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83
자격 있기에 허락 받은 자 (2)
고딘은 블라드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리라는 것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소년이 가지고 있는 기질은 예전에 겪어봐서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정작 고딘을 씁쓸하게 만드는 이유는 자신의 배려가 거절당했다는 것보다도 소년을 둘러싸고 있는 거짓된 거품들 때문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컸을 녀석인데.”
지금 고딘이 촛불에 의지해 확인하고 있는 보고서에는 블라드가 여태껏 쌓아 올린 성과들이 적혀져 있었다.
도시의 조직 하나를 궤멸시켰다.
흑마법사의 주구를 몰아내었다.
데스웜을 몰아오고 린드부름은 아예 직접 처단했다.
“바예지드가 다급하긴 했나 보군.”
고딘은 더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고는 옆에 있던 술잔을 들이켰다.
세상에는 상식이라는 것이 있고 어떠한 기준이 상식이 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너무 띄워 올렸어.”
고딘이 블라드를 처음 보았을 때 블라드는 분명 검조차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마지막의 휘두름은 그럴싸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표출이었을 뿐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용살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을 만큼의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만들어진 가능성이라······.”
북부에서 뛰어난 명성을 지니고 있는 바예지드 기사단이었으나 이번 시대만큼은 세대교체에 실패했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블라드를 위해 평가를 부풀려 줄 만한 동기는 어느 정도 있는 셈이었다.
“그래도 오러를 깨우쳤다는 것만큼은 대견하긴 하지.”
그리고 바예지드가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분명 소년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오러의 발현이라는 것이 가르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 어린 나이에 오러를 뽑아낸 블라드를 보고 바예지드가 흥분한 것은 충분히 이해될만한 일이었다.
“······.”
어떻게든 데려왔어야 했나.
비록 인연의 방향이 맞지 않아 내버려 두고 왔으나 잘만 회유했다면 어쩌면 지금쯤은 가이다르의 가능성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쉽군.”
살다 보면 수많은 갈림길에 서게 되기 마련이고 그 당시에는 최선을 다해 선택했다 하더라도 돌이켜보면 후회가 남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고딘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소년의 빛나는 가능성이 가려지는 것만 같아 입이 썼다.
※※※※
냉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알리시아를 보며 블라드의 시선이 마구 흐트러지고 있었다.
“다시 또 그럴 건가요?”
“죄송합니다. 많이 반성했습니다.”
그녀의 기세도 기세였지만 동그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수많은 음식이 향긋한 냄새와 먹음직스러운 자태로 소년을 유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세컨대 다시는 알리시아 님의 손수건을 소홀히 대하지 않을 겁니다.”
“좋아요.”
블라드의 진심 어린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알리시아는 방금과는 다르게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 번의 실수 정도는 넘어갈 줄도 알아야겠죠.”
마치 먹이로 유인한듯한 모양새가 되었으나 어쨌거나 블라드에게 확실히 답을 얻어내었으니 됐다.
레이디 제미나에 대해서는 다시 또 말할 기회가 있겠지.
“좋아요. 다들 드시죠.”
알리시아의 말에 다들 기다렸다는 듯 앞에 있는 식기들을 집어 들었다.
손님의 자격으로 초대된 바예지드의 기사들 모두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훌륭한데. 이정도의 만찬은 얼마 보지 못했어.”
“이번에 레몬의 작황이 엄청났다고 하더니만.”
옆에서 들려오는 선배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블라드는 눈앞에 음식들에 집중할 뿐이었다.
블라드는 예전 데어마르에 왔을 때 이곳의 식단에 대해 불평한 적이 있었다.
요제프는 마음에 들어 했었지만 블라드의 입장에서는 데어마르의 채식 문화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제 레몬 소스를 곁들인 통돼지 바비큐예요.”
‘오오······.’
그러나 지금 블라드의 앞에 놓여 있는 것은 군침 도는 고기들일 뿐이었다.
성장기 소년에게 있어 단백질이 필요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남작님.”
“많이 드세요.”
