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78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3)
“자 이제 마무리를 해볼까?”
옥사나는 자신의 두 손에 머릿기름을 부어놓고는 양손을 비비며 소년에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더 가까이 와야지.”
“······네.”
조용하지만 모두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옥사나의 응접실.
하녀들은 소년의 갑옷을 반짝이게 닦고 옷과 망토를 다림질하느라 분주했지만, 오직 옥사나와 블라드만큼은 고요함 속에 서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 예상보다는 빠르긴 하다만.”
옥사나는 보기만 해도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블라드의 머리를 단정히 쓸어넘겼다.
기름을 바른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머리카락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금발이 옥사나의 눈에도 꽤나 근사해 보였다.
“그만큼 힘들었겠지.”
“······.”
블라드는 옥사나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기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 이해한다는 듯 깊이 있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옥사나가 버겁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록 붉은 머리 소녀의 앞에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 말과는 달리 블라드는 몇 안 되는 어머니와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기억은 촘촘한 빗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금발이 근사하구나. 물려주신 부모님에게 감사해야 할 만큼.”
‘그래도 칙칙한 내 머리카락 색보다 그 사람의 금발을 물려받아 다행이야.’
어머니와의 오래된 기억을 자극하는 옥사나의 말에 블라드는 무심코 차고 있던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
언제나 자신에게 위안을 주었던 장식 없는 검이 있던 자리.
그러나 그곳에는 낯설고 어색한 검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순간에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존재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소년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곳에서 같이 봐주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됐다.”
블라드는 옥사나의 말과 함께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비쳐오는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만큼이나 창밖으로 번져오는 오후의 햇살이 눈부셨다.
“이 정도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겠다.”
자신이 만든 작품을 보며 뿌듯해하는 옥사나.
블라드는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블라드는 그 말과 함께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며 옥사나의 응접실을 눈에 담았다.
소리와 냄새, 그리고 흐르는 공기의 촉감까지 옥사나의 응접실에 있는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 새겨넣은 블라드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소년이 별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등 뒤에 두고 온 존재들은 멀어져만 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가끔씩 그들이 그리울 때마다 머릿속에 고이 접어두었던 기억들을 펼치면 될 테니까.
바로 지금 새겨넣은 기억처럼.
※※※※
“떨리냐?”
“그다지요.”
자야르는 애써 태연한 척하는 블라드의 대답에 그저 입꼬리를 올렸을 뿐이었다.
“센 척은 적 앞에서나 해라. 애송아.”
“······진짠데요.”
블라드는 그 말과 함께 자야르의 등 뒤에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문.
데스웜의 사체를 들고 왔을 때 보았던 광경이었지만 그날의 소년은 저 앞으로 나아갈 자격이 없었다.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옆에 서 있던 시종이 신호하자 자야르는 기사들의 전당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섰다.
오늘만큼은 오직 블라드만을 위해 열릴 문.
그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은 소년을 위해 가르치고 자신의 것을 내어주었던 기사 자야르 밖에 없을 것이다.
“바예지드의 종자 블라드! 그가 백작님의 명을 따라 기사들의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자야르는 자신의 종자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큰소리로 외쳤다.
“부디 입장을 허락해주십시오!”
누구보다 당당하기에 커다랗고 누구보다 자랑스럽기에 떨림 없는 자야르의 외침.
크게 울려 퍼지는 그의 말에 굳게 닫혀 있는 문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오라.”
목소리에 실려 은은히 풍겨오는 오러.
기사들의 세계가 소년의 입장을 허가했다.
끼이이익-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자야르의 손끝에서부터 닫혀 있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자격의 유무로써 소년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문이 열리자 끊겨 있던 붉은색의 융단이 소년이 나아갈 길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
블라드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모든 것이 반짝이는 공간이었다.
양옆에 도열해 있는 기사들.
창문을 넘어 비치는 햇살이 기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에 환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
블라드는 반짝이는 광경에서 잠시 눈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언제나 소년의 뒤를 지켜주고 밀어주었던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을 들 수 없기에 감히 문 앞에 서 있을 수도 없는 사람.
소년의 등 뒤에서 짙은 눈그늘의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가봐라.”
평생을 넘지 못할 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요제프는 본인은 아니었을지라도, 자신의 검 하나를 저 안으로 밀어 넣는 데 성공했다.
포기하지 않았던 청년은 그 누구보다 미소 지을 자격이 충분할 것이다.
“축하한다.”
기사들의 전당으로 나아가는 블라드의 등 뒤로 자야르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평소와 다른 자야르의 목소리에 블라드는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기분이었지만 애써 그것을 억눌렀다.
“바예지드의 종자 블라드는 내 앞으로 올라오라.”
블라드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침내 문을 연 기사들의 세계가 소년에게 이리 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달빛 아래서 소년을 지켜보고 있던 그 날의 모습과도 같은 눈빛으로.
“네.”
붉은색의 길은 명예의 길.
소년은 그 길을 둘러싸고 있는 기사들을 지나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뒷골목의 진창을 넘어 자신이 꿈꿔왔던 그곳을 향해서.
“이곳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소년은 언제나 별을 꿈꾸었다.
자신의 발이 시궁창 같은 현실에 빠져들지언정 언제나 시선만큼은 하늘 위에 떠 있는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별에 다다랐다.
“영원히 변치 않을 소드마스터의 규율을 너의 왼손에 들어라.”
