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92
너의 죄를 사하노라 (3)
밤의 열기를 불태운 뒷골목에는 오직 비루한 잔재만이 남아있었다.
일했던 자들도, 즐겼던 자들도 모두가 어딘가에 있을 그림자를 찾아 잠들어 있을 시간.
아직 해도 뜨지 않은 그 시간에 교회의 깃발과 함께 들이닥친 자들이 있었다.
“모두 정지!”
너저분한 뒷골목의 쓰레기를 짓밟으며 움직이는 병사들.
그들이 멈춰선 곳은 마담 마르셀라가 운영하는 여관. 장미의 미소였다.
“우리는 쇼아라의 주교이신 피에르 님이 보낸 사람들이다! 이곳의 주인은 문을 열어라!”
기사 블라드는 주교 피에르가 발행한 면죄부를 무시하였다.
이는 곧 신의 뜻을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며 신성모독이라 할 수 있는 엄중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곳 장미의 미소에는 그와 함께 무고한 자를 죽인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문을 열지 않으면 안에 있을 너희 또한 불경한 자들로 취급하겠다!”
조용한 뒷골목 안에 울려 퍼지는 성기사의 목소리.
가장 구원이 필요한 곳에 다다른 신의 뜻이었으나 그 뜻은 따뜻한 미소가 아닌 냉정한 심판이었을 뿐이었다.
“······이곳에 있는 죄인들을 끌어내라!”
성기사의 추상같은 명령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장미의 미소.
신성한 깃발 밑에 서 있던 성기사는 차라리 잘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창-
차장-
주교의 병사들이 각자 무기를 빼 들고는 소년의 둥지를 향해 치켜들었다.
신의 품은 자비로우나 그의 뜻은 냉정하니 인간들은 모두 그분께 고개 숙일지어다.
“문을 부숴라!”
블라드는 빛나는 별 하나를 움켜쥐었으나 아직 그 빛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까지 지키기에는 미약했다.
살면서 닥쳐오는 고난은 태풍과도 같은 것이며 오직 들고 있는 두 손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끼이이익-
그렇기에 사람들은 서로 어깨를 기대며 살아가야만 한다.
바로 지금처럼.
“성질들 급하시군.”
촛불 하나 밝혀지지 않은 장미의 미소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
반삭의 머리 위에 새겨진 흉터가 인상적인 사내는 반짝이는 판금 갑옷을 입은 것이 누가 보아도 범상치 않은 사람 같아 보였다.
“······누구냐.”
수십의 병사들을 향해 걸어 나옴에도 눈 하나 흔들리지 않는 기세를 가진 남자.
“나는 요제프 님의 기사 막심이다.”
이 도시에서 주교의 명이라는 말을 듣고 길을 비키지 않을 자는 없을 것이다.
오직 쇼아라의 시장인 요제프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미안하지만 장미의 미소는 현재 우리가 먼저 조사 중이다.
서로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동등한 권세라 한다면 결국은 명분이 우선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장미의 미소에 먼저 사법권을 발동한 자는 주교의 성기사가 아닌 요제프의 기사 막심이었다.
“이곳에 있는 인물들은 신성모독의 죄를 의심받고 있다.”
“살인죄로 의심받는 놈들이기도 하지.”
귀족과 교회는 서로 침범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다.
그러나 그 선을 먼저 무너뜨린 것은 주교 피에르였으니 요제프 또한 그동안의 암묵적인 규율을 지킬 이유는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장미의 미소는 우리가 봉쇄한다. 들어오고 싶다면 시장님의 허락을 받고 와라.”
막심의 말과 함께 장미의 미소 안에서 요제프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명분에 앞선 요제프의 병사들은 망설임 없이 주교의 병사들을 밀치며 천천히 영역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후회하실 텐데?”
사냥감을 놓친 성기사의 분노는 매서웠지만, 막심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요제프의 기사 막심.
그는 케이드와 함께 검은 눈물을 흘리던 여인에게 당했었던 두 기사 중 한 명이었다.
후회도 살아있을 때나 할 수 있다.
만약 그날 블라드가 아니었다면 막심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도 빚쟁이라 어쩔 수가 없어.”
일개 기사가 감당하기 힘들 교회의 권위였지만 막심은 자신이 하겠노라고 자원했다.
이 정도는 해야 목숨값을 갚는 거라 생각했으니까.
※※※※
시청 지하에 있는 감옥.
