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90
너의 죄를 사하노라 (1)
제미나는 장례식이 끝난 지금도 훌쩍거리며 블라드를 따라 걷는 중이었다.
거칠고 험난한 뒷골목에서 살아왔던 만큼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아왔던 제미나였지만 오늘만큼은 눈물이 끊이질 않았다.
아마 노인의 죽음은 제미나의 마음속에 파문 하나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이제 네 월급은 1골드 하고도 10실버 밖에 안 남았어.”
“······어쩔 수 없지.”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4골드라는 월급은 결국 노인을 위한 묘비와 비석을 사는 데 쓰였다.
일개 뒷골목 사람을 위한 장례비로는 큰돈이었지만 그래도 블라드는 수도원 근처 최대한 양지바른 곳에 노인을 묻어 주기로 했다.
그래도 마지막은 뒷골목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아무도 이름을 모르더라고.”
“그래?”
하벤은 특별히 사람까지 풀어 수소문을 해봤지만 아무도 늙은 대장장이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뒷골목을 이루는 구성품처럼 그저 언제부턴가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렇게 있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나도 몰랐으니까 별수 없지.”
그래서 비석에도 노인의 이름 대신 블라드가 기억하는 모습을 새겨놓는 수밖에 없었다.
쇼아라 최고의 대장장이.
귀신을 베고 용을 찌른 검을 만든 노인이었으니 아주 틀린 이름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쟤들은 왜 저러는 거야.”
“누구? 애들?”
노인을 위한 장례식을 마치고 장미의 미소로 돌아가는 길.
골목길 곳곳에서 삼삼오오 모여 블라드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있었다.
“요즘 따라 저러던데. 구걸을 하려면 하던가.”
다가올 듯 말 듯 먼발치에서 빼꼼히 블라드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들.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뒷골목 아이들의 태도에 블라드는 위화감과 함께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왜 저러는지 진짜 모르겠어?”
“왜 저러는데?”
“모르면 됐다.”
하벤은 지금 아이들이 보내는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블라드 또한 어린 시절 저런 눈빛을 가졌었으니까.
“이번 겨울은 작년보다 더 춥네.”
“그러게.”
괜히 인상을 찌푸리며 하나하나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던 블라드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많이들 얼어 죽겠네.”
당해본 사람만이 알고, 없어 본 자만이 안다.
춥고 배고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지금 저 멀리에 서 있는 아이들과 블라드를 한 묶음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담요 하나만 있어도 버틸 만하겠지?”
“그건 그렇지.”
블라드는 헛기침과 함께 턱을 긁적이며 하벤을 바라보았다.
“이번 달에 돈 모으기에는 어차피 글렀다고 봐.”
“1골드는 들 거야.”
이미 하벤은 블라드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
“10실버만 있어도 한 달은 넘게 살아.”
“그랬던 시절이 있었지.”
노인이 만든 장식 없는 검은 빛나고 있었기에 블라드에게 희망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쇼아라의 뒷골목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라 한다면 바로 금발 머리의 기사일 것이다.
더러운 뒷골목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기사라는 별을 움켜쥔 사람.
이곳에서도 해낸 사람이 있다.
“애들한테 나눠주면서 영감님을 위한 기도 한 번씩만 하라 그래.”
“담요 하나에 기도 한 번이면 수지맞는 장사네.”
장식 없는 검은 늙은 대장장이와 함께 땅에 묻혔지만, 노인이 만든 별은 지금도 뒷골목을 밝히고 있었다.
비록 이름과 형태는 달라졌을지라도.
※※※※
내뱉는 입김마저도 차갑게 얼어붙게 만드는 날씨였으나 곳곳에서 퍼져나오는 비릿한 피 냄새와 고기 썩은 내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소시지 만드는 법을 알면 못 먹는다더니······.”
그레고리는 이런 비위생적인 장소에서 고기를 도축한다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만큼 검은 곰의 열악한 도축장은 뒷골목 사람들의 삶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오타르, 아게. 너희가 먼저 문을 연다.”
“음.”
언제나 그랬듯이 오타르는 블라드의 지시에 군말 없이 자신의 도끼를 들어주었다.
“할 말 있나?”
“이번에는 어때? 몸 좀 풀어도 되나?”
그러나 아게는 블라드의 지시에도 가만히 되물을 뿐이었다.
자유로운 초원의 영혼인 아게는 아직 북부인들의 명령 체계에 익숙지 않았다.
