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86
이제는 이름 값을 해라 (3)
북부의 겨울은 잔혹하지만, 서부의 겨울 또한 그에 못지않다.
가릴 곳 하나 없는 황량한 황무지의 겨울은 칼날 같은 바람으로 서부의 사람들을 가혹하게 대하고는 했다.
바로 지금 이곳에서처럼.
“······차라리 목을 내주고 왔어야지.”
가이다르의 로비. 기사들의 전당.
그곳 가장 높은 곳에 앉아있는 남자는 누가 보아도 위압감이 넘치는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검을 빼앗기다니. 네가 그러고도 기사라 할 수 있는 거냐?”
지그문드 가이다르 백작.
로마노프 가문을 몰아낸 새로운 서부의 패자는 분노를 숨기지 않은 채 자신의 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공포에 떨고 있는 이슈트반은 지그문드에게서 흘러나오는 매서운 말에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쾅-!
“이제야 겨우 자리를 잡나 싶었는데 네놈이 이딴 식으로 초를 쳐!”
붉게 충혈된 눈과 떨리는 수염.
쥐여오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으스러지고 마는 의자의 팔걸이.
탐욕스러운 서부의 패자는 자신의 아들이 가져온 패전 소식에 온몸이 들끓는듯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 잘났다는 루트거 놈도 아니고 이제야 겨우 기사 작위를 달았다는 새파란 애송이 따위한테?”
져서는 안 되는 결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기리라 확신한 결투였었다.
그러나 이슈트반은 지고 말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자신의 검을 넘겨주고 말았다.
정확히는 자신의 검과 함께 데어마르에 대한 모든 영향권을 바예지드에게 넘겨주고 온 셈이었다.
“너는 뭘 했어! 내 아들이 개망신을 당하는 동안 너는 도대체 뭘 한 거야!”
뼈아픈 실책과 손해.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쓰디쓴 패배의 맛에 지그문드의 분노가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갔다.
“면목이 없습니다. 백작님.”
거칠게 날아오는 분노였지만 고딘은 반듯한 자세로 서 있을 뿐이었다.
“네가 아는 놈이었다며!”
“······굳이 따지자면 백작님과도 인연이 있는 녀석일 겁니다.”
오래된 인연이 있었다.
비록 악연이었고 이제야 끊어냈다고 생각했지만 실낱같은 연이 아직 쇼아라에 남아있었다.
“탈주 기사 호르헤가 키우던 녀석입니다. 가진바 재능도 훌륭했고 그 녀석을 둘러싼 기사들의 수준도 뛰어났습니다.”
호르헤라는 이름과 함께 잠시 멈칫한 지그문드.
“무엇보다 본거지의 이점을 잘 살리더군요. 예상외의 난적이었습니다.”
그날의 결투에서 이슈트반은 블라드와 검을 맞대고 있었지만, 참관인의 자격으로 서 있던 고딘은 반대편에 서 있던 자야르와 보이지 않던 힘겨루기를 하던 중이었다.
어째서 북부에서 크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기묘한 기세를 풍기던 기사였었다.
“호르헤······그 개자식.”
지그문드는 고딘의 말을 들으며 옛 기억을 헤집어냈다.
전대 가주였던 그의 삼촌이 특히나 아끼던 그 기사는 결국 마지막까지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녀석이기도 했다.
그래서 죽여버렸건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에게 엿을 먹이고 가는군.”
골치 아픈 드워프 해방 전선.
그리고 새롭게 고개를 든 북부의 애송이까지.
호르헤라는 기사가 뿌리고 간 잿더미들은 여전히 지그문드를 괴롭히고 있었다.
“······가이다르는 빼앗겨서는 안 된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어떻게든 배에 집어넣어라.
그리하여 남은 두 손으로 남의 것도 빼앗아 들고 있어라.
그래야만 이 거친 서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평생을 빼앗고 부수고 무너뜨렸다.
적에게도 남에게도 그리고 피를 섞은 가족에게도.
그리하여 지금 이곳에 온전히 남아있는 단 한 사람.
“어떻게든 내 아들의 검을 되찾아와라. 고딘.”
“알겠습니다.”
그는 패배를 용납할 수 없는 찬탈자. 가이다르 백작이었다.
※※※※
“진짜 안 갈 거야?”
눈이 펑펑 내리는 쇼아라의 아침.
블라드는 마르셀라가 특별히 증축해놓은 마구간 앞에 서서 누아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히히힝-
나는 오늘 출근 안 할 거야.
마치 그렇게 말하는듯한 검은 말의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그만 혀를 차고 말았다.
