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79
푸른 눈동자의 기사 (1)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던 요제프는 재빨리 눈을 치켜뜨고는 고개를 들었다.
점점 명료해지는 시야 속에서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페테르의 모습이 보였다.
몸이 약한 아들을 아버지로서 걱정해야 할지 아니면 가주로서 따끔히 혼을 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피곤했던 모양이구나.”
“죄송합니다.”
페테르의 눈동자 속에서 슬그머니 아버지의 눈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피곤할 만도 할 것이다.
쇼아라에서 출발해 쉴 새 없이 스투르마로 뛰어 올라와서는 블라드를 기사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으니.
블라드라는 소년이 바예지드 가문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단기만에 기사로 임명된 것은 요제프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네가 바란 대로 그 아이의 격은 맞춰주었다.”
“감사합니다.”
요제프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재빨리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록 페테르의 모습에 가려 밖의 풍경이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창틀에 매달려 있는 눈들이 요제프에게 서늘함을 안겨주었다.
“조만간 북부의 영주들이 모두 모일 회의가 열리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까.”
그러나 굳이 창까지 바라보며 정신을 일깨울 필요는 없었다.
이윽고 들려오는 페테르의 말이 요제프에게 있어 놀라움을 안겨주었으니까.
“대회의(大會議)입니까?”
“그래.”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발동되지 않았던 북부 대회의.
그 일이 조만간 일어날 것이라는 말에 요제프의 눈빛이 저절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북부의 모든 영주들이 모이는 자리이니만큼 곳곳에서 보이는 징조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제프는 그런 낌새들을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그만큼 강하게 보안을 유지했거나 아니면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급박하게 진행했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데어마르의 영주를 앉히고 싶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한 마디.
요제프가 잠시 당황하며 입을 열지 못하자 페테르는 옆에 있던 술병을 잡아들고는 조용히 따르기 시작했다.
곧 맑은 갈색빛이 만드는 향기와 흘러내리는 소리만이 집무실에 가득했다.
“알리시아 남작도 알 거다. 데어마르가 더 이상은 북부와 중부 사이를 넘나들 수 없음을.”
평화로운 시절은 끝났다.
이제는 생존을 위해 서로가 뭉쳐야 할 때.
그리고 그 선택은 데어마르 같이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영지들에게 더욱 가혹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녀가 저희를 선택하겠습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 네가 여태껏 애써온 것을 안다.”
페테르는 깊은 눈으로 마주 앉아 있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영민하지만 약한 자신의 둘째 아들 요제프 바예지드.
그러나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기에 그만큼 처절하게 발버둥 쳐왔다는 것을 안다.
“최선을 다해 지원하마. 데어마르에 관해서 만큼은 네가 곧 바예지드다.”
그러니 자신 또한 그 발버둥에 보답해주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로서도 그리고 바예지드 가문의 가주로서도.
“감사합니다. 아버지.”
“오랜만에 올라왔으니 며칠 쉬다 가도록 해라. 너의 어머니가 만족할 만큼.”
대화가 끝났음을 눈치챈 요제프가 미묘한 미소와 함께 집무실을 나가자 페테르는 짧은 한숨과 함께 옆에 있는 술잔을 집어 들었다.
“고민이로군······.”
무엇을 택할까 고민하는 것은 오직 데어마르만은 아닐 것이다.
페테르 또한 선택의 기로 앞에 서 있었으며 앞으로 몇 년 안에는 결정을 지어줘야 할 것이다.
귀족의 피는 냉정한 푸른색이어야 한다.
그들의 어깨 위에는 실로 무게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의무와 책임이 얹혀 있었으니까.
페테르는 술을 가득 따라낸 잔을 들고는 일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리는 눈과 함께 겨울이 오고 있었다.
조언자 라그무스가 말한 것처럼 이번 겨울은 지난해보다 더 추워질 것만 같았다.
※※※※
윤기 나는 망토, 반짝이는 갑옷.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저택을 나선 블라드는 지금 스투르마의 성벽 위에 서 있었다.
“이런 풍경이었네요.”
블라드는 저 앞에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는 황혼의 색깔이 스투르마의 성벽과 함께 북부의 평원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너한테 한번은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었지.”
