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89
넓어진 그릇만큼 (3)
같은 시장직에 임명되었다 할지라도 전임 시장과 요제프의 위치는 엄연히 달랐다.
전임 시장은 쇼아라의 원활한 유지와 세수 확보에 목적이 있었다면 요제프는 자신만의 확고한 업적이 필요한 사람이었으니까.
“아게라는 녀석이 블라드에게 제대로 머리를 숙일까요?”
“······적어도 지금의 처지에 대해 이해는 했겠지.”
블라드라는 유망한 소년을 키워냈고 데어마르라는 영지에 대해 확고한 지배력을 갖췄다.
그런 성과를 낸 요제프가 다음으로 계획하는 것은 바로 북방 한계선 위쪽에 있는 야만인들에 대한 일이었다.
“내가 내민 제안이 최대한의 성의를 담은 제안이었다는 것을 아게도 이해하고 있을 거다.”
그동안 바예지드는 많은 가문들에 의해 자신들의 권위를 도전받아 왔으며 이제는 그에 대한 대답을 행동으로 보여줄 때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전에 뒤에 있을 불안 요소들을 어떻게든 제거해 놓는 것이 바예지드가 해내야 할 선결과제일 것이다.
“······그러니 내 제안을 걷어찬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잘 알고 있겠지.”
미르셰아에 의해 부족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큰 타격을 받고만 부다아트 족은 요제프가 내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요제프는 앞으로 이들을 이용해 야만인들을 제어해 볼 생각이었다.
“의도대로 잘 움직여주면 좋을 텐데요.”
“그러게 말이지.”
시도해볼 만한 일이었으나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요제프는 데운 와인을 잔에 따르며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갈라져 있던 것인지 모르겠군.”
같은 북부의 사람들이지만 야만인과 북부인들은 오랫동안 서로 대척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된 증오의 연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요제프는 지금의 상황이 결코 북부에게 이득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너와 나의 세계는 맞닿아 있지만 하나가 될 수 없다.
세어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다름이 서로의 세계를 갈라놓고 있었으니까.
“그 녀석이 이번에도 잘 해줬으면 좋겠군.”
그래도 요제프가 아게를 블라드에게 붙여놓은 이유라고 한다면 소년에게서 아주 자그마한 가능성을 엿봤기 때문일 것이다.
야만인들이 신성시하는 검은 말을 타는 소년.
그리고 그 말을 타고 북부의 용을 사냥함으로써 야만인들을 구해낸 소년.
블라드는 여태껏 있던 북부인들과는 다르게 아주 조금은 야만인들에게 동질감을 얻고 있었다.
요제프는 부디 이번에도 블라드가 자신이 예상한 일을 뛰어넘는 결과를 보여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
그날 저녁 블라드가 헤집고 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다이스의 도박장은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겉으로야 내부 시설을 보수하기 위해 닫는다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블라드가 일주일간의 영업 정지를 명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되겠어요?”
“글쎄다. 봐야 알겠지.”
보르단의 집무실에 도착한 블라드는 그의 책상 위로 양손 가득 들고 온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던데.”
“말이라는 게 쓰여 있다는 걸 알아만 봐도 훌륭한 거야.”
블라드가 들고 온 종이들은 전부 다이스의 도박장에서 나온 재무 서류들이었다.
그동안의 기망 행위에 대한 이익을 추산해보겠다고 압류해 온 것이었지만 정작 그 일을 해야 할 보르단은 조용히 서류들을 옆으로 밀어놓았을 뿐이었다.
“······좀 떼어줄까?”
“아니요.”
무엇이 쓰여 있는지는 잘 몰랐으나 아무런 의미 없는 서류라는 것 정도쯤은 블라드도 알고 있었다.
다이스의 도박장이 다시금 문을 열기 위해서는 명명백백한 소명보다는 반짝이는 금화가 답이 되어줄 테니까.
“아직은 뒷돈 같은 거 받지 말래요.”
“누가?”
“제 친구가요.”
보르단은 블라드의 대답을 듣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똘똘한 친구구만. 처세술의 기본이 되어있어.”
하벤은 블라드에게 아직은 추수하기보다는 씨를 뿌려야 할 때라고 말했다.
바로 앞에 있을 이득에 급급하기보다는 더 높은 곳에 있을 과실을 노리라고 조언한 것이었다.
“이따가 그레고리 경을 한번 찾아가 봐라.”
“왜요?”
보르단은 용케 옳은 길을 찾아간 블라드가 기특해 보였다.
명령문도 제대로 읽지 못해 자신이 대신 읽어줬던 소년이 어느새 그럴싸한 기사의 모습이 되어있었으니까.
그러니 조그마한 도움 정도는 주어도 괜찮을 것이다.
“왜냐하면, 둘이 원하는 게 정확히 들어맞으니까.”
“······?”
그게 무슨 말이냐는 눈빛을 보내는 블라드를 보며 보르단은 서랍을 뒤져 사탕 하나를 던져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에게 실로 어울리는 디저트였다.
“해줄 말은 다 해줬으니 나가봐.”
묘한 말과 함께 손을 내젓는 보르단을 보며 블라드는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뭐야.”
아리송한 말과 함께 복도로 나온 블라드는 그저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호르헤는 블라드를 보고 어느 골목에서나 대장을 할 녀석이라 평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발상 자체가 여전히 골목 안에 틀어박혀 있다는 점이었다.
머리가 좋고 나쁨을 떠나 이제 막 위로 올라온 블라드는 아직 기사들의 세계를 이해할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블라드, 블라드.”
그러나 괜찮을 것이다.
“그레고리 님?”
블라드는 낯선 환경 속에서도 언제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내고는 했으니까.
“자자, 이거 받아라.”
