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9
깨어진 둥지 (2)
모든 것이 부서진 둥지라 할지라도 그녀는 이곳의 주인이었다.
그렇기에 아직 해야만 하는 일이 남아있었다.
“일어나!”
바닥을 구르고 있던 블라드를 거칠게 일으키는 손이 있었다.
“······마, 마르셀라.”
“정신 차려. 여기서 죽을 셈이야?”
창녀들의 기사 호르헤.
그는 장미의 미소를 본거지로 삼은 뒷골목의 보스였지만 정작 장미의 미소라는 창관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이제 여기를 지키는 자들은 다 죽었어. 곧 있으면 외팔이 잭이 들이닥칠 거야.”
마담 마르셀라.
도시 쇼아라의 꽃 중 한 명이자 장미의 미소의 주인인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마르셀라는요?”
“나보다는 너를 걱정해. 너는 호르헤의 단검이었어. 잭의 부하들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하······하지만.”
방금까지 모든 감정을 쏟아내었던 소년은 이제 남은 것이 얼마 없었다.
분노도, 슬픔도, 그리고 영민한 판단력도.
“외팔이 잭은 나를 살려줄지도 몰라요. 그는 나를 마음에······.”
짜악-!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눈물짓던 창녀들이 모두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손을 들어 올린 마르셀라와 뺨을 어루만지며 당황해하는 블라드가 있었다.
“정신 차려. 애송이!”
“······.”
마담 마르셀라는 녹록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거친 뒷골목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장미의 미소라는 성을 쌓은 사람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창녀들의 기사 호르헤가 그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마담 마르셀라가 그를 선택한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이거 들어.”
마르셀라는 바닥에 뒹굴고 있던 단검 하나를 쥐여주며 말했다.
그것은 호르헤가 주었으며 블라드가 고딘을 막기 위해 날린 단검이었다.
“우리 같은 뒷골목 인생들과 길 너머에서 사는 놈들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
“마르셀라······.”
블라드는 단검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마르셀라의 외침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머리 잃은 호르헤의 시체보다도 자신을 먼저 찾아와 주었기에.
“잘 들어. 그놈들과 우리의 차이는 바로 기회야.”
“기회······.”
“길 너머에 사는 놈들은 한 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어. 그럴만한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마르셀라는 손가락을 빼내어 가리켰다.
그곳에는 죽어있는 조직원들의 시체가 가득하였다.
“봐봐. 우리는 어떻지? 그저 단 한 번의 실패였을 뿐이야.”
블라드를 향해 소리치는 마르셀라의 눈에 뿌연 방울이 맺혔다.
“우리는 한 번만 실패해도 죽어. 그렇게 태어났어. 그러니까.”
마르셀라는 블라드의 옷깃을 당기며 말했다.
“너의 단 한 번뿐인 기회를 남의 손에 맡기지 마.”
수많은 시체들을 뒤로 한 채 마르셀라가 소년에게 외치고 있었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으라고.
마르셀라가 블라드에게 하는 말은 천만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조언이었다.
한 여자의 일생을 바쳐 얻어낸 귀중한 인생의 교훈이었기에.
“알았어요.”
그 조언은 마르셀라의 눈물과 함께 소년의 영혼 안으로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살고 싶으면 쇼아라를 떠나. 지금 당장.”
그리고 마담의 다급한 외침과 눈물이 다시금 블라드를 현실로 끌어왔다.
“맞아요. 마담의 말이 맞아요.”
“그래······.”
마르셀라는 소년의 눈에 다시금 빛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떠날게요. 지금 당장.”
비척거리며 일어서는 소년의 옆으로 붉은 머리의 소녀가 달라붙었다.
“제미나.”
“부축만 해줄게. 발목 안 붙잡아.”
“당장 떨어져.”
“지금도 비틀거리잖아. 적당한 곳까지만 옮겨주고 나는 빠질 테니까.”
“······.”