“임산부와 아기들을 흑마법을 부리는 놈들에게 팔아넘긴 녀석이야. 어떨 것 같아?”
“마음껏 죽여도 되겠네.”
아게는 이제야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야만인 특유의 도검을 꺼내 들고는 실실 웃었다.
신령스러운 말을 타는 녀석이기는 했지만 불편한 동거가 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겪어본 어린 대장은 의외로 초원의 기질과 맞는 성향을 지닌 자였다.
“지금쯤 알아차렸을 거다.”
“들어갈게요.”
그레고리의 말에 블라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제프가 지원한 병사들과 각자의 고용인들까지 끌고 나온 두 명의 기사들.
하벤이 정해준 길을 따라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였으나 40여 명이나 되는 병사들의 움직임을 검은 곰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좋아.”
선봉은 기사 블라드의 병력이다.
금발의 기사는 이번 작전의 제안자이자 제 일(一) 책임자였으니까.
“지금!”
블라드의 신호와 함께 두 사내가 검은 곰의 근거지로 뛰쳐나갔다.
가장 오래된 뒷골목 보스의 건물답게 문은 크고 단단했다.
“흡!”
기묘한 뼈 장식으로 만들어진 문고리를 도끼로 사정없이 내려치는 오타르.
그러나 뒤에서 사람들이 받치고 있었는지 문은 크게 출렁이기만 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다리 준비해.”
흐름이 끊겨서는 안 된다고 자야르는 말했었다.
공격이 막힌다 해도 언제나 다음의 수를 준비해둬야만 하며 그를 통해 주도권을 가져가야만 한다고 알려주었었다.
“잠깐.”
사다리를 2층 창문으로 붙이려 병사들이 움직였으나 순간 아게가 블라드를 향해 손을 들었다.
들고 있는 그의 손바닥에 새겨진 문신 사이로 자그마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도 한 번은 보여줄 때가 됐지.”
너희들만의 세계가 모든 것이 아니다.
세계의 발현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며 야만인들에게도 그들만의 방식과 세계가 있었다.
“문 뒤에나 숨는 나약한 놈들.”
선조들에게 바치는 자그마한 읊조림과 함께 아게의 문신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야만인의 세계는 선조들과 함께 쌓아 올린 세계.
생존을 위해 의무를 짊어지고만 가련한 후손을 위해 초원의 영혼들이 힘을 빌려주었다.
콰직-!
넓디넓은 북부의 초원은 자신을 가로막는 것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와라! 문 뒤에나 숨는 겁쟁이 자식들아!”
거칠 것이 없는 초원의 세계를 끄집어낸 아게의 발길질에 문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나무가 부서지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문에 매달려 있던 뼈 장식들이 힘없이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저 미친 새끼가!
야만인이다! 야만인이 쳐들어왔다!
“야만인이 아니라 부다아트 족이라니까!”
약하고 어린 것들을 팔아넘긴 놈들이라 했다.
그렇다면 죽여도 된다.
문신 안에 깃든 초원의 영혼들도 아게의 분노에 동의해 주었다.
쾅-! 쾅-!
콰직-!
아게가 부순 틈으로 오타르의 도끼질이 난무했다.
단순한 폭력만으로 단단한 문을 부숴내는 두 사내의 모습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쇼아라의 병사들도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이제 진입해도 되겠어.”
단순무식하지만 그만큼 효율적일 수밖에 없는 모습에 그레고리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 짓고 말았다.
살다 보면 가끔은 이런 통쾌한 모습도 필요한 법이었다.
“그럼 이제 가 볼······.”
그레고리는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 블라드를 바라보았지만, 자리에 있어야 할 소년은 이미 저 앞으로 뛰쳐 나간 뒤였다.
“비켜!”
굳게 닫은 왼쪽 눈과 함께 블라드의 온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
“이런!”
빠르고 강맹한 기세.
마치 한 줄기의 벼락이 달려오는 듯한 모습에 오타르와 아게는 재빨리 몸을 비키고 말았다.
콰앙!
겨우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문이 블라드의 거센 돌격에 기어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문을 부수는 거친 충격에도 라문드의 강체술은 블라드를 확실히 보호해주고 있었다.
“들어왔다!”
“막아! 막으라고!”
곳곳에서 나 뒹구는 뼈 장식들 사이로 블라드의 검이 번뜩였다.
비록 목 없는 사내는 목소리에게 넘겨주고 말았지만, 너희들만큼은 내 손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개자식들!”