블라드는 큼지막하게 썰려있는 고기를 한입 베어 물고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상등급의 고기야 칸노르 가문에서 실컷 먹어봤지만 데어마르에서 맛보는 바비큐는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맛을 선보이고 있었다.
[모든 요리의 정점은 소스에서 나오는 법이지.]이정도야 많이 먹어봤다는 듯 으쓱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블라드는 입안에 감도는 향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앞에 있는 고기들을 물어뜯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소년과 마주 보고 앉아있는 알리시아가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결 준비는 잘 되어가십니까?”
던칸은 자신의 아가씨가 보이는 태도가 민망한지 옆에 앉아있는 자야르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 그래도 그 일에 대해 요청하고 싶은 사항들이 있었습니다.”
자야르 또한 블라드 앞에 노골적으로 쏠려있는 음식들을 보며 민망해하던 참이었다.
자신의 명예를 짊어질 대전사를 위해 배려하는 것은 알겠지만 이것은 조금 도를 지나친 것이 아닐까.
“말씀만 하십시오.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며칠 후에 있을 결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소년은 든든하게 먹어둬야 하고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은 깊이 고심해야 한다.
이슈트반이라는 기사는 서부의 패자 가이다르 가문의 장남이었으며 그만큼 어린 시절부터 실력을 갈고닦아 온 진짜배기였기 때문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자야르는 블라드의 승리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고 있었다.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데어마르는 블라드 경을 위해 모든 것을 지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방금 던칸의 말처럼 데어마르는 소년을 위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만약 소년이 지게 된다면 알리시아는 가이다르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또 다른 외세인 바예지드의 간섭을 온전히 끌어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데어마르에 있는 모두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명분을 위해, 자립을 위해, 그리고 복수를 위해.
지금의 만찬은 그때를 대비하는 폭풍전야와 같은 것임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넉넉한 웃음소리와 함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
결투의 아침.
알리시아가 마련해 놓은 결투장으로 들어선 이슈트반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껄끄러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보통 결투는 로비나 전당에서 치러지지 않나.”
“알리시아 남작의 특별 요청이 있었습니다.”
고딘의 말처럼 알리시아는 이번의 결투를 로비나 홀이 아닌 야외에서 치르는 것을 원했다.
청혼에 관련된 일이니만큼 땅에 묻혀 있을 자신의 부모님들도 함께 봐주었으면 한다는 말과 함께.
“그래?”
굳이 납득하지 못할 이유는 아니었으나 이슈트반은 여전히 꺼림칙할 뿐이었다.
발끝으로 느껴지는 짧게 다듬어진 잔디의 감촉.
자그마한 자갈마저도 치워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들판.
“아침에 비가 왔었나?”
“아닙니다.”
그리고 비가 오지 않았음에도 촉촉이 젖어있는 들판의 잔디들.
빠르게 움직이기에는 편하지만, 자신처럼 강하게 디딤발을 짚어야 하는 검사들에게 있어서는 좋지 못한 환경이었다.
“이정도는 감수하셔야 합니다.”
“애를 쓰는군.”
전투에 앞서 전장을 유리하게 조성하는 것은 지휘관의 기본적인 자세 중 하나.
소년을 위해 어떻게든 자그마한 변수들을 쌓아 올렸을 애꾸눈의 기사를 바라보며 이슈트반이 사나운 미소를 흘렸다.
“준비됐나?”
이슈트반의 의미심장한 미소에도 그저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던 자야르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기선제압을 위해 지금도 블라드를 향해 쏟아지고 있는 가이다르 기사들의 무형의 기세.
그리고 소년을 위해 대신 그 기세를 틀어막아 주고 있는 선배들의 뒤로 블라드가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네.”
흔들림 없는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를 보며 자야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잘 참아주었다.
너의 원수라 할 수 있는 자들 앞에서도 끝없이 인내했던 것은 요제프 님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했던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좋아.”
그러니 이제는 자신이 소년의 인내에 보답을 해줘야 할 차례다.
자야르가 이제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던칸에게 보내자 알리시아가 초대한 사제가 결투장으로 올라왔다.