위험한 탈출을 도와주겠다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는 억지로 떼어놓으려 했지만, 소녀의 고집은 그 정도로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두가 제미나가 절대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축해주고 와. 제미나. 그리고 동이 트기전에 수녀원으로 오렴.”
“알았어요. 마담.”
“같이 가고 싶어도 돌아와야 해. 너까지 함께 움직이면 도시 밖으로 탈출한다 해도 금방 붙잡혀버릴 테니까.”
“······알겠어요.”
이별을 하라 말하는 마르셀라의 말에 제미나는 그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외팔이 잭의 부하들은 이미 장미의 미소를 감시하는 중이었다.
내부의 사정까지는 정확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알아채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호르헤가 없는 장미의 미소는 주인 없는 고깃덩이일 뿐.
외팔이 잭은 언제나 굶주린 자였다.
“꼭 돌아올게요.”
“블라드······.”
자신을 보며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소년을 보며 마르셀라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 그 말을 한 사내들이 몇 명인지 아니?”
“저는 다를 거예요.”
돌아오겠다 말하는 소년의 다짐을 들으며 마르셀라는 기억해냈다.
호르헤가 꾀죄죄한 강아지 한 마리를 들고 왔던 그때를.
색을 잃어버린 그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씻겼었다.
그래서 다시금 황금색을 찾게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보내야 할 때였다.
“어서 가렴.”
조금은 더 데리고 있고 싶었건만.
마르셀라는 블라드에게 주머니를 건네주며 말했다.
짤랑거리는 주머니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마르셀라의 걱정만큼은 가득 담겨 있었다.
“조심해요 마담.”
“수녀원에서 봬요!”
금발 소년과 붉은 머리 소녀가 서둘러 지하실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마 그곳에 있는 뒷문을 통해 몰래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좋아.”
호르헤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내보내는 데 성공한 마르셀라는 눈물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물 가득한 시선들.
가엾은 인생들이 그곳에 있었다.
의지할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녀들이.
“여러분.”
이제 마르셀라는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그것이 주인 된 자의 마지막 의무였으니까.
“오늘로써 장미의 미소는 문을 닫습니다.”
사내 없이도 당당할 수 있는 창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퇴직금을 드리겠어요. 남을 자들은 남고 떠날 사람들은 떠나세요. 그리고.”
마르셀라의 눈은 대로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처녀인 아이들은 나에게로 오도록.”
모두가 흐느끼고 있었다.
이제 자신들은 다시는 갖지 못할 것이다.
마르셀라와 같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마담을.
자신들을 위해 검을 들어주던 창녀들의 기사를.
다시금 누군가의 손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도.
둥지는 깨어졌다.
이제는 아무리 어린 새라도 스스로 날아올라야 할 시간이었다.
※※※※
“다 죽었어.”
“······.”
뒷문을 지키던 조직원들이 모두 갈라져 있었다.
깔끔했지만 자비 없는 검 놀림에 의해서.
“크으······!”
“괜찮아. 블라드?”
비틀거리는 블라드를 보며 제미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급박한 상황이었으나 블라드는 이미 체력의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5일이 넘는 시간을 차가운 밖에서 보냈으며 충격적인 상황을 겪음과 동시에 기사에게 달려들어 자그마한 부상까지 입고 만 상황이었다.
“······가자.”
그러나 몸 안의 기력은 떨어졌을지라도 눈빛의 기세만큼은 죽지 않았다.
소년은 맹세했다.
고딘이라는 기사를 반드시 죽이겠노라고.
“여기서 끝낼 수는 없지.”
“맞아! 움직이자!”
제미나는 블라드를 부축하며 서둘러 골목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알고 있는 익숙한 지역을 넘어 외팔이 잭의 눈을 피해 도시의 바깥쪽으로.
여태까지 그래왔듯 소년과 소녀는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제 뜻대로 만은 되지 않는 법이었다.
“찾았다!”
“저기 호르헤의 애송이다!”
