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77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2)
커다란 자물쇠, 단단한 쇠사슬.
마법적 술식과 함께 교회의 축문까지 새겨넣어 단단히 봉인된 두 개의 함.
그 함 앞에 한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보고해봐라.”
백발과 가까운 은색의 머리를 지닌 노년의 기사.
억세게 자란 수염과 제멋대로 뻗친 머리카락은 마치 사자의 갈기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린드부름 토벌에 성공했습니다.”
함을 바라보고 있는 노년의 기사 뒤에는 볼코프가 절도 있는 자세로 서 있었다.
“다행히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마무리를 지었기에 용살 기사단에게 명분을 내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놈은?”
작은 목소리였으나 사방을 울리는 울림이 있었다.
남자는 목소리만으로도 강한 기세를 담아낼 줄 아는 경지에 올라있었다.
“용살 기사단의 단장 미르셰아는 북부를 떠났습니다.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감시했습니다.”
“그렇군.”
볼코프의 보고를 들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함들을 바라보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 공명하며 용의 기세를 퍼트렸던 녀석들이었건만 지금은 마치 잠에라도 빠진 듯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더는 이 녀석들이 날뛸 이유는 없겠군.”
하얀 용 린드부름은 죽었고 용살 기사단의 단장 미르셰아는 북부를 떠났다.
그 말은 더는 이 조각들이 북부에서 불러댈 용은 없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가능성을 깨달은 용들은 이제 북부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린드부름이 한 마리만 있는 것은 아닐겁니다. 공작님.”
“그렇겠지.”
강철공(鋼鐵公) 티무르 바라노프.
그는 자신의 옆에서 조언하는 마법사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도 북부의 설원 어딘가에는 숨을 죽이고 있을 어린 용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능성을 되찾게 될 때가 오면 또다시 이번 같은 일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역시 조각 두 개를 한 번에 보관하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군.”
본래 북부에 보관되어 있던 함.
그리고 로마노프가 무너지면서 사제들이 구출하듯 옮겨왔던 서부의 함까지.
서로가 멀리 있을 때는 상관없었으나 가까이 붙어있으니 이런 부작용이 생기고 말았다.
“조각들을 떨어뜨려 놓아야 해.”
서로 반응하는 두 개의 조각을 떨어뜨려놔야 한다.
그러나 누가 이 함을 맡아 줄 것인가.
막중한 의무와 책임이 필요한 만큼 오직 자기 생각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공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더 보고할 일이 있나?”
티무르의 말에 볼코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용살자가 탄생했습니다.”
눈이 가득 쌓인 설원 위에서 하얀 용을 뒤쫓았던 소년이 있었다.
가장 강하지는 않았으나 가장 빨랐던 소년은 자신이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름은?”
티무르는 갑작스레 등장한 존재를 들으며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번 세대 바예지드 가문에서는 오직 루트거만이 주목할만한 대상이라 생각했었거늘.
“블라드라는 소년입니다. 아직은 종자에 불과하지만 가진바 가능성이 매우 빛나 보였습니다.”
“종자······.”
티무르는 볼코프의 보고를 듣고는 턱을 쓰다듬으며 용의 조각이 담긴 함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년이라.”
여태까지는 듣지 못했던 이름.
숨겨놓았던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튀어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린 것들은 언제나 예측하기 힘든 존재들이었다.
“어린 녀석들은 금방 자라기 마련이지.”
무엇이 될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이었으니까.
시간은 흐르고 세대는 변한다.
티무르는 이제 시간이 자신의 편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어딘가에 있을 새로운 용이 자신의 가능성을 깨닫기 전에 용의 조각들을 멀리 떨어뜨려 놔야만 했다.
그것이 맹약의 수호자인 자신이 할 일이었으니까.
※※※※
블라드는 식판을 내려놓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들리는 종자들의 식당.
딱히 변한 것은 없어 보였지만 지금 옆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종자들의 시선이 자신의 검에 쏠려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별일 없었냐?”
“별일은 없었지. 적어도 나한테는.”
포틀리는 오랜만에 보는 블라드를 마주하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제 더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서 그런지 통통하던 얼굴에 윤기까지 흐르는 것 같았다.
“할 말 있으면 해.”
“······물어봐도 돼?”
스프에 숟가락을 가져다 대던 블라드를 보며 포틀리는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지내는 환경이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타고난 소심한 성격만큼은 고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질문 하나에 소시지 하나.”
“그런데 그 검은 루트거 님이 주신 거 맞아?”
포틀리는 블라드의 제안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말을 건넸다.
블라드는 포틀리의 반응에 너무 쉽게 거래를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궁금해?”
“나뿐만 아니라 다들 궁금해할 걸?”
블라드는 포틀리의 말과 함께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 다들 물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소년이 차고 있는 검을 정말 루트거가 주었는지 말이다.
“원래 있던 녀석은 임무 중에 깨 먹었으니까. 당연히 받아야지.”
린드부름을 잡기 위해 소년은 최선을 다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검을 깨부수고 말았다.
그리고 루트거는 무리의 책임자로서 그 일에 대해 보상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대단하네.”
블라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게 말했지만 정작 그 말을 듣고 있던 포틀리와 주변의 종자들은 두 눈을 반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차기 가주로써 가장 유력한 분이시잖아. 그런 분한테 검을 하사받았다는 건 분명 특별한 일이지.”