황금색의 양피지.
블라드는 소드마스터의 맹세가 담겨 있는 양피지를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그저 꿈꾸었을 뿐인 빛나는 별을 드디어 자신의 손에 움켜쥔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말았다.
“무릎을 꿇고 맹세해라. 바예지드의 종자야.”
한쪽 무릎을 꿇은 소년의 어깨로 차가운 페테르의 검이 내려앉았다.
내려앉은 검의 차가움과 날카로움이 블라드의 정신을 명료하게 일깨우고 있었다.
“기사는 언제나 가능성을 품어야 한다. 그것이 소드마스터의 첫 번째 규율이다.”
쇼아라의 블라드.
그 이름을 만들어 준 기사들이 있었다.
비록 적으로 만난 사이였으나 그들은 소년이 품고 있던 가능성을 지켜주기로 했다.
그것이 기사가 행해야 할 마땅한 의무였으니까.
“기사는 언제나 자신의 양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소드마스터의 두 번째 규율이다.”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 기사 그레고리는 모든 것을 각오한 채 스스로를 불태웠다.
있어야 할 곳에 서 있다면 해야 할 순간에 서 있다면 망설이지 마라.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오직 스스로의 양심일지니.
“기사는 언제나 명예로운 길을 쫓아야 한다. 그것이 소드마스터가 정한 마지막 규율이다.”
기사는 언제나 명예로워야 하며 명예롭기 위해서는 언제나 위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치의 부끄러움 없이 오직 정당한 대가만을 위해.
“나의 검과 기사의 규율 앞에 맹세해라. 쇼아라의 블라드.”
소년은 언제나 장식 없는 검이라는 가능성을 바라보았었다.
진창에 같이 서 있었던 붉은 머리 소녀가 그것을 증언해 줄 것이다.
비록 뒷골목 진창의 인생이었을지라도 소년은 그것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을 지켜왔다.
장미의 미소를 지키던 창녀들의 기사가 언제나 선을 지키려 노력했던 소년의 양심에 대해 증언해 줄 것이다.
“맹세합니다.”
그리고 소년은 별을 바라보았기에 위를 보았고 그것을 손에 쥐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쉴 새 없이, 기어서라도.
자신도 몰랐던 규율이었으나 소년은 최선을 다해 그것을 지켜온 사람이었다.
“온 힘을 다해 소드마스터의 규율을 지키겠노라 맹세합니다.”
그리고 소년이 자신도 모르게 지켜왔던 소드마스터의 마지막 규율은 그동안 함께 발버둥을 쳐왔던 장식 없는 검이 증언해 줄 것이다.
“바예지드의 주인인 나 페테르 바예지드가 명한다.”
소년의 맹세와 함께 이곳의 정당한 주인이 소리높여 선언했다.
“내 앞의 소년은 무릎을 꿇었을 때는 미천한 종자 블라드였으나 다시 일어섰을 때는.”
자신의 검 아래서 새로운 별이 탄생했노라고.
“당당한 기사 블라드로서 일어서리라.”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
산 로지노가 축복한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자.
린드부름의 푸른 피가 외친 용살자.
그리고 이제는 바예지드가 인정한 기사인 쇼아라의 블라드.
그가 당당한 발걸음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수고했다.]그 당당함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소년을 지켜봐 왔던 목소리가 인정해주었다.
소년이 왼손에 들고 있는 소드마스터의 맹세와 함께.
뿌리 없는 소년은 오늘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뿌리를 만들어내었다.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후손이 아닌 오직 쇼아라의 블라드라는 이름 아래서.
이곳에 있는 모든 별들이 증언해 줄 뿌리였다.
※※※※
촛불이 일렁이는 어딘가의 집무실.
그곳의 주인인 중년의 남자가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뒤에 있는 드워프 놈들이 영 껄끄럽단 말이지.”
비대해 보이는 몸.
보기에도 굼떠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조금이라도 남자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두툼한 살집 속에 강인한 근육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귀족 놈들처럼 차근차근히 움직여 보기로 했다.”
접시에 놓인 호두를 손에 쥔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것들을 부서 내며 말을 이었다.
“유일한 하이날인 알리시아 남작에게는 아직 부군이 없다 하더군.”
“그렇습니다.”
고귀한 귀족이었음에도 쩝쩝거리는 소리를 거침없이 내는 남자.
그 어떤 것에도 눈치를 보지 않는 개척자이자 정복자.
“그래서야 쓰겠나. 이 험한 세상에 여자 혼자 몸으로 버티기는 힘들 거야.”
먹어도 먹어도 언제나 배고픈 그에게 또 하나의 먹잇감 하나가 눈에 들어온 참이었다.
“그러니 네가 이번에 힘을 좀 써줘야겠다.”
“말씀하십시오. 백작님.”
지그문드 가이다르 백작.
새로운 서부의 패자가 된 남자.
그가 내리는 명령에 촛불 밖에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내 아들 녀석과 같이 데어마르로 가라. 그곳에서 정당한 명분을 얻어와.”
폭력과 전쟁이 아닌 명분을 통해 뻗어나가겠다는 지그문드의 말에 기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다르의 피가 섞인 그의 아들과 함께 라면 적어도 자그마한 명분 하나 정도는 챙겨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 믿는다. 고딘.”
지그문드의 말에 고개를 든 기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가이다르의 기사 고딘.
창밖에 비치는 푸른 달빛이 그의 머리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