그래도 작은 창문을 통해 밖의 공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지만 블라드의 표정은 어두울 뿐이었다.
“언제나 다음을 준비하라 했을 텐데?”
“······.”
창살 밖에서 들려오는 자야르의 말에 블라드는 입이 열 개라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결국, 네놈의 뒤처리는 모두 요제프 님이 짊어지게 되었다. 이 멍청한 놈.”
결국, 종자였을때와 다름 없게 되었다.
이번 일에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은 주군인 요제프가 지게 되었으니까.
“죄송합니다.”
“······.”
자야르는 창살 안에서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 말하는 블라드를 보며 속에서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크게 뭐라 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은 실수라기보다는 함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멍청한 놈.’
똑똑한 녀석이니 조금만 더 시야가 넓었다면 이런 일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아직 소년은 귀족들의 세계는 물론 교회를 비롯한 더 넓은 세계에 대한 이해가 모자랐다.
피에르 주교는 참으로 적절한 대상을 골랐다.
“······조만간 교회로 나가 증언을 하게 될 거다. 그때를 대비해서 준비하고 있어라.”
명분은 저쪽에 있으니 결국 교회로 나가 해명해야 한다.
이단심문관이었던 피에르는 탁월한 심문 실력으로 주교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었으니 혹독한 재판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
블라드는 창살 안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자야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자책하지 마라. 해야 할 일을 한 거니까.]목소리의 위로에도 블라드는 쉽게 침울한 감정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분명 옳은 일이었고 감옥에 갇혀 있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제 잘못이 맞아요.”
뒷골목의 세계와 기사의 세계는 다르다.
얕보이지 않으려면 그 자리에서 반드시 되갚아야 하는 뒷골목과는 다르게 기사의 분노는 훗날을 기약할 수 있는 진득한 용암과도 같아야 한다.
검이란 날카롭기에 무거워야 한다.
그리고 블라드는 이제야 무거워야 한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 것만 같았다.
※※※※
“이래서 굳이 일주일이나 버틴 건가?”
피에르 주교는 창가에 서서 밑에 있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두 손이 묶인 채 저 아래에 있는 광장을 건너 죄인처럼 교회를 향해 걸어오는 금발의 기사가 있었다.
그동안 줄기차게 자신의 요청을 무시한 채 블라드를 끌어안고 있던 요제프였으나 더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명분의 싸움이었고 아무리 요제프라 해도 이 이상의 부담을 짊어지기에는 불가능했을 테니까.
“꽤 그럴싸하군.”
그러나 교회로 호송되는 블라드의 옆에는 그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놈은 죽어도 싸지! 임산부들을 팔아넘겼다는데!”
“할 일을 했는데 어째서 죄인처럼 취급한단 말이냐!”
“우리의 기사에게 모욕을 주지 마라!”
쇼아라의 블라드.
도시 쇼아라에서 나고 자랐으며 뒷골목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자수성가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
이미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블라드라는 기사는 분명 쇼아라의 시민들에게 있어 자긍심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교황청에서 보낸 주교는 인정할 수 없다! 이곳은 북부다!”
“우리는 북부의 피를 지닌 주교를 원한다!”
블라드에 대한 지지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간간이 터져 나오는 피에르에 대한 불만까지.
블라드의 행진이 더뎌질수록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쇼아라의 길목이 크게 울리고 있었다.
“애를 쓰시는군.”
그 모습을 보던 피에르는 차가운 비웃음과 함께 창문에서 돌아섰다.
감히 쇼아라의 민심을 통해 자신을 흔들려 하다니.
역시나 바예지드의 피를 이은 자들은 쉽사리 봐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다.
“이단심문관들은 다들 준비됐나?”
“준비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썼다고 한들 잔재주에 불과한 일.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진실된 이름 앞에서 꼬리를 내릴 하찮은 잡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
블라드는 긴장된 상황이었음에도 주위를 둘러보고 파악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
그렇게 둘러본 주위의 광경은 앞으로 있을 재판에 대한 부담감이 아니더라도 괜스레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
‘이렇게 와보네.’
평생을 쇼아라에서 살았음에도 한 번도 와보지 못했던 장소였다.
교회란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높은 문턱을 가진 곳이었으니까.
“기사 블라드는 앞으로 나오시오.”
반원의 형태로 만들어진 교회의 재판장.