주위의 사람들은 블라드가 루트거의 검을 받은 것을 단순히 보상의 의미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검은 루트거가 소년을 인정했다는 뜻이고 보증했다는 증거이기도 했으니까.
“혹시 너한테 선택지를 주신 건 아닐까?”
“······거기까지만 해.”
요제프의 종자였으나 루트거가 인정한 소년.
남들이 보았을 때는 분명 블라드가 복잡한 기류 속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블라드는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마음대로 상상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제프 님한테는 갚아야 할 것이 있어.”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할게.”
블라드는 옛일을 생각하며 가만히 빵을 뜯어 스프에 적셨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지금의 행동이 평생의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지금의 모습이 빛나 보인다고 할지라도 블라드는 자신이 어디에 속해있던 사람인지 잊지 않았다.
뒷골목의 더러운 진창이 아닌 바예지드라는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요제프라는 사람이 소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블라드는 그것에 대해 신의로써 갚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었으므로.
“그런데 그거 알아?”
블라드의 안색이 영 불편한 것을 눈치 챈 포틀리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뭐?”
포틀리의 노력을 알아챈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종자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차갑게 무시했을테지만 블라드는 포틀리와 칸노르 가문에게 이래저래 신세 진 것들이 있었다.
당장 그레고리만 하더라도 눈앞에 있는 포틀리와 피가 섞인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바예지드의 기사님들이 전부 이곳으로 모이고 있대.”
“전부?”
눈을 크게 뜨며 관심을 보이는 블라드의 반응에 포틀리는 안심이라도 한 듯 수저를 들며 말했다.
“적어도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모이나 봐.”
“갑자기 왜?”
“그건 나도 몰라.”
스투르마는 바예지드 가문의 주도(主都).
그런 곳으로 기사들이 모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겠으나 포틀리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이상한 점이 엿보였다.
“임무 중이던 기사님들까지도 전부 모여들고 있다나 봐. 소문에 의하면 백작님께서 직접 소환하셨다고 하더라고. 혹시 뭐 아는 이야기 없어?”
포틀리는 계속해서 스투르마 안에 있었던 자신보다야 밖에서 활동했던 블라드가 소문에 더 민감하리라 생각했다.
“아니.”
그러나 블라드 또한 갑작스레 기사들을 소환하는 상황에 대해 영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란 무력의 상징.
그런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린드부름과 같은 또 다른 위협이 닥쳐온 것은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닥쳐올 일에 미리 불안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년은 언제든지 검을 뽑아 들 준비가 되어있었으니까.
식당에 조용히 울려 퍼지는 식기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종자들은 조용히 블라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블라드는 몰랐겠지만, 소년을 오랜만에 본 종자들은 알 수 있었다.
종자로써 함께했던 금발 소년은 이제 자신들이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먼 곳에 있다는 사실을.
행동 하나, 눈빛 하나에 깃든 존재감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소년은 더는 종자라는 위치에 머물기에는 너무나 커져 버렸다.
오직 스프에 집중하고 있는 소년만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
“이제 순례는 그만하려고 합니다.”
“결정하셨습니까?”
가주의 집무실.
라문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내려놓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원한 선택이기는 했으나 참으로 고된 시간이었습니다.”
“······이해합니다.”
그 말과 함께 페테르는 라문드의 찻잔 옆에 놓인 동전을 바라보았다.
볼품없이 낡다 못해 붉게 녹까지 슨 동전은 누군가에게 건네준다고 하더라도 환영받지 못할 물건 같아 보였다.
“그렇다면 마지막 두카트는 블라드라는 소년에게 건네주실 생각입니까?”
“그 녀석은 자격이 있으니까요.”
라문드는 페테르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첫 만남의 강렬함에서부터 이번 린드부름의 토벌까지.
바로 옆에서 블라드를 지켜봐 온 늙은 기사는 소년이 이 동전을 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명예의 값을 받았으니 블라드라는 아이의 어깨가 무겁겠군요.”
“그러라고 하는 겁니다.”
라문드는 이제 한시름 내려놓았다는 듯 의자 등받이에 깊게 등을 기대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로써 그리고 바예지드의 가신으로서도 모든 의무를 마무리 지은 것 같아 홀가분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귀한 귀족이며 바예지드 가문의 가주이기도 한 페테르였으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앞에 있는 라문드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존경심을 표했다.
의무와 명예를 다한 늙은 기사는 이제 진정한 은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기사들이 꿈에 그리는 그런 마무리였다.
“그래도 며칠간은 더 머물다 가시지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라문드는 페테르의 말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아는 페테르라는 사람은 이별을 아쉬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은퇴를 하면 또 누군가는 새로이 등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페테르의 말에 라문드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는 듯 손바닥으로 무릎을 내려쳤다.
“가주께서도 인정하셨군요.”
“시기가 좀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소년이 이곳에 온지는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바예지드의 역사상 1년 만에 인정받은 종자는 없었다.
“이번 임명으로 최연소이자 최단기 기록이 깨지겠군요.”
“그런 전통 따위야 얼마든지 깨져도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전통을 중시하던 늙은 기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며 페테르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라문드 님께 직접 그 말을 들으니 더욱 확신이 생기는군요.”
페테르는 그 말과 함께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단단한 모습으로 도시를 지켜주던 스투르마의 성벽.
그 성벽의 위로 하얀 겨울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겨울과 함께 바예지드로 찾아왔던 소년을 페테르는 기억하고 있었다.
스투르마로 기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바예지드의 깃발을 든 채.
모두가 새로운 명예가 탄생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