있을 터.
이미 한 번 해본 경험이 있기에 린드부름은 망설임 없이 하얀 설원을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뛰쳐나가게 두지 마라!”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기사들 또한 필사적으로 린드부름의 앞을 막아서며 하얀 용에게 도약할 거리를 주지 않으려 애썼다.
공간을 점하려는 기사들과 용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히히히힝-!
“으아악!”
날카로운 이빨을 미처 피하지 못한 기사 하나가 말에게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애처로운 말의 비명과 함께 사방에 흩뿌려지는 붉은 피가 기사들의 갑옷으로 튀어 나가고 있었다.
“블라드! 뒤쪽으로 와라!”
이미 데스웜을 통해 호흡을 맞춰본 적이 있던 루트거의 기사들과 블라드는 재빨리 강철공의 기사들이 막아내지 못한 빈자리를 메꾸며 린드부름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까앙-! 깡!
“미친! 이도 안 들어가!”
“무리하지 마!”
걔 중에는 기회를 엿봐 직접 린드부름을 내려치는 기사들도 있었지만, 용의 비늘은 쉽사리 기사들에게 상처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아아아-!
데스웜만큼은 아니었지만 린드부름 또한 평범한 몬스터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비늘을 가진 존재.
그것을 뚫어내기 위해서는 깊고도 굳건한 세계를 지닌 기사들이 필요했다.
“브레스다!”
이제야 기회를 만들어 낸 린드부름.
심상치 않은 형태로 부풀어 오른 목덜미를 본 기사들이 재빨리 산개하며 내뿜어지는 용의 숨결을 피하고 있었다.
“크아아아!”
루트거의 기사 중 하나가 브레스를 정면으로 얻어맞고는 천천히 제자리에 멈춰서기 시작했다.
비록 도로테아의 각인이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매서운 용의 숨결은 더 이상 그의 참전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저번보다 더 강해졌소! 더 멀리 피해야 하오!”
“왜 갑자기!”
강철공의 기사들은 자신들이 상대했던 린드부름의 모습에서 한층 더 강력해진 브레스를 보며 놀라고 말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영악해지며, 강해진다.
여태껏 잠들어 있던 용의 피가 무언가의 자극을 받아 서서히 흉폭한 가능성을 치켜들고 있었다.
[네가 나서야 한다! 더는 버텨줄 기사들이 없어!]“쳇!”
그리고 여기, 린드부름과 같이 시간이 지날수록 들끓는 피를 가진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
“블라드!”
“거기! 횃불 줘요!”
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해왔으나 예상보다 훨씬 강력해진 린드부름의 브레스는 말들의 전진을 굼뜨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다!”
얼어붙는 다리와 함께 천천히 린드부름에게서 멀어지는 기사들 사이로 새까만 말 한 마리가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계획보다 빠르며 예상과는 어긋나는 움직임이었으나 실전에서는 지금과 같은 판단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주둥이 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모는 순간 협곡의 위치에서 벗어나고 말거다.]“······미치겠네.”
스스로를 미끼 삼아 협곡의 입구까지 몰아야 한다는 목소리의 말에 블라드는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되나?’
한 손에는 강철공의 기사에게서 넘겨받은 마법 횃불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호르헤의 단검을 쥐어든 블라드는 그것으로 재빨리 자신의 손바닥을 그어 내렸다.
“크으!”
미르셰아는 야만인들을 희생해 린드부름에게 인간의 피 맛을 각인시켰다 들었다.
그리고 이번 계획이 실패한다면 아게의 부족을 미끼 삼아 자신들의 뜻대로 용을 잡고 북부를 휘젓고 다닐 것이다.
‘엿이나 먹으라 그래!’
당신들이 믿어준 만큼 나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
비록 나라는 존재가 미약하기 그지없을지라도.
자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던 루트거를 생각하며 블라드는 피로 흥건히 젖은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붉게 물든 소년의 손아귀가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갔다.
“여기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소년의 필사적인 손짓 끝으로 붉은 핏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여기 네놈이 원하는 피가 있다!”