“이거 말 아닌 것 같은데.”
[머리가 너무 좋아도 문제로군.]다섯 필의 말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마구간.
그러나 그 안에서 쉬고 있는 말은 오직 누아르 단 한 마리뿐이었으니.
춥지 말라고 곳곳에 쌓여있는 건초더미와 따끈하게 삶아져 있는 여물은 이 녀석이 장미의 미소에서 어떠한 호강을 누리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누가 저놈이 야생마였다고 믿겠냐고.”
소년을 따라와 자유를 포기한 대신 확실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는 누아르.
편안하게 누워 잇몸을 드러내며 웃는 누아르를 보고는 블라드는 그만 부아가 치밀어오르고 말았다.
그나마 임무일 때만큼은 부리나케 달려와 주니 그걸로라도 위안으로 삼아야만 했다.
“아 춥네.”
블라드는 끝까지 말을 안 듣는 누아르를 내버려 둔 채 발목까지 쌓이는 눈을 밟으며 쇼아라의 시청으로 향했다.
기사가 된 이제는 마차 정도는 불러서 타고 다닐 만도 했지만 뼛속까지 배어있던 배고픔의 서러움은 블라드를 언제나 검소한 사람으로 만들고는 했다.
“월급이라는 건 처음 받아보는데.”
블라드는 평생을 정당한 대가를 받아보지 못한 채 살아왔었다.
뒷골목의 부랑아였을 시절부터 호르헤의 단검, 그리고 요제프의 종자였던 때까지.
가끔 주어지는 용돈 정도가 그동안 소년이 연명하던 수단이었지만 오늘부터는 달라질 것이다.
“보르단 님. 저입니다.”
“칼 같군. 들어오게.”
검을 들지 못하는 기사.
보르단의 집무실 앞에 선 블라드는 사방에서 퍼지는 달콤한 냄새를 맡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얼굴에 화색이 만연하군.”
너저분하게 간식 더미들이 널려 있는 그곳에서는 요제프만큼이나 건강을 돌봐야 할 것 같은 뚱뚱한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운동이라도 좀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많이 움직이면 일찍 죽는 거야.”
보르단은 전혀 기사답지 않은 말과 함께 서랍에서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내 들고는 책상 위에 얹어 놓았다.
“글은 읽을 줄 알았지? 그러면 명세서도 같이 줄 테니 기다려봐라.”
아무리 기사가 준귀족에 있는 위치라지만 글을 모르는 자들은 많았다.
다만 블라드는 비록 더듬거릴지라도 읽고 이해할 수 있었으니 말로 전해주는 대신 종이에 적어 주는 것이 절차에 맞을 것이다.
“······.”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명세서를 내려 적는 보르단.
그런 그를 보던 블라드는 재빠른 손짓으로 금화 주머니를 열어 안을 확인했다.
과연 전직 소매치기다운 손놀림이었다.
“4골드다.”
눈은 종이에 가 있었으나 귀는 블라드를 향해 있었던 모양인지 보르단은 시원하게 이번 달 월급의 액수를 말해주었다.
“왜? 실망인가?”“······아니요. 아닙니다.”
비록 입으로는 아니라 말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실망이었다.
‘일 년으로 따지면 50골드는 되는 거니까······.’
요제프를 만나기 전 블라드가 평생 모아왔던 돈이 1골드가 조금 안 됐었다.
지금은 부러지고 없는 장식 없는 검은 5골드였었고.
예전에 비한다면 분명 호강하는 금액이긴 했지만, 기사가 된 지금의 블라드가 만족하기에는 4골드라는 돈은 확실히 부족했다.
“애송이구만.”
보르단은 여전히 어설픈 티를 내는 블라드를 보며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야르가 아직도 소년을 끼고 다니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으니까.
“기사는 월급으로 돈 모으는 거 아니다.”
“그럼요?”
이제야 명세서를 다 작성했는지 탁하는 소리와 함께 깃털펜을 내려놓은 보르단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명예를 따라야 하고 의무를 져야 하며 그에 따른 책임을 가져야 하지.”
“······그런데요.”
돈 이야기에서 갑자기 기사의 근본으로 넘어가는 보르단의 말에 블라드는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그게 다 돈이란 이야기다.”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
블라드는 돈이 귀한 줄은 알았으나 정작 버는 방법에 대해서는 어두운 사람이었다.
평생을 굶주리고 산 만큼 열망하고 있었으나 정작 경험하지 못했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명예의 값은 연말에 한 번에 지급될 거다. 이른바 특별수당이라는 명목이지.”