안나의 검은 눈물을 닦아 주었던 블라드의 손끝에서부터 빛나는 세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 느꼈던 슬픔과 좌절은 소년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 훌륭한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그리하여 지금 블라드가 내뿜는 세계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히 자리 잡은 세계였다.
“들어가!”
“전원 진입해라!”
아게와 오타르가 재빨리 블라드의 뒤를 따르고, 그레고리의 지시에 따라 쇼아라의 병사들이 검은 곰의 근거지로 난입하기 시작했다.
넓다면 넓다 할 수 있는 로비 사이로 조직원들과 병사들이 내뿜는 입김과 욕설들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들어라!”
가로막은 자들이 있었지만 베어내었다.
그리하여 감히 아무도 달려들지 못하는 영역을 만들어 낸 블라드는 품 안에 들고 있던 명령문을 꺼내고는 크게 외쳤다.
“나는 쇼아라의 블라드다! 도시의 질서를 어지럽힌 검은 곰을 체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블라드의 손짓 한 번에 밑으로 떨어지는 두루마리.
두루마리의 가장 밑에는 쇼아라의 정당한 지배자 요제프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살인! 사기! 인신매매! 그리고 고귀한 도시의 주인을 기만한 죄까지!”
가장 앞서 있기에 빛난다.
정당하기에 누구보다 당당하다.
그렇기에 이곳에 있는 모든 자는 블라드가 외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검은 곰은 내 앞으로 나와라!”
선언과도 같은 블라드의 추상같은 명령에 돌아오는 것은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정당한 명령문과 함께 찾아온 기사에게 변명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빌어먹을.”
“······이런 젠장.”
어차피 잡히면 사형일 것을 안다.
그러나 검은 곰의 수하들은 외팔이 잭의 부하들과는 달리 쉽사리 블라드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지금부터 나를 방해하는 자. 모두 참살하겠다.”
감고 있는 블라드의 왼쪽 눈 사이로 자그마한 오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명령문을 읽을 줄 아는 기사가 이곳에 있었다.
※※※※
으아악!
살려줘! 살려주십시오!
계단을 따라 울려 퍼지는 비명들.
무언가를 죽이고 자르는 데는 능숙한 검은 곰의 부하들이었으나 정작 자신들이 당할 때만큼은 큰 소리를 내며 울부짖을 뿐이었다.
“······.”
블라드는 아게와 오타르가 열어 주는 길을 따라 조용히 계단에 올라섰다.
넓어진 그릇만큼이나 무거운 존재감으로 그렇게 질척이는 핏물을 밟고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열어.”
마지막으로 보스의 방을 지키고 있던 사내들이 있었으나 블라드의 고갯짓 한 번에 사시나무 떨듯 몸을 숙일 뿐이었다.
기사의 의무와 본인의 분노, 그 어딘가에 있는 블라드의 기세는 일개 조직원들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었다.
끼이익-
블라드의 명령에 보스의 방이 열리자 그 안에 앉아 있던 검은 곰의 모습이 보였다.
쉼 없이 흔들리는 동공과 함께 겨울임에도 젖어있는 그의 이마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블라드 경.”
그러나 블라드의 시선은 검은 곰을 향해 있지 않았다.
자신을 뒤로 한 채 천천히 일어서고 있는 남자.
그는 하얀 법복을 입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블라드는 잠시 당황했으나 곧 예의를 갖췄다.
만약 저 앞에 있는 자가 보이는 것처럼 신의 뜻을 따르는 사제라면 아무리 기사인 블라드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으니까.
귀족과 사제들은 서로 간섭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배웠었다.
“저는 주교님의 명을 따라 쇼아라의 교회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이곳에 길을 잃은 어린 양이 있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주름진 얼굴이었으나 얼굴에는 윤기가 가득하다.
자신이 아는 가장 고귀한 사제인 안드레아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저는 요제프 님의 명을 따라 이곳에 왔습니다. 사제님의 옆에 서 있는 자는 명백한 죄인이며······.”
“이제 죄인은 이곳에 없습니다. 블라드 경.”
실로 안심되는 미소.
인자함을 가득 담은 미소를 지은 사제는 곧 블라드에게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의 죄는 신의 이름 아래 사해졌으니까요.”
검은 곰은 사제의 말에 이제야 됐다는 듯 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블라드는 사제가 들이미는 종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야 막 찍었는지 선명한 잉크가 마르지도 않은 종이.
그곳의 맨 위에는 면죄부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