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84
이제는 이름 값을 해라 (1)
요제프는 눈을 좋아했다.
몸이 약한 그에게 있어 추운 날씨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으나 그래도 하얗게 내리는 눈만큼은 좋아했던 이유가 있었다.
“······복귀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군.”
어릴 적 요제프는 눈에 덮여 고요해진 도시를 보며 안심하고는 했었다.
그때만큼은 혼자만 멈춰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약한 몸을 가졌기에 남들이 앞으로 나아갈 때 홀로 주저앉아 있다는 현실은 언제나 요제프를 힘들게 했었다.
“요제프 님. 저 보르단입니다.”
“들어와라.”
밖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상념에서 깨어난 요제프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데어마르에서 온 전보입니다.”
자신만큼이나 건강을 챙겨야 할 것 같은 뚱뚱한 기사가 전보를 든 채 그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그의 두툼한 손아귀에 들린 저 작은 쪽지 안에 지금껏 요제프가 기다렸던 결과가 적혀있을 것이다.
“다오.”
“네.”
요제프는 차분한 눈빛으로 보르단이 건네는 쪽지를 받아들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시켰지만, 소년에게는 버거운 임무였을 것이다.
부디 최악의 결과만은 피했으면 좋겠는데.
“······.”
마법을 통해 보내는 전보였기에 많은 글자를 적어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자야르가 보낸 전보에는 이렇다 할 설명 없이 오직 결과만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렇기에 사전설명 없이 단 몇 줄만이 적혀있는 전보는 요제프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가이다르의 이슈트반이 쉬운 상대인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보르단은 요제프의 어이없는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반문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실력만으로 따진다면 현존하는 기사들과는 어깨를 나란히 하기는 힘들겠으나 이슈트반은 이제야 스물 중반의 나이.
그만한 나이에 이슈트반만큼 두각을 드러내는 인물은 서부에 몇 없었으니 보르단이 보이는 반응이 딱히 과장되었다고 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보르단의 말을 들은 요제프는 책상 위에 쪽지를 던져놓고는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웃고 싶은데 어떻게 웃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웃음이었다.
“마법사를 불러와라. 자야르에게 답장을 해야겠다.”
“아······. 알겠습니다.”
최악은 준비했으나 최선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여태껏 우울함에서 비롯된 그의 심려 깊은 계획들은 소년이 만들어내는 파장과 전혀 다른 쪽으로 흐르고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버텨만 보라고 준비시켜놨더니.”
요제프는 소년의 기사 데뷔전의 상대로 서부의 이슈트반을 선택했다.
그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강자라면 설사 블라드가 진다고 하더라도 흠은 아닐 것이며 혹시라도 그를 고전에 빠뜨리기라도 한다면 블라드에 대한 평가는 크게 올라갈 테니까.
거기에 손수건까지 잃어버리게 된다면 알리시아는 별수 없이 바예지드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계산까지도 끝내놓은 상황이었다.
“전부 다시 생각해야겠군.”
요제프는 복잡해지는 생각에 차가운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밖에서부터 사각거리며 땅으로 떨어지는 함박눈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반갑지 않은 눈이었다.
※※※※
커다란 응접실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기사들.
비록 무기는 검집에 집어넣었으나 두 무리 사이에서 마주치는 눈빛만큼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본다면 기사들의 반응이 조금은 다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털 망토를 뒤집어쓴 북부의 기사들은 묘한 웃음을.
깃을 잔뜩 세워둔 서부의 기사들은 이를 악물고 있다는 것을.
승자는 웃고 패자는 고개를 떨군다.
북부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막내가 가져다준 권리를 마음껏 누리며 그렇게 응접실 안에 서 있었다.
“검만큼은 돌려받았으면 합니다만.”
언제나 미소 짓고 있던 고딘은 지금만큼은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유연한 자세로 상대를 대하는 고딘이었으나 지금만큼 치욕적인 상황을 마주한 적은 몇 없었다.
“으음.”
