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80
푸른 눈동자의 기사 (2)
“왜 아직도 오지 않죠?”
알리시아는 머리를 감싸 쥐고는 책상 위에 엎드려서는 앓는 소리를 내었다.
“편지를 보낸 지가 오늘로써 한 달째인데 도착은커녕 기별조차 없어요.”
가이다르 백작가에서 불쾌한 연락을 보내온 지 오늘로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미 그쪽에서는 사람을 꾸려 출발했을 테니 조만간 이곳으로 도착하게 될 것이다.
“조금만 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보시죠.”
노기사 던칸은 책상 위에서 흐느적거리는 알리시아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다가오는 위협이 있으니 혼란스러울 법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야 말로 자신과 같은 가신들이 주군을 바로잡아줘야 할 때라는 것을 던칸은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최악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일에 겸허한 자세로 대처하실 수 있습니다.”
“······그냥 확 그쪽으로 시집가 버릴까.”
입술을 한껏 내민 채 투덜대듯 말하던 알리시아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우스운지 허탈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하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그렇습니다.”
가이다르 백작인 지그문드는 알리시아에게 자신의 장남과 혼인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편지를 보내왔다.
가이다르 가문이라면 요근래 가장 크게 이름을 떨치는 가문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데어마르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곳이었으니 알리시아의 입장에서도 한 번 정도는 깊이 고민해볼 만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편지 안에 하이날 가문에 대한 존중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정말 지그문드가 진심으로 가이다르와 하이날의 결합을 원했다면 이런 통보 같은 느낌의 청혼장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편지 안에 쓰여있는 감언이설들은 달콤하였으나 정작 하이날의 미래를 약속하지는 않았고 지그문드 백작이 그동안 해왔던 거침없던 전쟁은 그의 탐욕스러운 성정을 잘 보여준 일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지그문드 백작이 보낸 제안은 마셔서는 안 되는 독과도 같은 것이었다.
“주위가 온통 도둑놈들뿐이네요.”
“······알리시아 님.”
알리시아는 잘 알고 있었다.
바예지드 또한 단순한 호의로 자신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힘없는 자에게 조건 없는 우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었다.
“저희에게도 시간만 있다면 스스로 일어설 기회가 있을 겁니다.”
어떻게든 힘을 주려는 던칸의 말에 책상 위에 힘없이 엎어져 있던 유일한 하이날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래요. 해볼 때까지는 해봐야죠.”
힘이 없을 때 웅크리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손에 쥔 것이 없다면 어떻게든 빌려와야 하며 알리시아는 그 값을 충분히 치러줄 용의가 있었다.
“그런데 기사도 아니고 종자 한 명 빌려달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야?”
그러나 그녀가 바예지드에게 요청했던 소년은 여전히 연락 하나 없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냥 종자 한 명일 뿐인데.”
그냥 평범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날의 결투에서 하이날의 명예를 지켜주었던 소년.
그리고 자신의 손수건을 받아든 두 손으로 부모님의 묘비를 닦아준 소년이었다.
“알리시아 님. 지금 가이다르 가문에서 온 사람들이 영지에 다다랐다고 합니다.”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모두가 데어마르라는 영지에 대해 검은 속내를 드러내고 있을 때, 오직 순수한 의무로써 알리시아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단 한 사람이 있었다.
“알겠어요.”
그리고 알리시아는 지금도 그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
데어마르의 입구로 들어서는 남자들이 있었다.
대략 잡아도 열 명은 넘어 보이는 사내들은 모두가 훌륭한 무장을 하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촌동네로군.”
일행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무 조용해.”
정리되지 않은 짙은 눈썹, 넓은 어깨.
그리고 웃고 있음에도 호전적으로 보이는 인상.
기세를 전혀 정돈하지 않은 채 당당하게 흘리고 있는 청년은 자신의 눈에 들어온 영지가 마뜩잖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데어마르는 원래 이런 곳입니다. 전쟁보다는 외교로, 상공업보다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영지죠.”
“재미없다는 뜻이군.”
