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76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1)
하얀 설원 위 흩뿌려져 있는 푸른색의 핏자국들.
“······.”
블라드는 멍하니 눈밭 위에 앉아 푸르게 물든 설원을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눈 위에 흩어져 있는 린드부름의 흔적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과는 다른 무게로 자신의 손에 들려져 있는 장식 없는 검의 감촉 또한 그랬다.
“수고했다.”
루트거는 허공에 검을 휘두르며 검에 붙어있는 피들을 떨구고는 블라드에게로 걸어왔다.
비록 소년이 치명상을 날리긴 했으나 고통에 겨워 날뛰던 용의 마무리를 지은 것은 루트거의 검이었다.
아직 블라드의 세계는 용의 비늘을 베어 낼 정도로 단단하지는 못했으니까.
“······영감님은 괜찮나요?”
“영감님? 아직도 이름을 안 알려주던?”
블라드는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가만히 앉는 루트거의 온기를 느꼈다.
하얀 용의 숨결을 막아주었던 늙은 기사의 온기와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뭐 조만간 알려줄 것 같긴 하네.”
“······.”
가장 낮은 자격으로 순례를 떠난 늙은 기사는 자신의 몸을 던져 소년을 구해내었다.
비록 지금 같은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움직인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행동은 훌륭한 결과를 낳았다.
선(善)으로서 움직인 행동은 분명 나중에 되돌아오기 마련이었다.
“부러졌구나.”
루트거는 여전히 초점을 맺지 못하는 블라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이 머무는 곳은 산산이 부서져 손잡이만 남아 있는 장식 없는 검이었다.
“······최선을 다했어요.”
“그래. 그런 것 같더라.”
루트거는 두서없는 소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모두가 얼어붙어 있던 그때 눈발과 함께 흩날리던 소년의 눈물을 본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최선을 다했지.”
초원의 모닥불 옆에서 검을 손질하던 소년의 모습을 루트거는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정성스레 검을 닦던 블라드를 보며 소년이 얼마나 그 검을 아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좋은 거로 하나 마련해주마.”
뒷골목의 대장장이가 만든 검보다야 루트거가 수배한 장인이 만든 검이 더 뛰어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가문의 후계자 중 한 명인 루트거가 하사하는 것이니 그 의미 또한 각별할 검일 것이다.
“······.”
그러나 다른 기사들이라면 좋아서 날뛸만한 말이었음에도 블라드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장식 없는 검의 손잡이를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가 루트거를 향했다.
“이런 녀석이 또 있을까요?”
날카롭지 않아도 좋다.
빛나거나 강인하지 않아도 좋다.
소년은 그저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담은 의미 있는 검을 가지고 싶을 뿐이었다.
뒷골목 진창 위에서 자신에게 희망을 주었었던 장식 없는 검처럼 말이다.
“······글쎄다.”
소년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은 루트거는 그저 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것까지는 내어줄 자신이 없었으니까.
흩날리는 눈보라.
쓰러져 있는 하얀 용.
북부를 괴롭혔던 린드부름은 토벌되었다.
그리고 그 용은 자신의 시체와 함께 또 하나의 칭호를 남겼다.
용살자(Dragon Slayer). 쇼아라의 블라드.
바예지드가 보유한 이번 세대 두 번째 용살자였으며.
그리고 부서져 내린 장식 없는 검이 그 칭호의 증언자였다.
※※※※
쇼아라의 집무실.
요제프가 창가 가득히 들어오는 햇빛을 조명 삼아 업무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애꾸눈의 사내가 문을 열고는 조용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요제프 님.”
“무슨 일이지.”
날이 갈수록 짙어지는 요제프의 짙은 눈그늘을 보며 자그맣게 한숨을 내쉰 자야르는 들고 있던 서신을 건네주며 말했다.
“데어마르에서 온 편지입니다. 알리시아 남작이 직접 보내온 것입니다.”
“데어마르에서?”
한참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던 요제프는 데어마르라는 말에 하던 업무에서 눈을 떼었다.
요제프에게 있어서 쇼아라의 시장직 만큼이나 데어마르에 관한 일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동안 가이다르 쪽에서 별다른 동향이 있었나?”
“적어도 군사적인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자야르의 보고에 요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같이 어수선한 시절에는 쥐고 있는 정보가 중요하다.
나의 정보는 최대한 감추고 상대의 정보는 훤히 들여다볼 수 있어야만 안전과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
“별다른 군사적인 위협은 없었는데 직접 편지를 보내온다라······.”
요제프는 근처에 있던 편지칼을 집어 들고는 알리시아가 보내온 봉투를 조심스레 뜯어내었다.