라문드는 멍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말했다.
언제나 누추한 차림새로 지내왔던 그였지만 지금의 모습은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비록 갑옷까지는 아니었으나 기사들이 즐겨 입는 서코트(Surcoat)와 망토를 두른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고개를 숙일 만큼 당당한 한 명의 기사다운 모습이었다.
“스투르마의 성벽은 피를 먹고 자라왔다.”
블라드는 옆에서 들려오는 진중한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적들의 피이자, 바예지드의 피.”
그곳에는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소년을 마주하는 라문드가 있었다.
“그리고 너도 언젠가 때가 오면 마땅히 너의 피를 내놔야 할 거다.”
“······.”
라문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만 같은 블라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피가 필요하다.
그리고 기사라는 존재들은 그때가 오면 기꺼이 자신들의 피를 내놓겠다 맹세한 사람들이었다.
오래된 기사는 이제 막 기사가 된 소년에게 기사의 근본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알겠어요. 영감님.”
“라문드다.”
이제야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는 가장 낮은 곳을 헤매던 자.
“앞으로는 라문드 경이라 불러라.”
미처 주워 담지 못한 명예들을 찾기 위해 늙은 몸뚱이를 이끌고 헤매었던 그는 이제 명예로운 마지막 한 닢만을 손에 쥐고 있을 뿐이었다.
“받아라.”
그리고 마침내 노인은 가장 낮은 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소년에게 자신이 지니고 있던 마지막 동전을 건넴으로써.
“이게 뭔데요?”
“내가 터트린 너의 갑옷 값.”
네게 얻어먹었던 식사, 네게 빌렸던 여관의 숙박료.
그리고 네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모든 가능성에 대한 대가.
그 모든 것들을 지불하는 한 닢의 두카트.
“겨우 이걸로요?”
“겨우 그걸로 되고말고.”
블라드는 형편없이 녹슬어 있는 동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려대었지만 라문드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을 보며 그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충분하고말고.”
노인은 그동안 소년에게 많은 것을 빚져 왔고 그것은 막돼먹은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철저한 의도에 따른 결과였었다.
그런 라문드의 의도에 따라 자연스레 가장 낮은 자의 후원자가 되어있었던 소년은 이제야 꺼낸 낡은 동전에 어리둥절할 뿐이었지만 딱히 뭐라 불만을 내뱉을 수도 없었다.
이제 소년의 앞에 있는 노인은 이름 모를 영감님이 아닌 자신의 오랜 선배가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나중에 한 번 내 장원으로 놀러 오시게.”
“그러게요. 모자란 값은 거기 가서 받으면 되겠네요.”
라문드는 조용히 투덜거리는 소년을 보며 미소 지었다.
“자네의 방문은 언제든지 환영하지. 블라드 경(卿).”
“······네?”
블라드는 자신을 경이라 칭하는 라문드를 보며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이럴 때는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으니까.
“그동안 즐거웠네.”
자신에게 악수를 청하는 라문드를 보며 블라드는 미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장식 없는 검은 자신의 용도를 다했기에 소년과 헤어졌다.
늙은 기사는 자신의 의무를 다했기에 이제 소년과 헤어지려 한다.
“······.”
자신에게 이별을 말하는 라문드를 보며 블라드는 그가 건네준 동전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소년에게 있어 아직 이별은 어색한 순간일 뿐이었으니까.
저물어가는 황혼이 스투르마의 성벽과 함께 두 사람을 붉게 비추고 있었다.
천천히 기울어지는 저녁노을만큼이나 라문드의 악수를 받는 블라드의 손도 느릿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
푸른 눈동자의 사내가 저택을 걸어가고 있었다.
반짝이는 갑옷과 함께 흩날리는 금발을 보며 주위에 있던 하인들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사내가 걷고 있는 저택의 어느 곳 하나에도 빛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사방에 뚫려 있는 창들에서 비치는 햇빛과 그 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조각상과 장식품들.
오래된 만큼 고풍스러운 멋을 자랑하는 장식품들은 주인의 안목이 얼마나 고상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막 복귀했습니다. 아버지.”