재판장인 피에르와 피의자인 블라드가 들어설 곳은 재판장의 가장 중앙에 있었으며 요제프를 비롯한 관계자들과 교회에서 특별히 초대한 도시의 유력자들은 위에 있는 자리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게 되어있었다.
[이단심문관들이군. 들고 있는 수정구가 범상치 않아 보인다.]“······.”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단심문관들을 보았다.
총 8명의 심문관들.
그들 모두가 두 손으로 사람 머리만 한 수정구를 들고 있었다.
“······모두 8명입니다.”
“마녀사냥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건 도를 지나쳤습니다.”
요제프는 위에서부터 올라오는 쓴맛을 느끼며 눈썹을 찌푸렸다.
‘최악을 감안해야겠군.’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버티며 이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 많은 수단들을 강구했지만 결국 시간이 부족했다.
이제는 최악의 결과를 감안하고 다음 수를 준비할 각오를 해야만 했다.
“신의 말씀이 담긴 성경에 손을 얹고 진실만을 말하겠다 대답하시오. 블라드 경.”
신의 이름으로 새워진 교회 안에서 블라드는 성경에 손을 얹었다.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
맹세란 입으로 내뱉고 양심으로 지키는 것이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조금은 다르게 표현될 것이다.
재판장 바닥에 복잡한 글자로 채워진 축문들은 블라드가 거짓을 말하는 순간부터 수정구의 빛을 꺼뜨리게 될 테니까.
“······.”
요제프는 조용히 타오르는 눈으로 저 앞에 서 있는 피에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피에르에게서는 그저 무표정한 냉기만이 감돌뿐이었다.
“지금부터 바예지드의 기사인 블라드 경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소.”
시작을 알리는 말이었지만 어쩌면 이미 끝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재판은 정해진 결과를 맞히기 위한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결과는 블라드에게 있어 반가운 모습은 아닐 것이다.
“기사 블라드는 면죄부를 든 검은 곰이라는 사내를 살해했다. 이 말이 진실인가?”
주교의 질문을 들은 자신도 모르게 요제프는 두 손을 움켜쥐고 말았다.
지금 피에르는 같잖은 유도 신문을 통해 블라드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맞습니다.”
“스스로가 신의 말씀을 거역했다는 걸 인정하는군.“······그게 무슨?”
그저 검은 곰을 죽였다는 대답일 뿐이었으나 피에르의 해석에 따라 소년은 신의 뜻을 무시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신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 아니라!”
“다음 질문.”
하나의 질문, 하나의 대답.
블라드의 대답과 함께 심문관 하나가 원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기사 블라드는 이번의 사건과 같이 사람을 죽일 때마다 언제나 정당하고 올바른 결정을 해 왔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기에 해야 할 일을 했다.
검은 곰은 임산부들을 팔아넘긴 추악한 자였으며 아무리 면죄부라 할지라도 그의 잘못을 감출 수는 없다.
“거짓이군.”
그러나 블라드의 대답에 심문관이 들고 있던 수정구 하나가 빛을 잃었다.
“······!”
그 누구도 살면서 항상 옳은 결정만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피에르는 언제나, 항상, 최선의 자세 같은 도달하기 힘든 기준을 질문 속에 감춤으로써 블라드에게 거짓을 강요했다.
“이건!”
“다음 질문이다.”
방금의 질문으로 블라드는 거짓을 고한 자가 되었다.
고작 두 번의 질문이었을지언정 노련한 피에르는 블라드의 약점을 확실히 쑤셔대고 있었다.
“1년 전 쇼아라의 뒷골목에서 검은 벼락을 맞았다는 소년이 있다는 제보가 있었다. 그 소년이 자네인가?”
의도를 왜곡하고 속임수와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블라드라는 사람을 자신의 뜻에 따라 제단하기 시작하는 피에르.
그의 다음 질문은 헛된 의혹을 던짐으로써 블라드가 쌓아 올린 명성을 깎아내리려는 것이었다.
“······.”
그러나 피에르가 준비한 질문은 예상보다 블라드에게 큰 파문을 주는 질문이었다.
소년의 영혼 속에서는 정체를 알지 못하는 목소리가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사실입니다.”
“불길한 징조와 함께했군.”
세 번째 대답과 함께 블라드는 불길한 징조가 깃든 기사가 되었다.
지금부터 그가 쌓아 올린 모든 업적들은 의심받게 될 것이다.
“혹시 그 벼락을 맞고 난 뒤로 어떠한 목소리가 들려온다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떠한 존재의 계시가 있었나?”