고딘의 말을 들은 자야르는 턱을 쓰다듬으며 애써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절차상으로는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그래도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이슈트반은 지그문드 백작의 장남.
돌려서 말하고 있었으나 고딘은 그런 남자의 검을 가져가게 되어 불어올 후폭풍을 당할 수 있겠냐고 묻고 있었다.
“그거야 우리가 알아서 감당할 문제지 않겠소.”
자야르는 팔짱을 끼고는 고딘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전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그의 모습에서 바예지드가 가이다르에게 취하는 태도가 엿보였다.
“그래도 일개 결투에서 검까지 빼앗아가는 행위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분명 도를 넘은 처사입니다.”
고딘의 말처럼 일개 결투에서 검까지 빼앗아가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만큼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전리품일 것이다.
“애초에 뒷일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가이다르가 먼저이지 않은가 싶은데 말이오.”
분명 하이날과 바예지드를 무시한 것은 가이다르가 먼저였으니 지금의 치욕 또한 그들이 자초한 결과일 뿐.
이 모든 것은 그들이 감내해야 하는 결과였다.
“게다가 선도 그쪽이 먼저 넘었지.”
웃고 있으나 웃고 있지 않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야르의 눈이었으나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만큼은 확고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말해보십시오.”
이미 사태는 파국이다.
본인들이 주도한 상황이었기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고딘은 그럼에도 어떻게든 이슈트반의 검을 회수하기 위해 마지막 제안을 걸어보았다.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안 되지.”
고딘의 물음에 자야르의 눈빛이 깊어졌다.
결투의 승자는 블라드였고 전리품의 소유주도 또한 블라드였다.
그러니 정당한 대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소년의 의중이 중요할 것이다.
“왜 그 녀석이 이슈트반의 검을 가져갔는지는 당신도 잘 알잖아.”
이제는 거리낄 것 없다는 듯 테이블에 몸을 가까이 당기는 자야르.
어제의 결투에서 소년이 그토록 승리를 갈망했던 이유를 두 기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겠군.”
자야르의 말에 고딘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딘은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검은 이슈트반을 향해 날카롭게 세워져 있었지만, 푸른색의 눈동자만큼은 자신을 향해 있었다는 것을.
마치 여기 좀 보라는 듯, 나 좀 보라는 듯 그렇게.
“······협상은 결렬이로군.”
블라드가 이슈트반의 검을 가지고 간 이유.
그것은 푸른 달빛의 기사를 향한 선전포고를 위함이었다.
이제 승리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고딘만이 아니었으니까.
호르헤에게서 시작된 인연은 꼬이고 꼬여 결국 이곳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흐르고 흘러 데어마르에서 만난 지금의 인연들은 어쩌면 예전의 업보일 수도, 아니면 시대의 흐름일 수도 있는 인연이었다.
“결국, 우리는 나중에 또 보겠군.”
이슈트반과 블라드.
서부와 북부와의 최초의 전초전.
그 전쟁의 승리자는 북부였다.
“나가보시오.”
북부가 말했다.
이제 그만 데어마르에서 나가라고.
“작별 인사는 대신 전해주시길.”
“그 정도야.”
승부에서 패배한 서부의 기사들은 마땅한 권리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들을 위해 북부의 기사들이 차디찬 복도를 향해 문을 열어주었다.
※※※※
알리시아는 그녀의 집무실에서 하녀가 가져온 손수건을 들고는 신중히 수를 놓고 있었다.
“제가 하긴 한 거잖아요.”“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거의 다 완성되어 있는 손수건이었기에 굳이 그녀의 손길이 필요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언제 어디서나 명분이라는 것은 중요하기 마련이었다.
“이 정도면 제가 다 한 거예요.”
“······맞습니다.”
굳이 하라면 못할 것은 없었겠지만 알리시아는 가주의 업무를 소화하는 것만도 벅찬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알리시아가 한 땀이라도 수를 놓은 것만은 사실이었으니 이 손수건을 받는 소년도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다.