당당한 발걸음으로 로비로 걸어들어온 미르셰아가 공손한 모습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는 홀 가장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왔느냐.”
마지막 숨을 토하는 황혼빛이 그가 앉아 있는 자리를 비추었다.
마치 바짝 말라버린 고목 나무와도 같은 손이 창밖으로 비치는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보고해봐라.”
쇳소리가 나듯 물기 하나 없이 갈라지는 목소리에서 그의 나이와 기력이 엿보였다.
미르셰아가 아버지라 칭한 남자는 무거워진 세월을 감당하지 못해 그저 얹혀 있듯 간신히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위에서 들려오는 힘겨운 목소리에 미르셰아는 송구스럽다는 듯 더더욱 고개를 숙이며 북부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하얀 용 린드부름.
자신의 가능성을 깨달았기에 용의 조각들이 꾀어내었던 북부의 용은 용살 기사단이 아닌 바예지드의 기사들에 의해 토벌되고 말았다.
“······야만인 놈들. 제 주제를 모르고.”
북부의 사내들을 야만인이라 한데 뭉쳐 표현한 노인은 실망한 감정을 감추지 못한 채 앙상한 손가락을 들어 팔걸이를 두들겨 대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북부에 대한 편견은 아직도 노인의 영혼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미르셰아는 자신의 실패가 아버지에게 큰 실망을 안겨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이 실패한 데에는 커다란 변수가 있었으며 그 변수는 분명 지금 실망하고 있는 노인에게 큰 기쁨을 안겨다 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북부에서 반가운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반가운 소년?”
바짝 메마른 노인은 갑작스러운 미르셰아의 보고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거운 세월에 의해 육체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얗게 탈색되었지만, 지니고 있는 푸른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번뜩이고 있었다.
“혹시 북부에 들리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그곳에서 아직 눈뜨지 못한 어린 용을 발견했습니다.”
미르셰아의 말에 노인은 눈을 깊이 감았다.
마치 지나간 옛 기억을 헤집듯 감고 있는 눈꺼풀이 쉴 새 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북부만 가보았겠느냐. 나는 평생을 걸쳐 이 세상 모든 곳을 눈에 담아온 사람이다.”
씨앗이란 무엇이 될지 모르는 가능성의 존재.
그 가능성들을 뿌리기 위해 노인은 지난 세월 동안 대륙 곳곳을 돌아다녀 왔다.
그것은 노인의 신념이자 소원이었으며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 아이를 보고 심장이 울렸더냐?”
“그렇습니다.”
“색깔은 어떠하더냐?”
노인의 말에 미르셰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금발에 푸른 눈.
드라굴리아 가문의 피가 전해주는 색깔이 그곳에 있었다.
“저희와 같습니다.”
“······그래.”
미르셰아의 말에 메마른 노인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와 함께 간신히 지평선에 매달려 있던 황혼이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래도 용의 조각들이 부르지 않은 것을 보니 너의 말처럼 아직 눈을 뜨지는 못한 모양이구나.”
어느새 촉촉해진 노인의 목소리와 함께 저택 곳곳으로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햇빛에 비치던 저택과는 또 다른 모습.
고풍스럽던 조각상들은 어두운 그림자가 스며들자 불길해 보일 뿐이었고 멋진 풍경이 그려져 있는 그림들은 누가 보아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겨대었다.
“씨앗을 뿌리는 일은 언제나 고되며 그것을 기다리는 시간은 괴롭지만 그럼에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그 일을 반복하고는 하지.”
마침내 어둠이 가득 내려앉은 로비 안.
그곳 가장 높은 곳에서 여태껏 보지 못한 사내가 일어섰다.
“나 또한 그래왔다.”
풍성한 금발.
명료한 푸른 눈.
그리고 당당한 풍채와 분위기를 가진 중년의 사내.
어둠이 주는 물기를 빨아들인 남자가 로비를 내려오고 있었다.
“그 아이를 한번 보고 싶구나.”
제국의 수도 브리간테스.
그곳에서도 중심에 있는 저택.
용혈공(龍血公) 드라굴리아 공작이 기거한다는 그곳에서 가장 오래된 푸른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