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87
넓어진 그릇만큼 (1)
호박석(琥珀石)이란 보석은 시간을 담은 보석이라고도 한다.
나무의 수액이 오랜 시간 굳어져서 만들어지는 이 보석은 나뭇잎이나 곤충 등 주변에 있는 환경들과 같이 굳어지고는 하기 때문이다.
“깨끗한데?”
[음.]그러나 블라드가 들고 있는 호박석에는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 티끌 하나라도 보일 법도 할 텐데 이게 호박석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간 모습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풍나무가 서 있는 들판이라니······. 이거 혹시 마법인가요?”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지라도 알리시아가 내어준 호박석은 확실히 시간을 담았다.
목소리의 세계에서 보는 호박석 안에는 가만히 멈춰 있는 어느 가을날의 풍경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는 나도 모르겠다.]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자신이 그곳에 서 있는 것만 같은 생생한 풍경.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 바람결에 흔들거리는 갈대밭의 풍경이 보석 안에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데······.”
오른쪽 눈, 왼쪽 눈.
번갈아 가며 눈을 떠보던 블라드는 바라보는 세계마다 확연히 달라지는 호박석의 모습을 보고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엘프들과 관계가 있겠네요.”
[나도 그럴 거라 생각한다.]경험 없는 소년과 기억 없는 목소리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결국 블라드는 이 보석을 전해줬다는 엘프들에게 가봐야 정확한 연유를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멀긴 한 데······.”
목소리의 기억을 찾아주겠노라 약속했던 블라드는 이제 새로운 실마리를 찾았다.
그리고 그 실마리가 가리키는 곳은 제국의 동쪽, 엘프들의 숲이 있는 곳이었다.
“똑똑똑.”
어떻게 하면 엘프들의 숲으로 가볼 수 있을까 한참 고민하던 블라드는 갑작스레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아닌 누군가가 입으로 내는 노크 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서둘러 알리시아에게 받은 호박석을 품 안에 숨긴 블라드는 방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자기 몸만큼이나 커다란 빨래 더미들을 들고 있는 붉은 머리 소녀가 블라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없네?”
복도에 서서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블라드의 방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제미나.
마치 검열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에 블라드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윽고 자신에게 날아오는 빨래 더미들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왜 이래.”
들려오는 물음은 무시한 채 재빨리 복도를 둘러본 제미나는 밖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재빨리 블라드를 안으로 밀어 넣고 방문을 닫아걸었다.
“아무도 없는데 왜 말소리가 들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복도로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듯 흘러나왔던 블라드의 목소리.
그러나 지금 방 안에 두 사람이 아닌 오직 한 명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미나는 눈을 날카롭게 뜬 채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혹시 아직도 귀신이랑 대화하니?”
“······.”
블라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미나의 눈을 본 순간 그럴 수가 없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제미나를 몰랐던 날보다 알았던 날이 더 많았다.
밑바닥을 구르던 둘은 친구였고 동지였으며 때로는 공범자이기도 했었다.
“······귀신은 아니고.”
그렇기에 제미나 앞에서만큼은 무언가를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블라드를 가까이서 보아온 사람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너 방 옮겨.”
“어디로?”
“복도 끝으로.”
제미나는 그 말과 함께 침대 위에 걸터앉고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럼 내가 너 옆방으로 갈게.”
제미나는 블라드를 복도 끝으로 밀어 넣고 그 옆방을 자신이 쓰겠다고 말했다.
불길한 존재와 대화하는 블라드의 모습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제미나는 지금 자신도 기꺼이 공범이 되어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진짜 괜찮은 거지?”
“······응.”
걱정을 가득 담은 눈빛이 블라드의 눈동자를 꿰뚫고 들어왔다.
블라드는 말은 하지 않아도 진심으로 와닿는 제미나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조심해. 너는 이제 숨어다닐 수 없는 사람이잖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뒷골목의 소년은 얼마든지 어둠 속으로 스며들 수 있었지만 바예지드의 기사 블라드 경은 그럴 수 없다.
이제는 기사가 된 블라드는 어느 곳에 있든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
“교회 꼭 가 봐.”