외팔이 잭의 굶주린 시선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왔다.
블라드와 제미나는 뒷골목 출신임을 살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으나 그것은 외팔이 잭의 부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탐욕스러운 하이에나들이 무리를 빠져나온 어린 사자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축을 받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었으나 이것은 그저 발악과도 같은 움직임일 뿐이었다.
파멸이 다가오고 있었다.
“블라드!”
“돌아가.”
“싫어!”
“약속했잖아! 수녀원으로 가! 아니면 하벤한테라도!”
“싫다고!”
눈물을 흘릴지언정 한사코 고개를 내젓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겁나게 말을 안 쳐 듣네!”
이럴 줄 알았다.
“이 멍청한 년아! 적당히 바래다 만 준다며!”
“흐으으······흐끅!”
눈물을 흘리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언제까지 널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
위태롭게 벽에 기댄 어린 인생들.
서로를 부축하고 지켜주며 여기까지 왔건만 질척한 뒷골목은 쉽게 아이들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오늘만큼은 짊어져야만 하는 소녀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웠다.
포기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무게가.
“······.”
그러니 빠져나가야만 한다.
하지만 무슨 방법으로?
물고 물리는 생각들 속에서 블라드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익숙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일단은 아무 곳에라도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래야 골목길에 깔린 잭의 부하들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영감! 문 좀 열어봐요!”
소년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대장간 앞이었다.
언제나 한참을 서서 바라보던 검이 있던 곳.
“어떡해······없나 봐.”
그러나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늙은 대장장이는 답이 없었다.
대답 없는 낡은 문을 보며 제미나의 커다란 눈 속에 공포가 가득했다.
블라드는 그 공포를 보며 다가올 미래를 예감했다.
외팔이 잭은 그런 사람이었다.
상처 입은 사람을 물어뜯고 지쳐 쓰러진 자들을 주저앉혀 자신의 디딤돌로 쓰는 사람.
“그럴 순 없지.”
제미나를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비켜!”
블라드의 푸른 눈에 다시금 빛이 찾아들었다.
“으,응!”
제미나를 밀쳐낸 블라드는 단검을 빼내어 필사적으로 대장간의 잠금장치를 비틀어댔다.
장인이 만들어 단단하고 견고했으나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오직 힘만이 유일한 방법인 순간이 있는 법이었다.
“열려라!”
소년의 간절함을 담은 단검이 비명을 지르며 문에 달린 잠금장치를 비틀어내고 있었다.
끼이이익-
그리고 그 간절함에 답을 해주었다.
서서히 잭의 부하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때쯤 블라드는 겨우 입을 벌린 잠금장치를 단검의 손잡이로 내려쳤다.
딱–!
틈이 보였다.
어두운 대장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틈이.
“이익!”
벌려진 틈 사이로 작은 체구의 제미나가 먼저 들어가고.
“후우.”
그 뒤를 따라 블라드가 움직였다.
다급한 손놀림으로 땅에 떨어진 잠금장치의 잔해들을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그렇게 대답 없던 대장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허억, 허억······.”
“괜찮아?”
“조용히.”
체력을 다 소모한 블라드였으나 감각만큼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들린다.”
스탕가를 아니, 고딘을 몰래 들여보냈을 때처럼 소리에 집중하며 잭의 부하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발자국 소리들이 뒷골목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못 나가겠는데.”
사방을 메운 소리들이 블라드의 귓가에 들려왔다.
“흡!”
“······.”
그리고 소녀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미나는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것들 어디 갔어!”
“분명 이쪽으로 왔는데.”
블라드는 단검을 빼 들고는 문 옆에 바짝 기대어 섰다.
숨죽인 아이들과 하이에나들의 거리는 그저 얇은 나무판자 하나의 간격뿐이었다.
“어린놈들이라 날쌔네. 혹시 다른 골목으로 빠진 거 아냐?”
“빨리 찾아봐! 금발 머리 놈을 찾아오면 빌리가 따로 포상한다니까.”