소년의 손끝에서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
린드부름은 그 핏방울이 방울져 내리며 하얀 눈밭에 붉은 흔적을 남기는 순간을 두 눈을 부릅뜬 채 지켜보고 있었다.
인간의 피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이 그곳에 있었다.
자신이 여태껏 찾던 것이었다.
크아아아아아—!
하얀 용이 여태껏 보지 못했던 흉포한 포효를 내지르며 새까만 말을 향해 빠르게 가속하기 시작했다.
마치 미친 것처럼.
소년 하나만 뜯어내면 된다는 것처럼.
“너무 효과가 좋잖아!”
[······그것까지는 하지 말지 그랬냐.]블라드는 고작 손바닥 하나 그었을 뿐인데도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흉폭해진 린드부름을 보며 재빨리 누아르의 고삐를 붙잡았다.
“달려!”
이미 지치고 얼어붙은 기사들은 저 뒤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
이제는 자신뿐이라는 것을 눈치챈 누아르는 재빨리 흐르고 있는 소년의 세계를 받아먹기 시작했다.
소년의 세계는 아직 색이 정해지지 않은 세계.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새까만 밤하늘 위에 별 하나를 띄우는 것에는 충분할 것이다.
히이이잉-
자신조차 아찔할 정도의 속도로 내달리는 누아르의 이마로 새하얀 뿔 하나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누아르는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끼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것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누아르는 소년을 찾아온 것이었다.
조금 더 빨라지고 조금 더 완벽해지기 위해.
지금, 하얀색의 설원 위를 달리는 것은 오직 두 개의 세계뿐.
가장 빠른 용, 그리고 가장 빠른 말.
그리고 이 두 개의 세계를 온전히 채워 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단 하나.
“가자!”
불어오는 눈보라에 금발을 휘날리고 있는 소년, 단 한 명뿐이었다.
몰락한 용과 잊혀진 일각수가 내지르는 포효가 새하얀 설원에 가득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옵니다!”
땅에 꽂아둔 창들을 옆에 두고는 가만히 왼쪽 눈을 감고 있던 볼코프의 귀로 부관이 내지르는 보고가 들려왔다.
“얼마나?”
“저 앞에 있으니 앞으로 5분 후면······아니.”
평소와는 다르게 당황하며 보고하는 부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3분, 아니 1분!”
“뭐?”
비명과도 같은 부관의 보고에 재빨리 투창을 뽑아 들고는 오러를 주입하는 볼코프.
치켜뜬 오른쪽 눈으로 본 광경은 과연 부관이 당황할 만한 것이었다.
“바로 앞입니다!
“뭐 이런······.”
하얀 설원을 거칠게 가로지르는 눈보라가 있었다.
너무나 빨라 북부의 삭풍조차도 가로지르는 직선의 눈보라였다.
그 눈보라의 가장 앞에는 튀어 오르는 눈을 맞으며 반짝거리는 새까만 말이 있었고.
그아아아아-!
그리고 그 뒤에는 어느새 푸른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이 피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붉은 눈동자로 변한 린드부름이 있었다.
그들이 협곡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바예지드의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내라!”
세워놓았던 계획은 온데간데없이 지금 볼코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소년이 치켜든 횃불 하나만이 애처로이 흔들릴 뿐이었다.
“최고의 용 몰이꾼이라더니······.”
한탄과도 같은 감탄을 내뱉은 볼코프는 어깨를 크게 뒤로 젖히며 투창을 치켜들었다.
“과연 그 말이 맞구나!”
계획은 어긋나도 좋다.
결과만 좋다면 모든 것이 옳은 것이다.
감히 의심했던 미안함과 함께 소년에 대한 감탄을 담아 볼코프는 크게 창을 휘둘렀다.
쐐애애액-
소년의 뒤를 쫓느라 정신이 없는 린드부름의 이마로 볼코프가 쏘아내린 투창이 날아들었다.
※※※※
[온다!]불어오는 맞바람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블라드는 목소리의 경고와 함께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쐐애애액-
순간, 블라드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있었다.
그 살기 어린 소리는 뒤를 쫓고 있던 린드부름조차도 잠시 고개를 돌리게 만들 정도였다.
콰악-!
그아아아아-!
닿지 않았다.