그는 지난 계승권에 관련된 결투에서 소년이 스스로의 세계를 꽃피우는 것을 보았던 사제였다.
“양 측의 대결자들은 올라오시오!”
안면 있는 사제.
소년을 위해 만들어진 전장.
“양측의 참관인들도 올라오시오!”
그리고 소년을 위해 만들어진 규칙.
사제의 지시에 따라 이슈트반과 블라드의 뒤로 두 명의 기사가 결투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푸른 달빛의 기사 고딘과 애꾸눈의 기사 자야르.
가이다르와 바예지드를 대표하는 기사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번 결투는 오러 사용이 가능하오.”
이슈트반과의 순수한 검술 대결은 필패라 생각한 자야르는 변수를 만들기 위해 오러를 선택했다.
소년이 가지고 있는 세계의 굳건한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니까.
“생사를 결정짓는 결투가 아니기에 두 분 중 누구라도 대결자들이 위험에 처하면 난입할 수 있소.”
오러를 사용하는 만큼 그에 대한 안전장치가 필요할 것이며 지금 올라와 있는 두 명의 기사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참관인이 될 것이다.
“지금의 규칙에 동의하시오?”
두 기사의 끄덕임을 본 사제는 이제 결투를 위한 마지막 준비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당사자들은 앞으로.”
참관인들이 내려가고 오직 결투의 당사자들만이 남아있는 결투장.
그곳에서 블라드와 이슈트반은 서로를 마주하며 서 있었다.
“손수건은 잘 가지고 있나? 괜한 절차를 거쳐서 손에 쥐기는 귀찮아서 말이지.”
“······.”
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기다리며 고개를 들고 있는 사제.
이윽고 다가올 결투의 시작을 기다리며 블라드가 입을 열었다.
“내가 손수건이라 치면 그럼 너는 뭘 줄 거냐.”
약한 개는 짖기 마련이다.
위협적인 태도로써 자신의 공포를 감추고 상대방의 위협을 주기 위해.
그러나 자신보다 약한 것이 분명한 눈앞의 소년은 짖기는커녕 조용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들고 있는 검 정도는 받아야 하려나.”
“이 개자식이······.”
빼앗는 것이 익숙한 것은 오직 서부의 기질만은 아니었다.
빼앗기는 것이 곧 죽음인 뒷골목에서 살아온 소년 또한 이슈트반에 못지않게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
“확실히 그 정도면 균형이 맞을 것 같네.”
갖고 싶어서 빼앗아 왔다.
살기 위해서 빼앗아 왔다.
빼앗는 것에 익숙한 두 짐승들이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오늘의 태양 아래 신께서 보고 계시오!”
사제의 신호와 함께 결투가 시작되었다.
‘······저건 뭐야.’
당장이라도 뛰쳐 들어 블라드를 곤죽 내버리고 싶었던 이슈트반이었으나 블라드가 취하고 있는 생소한 자세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었다.
쉽사리 검을 뻗을 수 없고 뻗는다고 해도 닿기 힘든 그런 자세였다.
한 손으로 검을 들고는 최대한 몸을 옆으로 세운 자세.
할 수 있는 한 최소한의 피격면적만을 허용하는 소년의 자세는 분명 레이피어를 사용하는 검사들이 주로 취하는 자세였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정보라는 것이 곧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딘은 소년에 대한 정보를 손에 쥐고 있었음에도 잘못된 판단을 내렸지만, 요제프는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정보를 지금의 상황을 예측하고 만들어냈다.
요제프는 알리시아의 편지를 받은 순간부터 이슈트반과의 결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널 위해 준비한 거거든.”
바예지드의 기사들은 알리시아가 애가 탈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데어마르에 도착했다.
그것은 소년이 준비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
결투를 지켜보던 고딘은 블라드가 취하는 꺼림칙한 자세를 보고는 소년의 뒤에 서 있는 바예지드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준비하고 있었군.’
결투장 밖에서 소년을 바라보고 있는 바예지드의 기사들.