“부러진 이빨의 복수라도 하려 그러나?”
덜덜 떨리는 제미나의 어깨와는 반대로 블라드의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저놈들이 눈치채면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테니.
비록 호르헤가 남겨준 단검은 볼품없이 비틀렸으나 저놈들 정도는 해결해 줄 수 있을 터였다.
소년은 집중했다.
자신의 어깨에는 소녀의 미래까지도 매달려 있었으니까.
“가자. 다른 놈들한테 빼앗기기 전에.”
“하아······이 연놈들이 다 어디로 내뺀 거야.”
블라드는 점점 멀어져가는 남자들의 기척을 쫓는데 귀를 기울였다.
그렇기에 알아채지 못했다.
“거기 누구요?”
조용히 대장간 안에서 일어나는 누군가의 움직임을.
“······!”
아직 잭의 부하들이 멀리 가지 않은 상황.
블라드가 낭패한 심정으로 서둘러 움직이려 하였으나.
“우, 움직이지 마. 영감.”
블라드의 곁에는 그를 부축하던 붉은 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지, 진짜 찔러버릴 거야.”
대장간에 굴러다니는 쇠붙이를 든 채 늙은 대장장이를 협박하는 소녀.
“너······왜 여기 있냐?”
낡은 대장간의 틈 사이로 겨울의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제야 늙은 대장장이는 볼 수 있었다.
달빛에 비친 소녀의 눈물이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것을.
그것은 별일것이다
“그거 내려놔. 되다 만 것아.”
“영, 영감이 입 닥치고 있으면요.”
어린아이의 것만큼이나 작은 손이었지만 그 손에 쥐고 있는 간절함 만큼은 진짜였다.
“흑······흐윽.”
위협적으로 보이게 노력하고 있었으나 공포에 질려 있는 작은 소녀는 손을 벌벌 떨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
그것이 노인이 본 광경이었다.
다가오는 위협에 잔뜩 긴장해 있는 소년과 어찌할 바를 모르며 울고 있는 소녀.
세상에 버림받은 어린 것들이 자신의 앞에 초라하게 서 있었다.
“진, 진짜 찌를 수 있어. 히끅.”
“알았으니까 좀 닥쳐봐라. 이 되다만 것아.”
노인은 울고 있는 소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월만이 읽을 수 있는 안목으로.
주렁주렁 매달린 눈물들에는 공포가 깃들어 있었으나 눈동자 속에는 결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
이 아이는 진짜 찌를 수도 있다.
옆에 서 있는 소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 거냐. 말해 봐.”
두런거리던 사내들의 목소리가 멀어지자 늙은 대장장이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소년의 입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내뱉기가 힘들다는 듯이.
“졌구만.”
그저 입안에서 맴돌고 있을 뿐인 말이었지만 늙은 대장장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뒷골목에서 살아온 사람이었으니까.
“호르헤가 죽었어요.”
“······괜찮은 보스였었지.”
“히이끅! 흐읍!”
호르헤의 이름이 나오자 제미나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사정은 알겠다. 그러니 일단 흉한 거부터 내려놔 봐라 되다만 것아.”
“히끅! 안돼!”
그러나 감정이 허물어졌을지언정 제미나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검 줘요!”
“뭐?”
블라드를 내보내야 한다.
이 도시 밖으로.
“매달려 있던 거 그거 줘요! 도시 밖으로 무사히 나가도 몬스터들한테 죽을 수도 있단 말이야!”
“아니 근데 이 년이······.”
횡설수설하고 있었으나 제미나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외팔이 잭의 눈을 벗어나 쇼아라를 벗어난다 할 지라도 지금은 깜깜한 새벽이었고 추운 겨울날이었다.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다음 마을로 이동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시간이었다.
“농담 아냐! 블라드가 죽어버리면 나도 콱 죽어버릴 거니까! 그러니까 그거 내놔!”