피에르의 회백색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아니라 말해도 상관없다.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상처 입고 흠집 난 블라드의 명성은 지금과 같이 밝게 빛나지만은 않을 것이다.
“······.”
들려오는 피에르의 질문에 블라드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태껏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악의의 형태에 블라드는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왜 대답을 하지 않나?”
쉽게 대답하지 못한 채 주저하기 시작하는 블라드의 모습에 방청석에 있는 사람들까지 조금씩 수군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주교와 뜻을 함께하는 도시의 유력자들에게서부터 시작된 웅성임이었다.
“목소리가 들렸냐고 물어본 것이라면······.”
맞다고 하면 사특한 존재가 될 것이며 아니라 하면 거짓을 고한 것이 된다.
무어라 말해도 돌이킬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맞다고 해라.]주저하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목소리가 말했다.
이 경우에는 거짓을 말하는 게 더 치명적인 것임을 목소리는 눈치채고 있었다.
차라리 벼락을 맞은 후유증으로 정신이 잠깐 나갔었다고 변명이라도 하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라고 말하면 거짓이 된다. 그렇게 되면 변명할 기회조차 없을 거다.]최악의 상황이라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목소리의 정체가 드러나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는 재판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미 각오한 바가 있었다.
[걱정하지 말고 그렇다 해라. 절대 내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하마.]“······.”
자신을 의심하는 심문관들과 대답을 강요하는 주교.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한 블라드는 무슨 대답이라도 내놓아야만 했다.
쾅-!
“멈추시오!”
블라드가 입을 열려 하는 순간 재판장의 입구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거칠게 열린 만큼 크게 열린 입구에서부터 겨울의 찬바람이 매섭게 들어치기 시작했다.
“재판을 멈추십시오!”
열려 있는 문에 서 있는 사람들.
헐떡이는 늙은 사제와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부제.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그레고리까지.
“이 재판은 공정하지 않소이다!”
늦었지만 늦지 않은 사람들이 드디어 이곳에 도착했다.
“허락받지 않은 자는 들어올 수 없다!”
갑작스레 난입한 남자를 보며 경비병들이 가로막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하얀색 법복을 보고서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신실한 신의 종임을 알려주는 것이었으니까.
“감히 무슨 자격으로 내 앞에서 재판의 자격을 운운하는 거냐!”
갑작스러운 방해에 흐름이 끊기고 만 피에르는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재판장에 난입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지금 막 들어선 남자는 지금의 재판이 공정하지 않다고 말할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기사 블라드 경의 이름을 보증한 사람입니다!”
쇼아라의 블라드.
아무도 모르게 땅바닥에 뒹굴던 그 이름을 고이 주워 신의 이름 앞에 놓아준 사람이 있었다.
“만약 그의 이름 앞에 의혹이 있었다면 당연히 나를 먼저 거쳤어야 합니다!”
블라드는 자신의 보증인이라는 말이 들려오자 고개를 돌려 입구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수염에 붙어있는 눈 덩어리들을 떼지도 못한 채 서둘러 재판장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어린 부제의 부축을 받으면서 지친 발걸음으로 한 걸음씩 그렇게.
“사제님······.”
“지금부터 아무 말도 하지 말게.”
안드레아는 아직도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블라드의 옆에 섰다.
그의 숨결 하나하나에는 아직도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내가 자네 대신 말해줄 테니.”
공정하지 않은 재판장이었으며 기울어져 있는 재판이었다.
그러나 방금 소년을 위한 추 하나가 올려졌으니 재판은 다시금 새로운 균형을 가지기 시작했다.
“······결국, 여기로 왔군.”
피에르의 회백색 눈동자에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소년의 보증인이자 북부의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신실한 사제였다.
“오랜만입니다. 피에르 주교님.”
기사의 인도를 따라 북풍의 설한을 뚫고 온 남자.
“사제 안드레아. 인사드립니다.”
사제 안드레아.
그는 자신이 보증한 소년을 위해 스스로 저울 위로 올라갈 각오를 한 사람이었다.
이제는 스스로 서야 할 때
고아가 되었다는 서러움은 단순히 부모를 잃었다는 슬픔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도둑놈의 새끼가!”
“내가 안 훔쳤다니까!”
이제는 소년을 위해 아니라고 말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다는 현실은 어린 블라드를 끊임없이 지치게 했다.