공교롭게도 그들 모두가 이슈트반과 같은 대검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기사는 오직 정당한 대가만을 가져간다
요제프는 져도 좋다고 말했다.
언제나 최악을 대비하는 청년은 이미 블라드가 패배할 경우의 수를 대비하고 있었으니까.소년을 위해 기꺼이 대련할 기회를 내어준 바예지드의 기사들도 블라드가 이슈트반을 꺾을 가능성은 높게 보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아왔을 백작가의 자제를 겨우 자신 따위가 이기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을 것이다.
스승인 자야르도, 명예를 맡긴 알리시아도.
그리고 결투장 밖에서 그때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고딘조차도.
하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덤벼봐.”
나라는 사람도 기대를 받아보고 싶다.
“얼마나 잘났는지 한번 보자.”
이제는 나도 스스로의 명예를 짊어진 사람이니까.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쳐온 몸부림은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으니까.
※※※※
까앙-!
깡-!
검과 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어김없이 튀어 오르는 불꽃.
결투를 지켜보던 바예지드의 기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좋아. 잘하고 있어.”
“그대로만 가면 된다. 그대로만.”
촉박한 시간에 때려 넣듯 전수한 대검 파훼법이었다.
그럼에도 블라드는 자신들이 가르친 대로 이슈트반의 검을 받아내고 있었다.
비틀거리면서도, 이를 악물고서는.
길이를 이용한 찌르기는 걷어내고 무게를 이용한 내려치기는 피해낸다.
실전에서는 사용하기 힘들 극단적인 자세였던 만큼 블라드가 띄운 승부수는 확실하게 이슈트반을 갉아먹고 있었다.
“쥐새끼 같은 놈!”
그리하여 블라드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검 특유의 흉폭한 범위를 가진 횡베기 뿐이었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터엉-!
‘뭔 놈의!’
고딘이 말하기를 눈앞의 금발 애송이는 검을 든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다 했다.
그러나 지금 부리고 있는 반격기는 가진 바 경력에 비한다면 턱없이 고급 기술에 행하는 기교였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테냐!”
공격 따위는 포기했다는 듯 철저하게 방어 일변도로 결투에 임하는 블라드.
이슈트반도 언제까지나 블라드가 이렇게 피하고 막아낼 수 없을 것임을 알지만 문제는 그때가 되면 자신 또한 체력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대검이라는 무기는 다른 병기들에 비해서 단단하고 무거운 만큼 소유자로 하여금 훨씬 더 많은 체력의 부담을 짊어지우는 무기였으니까.
‘빌어먹을!’
이슈트반은 지금 마치 진흙탕 속을 걷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바예지드가 조성한 전장, 미리 준비해 온 듯한 블라드의 자세, 그리고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점점 질척해지는 땅바닥까지.
들이쉬는 공기까지 무거우니, 마치 데어마르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방해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천한 곳에서 기어 올라와서 그런가? 하는 방식도 더럽기 짝이 없군!”
그런 이유들로 인해 이슈트반은 지금 조급해하고 있었다.
소년은 져도 되지만 이슈트반은 져서는 안 된다.
아니, 무명의 기사를 상대로 이렇게 고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 것 자체로 이미 수치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널 낳아준 어미도 지금 네 녀석의 추레한 모습을 보면 눈을 돌리고 말 거다!”
이제는 부모까지 거들먹거리며 도발을 일삼는 이슈트반을 보며 블라드는 그만 실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것마저 참을 거냐는 듯 입술을 실룩거리는 이슈트반이었지만 방금의 도발은 뒷골목에서는 인사나 다름없는 말일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리고 설사 이곳에 어머니가 있다 할지라도 지금 자신을 보며 손가락질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불리하고 위태로운 상황이었지만 분명 블라드는 승리를 향해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
순간, 번뜩이는 은빛의 궤적.
날카롭게 벼려놓은 자세에서 화살처럼 뻗어 나온 일격이 이슈트반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여태껏 보여주지 않았던 움직임이었기에 쉽사리 반응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이 자식······.”
“들어오라며?”
뺨을 따라 주르륵 흐르는 한 줄기의 핏방울.