그러나 기세만으로 발광하는 용의 고개를 돌리게 만들 정도의 공격이었다.
‘됐다!’
비록 실패한 공격이었으나 블라드는 들고 있던 횃불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비록 몰고 오는 과정은 엉망이었으나 지금부터는 또다시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이었으니까.
볼코프의 의도는 좁은 협곡으로 용을 불러들이는 것.
혹시라도 린드부름이 뒤로 돌아나가지 못하게 투창으로 퇴로를 끊는 중이었다.
“어딜 보냐!”
블라드는 들고 있던 횃불을 과감히 집어던지며 다시 한번 린드부름의 주의를 끌어내었다.
이젠 다 왔다.
저 앞에 있는 협곡까지만 이 녀석을 끌고 간다면 루트거의 불꽃 같은 세계가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데스웜의 외피까지 갈라내었던 루트거의 검이니 분명 린드부름의 비늘도 갈라낼 수 있을······.
쿠웅-!
“······억!”
계획이 거의 성사되었음에 기뻐하던 블라드는 갑작스레 쿵 하고 내려앉는 심장을 붙잡으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블라드! 왜 그러냐!]“끄으으······.”
목소리의 재촉에도 블라드는 쉽사리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소년의 안위를 걱정한 누아르도 그리고 뒤를 쫓아오던 린드부름도 고통에 겨운 듯 고개를 내저으며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헐떡이는 블라드와 린드부름을 보며 협곡의 입구 앞에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당황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이건 도대체!’
까맣게 좁아지는 시야, 마치 심장이 멈추는 것만 불안과 공포.
본능이 건네오는 강렬한 경고에 블라드는 이를 악물고야 말았다.
더는 뛰지 마라.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마라.
“이런······씨이발.”
블라드는 심장을 통해 다가오는 경고를 애써 무시하며 끼긱거리는 목을 억지로 치켜들고는 기세가 뿜어져 나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가리키는 지점이 있었다.
협곡의 저 안쪽, 흐느끼고 있는 야만인들 앞에 서 있는 남자.
그 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소년을 바라보며 사납게 미소 짓고 있었다
오직 용만이 느낄 수 있는 기세가 소년과 하얀 용을 짓누르고 있었다.
장식 없는 검
“지금 돌격해라!”
협곡의 바로 앞에서 멈춰버린 하얀 용과 금발 소년.
둘 다 하나같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멈춰있는 것이 마치 공포스러운 무언가라도 본듯한 모습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소년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라도 고개를 들려 하고 있다는 것과 린드부름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항과 굴복의 갈림길에서 두 존재의 길이 엇갈리고 있었다.
“앞으로! 기사들은 앞으로 가라!”
루트거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뛰쳐나가는 바예지드의 기사들.
사냥감이 덫에 걸려들지 않았으니 검을 맞댈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지금뿐이었다.
“뭐 이런 해괴한 일이!”
경험 많은 라문드조차 성공 바로 직전에서 멈춰버린 린드부름을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저놈들이다.’
증거는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루트거는 두 눈 가득 분노를 머금고는 뒤쪽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차분히 가라앉은 눈동자로 소년을 바라보는 미르셰아.
저 멀리 서 있는 그의 입가에는 실로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아아아아-!
가장 빠른 용 린드부름.
자신보다 더 거대한 세계를 피하기 위해 꼬리를 만 용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하얀 설원을 향해 뛰어가려 하고 있었다.
거대한 세계가 닿지 않는 자신이 지배하던 그곳으로.
“볼코프 경!”
순간, 협곡에 가득 울려 퍼지는 루트거의 외침이 있었다.
볼코프의 세계는 멀리 보는 세계.
날카로운 것을 더 멀리 보내기 위해 다듬어낸 그의 세계가 투창에 맺히기 시작했다.
“어딜 빠져나가려고!”
검이 아닌 창을, 창 중에서도 던지는 무기를 선택한 이단과도 같은 기사의 손끝에서부터 보랏빛 섬광이 뻗어 나왔다.
평범한 기사라면 반응조차 하지 못할 그런 빠르기로.
그아아아-!
그러나 시기가 좋지 못했다.