그러나 추레한 뒷골목의 소년이든 빛나는 기사의 모습이든 블라드는 언제나 소녀의 걱정 속에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제미나.”
“왜?”
블라드는 품에서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내 들고는 밖으로 나가려는 제미나를 불러세웠다.
인생 처음으로 받은 월급.
보르단에게 그것을 받아든 블라드는 가장 먼저 붉은 머리의 소녀를 떠올렸었다.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하나 사줄게.”
같은 1골드의 가치라도 지니고 있는 의미는 다르다.
부유한 자에게는 쉽게 건네줄 수 있는 돈이었겠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일 수도 있는 돈 일 테니까.
“가지고 싶은 거?”
그리고 그날 대장간에 서 있던 소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탈탈 털어 넣어 블라드에게 장식 없는 검을 쥐여주었었다.
비록 5골드짜리 검이었지만 제미나에게 있어서는 현재와 미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털어 넣은 돈이었을 것이다.
“너나 챙기고 다녀. 이 멍청아.”
그러나 제미나는 블라드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지금 소년에 손에 들려있는 반짝이는 금화들은 모두가 목숨값인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것저것 장비라도 챙기던가.”
제미나는 그 말과 함께 빨래 더미들을 돌려받고는 다시 복도로 나섰다.
작은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 빨래 더미들이었으나 제미나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갈 뿐이었다.
“······.”
누군가는 기대하고 누군가는 요구했다.
그러나 소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채 그저 내어주고 걱정해 줄 뿐이었다.
“그냥 말이라도 해보지.”
대가 없는 호의는 너무나 무겁다.
그렇기에 블라드는 언제나 제미나에게 빚을 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떠들썩한 장미의 미소.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마르셀라의 가게에는 예전과 같은 활기가 감돌고 있었다.
“장사 잘되네요.”
“지금 시간대에 올 만한 곳이 여기 밖에 없거든.”
예전에는 창관이었으나 지금은 고급스러운 여관이 된 장미의 미소.
마르셀라가 이렇게 과감한 업종 변경을 선택한 것은 나름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진하게 놀기 전에 여기서 예열을 하고 가는 거야.”
일찍부터 유흥을 즐기고 싶은 탕아들.
즐기고는 싶으나 너무 깊은 곳까지는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 샌님들.
마르셀라는 새로운 시장의 가능성을 엿봤고 자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펼쳐 새로운 장미의 미소를 만들어냈다.
“사람이 모자라지는 않아요? 누군가 시비를 건다거나.”
“시비?”
마르셀라는 블라드의 순진한 물음에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소년은 아직도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감히?”
그녀가 조직의 보호 없이도 지금처럼 과감히 사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다 믿을만한 뒷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쇼아라의 기사님이 여기에 계신 데 감히 누가 시비를 걸겠어.”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요.”
“그러니까 여관비는 안 받을게.”
마르셀라는 난간에 팔을 기댄 채 1층을 내려다보고 있는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분명 크리라 생각은 했었지만, 지금처럼 아예 격이 달라지리라고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었다.
“데려가.”
“누구요?”
소년은 남자가 되었고 이제는 더 큰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뒤를 받쳐줘야만 할 것이다.
“싸움도 안 나는 우리 가게에 데리고 있기에는 덩치가 아깝더라고.”
마르셀라는 턱 끝으로 1층 어딘가를 가리키며 웃었다.
장미의 미소 입구.
그곳에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흑인 한 명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잘 먹이니까 근육이 좀 붙더라.”
“괜찮겠어요?”
아무리 뒷골목 보스들이 건들지 않더라도 건장한 사내의 존재는 필요할 것이다.
이곳은 술을 파는 곳이었고 언제든지 돌발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장소였으니까.
“경비 서고 싶다는 애들은 많아.”
그러나 저기 있는 검은 피부의 사내만큼 블라드와 깊은 인연을 가진 사람은 뒷골목에서도 몇 없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마르셀라는 오타르를 내어주는 것에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우리 여관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데려가도 좋아.”
“그렇게 하죠.”