이슈트반의 볼에 그토록 무시하던 천한 기사의 검 끝이 스쳐 지나갔다.
“······.”
참관인의 자격으로 결투장 밖에 서 있던 고딘도 방금의 일격을 보고는 잠시 움찔거렸을 정도였다.
속도를 추구한 만큼 얕았으나 그만큼 허를 찌른 공격이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군.’
고딘은 이슈트반과 블라드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블라드 또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리를 노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간 소년이 쌓아온 업적들은 모두가 누군가의 손을 빌렸기에 가능한 것들이었고 모두가 나눠야 하는 명예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사라는 작위를 통해 스스로의 명예를 짊어진 자로써 블라드는 오직 자신만의 승리를 가지고 싶어 했다.
“가이다르 백작님이 지금 너의 모습을 보시면 기뻐서 날뛰시겠는데?”
“······!”
도발이란 허무한 메아리로 끝나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실존하는 위협으로 다가와야 하며 상대방에게 굴욕으로 닿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지금 블라드가 하는 것처럼.
“이, 이 자식이······.”
마치 도발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듯 다시 여유롭게 자세를 잡는 블라드를 보며 이슈트반이 눈가에 새빨간 핏발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런.”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이슈트반의 검 끝에서부터 오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오러를 끌어올린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를 세상 밖으로 꺼내는 행위.
그만큼의 정신력을 소모하게 되며 소모된 정신력은 체력을 갉아먹게 된다.
고딘은 소년의 의도에 훌륭하게 말려든 이슈트반을 보고는 그만 혀를 차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잘 왔다만.”
변화하는 전장의 공기를 느낀 자야르는 재빨리 검 손잡이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지금부터 잘 버텨야 할 텐데.”
참관인의 자격으로 서 있던 자야르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눈앞의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며 언제든지 전장으로 난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죽어라! 이 천한 놈아!”
[온다!]대검술의 진정한 무서움은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강맹한 일격보다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격에 있다.
공수전환이 여의치 않은 무기인 만큼 한 번의 출수로 반드시 결과를 얻어야 하는 무기.
그렇기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격만이 대검의 약점을 상쇄시킬 수 있으니까.
“으윽!”
쾅! 콰앙! 쾅!
사방에서 땅이 울리고 곳곳에 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한 진동에 블라드는 균형을 잡기가 힘들 정도였다.
“어디 이것도 피해 봐라!”
분노와 함께 휘둘러지는 이슈트반의 오러를 따라 들판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형편없이 잘려 나간 잔디와 흙들이 비처럼 내리며 블라드의 시야를 가려대었다.
[그래도 봐야 한다!]어지러워지는 블라드의 발놀림을 따라 기다렸다는 듯 이슈트반의 분노어린 검이 짓쳐 들고 있었다.
‘젠장!’
유도했던 상황이었고 의도했던 결과였지만 막상 맞닥뜨린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과연 백작가의 지원을 받아 견실히 쌓아 올린 이슈트반의 세계는 아직 블라드가 범접하기에 힘들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냉철함을 유지하고 있던 평소였다면 말이다.
‘앞으로!’
계속 피해 다닌다면 비길 수는 있을 것이다.
설사 진다고 할지라도 얻을 수 있는 나름의 성과도 있다.
그러나 블라드는 이제 피하고 도망치고 다음을 기약하는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저 앞에 자신의 둥지를 부순 기사가 있다.
그날 자신은 장미의 미소에서 도망쳤고 쇼아라에서 달아났지만 더는 저 남자 앞에서 뒷걸음질 치고 싶지 않았다.
“으아아!”
똑똑히 봐라.
이제는 당당한 자격이 있는 나를.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했다.
누군가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자격이었겠으나 블라드에게 있어서는 투쟁의 산물.
지금의 검 한번을 뻗어내기 위해 소년은 여태껏 멈춰본 적 없었다.
‘보인다!’
보이는 작은 틈이 있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연격의 흐름 속에서도 이슈트반에게 닿을 수 있는 작은 틈이.
[왼쪽!]순간, 어깨로 닿아오는 묵직한 일격.