린드부름은 바로 앞에 있는 거대한 세계에 의해 공포에 떨고 있는 참이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유형의 위협에 대해 기민한 감각을 세우고 있는 상태였다.
콰직-!
그렇기에 쏘기 전에 보았고 닿기 전에 피할 수 있었다.
몰락한 용의 잔재 중 가장 빠른 다리를 이용해서.
“이런 젠장!”
재빨리 땅에 꽂혀 있던 투창을 뽑아낸 볼코프가 제 2격을 준비하고 있는 사이 루트거와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하얀 용에게 다다랐다.
“시간을 벌어라!”
단단한 외피로 유명한 데스웜조차 일검에 베어낸 루트거였다.
다만 그의 가슴 속 깊숙이 있던 세계를 세상 밖으로 터트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 소년이 데스웜에게서 시간을 벌어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버텨라!”
“앞을 틀어막아야 해!”
기사들이 온몸으로 시간을 벌어내는 동안 루트거는 재빨리 왼쪽 눈을 감은 채 자신의 검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익숙한 진동에서 오는 울림이 그를 좀 더 깊은 세계로 빠져들게 했다.
위에서는 쏘아져 내리는 보랏빛 섬광.
밑에서는 질척거리며 달려드는 빛나는 인간들.
그동안은 고귀한 용인 줄 모르고 살았으나 이제는 알게 된 린드부름은 감히 자신에게 달려드는 인간들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말았다.
그아아아아-!
소년을 향해 달려들 때보다 더한 포효와 함께 숨을 한껏 들이켠 린드부름.
방어조차 도외시한 채 있는 힘껏 분노를 머금은 하얀 용의 목덜미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이런!”
잠시 후 닥쳐올 파멸적일 숨결을 눈치를 챈 라문드는 재빨리 전장에서 이탈해 소년을 향해 달려갔다.
[블라드! 정신 차려라!]“이놈아! 여기서 뭐 하는 거냐!”
“······.”
그러나 블라드는 목소리와 라문드의 재촉에도 부들부들 떨 뿐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소년의 세계와 맞닿은 누아르 또한 바로 앞에 있는 푸른 눈동자의 주박에 갇혀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다른 이들은 몰랐겠지만, 소년은 지금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세계에 대항해 계속해서 고개를 치켜들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글렀구만.”
두 눈을 부릅뜬 채 뿌리 깊이 박혀버린 소년의 모습을 보며 라문드는 뒤로 돌았다.
최선을 택할 수 없다면 차선을 택해야 한다.
그리고 은퇴한 기사의 선(善)은 바로 미래를 책임질 소년이었다.
“늙으면 찬바람이 관절까지 드는데 말이지.”
푸아아와악-
라문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희뿌연 안개같이 다가오는 린드부름의 숨결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영혼까지 얼어붙고 말 용의 숨결.
“흡!”
등 뒤에 소년을 품은 늙은 기사는 이를 악물었다.
부디 평생을 다해 쌓아 올린 자신의 세계가 용의 숨결보다 뜨거운 것이기를 빌면서.
검을 드는 대신 양팔을 교차한 라문드의 몸으로 빛나는 오러가 깃들기 시작했다.
※※※※
“······.”
블라드는 차갑게 깔린 희뿌연 안개 속에서 가만히 숨을 골랐다.
다가오는 냉기에 소름이 올라왔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라문드의 오러만큼은 따뜻했다.
[끊어내야 한다!]“······끄으으.”
사방에서 몰아치는 냉기가 소년의 몸을 굳게 만들고 있었지만 블라드는 떨리는 손으로 억지로 검을 붙잡았다.
차가운 눈동자가 보내는 시선은 마치 거미줄처럼 얽혀들어가 소년을 붙잡고 있었지만 그래도 블라드는 해야만 했다.
“빌어먹을!”
거대한 세계에 대항하려면 자신의 세계 또한 넓어져야 한다.
어떻게든 뻗어나갈 곳을 찾아 헤매던 소년의 세계에 라문드의 온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아직 색을 정하지 못한 블라드의 세계에 또 다른 한 줄기 색깔이 깃들고, 그 빛이 장식 없는 검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영감님.”