소녀의 손에 들려있는 날붙이가 노인의 턱밑까지 들어왔다.
“이, 이 년이!”
앙증맞은 손에 들려있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날카로운 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눈물로 뒤덮인 소녀의 눈에는 자신조차 제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너 미쳤냐!”
“검이나 꺼내!”
검을 내놓으라 말하며 자신을 위협하는 제미나를 보며 늙은 대장장이는 짙은 씁쓸함을 느꼈다.
‘그래······.’
이것이 뒷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본성이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의 본성.
자신 또한 그랬었고 눈앞의 어린 것들도 그럴 때가 된 것뿐이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제미나! 내려놔!”
블라드의 숨죽인 외침이 들려왔으나 제미나의 손끝은 여전히 위태롭게 흔들렸다.
소녀는 결심했다.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휘두르기로.
소년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있었으니까.
“제미나!”
소년의 숨죽인 외침과 함께 단검의 날이 번뜩였다.
“······!”
늙은 대장장이는 곧 자신의 목을 파고들 날카로운 것을 예상하며 눈을 감았다.
“갚을게요.”
그러나 소녀가 들고 있던 날이 향한 곳은 늙은 대장장이가 아니었다.
“이걸로는 모자라겠지만 나중에 꼭 갚을게요. 맹세해요!”
눈을 뜬 노인은 자신의 앞에 나풀거리는 것을 보며 굳어버리고 말았다.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곱슬거리는 붉은색.
그것은 어린 소녀가 유일하게 자랑스러워했던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이 되다만 년이······.”
“제발 주세요. 제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의 가장 자랑스러운 것을 내어준 소녀.
간절함이 가득한 소녀의 눈은 아직 뒷골목에 물들지 않았다.
눈물로 가득한 소녀의 눈은 그 시절 자신과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하.”
앞에 있는 눈부신 불꽃에 시려오는 눈을 돌린 노인은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떠날 거냐.”
“네.”
자신이 평생 꿈꿔왔으나 하지 못했던 일들을 눈앞의 어린것들이 하려 하는 중이었다.
아직 채 여물지 못한 날갯짓으로.
“어린 것들이 날 너무 귀찮게 해.”
노인은 어른이었다.
어른이라면 아무런 대가 없이도 어린아이들에게 해줘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었다.
그것도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이라면 더욱더.
“따라와라.”
노인은 오늘만큼은 고개를 들어 별을 보기로 했다.
평생을 원했지만 하지 못했었던 일이었다.
※※※※
늦은 밤.
겉보기에는 고요했으나 굶주린 눈빛들이 가득한 뒷골목.
그곳으로 늙은 대장장이와 작달막한 체구를 가진 소년이 수레를 밀고 있었다.
“겁나 무겁네.”
“잔말 말고 밀어라.”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뒷골목에 수레가 내는 삐걱거림만이 울리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쇼아라의 외곽 중에서도 외곽인 곳이었다.
도시의 넘쳐나는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었으며 뒷골목의 인생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들만이 자리를 잡은 곳.
그래서 쉽사리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
“여긴 올 때마다 적응이 안되는구만.”
한겨울이었음에도 코끝을 감도는 악취가 느껴졌다.
‘여기마저 틀어막고 있으면······.’
이곳이 마지막이었다.
외팔이 잭의 부하들은 이미 뒷골목 곳곳에 포진해 있는 상태였다.
그것이 혹시라도 살아있을 호르헤의 조직원들을 잡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정체를 알 수 없는 학살자를 찾기 위함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외팔이 잭은 자신의 눈을 피해 달아나려는 모든 것들을 붙잡아두고 싶어 했다.
그래서 늙은 대장장이와 제미나는 이곳까지 밀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영감.”
그러나 둘의 염원과는 다르게 이곳에는 이미 잭의 부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왜?”
“이 야밤에 여긴 왜 왔어?”
“보면 몰라?”
“······쓰레기버려?”