알리시아는 비록 영주로서의 경험은 모자랄지라도 모든 행동에 신중을 가하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굳건한 동맹이었으나 사소한 부탁이나 요구로 스스로의 가치를 깎을만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
자야르는 알리시아의 편지를 들고 있는 요제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점점 내려앉는 그의 눈썹이 사태가 그리 녹록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요제프는 미묘한 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편지를 내려놓았다.
“블라드가 언제쯤 돌아오지?”
“앞으로 한 달은 더 걸릴 겁니다. 최소한 베른헴 요새까지는 나아갈 테니까요.”
아직 토벌대가 린드부름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요제프는 자야르의 말에 눈썹을 구겼다.
“시간이 모자라군.”
“그 녀석이 필요한 일입니까?”
요제프는 자야르의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애매하게 모자라겠어.”
똑.똑.똑.
책상을 두들기며 의자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댄 요제프는 편지를 보았을 때보다 배는 넘는 시간 동안 고민을 거듭했다.
“용 토벌대는 임무를 마치면 스투르마로 돌아가겠지?”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렇다면 나도 스투르마로 가야겠군.”
자야르는 갑작스레 스투르마로 돌아가겠다는 요제프의 말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준비하겠습니다.”
생각을 결정지었다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망설임은 시간만 낭비할 뿐 결과에 도움을 주지 못하니까.
“부탁하지.”
자야르가 스투르마로 올라갈 채비를 하기 위해 집무실 밖으로 나서자 요제프는 두 손을 모아쥐고는 이마에 기댔다.
“이런 식으로 한단 말이지.”
비록 눈에 보이는 위협은 아니었으나 의도가 명확한 움직임이 있었다.
알리시아는 가이다르에서 보인 그 움직임에 놀라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그날의 실수가 최고의 수가 되었군.”
요제프는 그 말과 함께 그만 소리죽여 웃고 말았다.
언제나 다음을 생각해야만 했던 요제프의 인생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행동이 다음의 행보를 결정한 적은 지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물빛 머리의 고귀한 레이디에게 실수를 범했던 금발 소년이 있었다.
그때 당시에야 눈앞의 장면을 보며 황망해 했을 뿐인 요제프였으나 그 일이 지금 닥친 문제의 실마리가 되고 말았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준비를 시켜줘야 하겠어.”
그날 소년은 자신의 두 손으로 레이디의 손수건을 받아들었고 그와 동시에 그녀에 대한 의무와 명분을 가져갔다.
이제는 그 실수에 대해 보답을 해야 할 때다.
의자를 돌려 앉은 요제프는 가만히 창 밖을 내다보았다.
도시의 정경, 굳건한 성문, 그리고 저 멀리에 있을 북부의 설원.
요제프가 바라보는 방향은 금발 소년이 있는 곳이었다.
※※※※
“이놈아. 무슨 송장이라도 옮기는 거냐? 내 머리 위로 뭔 놈의 천 쪼가리들을 이렇게 올려놓는 거야.”
블라드는 자신의 옆에서 투덜대고 있는 라문드를 보며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바람 들어오잖아요.”
“북부의 사내가 겨울바람을 두려워해서야 쓰나.”
“늙으면 관절에 바람이 숭숭 든다면서요.”
“······.”
삐걱거리는 달구지 위.
그 위에 누워 가죽과 천 조각들을 잔뜩 뒤집어쓴 라문드는 소년이 건네온 말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솔직히 지금 모습만 보면 말하는 송장이지 뭐예요.”
“이 나이에 남에게 들으면 민감해지는 단어들이 몇 개 있는 법인데 말이지.”
블라드는 자신을 위해 린드부름의 브레스를 막아준 라문드에게 최선을 다해 간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챙겨주는 것도 그리고 챙김 받는 것에도 익숙지 않은 노인과 소년은 서로 투덕거리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용을 토벌하고 복귀하는 토벌대.
임시로 맡아놓은 베른헴 요새의 대장직을 원래의 기사에게 이양한 루트거는 토벌대를 이끌고 스투르마로 돌아가고 있었다.
용의 위협에 함께 힘을 합쳤던 강철공의 기사들과.
“이대로 같이 스투르마로 갈 생각은 없으신지? 귀한 곳에서 오신 손님들이니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것 같은데 말이오.”
그리고 명분을 앞세워 갑작스레 북부로 들이닥쳤던 용살 기사단과도 함께 말이다.
“······바예지드의 가주님을 직접 뵐 기회는 앞으로도 그리 흔치 않을 것 같긴 하군.”
루트거의 정중한 초대에 미르셰아는 턱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과연 내가 그곳에 가서 들뜨지 않고 조용히 지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소.”
서로가 귀족의 예법과 대화로 말하고 있었으나 그 안에는 시퍼렇게 빛나는 경고들이 담겨 있었다.