“······가 봐라.”
차갑게 굳어버린 입술 사이로 라문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노인은 자신의 할 일을 다 했고 이제는 소년의 차례였다.
블라드는 등 뒤에서 흘러나오는 라문드의 말을 들으며 있는 힘껏 장식 없는 검을 휘둘렀다.
소년에게 휘둘러진 보이지 않던 차가운 그물들이 끊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
“······.”
언제나 여유로웠던 자세를 유지했던 미르셰아였지만 지금만큼은 굳은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린드부름이 내뱉은 희뿌연 숨결이 바람에 걷혀 날아가고 그 안에 있던 풍경들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풍경.
냉기에 굳어버린 기사들 사이로 눈보라가 만들어 낸 얼음알갱이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짝임을 헤치며 빠르게 뛰쳐나가는 검은 말이 있었다.
미르셰아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소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와 푸른 눈동자.
비록 색은 같았으나 다른 빛을 간직한 눈동자가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대단하군.”
미르셰아는 언제나 짓던 냉소적인 미소를 지운 채 순수한 감탄을 담아 앞으로 나아가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동자가 천천히 미르셰아를 떠나고 있었다.
거대한 세계의 허락 없이 오직 자신만의 의지로.
소년의 검은 그의 존재감을 끊어냈다.
“가자!”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그것을 요제프에게 배운 블라드는 지금 당장 미르셰아에게 달려들기보다는 저 뒤에 있는 하얀 용을 먼저 해결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을 깔아뭉개려던 사내에게 제대로 된 한 방을 먹일 수 있을 테니까.
늙은 기사의 방패 아래 다시금 고개를 든 블라드는 검은 말을 이끌고 하얀 용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끄으으으······.”
린드부름의 차가운 숨결에 협곡에 있는 모든 것들이 얼어붙어 있었다.
방금까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던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루트거는 재빨리 오러를 돌리며 얼어붙어 있는 몸을 녹이려 하였지만, 찰나의 순간만 주어져도 저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하얀 용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이런······젠장.”
도로테아의 각인이 냉기에 대항하여 발광하고 있었지만, 기사들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협곡 위에서 홀로 분투하며 린드부름을 저지하는 볼코프의 투창이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실패인가.’
루트거는 저 밑에서부터 차오르는 실패의 기운을 느끼며 이를 악물고 말았다.
최선을 다하였으나 결국 닿지 못했다.
단 한 발자국의 차이로 실패하는 일도 있는 법이었다.
“음?”
그 순간 루트거의 시야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검은 형상이 있었다.
“막아볼게요!”
“······블라드!”
방금까지만 해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금발 소년이 모는 말이었다.
검은 머리의 청년은 잠시 고개를 숙였으나 금발의 소년은 단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멈춰있는 지금 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라!]“으아아아!”
블라드는 뽑아 올린 오러를 장식 없는 검에 몰아넣은 채 이제야 막 도약하기 시작하는 린드부름의 오금을 후려쳤다.
까아아앙-!
크아아아아-!
순간 터져 나온 린드부름의 거친 포효에 블라드가 발악하듯 소리를 질러댔다.
“너무 단단하잖아!”
용이라는 존재에게 처음 검을 휘둘러본 블라드는 얼얼해진 손목을 돌리며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루트거는 어떻게 이 녀석보다 더 단단한 데스웜을 베어낼 수 있었지?
[안 되면 계속해야지!]“······이익!”
목소리의 말에 다시 한번 왼쪽 눈을 감은 블라드의 검으로 오러가 흐르기 시작했다.
“창을 다오!”
볼코프는 안개속에서 갑작스레 뛰쳐나온 소년의 존재를 보며 다시금 희망을 품었다.
결국 이 작전의 성패는 시간에 달려있다.
린드부름이 가속하기 전에 루트거와 기사들이 움직인다면 토벌에 성공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용살 기사단에게 기회를 넘겨줘야 할 것이다.
“창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창을 넘겨주던 부관의 보고에 볼코프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제길.”
땅에 꽂아두고 있던 볼코프의 창도 이제는 몇 남지 않았다.
부족한 것은 시간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날려야 해!”
