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88
넓어진 그릇만큼 (2)
황금색 공이 굴러간다.
누군가에게는 한순간의 스릴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전부를 실은 공이.
검정과 빨강의 턱을 넘어 쉴 새 없이 구르는 공 하나가 샹들리에가 비추는 빛에 따라 반짝이고 있었다.
[진작 이곳에 와볼 걸 그랬다.]그러나 도박장의 떠들썩한 주위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블라드는 눈앞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룰렛에 집중할 뿐이었다.
[동체 시력이나 순발력을 단련하는데 이만한 곳이 없겠군.]목소리의 말이 맞았다.
지금도 쉴 새 없이 굴러가는 룰렛 위의 공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불규칙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빨강이 좋겠는데.”
조금 있으면 18살이 될 붉은 머리의 소녀를 생각하며 블라드는 18번이라는 숫자 위에 칩 하나를 올려놓았다.
번호 하나에 모든 확률을 거는 스트레이트 배팅.
무엇을 알고 올려놓은 것은 아니었으나 블라드는 행운의 상징이 가리키는 곳을 따랐다.
[시작한다.]블라드의 목소리와 함께 블라드는 재빨리 왼쪽 눈을 감고는 오러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라문드에게서 배운 강체술은 신체를 강화하는 술법.
룰렛 위에서 힘차게 돌아가던 황금색 공이 블라드의 눈동자 속에서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흠.”
평범한 사람이라면 볼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을 끊어내기 시작하는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
어느 곳으로 튀어 나갈지 모르는 황금색 공을 보며 블라드의 눈썹이 점점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
믿음만큼 얄팍한 것은 없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룰렛만큼은 공정한 운에 따라 움직일 거라 생각했겠지만 현혹되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블라드의 눈에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사기꾼 새끼들.”
결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장을 통제해야 한다.
그러나 이곳은 통제를 넘어 조작을 감행하고 있었으니 그 어떤 일말의 노력조차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세상이다.
“블라드 경.”
속에서부터 조용히 끓어오르는 감정을 곱씹고 있던 블라드의 귓가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리 말씀을 하고 오셨다면 저희가 모셨을 텐데요.”
뒷골목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끔한 양복 차림의 신사.
도박장의 지배인이 하는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그만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블라드가 뒷골목의 부랑아였을 시절에는 가까이 오지도 말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던 그였으나 이제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모신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지금 보스는 계십니까?”
“다이스 님은 지금도 위에서 블라드 경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뒷골목의 보스 중 한 명인 도박장의 다이스.
그가 자신을 기다린다는 말에 블라드는 다시 한번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예전과는 위치가 달라졌고 격이 달라졌다.
“그런데 왜 나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겁니까?”
“네?”
그렇기에 블라드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곳은 잘못된 곳이며 블라드는 정당한 명분과 자격을 갖춘 당당한 자였다.
그러니 마땅히 찾아와야 할 사람은 쇼아라의 기사가 아닌 도박장의 주인일 것이다.
“보스보고 여기로 내려오라고 해.”
목소리는 말했었다.
기선제압은 화려하게.
누구나 입을 다물지 못하도록 강렬하게 하라고.
“그때까지 도박장은 영업을 중지한다.”
“······그게 무슨.”
잘못된 세상을 담은 테이블 위로 성큼 올라선 기사가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빛나는 금발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거기 딜러. 손 떼.”
검 끝으로 파랗게 질린 딜러를 가리키며 성큼성큼 테이블 위를 걸어 나가는 블라드.
발에 걸리는 칩들과 잔들을 거침없이 치우며 걸어가는 블라드의 모습에 이곳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블라드, 블라드 경!”
사태가 심각해진 것을 보고받은 도박장의 주인이 황급히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계단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지만 늦었다.
이미 블라드의 시선은 룰렛 밑에 감춰진 어두운 진실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동안 재미 좋았겠는데?”
뒷골목의 보스. 도박장의 다이스.
그는 자신을 보며 사납게 웃는 사내를 보며 숨이 턱 막히는 감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잘못 걸렸군.’
웃고 있는 블라드에게로 도박장의 기도들이 당황하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들은 곧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오지 마라. 지금 기사님께서 공무집행 중이시잖아.”
“음.”
“이 녀석들은 죽여도 되나? 그래도 될 것 같은데?”
어느새 블라드의 뒤를 가로막고 선 세 명의 사내가 무기를 뽑은 채 사나운 기세로 그들을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이런······.”
다이스는 그제야 쇼아라의 새로운 시장이 자신을 향해 사나운 개를 풀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 개는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뒷골목 이곳저곳을 헤집을 수 있는 녀석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나고 자란 녀석이었으니까.
※※※※
하벤의 방을 부수고 그를 꺼내온 날. 블라드는 손에 쥔 병을 들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거 그거 아냐?”
“그거 맞아.”
하벤은 자그마한 보따리 하나를 든 채 블라드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보따리에는 하벤이 평생을 모아왔던 모든 것이 들어있었으나 지팡이를 짚고서도 한 손에 들 수 있을 만큼 얄팍한 짐이기도 했다.
“기사가 좋긴 좋다. 방 때려 부수고 조직원 하나를 데리고 나가는데도 오히려 선물을 안겨주니 말이야.”
“······이건 선물 아니야.”
블라드는 병 안에서 묘하게 끈적거리며 찰랑거리는 술을 보며 곤란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캡틴Q잖아. 이거.”
“정확히는 캡틴Q3. 보스가 만든 개량판이야.”
뒷골목의 보스 중 한 명인 캡틴 후버.