지금도 서로를 날카롭게 견제하는 북부와 중앙의 기사들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헤어져야 하겠군.”
루트거가 내뱉는 명백한 축객령에 미르셰아는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용살 기사단의 명분은 린드부름의 토벌.
그러나 소년의 활약으로 그 명분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더는 주인의 허락 없이 북부의 땅에 서 있을 자격이 없었다.
“야만인들은 어찌해드릴까. 우리가 처리해도 되겠소?”
“북부의 일은 북부에게 맡기고 가시오.”
아무리 야만인들이라 하더라도 용살 기사단에게 내어줄 수는 없다.
루트거의 단호한 거절에 조용히 뒤를 따르고 있던 아게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러시다면.”
미르셰아와 루트거의 손짓에 따라 점점 갈라지는 두 개의 무리.
중앙의 기사들과 북부의 기사들 사이로 더는 좁힐 수 없는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용살자에게 인사 한번 하고 가도 되겠소?”
“······.”
“몇 가지 물어볼 것도 있고 말이지.”
동류는 동류를 알아본다.
그렇기에 용살 기사단은 언제나 용의 피를 뒤집어 쓴 자들에게 경의와 친애를 보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만약 미르셰아와 루트거가 서로 대적하는 사이만 아니었어도 둘의 관계는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잠시라면.”
“고맙군.”
이것만큼은 하고 가야겠다는 미르셰아의 강한 의지에 루트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한 번의 인사를 막기 위해 그와 고개를 뻗대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으니까.
서슬 퍼런 북부의 기사들 사이를 천천히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미르셰아.
사방에서 뻗쳐오는 흉험한 기세와 눈빛들이 매서웠으나 미르셰아는 그런 것들에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스스로에게 당당한 자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바예지드의 종자, 쇼아라의 블라드.”
기사들을 헤치고 나아간 그곳에는 노인이 누워 있는 달구지를 가로막듯이 서 있는 소년이 있었다.
금발과 푸른 눈동자.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무언가의 기질을 엿본 미르셰아는 미소 지었다.
“꽤 하던데.”
“하고 싶다는 말이나 빨리하시지.”
자신을 억눌렀던 푸른 눈동자.
선의는 아니었을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블라드는 미르셰아에게 이빨을 들이대었다.
만약 그의 방해만 아니었어도 라문드는 지금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을 것이다.
“나는 네가 반가운데 너는 그렇지 않나 보군.”
“반가울 이유는 없는데 반갑지 않을 이유는 많거든.”
비록 들고 있는 검은 없었으나 내뿜는 기세만큼은 벨 듯이 날카로웠다.
블라드는 입이 아닌 눈빛과 기세로써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
미르셰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블라드의 주위로 흐르는 기류를 바라보았다.
흩날리던 소년의 머리카락도 바람을 따라 근처를 맴돌던 눈송이들도 모두 멈추고 있었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소년은 미르셰아처럼 기세로써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이 좀 더 성숙해졌다는 증거였다.
“이거 좀 섭섭하군. 위험한 곳에 가지 말라는 나의 의사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던 모양이야.”
“지랄하지 마.”
자신의 앞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년을 보며 미르셰아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과연 이래야지.
어디서나 당당히 고개를 들 줄 알아야지.
너는 그래야만 하는 존재니까.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몇 가지 질문만 하고 사라져주마.”
그러나 미르셰아에 비한다면 아직은 연약한 세계.
미르셰아는 발걸음 한 번으로 소년의 영역을 찢어발기고는 천천히 블라드의 앞으로 다가섰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푸른 눈동자에 서로의 모습이 비쳐질 정도로 가까이.
“첫 번째 질문이다.”
그리고는 미르셰아가 조용히 귓속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누구도 듣지 못하게.
오직 소년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혹시 용을 볼 때마다 심장이 뛰어오르지 않나.”
“······!”
질문과 함께 천천히 기세를 내뿜는 미르셰아.
그때처럼 오직 용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기세에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뭐라는 거냐.”
“두 번째 질문.”
대답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소년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미르셰아가 미소 지었다.
“린드부름의 피는 푸른색이었지.”
터질 듯이 뛰어오르는 심장 박동 속에서 가까스로 서 있던 블라드는 미르셰아의 다음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이윽고 들려온 그의 질문이 너무나 황당했기 때문이다.
“혹시 그 피를 보고는 목이 말라오지 않았나?”
“뭐?”
질문이 무언가 이상하다.
미르셰아에게서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블라드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용살 기사단의 단장. 미르셰아.
미르셰아 드라굴리아.
“용의 피를 마시고 싶지 않았냐 묻는 거다.”
소년과 닮은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