소년 혼자만의 발버둥만으로는 린드부름을 막을 수 없다.
비록 루트거가 최고의 용 몰이꾼이라 했지만 그렇다고 끝을 낼 수 있는 용살자는 아니지 않은가.
이제는 몇 남지 않은 창을 건네받은 볼코프는 린드부름을 향해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너는 오른쪽으로!]바로 앞에 있을 린드부름을 상대하느라 볼코프의 움직임까지 챙기지 못하는 블라드를 위해 목소리가 지시를 내렸다.
가속하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하며 결국 소년은 혼자서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공간을 점해야 한다.
까앙-!
“······!”
매섭게 휘두르는 검의 끝으로 불길한 파쇄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오러로 감싸고 있다 할지라도 뒷골목에서 태어난 검으로는 용의 비늘에 대항할 수 없었다.
“이런!”
들고 있기에 알 수 있는 균열을 느끼며 블라드의 안색이 파래져 갔다.
소년이 별처럼 바라보았던 검이 부서지고 있었다.
[멈춰서는 안 된다.]“하지만!”
[언제까지고 그 녀석과 함께할 수는 없어!]목소리의 말에 블라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소년이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높은 곳에 걸려있던 장식 없는 검이지만 그동안 상대해왔던 적들은 평범한 철검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들뿐이었다.
오히려 여태까지 버텨온 것이 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녀석이 해야 할 일을 하게 해라!]“······.”
한계 끝에 다다른 존재들은 멈출 수밖에 없다.
늙어 버린 기사가 그랬듯, 평범할 뿐인 장식 없는 검도 이제는 멈춰야만 한다.
“빌어먹을!”
뒷골목의 대장장이는 말했었다.
만약 자신의 검이 소년의 발목을 붙잡게 된다면 참을 수 없을 것이라고.
소년은 그 말과 함께 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대장장이를 기억했다.
까앙-!
“멈춰!”
까아앙-!
“멈추라고!”
설원을 향해 뛰쳐나가기 시작하는 린드부름의 다리를 사정없이 후려치며 소년이 울부짖고 있었다.
소년의 울부짖음과 함께 장식 없는 검도 깨어져 나가고 있었다.
“이 개자식아!”
흩날리는 눈의 결정들과 함께 하얀 검의 조각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소년의 눈물도 같이.
콰직-!
그아아아아-!
하얀 용이 소년의 기세에 잠시 멈칫한 사이 협곡 위에서 쏘아져 내린 보랏빛 섬광이 있었다.
“됐다!”
블라드의 결사적인 방해에 힘입어 린드부름의 무릎으로 볼코프의 창이 날아와 박혔다.
협곡 위에 있던 볼코프는 그 모습을 보며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마지막 남았던 투창이었다.
“흐으······흐으으.”
아까 그어낸 손아귀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장식 없는 검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소년의 피를 먹은 검이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마지막이야.”
자신을 마주 보는 린드부름의 푸른 눈동자를 보며 블라드는 마지막으로 장식 없는 검을 치켜들었다.
“마지막. 정말 마지막.”
달리는 말 위에서 소년은 검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나를 이곳까지 다다르게 해준 너에게 감사한다.
“간다!”
점점 느려지는 린드부름을 따라잡은 블라드가 마침내 바로 앞에서 마주친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단단한 비늘은 뚫을 수 없지만 너의 눈빛 정도는 뚫을 수 있겠지.
그것이라면 장식 없는 검의 마지막으로 충분할 것이다.
“잘 가라.”
마지막으로 소년의 오러를 머금은 장식 없는 검이 설원 위에서 반짝였다.
소년의 함성과 함께 뒷골목의 별이 푸른 눈동자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아아아아-!
하얀 설원 위.
용의 비명과 함께 장식 없는 검이 깨어져 나갔다.
소년의 가능성을 품었던 뒷골목의 검은 마지막 순간 별이 되었다.
※※※※
비록 높디높은 밤하늘은 아니었어도 검은 빛나고 있었다.
스스로가 빛나기를 원했던 소년의 손에 들려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뒷골목의 검 또한 별이 될 자격은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별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름은 바로 용살검(龍殺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