우락부락한 몸을 가진 남자는 옆에서 들려오는 데어마르에 대한 설명에 흥미가 식었다는 듯 머리를 긁적여댔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지. 고딘?”
“인사는 하셔야죠.”
“인사만 하면 되는 거지?”
“관심 있는 척도 하시고, 이것저것 이야기도 나눠보시고.”
“쓰읍.”
가이다르 가문의 장자 이슈트반.
그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거침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하기 싫은 것을 거부하는데에도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그런 귀찮은 일은 하기 싫은데.”
귀찮다는 생각만 해도 열이 뻗쳐오르는지 갑작스레 사나워지는 이슈트반의 기세에 뒤에 있던 기사들이 절로 긴장하고 말았다.
“타고난 피에 대한 의무를 다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기세를 정면에서 받아내고 있는 고딘은 그저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언제나 웃는듯한 얼굴 뒤에 날카로운 검을 숨기고 있는 기사.
그렇기에 마주 보고 웃어 줄 수 없는 그런 남자.
“······알았다.”
자신의 기세에도 전혀 흔들림 없는 고딘의 모습을 보며 이슈트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쉴 뿐이었다.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고딘을 붙여 보냈다는 것은 아버지가 이번 일에 진지한 태도로 임하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고딘은 이슈트반이라는 사람이 오직 억누르는 방법만으로는 달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근방에는 감히 견주어 볼 만한 귀족 여성이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서부의 핏줄.
지그문드의 성정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이슈트반은 고딘이 대놓고 물린 당근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욕이 조금 생기는 군.”
지루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임무였으나 그래도 흥미가 동하는 것이 한 가지라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이슈트반의 시야 끝으로 하이날 가문의 깃발을 매단 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
“오오.”
저 위에 앉아 있는 물빛 머리의 여인을 보며 이슈트반이 처음 내뱉은 말은 감탄사였다.
“소문으로 들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역시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습니다. 한낱 말로써는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 지금 제 앞에 있군요.”
“······.”
우락부락해 보이는 생김새와는 다르게 꽤 세련된 말을 주워섬기는 이슈트반이었으나 알리시아는 이미 그에게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감히 한 영지의 주인을 대하는 데 있어 이슈트반의 태도가 너무나 가벼웠기 때문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저는 가이다르 가문의 이슈트반입니다.”
“······환영합니다. 가이다르의 이슈트반 님.”
감히 남작이라는 공식된 명칭이 있음에도 한낱 레이디라는 칭호로 알리시아를 부른 이슈트반.
그녀 옆에 서 있던 던칸은 날카로운 기세를 보내며 이슈트반을 압박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이슈트반은 싱글싱글 웃어넘길 뿐이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미리 온다고 기별을 주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애초에 기세로써 압박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알리시아 하이날은 이곳 데어마르의 온당한 주인.
주인은 주인으로서 스스로를 존귀하게 만들 의무가 있었다.
“이번 청혼에 대한 사전적인 조율도 필요했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은 조금은 성급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만.”
그녀의 머리 색은 물빛이었으나 혀끝에서 흘러나오는 말의 색깔은 차디찬 푸른색이었다.
알리시아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귀족의 색깔을 입는 데 성공했다.
“가이다르가 저에게 보여주신 태도가 조금은 아쉽군요.”
알리시아의 말처럼 편지 하나 보내놓는다고 해서 귀족 간의 결혼이나 약혼이 성립되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가이다르는 알리시아의 의중은 듣지조차 않은 채 이미 당사자인 이슈트반을 데어마르로 보낸 상황이었으니 이것은 아무리 좋게 봐준다고 할지라도 알리시아에 대한 무례일 수밖에 없었다.
“저희 백작님께서는 만남 속에서 시작되는 인연도 있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귀족 가문 간의 만남이 이렇게 성급하게 진행된다는 말입니까?”
능글거리는 고딘의 말에 발끈한 던칸은 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한마디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늙은 기사에게 있어 알리시아라는 주군은 자신의 딸과도 다름없이 아끼는 존재였으니까.