“그 나이에 벌써 눈이 맛이 갔어? 그럼 이게 뭐로 보이냐. 이놈들아.”
독이 잔뜩 오른 하이에나들을 상대로 노인은 당당해지려 애썼다.
“근데 왜 지금 버려?”
뒷골목에서 오래 살아왔기에 늙은 대장장이를 대우해 주고 있었으나 잭의 부하들은 지금 찾아야 할 것이 있었다.
“그럼 지금 버려야지. 그동안 네놈들이 싸우느니 마느니 하면서 골목을 틀어막았었잖아! 그동안 못 버린 것들로 대장간이 터지겠다!”
“······쟤는 뭐야?”
잭의 부하 중 한 명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노인 옆에 있는 소년을 가리켰다.
그들이 알기로는 늙은 대장장이는 언제나 혼자 일해왔었기 때문에.
“늙으니까 기력이 딸려서 빵 하나 준다고 하고 데려왔다. 아니면 네놈들이 대신 밀어주던가!”
“잠깐.”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으나 지금 시기에는 확실한 확인이 필요했다.
“움직이지 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수레를 밀고 있던 소년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 오늘은 주먹 대신 칼이 나갈 수도 있는 날이거든.”
“······.”
결국, 우악스러운 손길에 후드가 잡혀 올라간 소년.
“왜 이래요. 빌어먹기 힘드네. 진짜.”
“······통과.”
붉은 머리의 소년이었다.
얼굴에는 꾀죄죄한 숯덩이가 묻어있는 것으로 보아 대장간에서 꽤 험하게 구른 모양이었다.
“뭘 찾는데 이 지랄들이야?”
“호르헤의 금발 애송이. 그놈만 시체가 없더라고. 그리고······쯧.”
검문하는 사내는 혀를 차며 말을 줄였다.
“그리고 뭐! 말 안 해줄 거면 이제 가도 되냐!”
“하나만 더.”
사내는 고개를 돌려 누군가에게 명령했다.
“어이, 깜둥이. 이 수레 확인해 봐.”
사내가 하는 말에 숨죽이고 있던 세 명이 침을 꿀꺽 삼켰다.
“먼지 날리게 여기서 하지 말고.”
“네.”
제미나는 떨리는 눈으로 수레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볼품없이 낡은 옷을 입은 거대한 덩치의 남자.
그 남자의 피부는 검은색이었다.
“저놈한테 가보쇼.”
“니미······.”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불만을 내뱉은 채 수레를 밀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으나 노인의 등에는 이미 땀이 흥건했다.
‘다른 곳으로 갔어야 했나.’
그러나 후회해도 늦은 일이었다.
어차피 이곳 말고는 달리 갈 곳 조차 없었다.
마지막 희망을 품고 찾아왔건만, 외팔의 잭은 눈은 도시의 가장 더러운 곳까지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많이도 가져오셨네.”
“그동안 많이 쌓여있어서.”
검은 피부의 사내에게 노인은 기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확인 좀······해봅시다.”
순간, 수레를 들추려던 검은 피부의 남자와 제미나의 눈이 마주쳤다.
“······.”
“······!”
서둘러 고개를 내린 제미나였지만 자기를 알아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앞에 있는 남자는 제미나를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대장간에서 나온 쓰레기라 그런지 먼지가 많네. 좀 더 앞으로 옮겨야겠어.”
검은 피부의 사내가 혼잣말을 하며 수레를 앞으로 밀어댔다.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는 두 사람.
“그런데 머리는 왜 잘랐어?”
“······!”
주위에 사람들이 멀어지자 남자는 무심한 목소리로 제미나에게 말을 걸었다.
“무, 무슨 소리야.”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으나 제미나는 사내가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낭패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
그와 동시에 수레 안에 담겨 있던 쓰레기 더미들이 미묘하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딱 검 하나가 튀어나올 만한 틈을 만들어내면서.
“앞뒤가 평평해서 그런지 머리를 자르니 영락없는 사내놈인데.”