“큭!”
주인의 의지를 따라 아이들의 숨결을 머금은 갑옷이 필사적으로 이슈트반의 궤적을 비틀어내었다.
신의 뜻을 따르기에 누구보다 당당했던 성기사에게서 훔쳐 온 갑주술이었다.
“어딜 감히!”
길이가 긴 만큼 짧은 거리에는 대항하기 힘든 대검의 특성.
믿기지 않을 속도와 기이한 움직임으로 자신의 검을 벗겨낸 블라드의 돌격이었으나 이슈트반은 이미 약점에 대비할 몇몇 방도들을 익혀두고 있었다.
“커억!”
강하고 단단하다.
핏줄로써 타고난 이슈트반의 강인한 육체는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무기였다.
갑작스레 블라드의 복부를 파고드는 이슈트반의 발차기.
게다가 어느새 자유로워진 이슈트반의 왼손이 블라드의 안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걸로 되겠냐!”
“크억!”
그러나 블라드는 보란 듯 자신의 이마로 이슈트반의 일격을 받아낼 뿐이었다.
“이런 미친!”
라문드의 빛나던 이마는 분명 소년의 기억에 강렬히 각인되어 있었다.
이제는 은퇴해야 하는 늙은 기사는 다음을 책임질 바예지드의 기사에게 가르침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이다!]한순간, 오직 지금의 한순간.
틈을 노린 단 한 번의 도약을 위해 소년을 최선을 다했다.
고귀한 자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으며 부유한 자는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려야 하는 뒷골목의 인생은 한 번 의 기회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바로 지금의 소년처럼.
“죽어! 개자식아!”
이제는 볼 필요가 없다.
바로 앞에 상대가 있으니.
시야를 포기할 수 없기에 가까이 다가가서야 자신의 왼쪽 눈을 감은 블라드에게서 기다렸다는 듯 세계가 뿜어져 나왔다.
고귀한 세계. 준비된 세계.
그렇기에 자신을 내려다보던 이슈트반의 세계.
그 끝자락으로 뒷골목에서 기어 올라온 소년의 검 끝이 닿았다.
하얗게 터져 나오는 자신의 세계와 함께.
이곳에 있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무에 얽혀있는 하얀 뱀이 소년의 세계와 함께 큰 소리를 내질렀다.
※※※※
“······나는, 나는 정당하지?”
이슈트반의 목덜미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파고들어 갔다면 아마 이슈트반은 절명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지?”
모두가 침묵하는 결투의 마지막.
소년의 검은 기어이 고귀한 자의 목 끝에 닿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누군가가 소년을 검을 막아 세웠다.
“대답해-!”
“······그래.”
이제야 너에게 닿았다.
푸른 달빛의 기사.
그토록 염원했던 달빛 아래서의 검이 드디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놔. 너희도.”
그날 나는 나의 둥지를 잃었다.
너저분한 고기 조각으로 나의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니 이제는 나도 무언가를 받아 가야 하겠다.
“기사는 정당한 대가를 가져간다. 가이다르의 고딘.”
정당한 명분, 정당한 자격.
그리고 정당한 결과.
소년은 지금의 결과를 얻기 위해 지금까지 기어 올라왔다.
그러니 승리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쯤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는 이번 결투의 대가로 이슈트반의 검을 요구한다.”
기사는 정당한 대가만을 받아 간다.
그것을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은 지금 바로 눈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푸른 달빛의 기사였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소년과 목 끝에 닿은 서늘함에 떨고 있는 귀족.
소년의 검을 막고 있는 푸른 달빛의 기사와 소년을 감싸고 있는 애꾸눈의 기사.
당사자와 참관인들의 검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결투장 위에서 신의 뜻을 받드는 사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승, 승자는 바예지드의 기사. 쇼아라의 블라드요!”
내리쬐는 태양 아래 소년의 금발이 빛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렇듯 오늘만큼은 신도 소년의 승리를 눈여겨 봐주실 것이다.
소년의 검이 드디어 저 위에 있는 세계에 닿은 순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