“너무 그러지 마시지요. 백작님께서 알리시아 님을 얼마나 아끼셨으면 누구에게 뺏길세라 직접 아드님을 보내셨겠습니까.”
그러나 함부로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이들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온 것은 분명 의도가 있는 행동일 것이며 그 의도는 나름의 명분을 쌓기 위함일 것이다.
“예의와 절차가 어느 정도 무시된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이슈트반 님은 가이다르 가문의 장자이시자 후계자이신 분. 이미 존재만으로 시답지 않은 절차 따위는 대신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고딘의 말처럼 이 자리에 가문의 장자를 보낸 것은 지그문드 백작이 큰 의미를 주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만약 알리시아가 이 자리에서 그를 함부로 대했다가는 가이다르 가문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십시오. 저희는 좋은 소식을 들고 온 사람들입니다.”
이슈트반의 능글맞은 웃음을 보며 알리시아는 자신의 치마를 꽉 움켜쥐고 말았다.
청혼이라는 까다롭고도 어려운 명분을 들고 온 불청객들.
노리는 것도 명백하며 하고자 하는 일은 불쾌하기 그지없는 사내들을 보며 알리시아는 최선을 다해 인내하려 노력했다.
“여러분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일단은 마련된 거처에서 쉬고······.”
“쉬는 것보다는 알리시아 님과 돈독한 담소를 먼저 나누고 싶습니다만.”
개척자들은 거침이 없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거침없이 가지고 싶다 말한다.
“먼저 부모님들께 인사라도 드리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군요.”
그리고 가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제는 죽고 없는 부모까지 들먹거리는 이슈트반을 보며 알리시아의 물빛 눈동자가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딜 감히······.”
인내는 누구에게나 귀중한 덕목이었으나 그것 또한 선이라는 것이 있다.
만약 선을 넘었음에도 인내할 뿐이라면 그것은 스스로를 낮추는 행위일 뿐이다.
“여기가 어디라고······.”
데어마르의 군주, 유일한 하이날.
그녀가 참아서는 안 되는 모욕을 앞에 두고 분노를 토해내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예지드의 기사님들이 도착하셨습니다!”
알리시아가 인내로써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균형이 깨어지려는 순간, 집사가 큰소리를 외치며 로비를 가로질러 왔다.
감히 고용인의 입장에서 주군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집사는 이미 이렇게 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또한 해야만 했다.
“지금 막 저택에 도착하셨습니다.”
등 뒤에서 쏘아져 오는 기사들의 날카로운 기세에 집사는 창백한 안색으로 식은땀을 삐질거리고 있었으나 자신의 할 일을 하기 위해 어떻게든 애쓰고 있었다.
“들라 해라!”
만약을 대비하고 있던 던칸의 준비는 성공했고 가련한 집사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할 일을 마쳤다.
던칸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데어마르의 로비가 스스로 문을 열었다.
서서히 열리는 문틈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있었다.
북부 특유의 털 달린 망토.
그들이 온 곳과 같이 날카롭고 차가운 기세를 풍기는 북부의 기사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이날 남작님.”
그리고 그들 가장 앞에 서서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애꾸눈의 기사.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데어마르의 주인을 뵙습니다.”
서부의 기사들과는 달리 북부의 기사들은 예의로써 데어마르의 주인을 대하고 있었다.
“······.”
알리시아는 홀로 고개 숙이지 않은 채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때와 같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알리시아를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홀로 그녀의 명예를 들고 결투장으로 들어섰던 소년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기 있는 기사들과는 조금은 다른 자격으로 로비 앞에 선 소년은 뒤늦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당신의 부름에 답하기 위해 지금 이곳에 당도했습니다. 레이디 알리시아.”
이슈트반은 알리시아를 레이디라 부를 자격이 없다.
그러나 지금 로비에 들어선 소년은 그녀를 레이디라 부를 자격이 있었다.
그녀가 허락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환영합니다. 바예지드의 기사님들.”
알리시아의 끄덕임과 함께 로비의 문이 닫히고 있었다.
이제는 입장해야 할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기에.
명분을 가지러 온 자들과 명분을 손에 쥐고 온 자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