“재수없게스리! 이래서 부모 없는 놈들은 안 돼!”
세상은 편견 안에 블라드를 가둬놨고 결국 어린 소년은 자신을 구겨가며 뒷골목 고아의 삶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블라드는 어딘가가 구겨진 채로 한 치 앞만 바라봐야 하는 인생을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홀로 재판장 위에 서 있는 소년을 위해 그의 잘못이 아니라 말해주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지금부터는 제가 블라드 경을 위해 대신 대답할 것입니다.”
대답을 주저하는 소년을 자신의 등 뒤에 감춘 채로 그렇게.
그는 소년의 구겨진 영혼을 펴기에는 조금은 늦었지만 아주 늦지는 않았다 믿는 사람이었다.
※※※※
“당연히 앞으로도 그의 모든 행동은 목소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저 위에 계신 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피에르의 질문은 블라드를 불길한 징조가 깃든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었지만, 안드레아의 대답은 블라드를 축복받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같은 한 사람이었지만 보는 시야에 따라 그렇게 달라 보였다.
“창녀를 어머니로 둔 비천한 태생이오. 신의 축복이란 것이 그리 녹록한 줄 아시오?”
한낱 뒷골목 고아 따위에게 신의 축복이라니.
정말로 신의 축복이 블라드라는 사람에게 깃들었다면 그를 더러운 뒷골목이 아닌 고귀한 핏줄 속에서 태어나게 했을 것이다.
“제국의 건국왕이신 프라우센 님도 몰락한 귀족가의 자식으로서 밑바닥에서 숱한 고난을 겪어오셨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결국 그분은 신의 축복과 함께하셨습니다.”
교회의 주교가 블라드가 태어난 자리를 보는 동안 교회의 사제는 소년이 앞으로 나아갈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비천한 곳에서 태어났다 할지라도 안드레아는 소년이 누구보다 빛나는 가능성이 있다 믿는 사람이었으니까.
“······다음 질문.”
오직 쇠붙이로 만든 것만이 날카로운 무기는 아니다.
비록 검은 아니었으나 이곳 쇼아라의 교회에서도 서로 날카로운 무기를 든 채 찌르고 막아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사 블라드는 쇼아라의 뒷골목에서 자라오며 지금까지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왔다. 이 말이 진실인가?”
훔치고, 빼앗고, 때로는 죽이고.
블라드는 분명 죄를 지으며 살아왔다.
“살아남기 위해 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의 죄는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한 긴급구호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분명 가련한 여인과 아이를 위해 관을 옮겨주고 못을 박아주었다.
저주가 두려워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지만, 오직 소년만은 측은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었다.
태어난 심성대로 살지 못했던 것은 분명 블라드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기사 블라드는 검을 잡은 지 고작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사특한 존재를 물리치고 용을 죽였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납득 가능한 일인가!”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오러를 깨우치고 용을 죽이고 서부의 기사를 물리쳤다.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소년의 성장세는 분명 밖에서 보았을 때는 의구심을 품게 할 만한 것일 테다.
“······.”
안드레아는 피에르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 잠시 그날을 기억해보았다.
일개 용병이었음에도 자신의 의무를 위해 새까만 밤길을 달려왔던 소년.
그날, 밤하늘을 가르며 달려왔던 블라드의 세계는 누가 보아도 눈부신 하얀색이었다.
“······블라드 경의 빛나는 세계는 오직 저만 본 것이 아닙니다. 주교님.”
그리고 블라드의 세계를 본 자는 안드레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 각 가문에서 모아온 증언서들이 있습니다.”
안드레아는 요제프가 전해준 종이들을 움켜쥐고는 높게 들어 올렸다.
종이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는 고귀한 자들의 문장들.
그곳에 적혀 있는 이름들 모두가 블라드의 가능성을 똑똑히 보아온 사람들이었다.
“하이날의 던칸, 산 로지노의 유스티아, 그리고 바라노프의 볼코프까지! 이들 모두가 그간의 업적이 모두 소년이 한 업적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결국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안드레아는 피에르의 암수 속에서 블라드를 끄집어내고 있었지만, 그가 보내온 한 줄기의 밧줄은 소년이 여태껏 쌓아 올려왔던 사실들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블라드는 지옥과도 같은 의심 속에 서 있었지만 결국 스스로를 구해내고 있었다.
“······기사들의 증언서. 확인했소.”