아무리 깊은 인연을 가진 사이라도 의지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지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마르셀라는 블라드라는 연줄을 확실히 잡기 위해 얼마든지 투자할 용의가 있었다.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데려와. 4층에 방은 많으니까.”
주고받음의 관계.
마르셀라는 블라드라는 기사의 근거지로 장미의 미소를 제공해주겠다 말하고 있었다.
“괜찮은 조건이네요.”
마지막 남은 창녀들의 기사는 이제는 창녀가 아니게 된 마담을 보며 웃음 지었다.
이제는 검을 들지 않아도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
블라드가 기사가 된 후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
도시에서 해가 지는 곳.
미묘하게 달라지는 공기를 느끼며 블라드는 서쪽의 부둣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좀 아까운데.”
[사람에게 쓰는 값은 비쌀수록 좋은 거다.]요제프가 기사가 된 기념으로 블라드에게 건네준 위스키는 총 3병이었다.
그중 한 병은 이미 하얀 뱀에게 썼으니 남은 위스키는 단 두 병뿐.
블라드는 그중 한 병을 들고 지금 캡틴 후버의 본거지로 찾아가는 중이었다.
차가운 강바람과 함께 쏠려오는 비릿한 물의 냄새.
여기저기서 풍겨오는 말린 생선들의 냄새.
과히 좋은 냄새라 할 수 없었지만 그 냄새들을 맡으며 블라드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는 변한 게 없네.”
기댈 수 있는 존재란 참으로 귀중한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그리고 무언가 고민이 있을 때마다 블라드는 항상 이곳을 지나쳐왔었다.
이 거리의 끝에는 언제나 자신을 반겨주는 갈색 머리의 남자가 있었으니까.
“나 좀 들어갑시다.”
“네? 네. 네 그러시죠. 기사님.”
블라드는 자신을 보며 당황하는 문지기를 지나 삐걱거리는 나무판자를 밟고 좁디좁은 복도로 걸어갔다.
점점 좁아지는 복도의 끝.
그곳에 초라하게 매달려 있는 문짝 하나가 바로 블라드가 향하는 곳이었다.
“하벤 있어?”
“응?”
갑작스레 들려온 말소리에 안에 있던 사람이 놀란 듯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쩔뚝쩔뚝.
자그마한 방이었음에도 그곳의 주인은 한달음에 걸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블라드.”
예전에 봤을 때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이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별 건 아니고.”
블라드는 볼 때마다 말라가는 것만 같은 하벤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들고 있던 위스키 병을 흔들어대었다.
“저번에 받았던 캡틴큐나 좀 갚을까 해서.”
“오오.”
하벤은 찰랑거리는 소리만으로 지금 블라드가 들고 있는 위스키가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 귀한 물건까지 들고 있었으니 거절할 수는 없는 법.
“빨리 들어와. 빨리.”
하벤의 안내로 방 안에 들어선 블라드는 예전과 다를 바 없는 그의 작업실을 보고는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 하나에 의자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은 하벤의 작업실.
강가에 바로 붙어있어서인지 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장애가 있는 하벤에게는 이만한 곳이 없을 터였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더니 그래도 금발이 다르긴 다르구만.”
“뭐라는 거야.”
곳곳에 쌓여 있는 종이 뭉치들을 치워낸 하벤은 입맛을 다시며 재빨리 술판을 벌일 자리를 만들어냈다.
“일은 다 끝냈어?”
“일은 끝나는 게 아니야. 그냥 계속하는 거지.”
삶의 고단함이 물씬 느껴지는 말과 함께 병의 마개를 뽑아낸 하벤은 구석에 놓여 있던 먼지 쌓인 잔을 꺼내 들었다.
“잠깐만.”
이가 나가버린 나무잔을 자신의 웃옷으로 닦아내는 하벤.
그래도 손님이라고 블라드에게 가장 그럴싸한 잔을 내어준 하벤은 싱글벙글 웃으며 위스키를 따라내었다.
“그래. 그래. 오늘은 무슨 일이야? 돈 빌려달라는 것은 아닐 테고.”