배부른 고양이는 쥐를 사냥하지 않는다.
돈과 명예를 얻고 싶다면 그만큼의 공을 세워야만 한다.
“너는 좀 기대해봐도 좋을 거다.”
보르단의 말대로 소년은 이번 한 해 동안 바예지드의 이름을 드높인 주인공 중 한 명이었다.
가주인 페테르도 소년을 빌려다 쓴 루트거도, 그리고 본래의 주군인 요제프도 분명히 그 사실을 고려해 줄 것이다.
“그럼 의무와 책임의 값은요?”
이제야 보르단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한 블라드는 눈을 반짝거리며 다음 금화를 기대했지만 보르단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하이날 가문의 보물을 들고 온 네가 물어볼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제 것 아니에요. 엄연히 빌린 거거든요.”
블라드는 억울한 목소리로 보르단에게 항변했다.
쇼아라로 오는 내내 선배 기사들에게서 받은 놀림이 떠오르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 건 줄 알았으면 안 받았을 거라구요.”
“그래. 남들 앞에서도 계속 그 자세를 유지해. 그게 바로 명분이야.”
“······.”
호박석이 이런 식으로까지 해석되는 물건일 줄은 몰랐다.
그저 알리시아에게 여기저기 부려 먹히는 정도를 각오하고 가져온 호박석이었지 그렇게 의미심장한 뜻을 지닌 물건이었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봤을 것이다.
“나중에 귀족이 되도 나는 잊으면 안 된다.”
기사로써 출세를 노리는 것이 어떻단 말인가.
보르단은 불꽃 같은 야망을 애써 숨기려드는 블라드를 보며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요제프가 찾는다는 말과 함께.
“알고 있었죠?”
[······좋잖아. 귀족.]복도로 나선 블라드는 들려오는 목소리의 대답에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세상에 믿을 자들은 없다.
당하는 놈이 죄인인 세상이었으니 블라드는 잠시나마 말랑해진 자신의 정신 상태를 탓할 뿐이었다.
※※※※
“순찰 구역을 내어주마.”
난로 가까이서 향긋한 냄새와 함께 데워지는 와인병.
손님용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눈을 감고 있는 애꾸눈의 기사.
그리고 벽 쪽에 세워져 있는 이슈트반의 검까지.
“이제는 너도 기사가 되었으니 더 많은 책임과 의무를 져야 한다.”
이제야 서류를 내려놓은 요제프는 난로 옆에 놓여 있던 와인병을 들고는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술 중에서는 위스키를 가장 좋아하는 그였지만 날이 추워지는 겨울만큼은 따끈하게 데운 와인에 기관지에 좋은 향신료를 띄워 마시고는 했다.
“저 혼자 하나요?”“경비병들을 내어주긴 하겠지만 책임자는 오롯이 너 한 사람이겠지.”
블라드는 그동안 잘해왔다.
맡은 바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고 그 이상의 가치를 바예지드에 가져왔다.
그러니 더욱 키워내야 한다.
“용병 시절의 조장과는 전혀 다른 위치일 거다.”
“알겠습니다.”
요제프가 내어준 와인잔을 건네받은 블라드는 두 손으로 올라오는 온기를 받아들였다.
“구역은 역시 뒷골목이 좋겠지? 다른 사람들이라면 골치 아파 할 테지만 너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곳 아니냐.”
“그렇습니다.”
어두운 밤, 말 한마디만으로 성문을 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블라드는 아직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다.
아직 어린 블라드에게는 시간과 경험이 약이 되어줄 테니까.
“사람이 모자라긴 할 거다. 경비병들은 순찰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써먹어야 하는 인원들이거든.”
쇼아라에 있는 기사들은 모두 여섯.
특별한 임무를 맡고 있는 자야르와 보르단을 제외한 모두는 지금의 블라드처럼 자신들만의 구역을 맡아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임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요제프가 내어주는 병력만이 아닌 자신의 사람들을 고용해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기사로서의 의무였으며 또한 특권이기도 했으니까.
“4명까지는 내가 월급을 지원해주마. 너의 밑에 있을 사람들을 고용해봐라.”
기사란 앞장서는 자.
어디서나 대표가 될 수 있는 사람.
이제 블라드는 기사가 되었으니 자신의 사람들을 고용하고 부릴 자격이 있었다.
“이제는 기사라는 이름값을 해야지.”
더 많은 책임, 더 많은 의무.
그리고 더 많은 이권.
지금도 장미의 미소에는 블라드를 기다리는 상인들이 가득했다.
모두가 지금의 상황을 예견한 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