검은 피부의 남자는 제미나에게 말하고 있었으나 눈만큼은 쓰레기 더미 안쪽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까 아무도 못 알아보겠어.”
덩치를 가진 사내가 밀어서인지 노인이 가져온 수레는 거침없이 잭의 부하들과 멀어지고 있었다.
“이쯤이면 되겠군.”
적당히 검문하는 사내들과 멀어지자 검은 피부의 남자는 꼬챙이를 꺼냈다.
볼품없이 녹이 슨 꼬챙이였으나 제미나의 눈에는 그 어떤 명검보다도 날카로워 보이는 것이었다.
“이게 내 일이라.”
푸욱-
그리고 그것을 사정없이 수레 더미 안에다 찔러대었다.
사내가 꼬챙이로 쓰레기 더미 여기저기를 찌르기 시작하자 제미나는 차마 바라보기 힘들다는 듯 눈을 감고 말았다.
제미나가 눈을 감든 말든 검은 피부의 사내는 계속해서 수레에 실려있는 쓰레기더미를 향해 꼬챙이를 찔러대고 있었다.
“하벤이 강에 배를 띄웠다던데.”
“······.”
교묘하게 사람 하나 앉아있을 공간만을 피해 가면서.
“지금 그쪽으로 잭의 부하들이 죄다 몰려갔어. 반병신이 된 놈이 강에 배를 띄운 이유가 있을 거라면서.”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건데.”
제미나는 끝까지 시치미를 떼며 모르는 척하였으나 수레 안쪽에 숨어있던 블라드는 지금 검은 피부의 사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냥 알아두라고. 좋아. 통과.”
“······고맙다. 오타르.”
자그마한 말소리가 수레 안쪽에서 흘러나왔으나 오타르라 불린 사내는 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가봐.”
통과하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노인과 붉은 머리의 소녀가 재빨리 수레에 달라붙어 밀기 시작했다.
“내 동생이 빚진 40실버는 이걸로 갚은 거다.”
스쳐 지나가는 수레의 뒤로 검은 피부의 사내가 말을 건넸다.
목숨값은 오직 목숨으로만 갚을 수 있는 법.
빚을 갚은 남자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수레는 다시 움직였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도시의 성벽, 그곳에 뚫려 있는 밖으로 통하는 구멍 하나를 향해서.
그 구멍이 가까워질수록 소녀의 눈동자에는 슬픔이 차올랐다.
이제는 이별의 시간이었다.
“잘 가. 블라드.”
그 구멍 밑에 있을 쓰레기 산을 향해 노인과 소녀가 수레를 밀어 올렸다.
“건강해야 해.”
제미나는 울먹거리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소년의 안위를 생각했다.
쏴아아아악-
수레의 손잡이가 끝까지 올라감과 동시에 소녀의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나 보러와야 해?”
이제는 붉은 머리 소녀가 흘린 눈물과 함께.
밤하늘의 달 아래서 도시의 밖으로 떨어지는 쓰레기들이 있었다.
도시의 그 누구도 봐주지 않는 초라한 것들이었으나.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다고 해도 빛나는 것을 고이 품고서.
“······하아.”
성벽 밖, 쓰레기로 만들어진 산더미 위에서 소년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물로 뿌예진 시야였으나 밤하늘의 반짝이는 것들만은 여전했다.
밤하늘의 별들.
그러나 오늘만큼은 별 하나가 땅 아래서 빛나고 있었다.
소년이 꽉 쥐고 있는 그 별은 노인의 꿈으로 만든 것이었고 소녀의 눈물로 산 것이었다.
“반드시 돌아올게.”
비록 높디높은 밤하늘에 있지 않더라도.
아무도 보지 못하는 시궁창 속에 처박혀 있더라도.
스스로가 빛나기를 원한다면.
여전히 가슴 속에 빛을 품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별일 것이다.
소년의 가슴 속에서 빛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