“그건 아니지.”
위스키 한 병에도 기뻐하는 하벤을 보며 블라드는 입안에서부터 쓴맛을 느꼈다.
이곳에 이런 초라한 모습으로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요즘도 그 뭐야. 항해법이나 별자리나 그런 거 보고 있어?”
“아 그거?”
이제야 위스키를 한 입 맛본 하벤은 기분 좋게 인상을 찌푸리며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그거 그만뒀어.”
“······왜?”
아무리 빛나려 애쓴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는다면 결국은 말라죽을 수밖에 없다.
모두가 블라드처럼 다가오는 기회를 움켜쥘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누가 절름발이를 항해사로 써주겠어. 아무리 봐도 거기까지는 무리지.”
꿈꿀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하벤 또한 이 좁디좁은 방 안에서 그렇게 말라가고 있었다.
“······배를 타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지금도 코끝을 스치는 강의 냄새.
하벤은 언젠가는 이곳에서 벗어나 배를 타고 저 먼 곳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꿈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정도면 됐지 뭐. 사람은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해.”
그러나 하벤의 꿈은 결국 어두운 복도 끝 좁은 방에 갇히고 말았다.
현실의 무게란 언제나 사람들을 꿈꾸게 내버려 두지 않는 법이었다.
“······그래?”
꿈꾼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쥘 수는 없다.
노력한다 해서 무조건 가질 수 없다.
블라드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벤을 뭐라 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벤의 잘못이 아니다.
“여기가 잘못이야.”
“응?”
하벤은 술도 마다한 채 갑작스레 일어서는 블라드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그래?”
“······.”
새장 안의 오래 갇힌 새는 나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좁고 어두운 곳에 오랫동안 갇혀버린 인생들 또한 자신들의 가능성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것을 그들만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쾅-! 쾅-!
“블라드!”
하벤의 비명과 함께 블라드가 사방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콰직- 콰지직-!
“야. 임마!”
“다 이것들이 잘못이지!”
하벤과 강을 가로막는 같잖은 벽들.
고작 발길질 한 번에 부서지고 말 이 개 같은 것들이 그동안 하벤의 꿈을 갉아먹고 있었다.
“다 이게 잘못이라고!”
검집으로 후려치고 발길질로 부서 내고.
그렇게 블라드는 쉴 새 없이 하벤을 가로막고 있는 벽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콰직-! 콰지지직-!
네가 할 수 없다면 내가 해주마.
너도 나한테 그렇게 해줬으니까.
뒷골목의 어둠에 잡아먹히지 않게 위에 있는 목표라는 것을 보여줬으니까.
“블라드······!”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벤의 방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장애와 현실. 그것들을 벽으로 삼아 가련한 하벤을 가둬두고 있던 벽들을 블라드가 부수고 있었다.
“너 미쳤어! 그만해!”
하벤은 그동안 애써 자리 잡은 현실이 부서지자 당황하며 소리를 질러대었지만 블라드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절대 멈출 생각이 없었다.
하벤은 노력으로써 블라드에게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하벤이 알려준 세상이 아니었다면 블라드는 기사라는 별을 꿈꾸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제야 보이네!”
이곳은 별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블라드는 하벤의 벽을 부숴 주어야만 했다.
그도 마땅히 꿈꿀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으니까.
“······.”
하벤은 거친 숨을 내뱉는 블라드의 어깨 너머로 비치는 빛 한 줄기를 보았다.
자욱이 피어오르는 먼지들도 막아내지 못하는 붉은 빛.
저물어가는 황혼과 함께 붉게 물드는 쇼아라의 강이 그곳에 있었다.
불어오는 강바람.
바람을 따라 사방으로 휘날리는 서류들.
그동안 하벤을 붙잡아두고 있던 현실들이 그렇게 바람을 따라 날아가고 있었다.
“······시원하긴 하네.”
강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자신이 꿈꾸는 것을 잊어버렸을 뿐.
하벤은 차가운 겨울의 바람과 함께 들고 있던 위스키를 들이마셨다.
머리는 취해가지만, 영혼은 깨어가는 그런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