“흠흠. 이제는 요제프 님의 제안을 굳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죠?”
“그렇습니다.”
이제 됐다는 듯 손수건을 물린 알리시아는 요제프가 전해준 편지를 고이 접어 봉투 속에 다시 넣었다.
블라드가 자신의 기사로서 이슈트반의 청혼을 물리쳤으니 이제 옥사나를 대모로 모실 이유는 필요 없게 된 셈이었다.
“천만다행이네요. 아무리 바예지드의 품이 따뜻하다고 해도 그들에게 빌미를 내주는 것은 꺼림칙했으니까요.”
“맞습니다.”
알리시아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하이날의 존립과 데어마르의 재건.
아무리 바예지드의 품이 따뜻하다 해도 그들의 목적 또한 결국 이곳을 손에 넣기 위함임을 알고 있던 알리시아는 어떻게든 스스로 일어서기 위해 발악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발버둥은 이제 새로운 목표를 찾고 있었다.
“······블라드 경 같은 기사는 흔치 않지요?”
“물론입니다. 알리시아 님.”
여자 하나만 얻는다면 하이날과 데어마르에 관한 모든 권리를 얻을 수 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알리시아에게 있어서는 홀로 서 있는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약점이 되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앞으로 그가 어디까지 성장할 거라고 예상하시나요?”
그렇기에 현재보다 후일의 가능성이 더 기대되는 블라드라는 기사는 분명 그녀가 탐낼만한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이대로만 커나간다면 아마 다음 세대에는 북부를 대표하게 될 겁니다. 그 정도의 재목입니다.”
던칸은 이미 기사로서는 노쇠했지만, 경험으로 단련된 눈만큼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데어마르에서 있었던 두 번의 결투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던칸은 소년의 가능성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으음.”
알리시아는 던칸의 말을 듣고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어 갔다.
인상을 쓰는 모습이 어울리는 외모는 아니었으나 그녀는 이제 평범한 레이디가 아닌 한 영지의 주인으로서의 기품이 잡혀가는 중이었다.
“······역시 여자 혼자 몸으로 가주의 역할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아름다운 꽃에는 벌레가 꼬이기 마련.
가이다르처럼 쳐들어오듯 청혼하는 자들은 없었으나 이미 그녀의 계승권을 노린 수많은 귀족 남성들이 보낸 편지가 그녀의 집무실에 쌓여있는 참이었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차라리 아무 배경 없는 기사라도 한 명 제 옆으로 들여놓는 게 낫겠어요.”
이런 상황에서 알리시아가 유일한 하이날로서 단단히 기틀을 굳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
다른 가문의 때가 타지 않은 상대를 남편으로 구해오는 방법뿐이었다.
“오오. 알리시아 님.”
던칸은 알리시아가 무엇을 노리는지 알고서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무리 가능성이 있다 할지라도 소년은 기사가 된 지 아직 몇 주밖에 지나지 않은 새파란 애송이였으니까.
“저의 제안을 바예지드도 좋아할 수도 있어요. 어찌 보면 혈맹 같은 느낌 아니겠어요?”“아직은 이르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기사가 준귀족에 위치에 있다고는 하지만······.”
“더 클 거라면서요.”
던칸은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알리시아가 내놓은 방안 말고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남들이 채가기 전에 미리 선점이라도 해놓는 게 낫겠어요.”
“······.”
던칸은 무언으로 알리시아의 결정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고 말았다.
“······그래도 너무 성급한 결정은 하지 마시지요.”
“이상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알리시아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려 하이날의 나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하는 짓도 기특하고.”
알리시아의 물빛 눈동자가 그곳에서 소년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모님의 묘지가 있는 언덕.
소년은 하이날의 전대 주인들에게 고개를 숙인 채 들고 있던 술을 뿌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지켜봐 주어서 감사하다는 듯한 모습으로.
다른 남자들은 자신을 갖기 위해 악다구니를 칠 뿐이었지만 오직 금발의 소년 만큼은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 술을 뿌려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