때마침 복도 끝에서 손짓으로 자신을 부르는 그레고리를 따라간 블라드는 그가 건네준 물건을 받아들었다.
고급스러운 포장지로 싸여있는 물건.
종자 시절 포틀리가 자주 건네주던 칸노르 가문의 염장 고기였다.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는데.”
“그래?”
보르단의 말을 따르겠다는 말이었으나 그레고리는 좀 다르게 해석했는지 크게 기꺼워하기 시작했다.
“잘됐구만. 역시 우리는 마음이 통할 줄 알았어.”
“그런가요?”
그레고리는 포틀리의 외삼촌.
다시 말해 칸노르 가문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검은 곰이라고 했던가? 뒷골목에서 정육업을 하는 조직 말이야.”
“네.”
칸노르 가문은 바예지드 백작령에서 축산업으로 유명한 가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스투르마와 근처 마을에 국한된 영역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녀석들 요제프 님도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것 같던데 어때? 같이 한번 쓸어볼까?”
“······.”
그런 칸노르 가문이 원활히 다른 지역에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서는 기존에 있던 상권을 차지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리고 도시 쇼아라에는 때마침 칸노르 가문이 후원하는 어린 기사가 있었다.
“그런 이야기였군요.”
“응?”
기사는 검이고 검은 곧 힘이다.
정당한 명분과 함께 길을 여는 기사들의 뒤로는 언제나 이득을 보려 하는 사람들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좋아요. 어차피 손 보려 하던 참이었으니까.”
블라드는 그레고리가 건네주는 염장 고기를 손에 쥐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빌려주실 거죠?”
“당연하지. 원한다면 직접 나서주마.”
도박장의 다이스와 밀수업의 캡틴 후버는 괜찮지만 검은 곰은 안된다.
그는 선을 넘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기사라는 존재들은 선을 넘은 사람을 처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들이었다.
블라드는 이제야 안나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마무리 지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끼익- 끽.
더러운 것들을 잠시나마 덮어놓은 하얀 골목길 위에서 블라드는 가만히 입김을 뿜었다.
하벤에게 가는 부둣가의 길.
그리고 대장간으로 가는 골목길.
블라드는 이 두 개의 길을 걸을 때만큼은 잠깐은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비록 처해 있는 현실은 어지러울지라도 이 두 곳으로 가는 길만큼은 똑바른 직선이라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쾅-!
마침내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을 열어젖힌 블라드는 겨울의 찬바람과 함께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대장간으로 들어섰다.
“······.”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먼지 앉은 작업대와 싸늘하게 식어있는 작은 화로.
대장간이라면 언제나 불을 지피고 있어야 할 화로였지만 지금은 희멀건 잿가루만 가득할 뿐이었다.
“제가 너무 늦게 왔나 보네요.”
오랫동안 치우지 않았던 문밖의 눈은 쌓이고 쌓여 딱딱한 얼음덩어리가 되어있었다.
마치 그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듯 그렇게 초라한 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부탁할 게 있었는데요.”
블라드는 노인에게 부탁할 게 있었고 보여줄 것이 있어 이곳에 왔다.
그러나 늙은 대장장이는 손님이 왔음에도 그저 낡은 침대 위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블라드는 미동도 없는 그를 보며 근처에 있는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앉았다.
“이걸 폼멜에다 달아달라고 부탁하러 왔거든요.”
블라드는 알리시아에게 받은 노란색 호박석을 손에 쥐고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것을 보면 노인이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
비록 평생을 뒷골목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바깥세상을 동경했던 노인은 언제나 검의 상처와 함께 들려오는 블라드의 이야기를 좋아했었다.
“······.”
그리고 블라드 또한 망치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노인의 웃음을 좋아했었다.
블라드는 문득 고개를 들어 대장간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언가에 의해 깊게 패여 있는 나무 기둥 하나.
언제나 장식 없는 검이 매달려 있던 그 자리였다.
“오랜만에 보니까 또 낯설게 보이네.”
노인의 꿈은 오랜 시간 동안 뒷골목에 매달려 있었고 소년은 그 꿈을 보며 자신의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쩌면 쇼아라로 탈출하던 그 날밤 이전부터 노인은 블라드를 구원해주고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사실은 이거 드리려고 왔어요.”
무거운 한숨과 함께 일어선 블라드는 품 안에서 천으로 곱게 싸놓았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장식 없는 검.
이제는 검이라 부를 수 없는 손잡이만이 남아있는 뒷골목의 검.
블라드는 싸늘하게 누워있는 노인의 품에 장식 없는 검을 들려주었다.
“고마웠어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한 마디일 것이다.
자신을 구해주어서 고마웠다고.
블라드는 마지막으로 노인의 화로에 불씨를 지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곳에서부터 번져오는 온기가 블라드의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했다.
“좋은 꿈 꾸세요.”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겨울의 찬바람이 들어오고, 곧이어 점점 멀어지는 소년의 등과 함께 문이 닫혔다.
소년은 떠나고 노인은 남는다.
시간이라는 것은 그렇게 흐르는 것이며 아무도 그에 대해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
소년이 떠나고 이제는 아무도 없는 초라한 대장간.
그곳에서 늙은 대장장이는 블라드가 들려준 대로 가만히 장식 없는 검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
그는 장식 없는 검과 함께 꿈을 꾸고 있었다.
그의 꿈속에서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하얀 설산이 보였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용이 벌판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제야 뒷골목을 벗어난 그의 표정에는 자그마한 미소가 감도는 것 같았다.
노인의 꿈에서 시작했으나 소년의 손에서 완성된 장식 없는 검.
하늘을 향해 매달아 놓았던 별은 드디어 노인의 품으로 돌아왔다.
누구보다 밝게 빛나는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