피에르는 안드레아가 전한 기사들의 증언서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신실함에 대한 의심, 출신에 대한 비천함, 떳떳하지 못한 범죄들, 그리고 만들어진 가능성에 대한 의혹까지.
피에르는 블라드를 잡아채기 위해 촘촘한 그물을 만들어 놓았지만, 사제 안드레아의 변호는 그가 만든 그물을 갈기갈기 찢어내고 있었다.
안드레아가 들고 있는 진실이라는 단검은 그렇게 날카로운 것이었다.
“······.”
피에르는 블라드를 둘러싸고 있던 심문관들을 바라보았다.
피에르가 던지는 질문 하나마다 밖으로 나갔던 수정구들.
그러나 안드레아가 도착한 이후 빛이 꺼진 수정구는 단 하나도 없었으며, 이제 원 안에 남아 있는 수정구는 단 하나뿐이었다.
‘결국, 꺼내야 하는가.’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다.
피에르는 단 하나의 질문만으로는 블라드를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렇기에 만약을 위해 준비해놓은 방안을 사용하기로 했다.
요제프와 피에르는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준비했던 것을 들여와라!”
그것은 최악을 준비한다는 것.
피에르의 지시에 따라 성기사들이 재판장 안으로 커다란 봉함[封緘]을 들여오고 있었다.
사제나 잡부가 아닌 성기사들이 직접 들고 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
곳곳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나무함은 분명 이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범상치 않은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재판의 재판장인 나 피에르는 아직 하나의 질문을 남겨두고 있다.”
피에르의 회백색 눈동자가 안드레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주교 앞에서 날뛰는 저 사제 하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번거롭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질문을 던지기보다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그의 의혹을 밝혀보기로 했다.”
피에르의 신호와 함께 심문관들이 커다란 나무함의 봉인을 풀기 시작했다.
숨죽이는 사람들과 긴장하는 심문관들.
“이런······.”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물건을 본 안드레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거울?”
“아니, 갑자기 웬 거울이?”
커다란 봉함 속에서 나온 물건은 거울이었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이 거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질문 대신 기사 블라드에 대한 구마의식을 행할 것을 명하겠다.”
성 마르엘로의 거울.
교황청이 지정한 공식적인 성물인 마르엘로의 거울은 바라보는 사람의 모든 진실을 비춘다고 알려진 보물이었다.
“블라드 경은 진실로 떳떳하다면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이단심문관들이 성물이 쓸 때는 단 한 가지의 경우.
사람의 영혼 안에 숨어 있는 악(惡)의 존재를 발견하고자 할 때였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블라드의 안에 마귀가 있다.
피에르의 구마의식은 그것을 상정한 행위였다.
“여태까지 진실한 대답으로 그의 결백을 증명해 왔는데 어째서 블라드 경에게 구마의식을 진행하려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지금의 구마의식은 블라드에게 낙인처럼 찍혀 불명예의 상징처럼 따라다니게 될 것이다.
“안드레아 사제. 나는 일말의 의심조차 밝혀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이오.”
그러나 피에르가 단순히 블라드의 명예에 흠집을 내기 위해 성 마르엘로의 거울을 꺼내 든 것은 아니었다.
목소리가 들리냐는 질문에 크게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던 블라드.
노련한 피에르는 증인이 흔들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정녕 그의 영혼이 깨끗하다면 그저 앉기만 하면 될 일 아니오.”
틀린 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옳은 말도 아니었다.
지금의 행위 자체가 블라드에게 큰 부담을 짊어지게 하는 것임은 분명했으니까.
“······.”
안드레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뒤에 있는 소년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피에르의 마지막 수단은 발악과도 같은 것이었고 최선을 다해 변호하던 안드레아조차도 이것만큼은 막아 줄 수는 없었다.
“걱정하지 말게. 그저 안에 깃든 사특한 존재를 찾아내는 물건이니까.”
안드레아는 블라드가 신실한 사람이라 믿었기에 이번 시도만 넘긴다면 무사히 재판이 끝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안드레아는 소년의 진실된 모습을 꿰뚫어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가 미처 살펴보지 못한 블라드의 면모가 하나 있었다.
소년은 오롯이 홀로 서 있는 자가 아니었다.
지금도 그의 영혼에는 시련과 고난을 같이 겪어왔던 목소리라는 존재가 깃들어 있었으니까.
성 마르엘로의 거울.
그 거울을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빛은 떨리고 있었고.