왕년에는 나름 유명했다던 바다의 선장이었으나 지금은 늙고 몰락하여 쇼아라의 어둠에 몸을 숨긴 사람.
그러나 몰락해버린 그에게도 아직 남아있는 열정 하나가 있었으니 그것은 젊었을 적 맛보았다던 인어들의 술을 재현하는 것에 있었다.
“인어들은 혀가 없나 봐.”
“바다에 사니까 우리랑은 신체구조가 좀 다를 수도 있지.”
하벤은 후버가 술을 만드는 솜씨는 형편없지만 나쁘지는 않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호르헤가 있었을 적에도 평판이 나쁜 보스는 아니었던데다 비록 취급이 험하긴 했으나 장애를 가진 자신을 거둬주었던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새로운 쇼아라의 시장도 캡틴은 건들지 않을 거야. 도시를 위해 나름의 가치 창출을 하고 있는 사람이거든.”
“그래?”
“아무리 벌레라고 해도 익충이 있고 해충이 있는 법이니까.”
하벤은 그동안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주어지는 서류와 작업들을 통해 다양한 세상을 간접적으로 보아왔다.
강을 통해 먼 곳까지 나아가는 밀수 조직의 특성이 하벤의 안목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이다.
“경험 없는 너를 제일 통제하기 어려운 구역인 뒷골목에다 박아넣었다는 것은 사실 시험의 의미도 있을 거야. 이건 기회이자 위기라고.”
“음.”
블라드는 자연스레 하벤의 보폭에 맞추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장애를 가진 그를 배려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하벤의 입에서부터 들려오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블라드의 걸음을 잡아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뭐 앞으로 어쩔까?”
요제프는 경험 없는 블라드에게 세세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조언을 구하는 경험조차도 어린 기사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처럼 보스들한테 알려줘야지.”
밤하늘 사이, 저 멀리 보이는 장미의 미소를 보며 하벤이 미소 지었다.
“네가 왔다는 걸.”
새로운 시장, 새로운 기사.
그리고 새로운 질서.
요제프가 블라드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벤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
마르셀라는 블라드에게 4층의 절반을 내어준다고 했고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고맙다.”
“······나도 아는 놈이잖아.”
이제는 기사의 사역인이 된 오타르는 자신에게 방과 직업을 내어준 블라드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계속 소매치기하다가는 곧 죽을 게 뻔한데 어떡하겠어.”
“······.”
블라드는 4층 난간에 턱을 괴고는 1층에서 열심히 밀대질을 하고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예전 자신이 초팔이였을 시절 했던 업무를 넘겨받은 흑인 소년.
오타르의 동생이자 자신과도 인연이 있는 네드를 위해 블라드는 장미의 미소에 자리 하나를 마련했고 지금 네드는 오타르와 함께 4층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마담이 기뻐해. 그동안 거치적거리던 놈들 다 치워냈다고.”
청소하는 척 블라드에게 다가온 제미나는 조용히 귓속말로 하벤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르셀라가 그렇게까지 싫어했을 줄은 몰랐네.”
제미나가 가리키는 곳에는 테이블 하나를 둔 채 블라드를 찾아온 사람들을 상대하는 하벤이 있었다.
“달라 보이네. 하벤한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어.”
블라드는 제미나의 말에 소리내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현했을 뿐이었다.
사람은 능력을 발휘할 자리가 있어야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하벤은 물비린내 나는 어두운 방이 아닌 기사의 대리인이라는 자격으로 어중이떠중이들을 솎아내는 중이었다.
아마 그동안 모아두었던 만큼 길었던 오늘의 면담이 끝나면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의 명단을 든 채 블라드를 찾아올 것이다.
‘올 때가 됐는데.’
블라드는 마르셀라가 만들어 준 샌드위치를 씹으며 자신을 찾아올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제프는 총 4명의 봉급을 지원해 준다고 했었고 블라드도 하벤과 오타르만으로는 뒷골목의 치안 업무를 수행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지속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온 사람이 있었으니 3명까지는 무난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블라드! 블라드!”
“뭐야.”
한참 바닥을 닦고 있던 네드가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오르며 블라드를 찾기 시작했다.
“블라드!”
“여기 있잖아.”
과묵한 형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네드를 보며 블라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시청에서 블라드를 찾아온 손님이 있어. 한 명은 턱이 길고······.”
“올라오라 그래.”
블라드는 고트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바예지드의 마구간 지기가 안정된 직장이라 한들 고트가 고작 하인의 위치에서 만족할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근데 둘이야.”“음?”
그러나 고트는 혼자가 아닌 다른 한 사람을 더 매달고 이곳으로 찾아왔다.
“누군데?”
블라드의 물음에 네드는 재빨리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오히려 반문하기 시작했다.
“문신 많고 머리 땋고······.”
북부에서 흑인이 가지는 위치는 낮고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피부로 차별받는 흑인조차도 가까이 가기 싫어하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혹시 아니지. 블라드?”
네드의 우려와 함께 장미의 미소로 들어서는 두 사람이 있었다.
어딘가 풀이 죽어 보이는 고트의 뒤에 서 있는 강렬한 인상의 사내.
장사를 준비하던 종업원들과 마르셀라조차도 잠시 고개를 돌릴 만큼 강한 존재감을 내뿜는 사람이었다.
“여기는 좀 커서 마음에 드네.”
신령한 정령의 피를 이은 누아르를 쫓아 쇼아라까지 따라 내려온 야만인 사내.
“여기 오면 일자리가 있을 거라고 시장이 그러던데?”
부다아트 족의 아게가 4층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씨익 웃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