“······.”
가만히 깍지를 낀 채 상황을 주시하던 피에르도 흔들리고 있는 블라드의 눈빛을 보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블라드를 바라보는 그의 무기질한 눈동자가 조금씩 번들거리고 있었다.
※※※※
정체가 드러날지도 모르는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잔잔했다.
이 재판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목소리는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괜찮다. 앞으로 가라.]목소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소년에게 검을 내어주었던 늙은 대장장이를.
그는 자신의 볼품 없는 검이 블라드의 발목을 잡지 않기를 바랐고 비록 대화 한 번 나누지 않은 사이였지만 목소리는 그와 깊은 동질감을 느끼고는 했다.
‘하지만.’
[그동안 너에게 알려줄 것은 다 알려주었지.]갑작스러운 목소리의 대답에 잠시 멈칫하는 블라드의 걸음.
그러나 서슬 퍼런 심문관들의 눈빛은 블라드의 머뭇거림을 용서하지 않았다.
[저 거울에 비치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더 깊은 세계로 빠져들어 가야 한다.]목소리는 예전에도 한 번 안드레아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잠시 더 깊은 내면으로 빠져든 적이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것은 교황청이 자랑하는 성물.
저 대단한 성물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세계로 빠져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사의 세계는 바다와도 같이 넓고 깊은 것이다. 여태껏 네가 펼쳐온 세계는 그저 발 한쪽을 담근 수준일 뿐이었지,]루트거는 검을 튕겼고, 그레고리는 발을 굴렀다.
블라드의 세계를 이끌어주었던 기사 파블로는 검과 방패를 맞부딪혔었다.
그 행동들 모두가 더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세계를 끌어올리기 위한 열쇠와도 같은 행위였었다.
[기본은 닦아 놓았으니 이제는 더 높은 곳을 향해 정진할 때가 되었다.]이제야 막 기사들의 세계에 다다른 블라드였지만 아직도 올라가야 할 계단은 많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알려준다고 해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목소리는 지금이야말로 소년이 스스로 일어서야 할 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기사 블라드는 눈을 떠라! 그리고 앞에 있는 거울을 바라봐라!”
“······.”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침내 거울 앞에 다다른 블라드였지만 쉽사리 거울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지금 눈을 뜨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있었으니까.
‘저는 아직 그 세계까지 다다르기에는 모자라요.’
[그래도 언젠가는 다다르겠지.]‘엄청 오래 걸릴 거예요. 평생 못할지도 모른다구요.’
바라보았을 때는 몰랐으나 마침내 다다랐을 때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어떤 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높은 벽을 넘어야 하는지도.
[이제는 혼자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목소리는 각오했고 이제는 해야 할 순간이었다.
할 일을 마친 장식 없는 검이 깨어졌듯 목소리 또한 지금은 자리를 비켜줘야 할 때다.
웅성거리는 방청석.
점점 커지는 심문관들의 기도문 소리.
그러나 그 와중에도 블라드는 확실히 들었다.
목소리가 보내는 작별 인사를.
“······알겠어요.”
거울 앞에 선 블라드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맞닿아 있는 세계였기에 느낄 수 있었으니까.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었던 세계가 저 깊은 곳으로 무너지듯 침잠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주저하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피에르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정말로 소년 안에 자신이 기대해 마지않았던 것이 있는 것이 아닐까.
“눈을 뜨고 앞을 봐라! 블라드!”
이제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저 밑에 가라앉아 있었지만 블라드는 기억했다.
자신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세계가 어떠한 세계였는지를.
목소리의 세계.
그의 세계는 폭풍과 뇌우. 그리고 선명한 하얀색이 가득한 세계였다.
“······!”
마침내 마주친 성 마르엘로의 거울.
그 앞에서 블라드는 당당히 눈을 뜨고는 자신과 맞닿아 있던 세계의 잔재를 보았다.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남겨주고 간 하얀색의 세계였다.
“저건······.”
“거울이······빛난다?”
소년과 마주친 거울이 빛나고 있었다.
새하얗게, 마치 터져나가듯.
“맙소사······.”
일어서는 신실한 사제와 어찌할 줄 몰라하는 심문관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결과에 경악하고 있는 피에르까지.
성 마르엘로의 성물에서부터 시작된 소년의 세계가 재판장이 터져나갈 듯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내가 잘못한 게 하나도 안 보이잖아.”
벼락은 구름에서 만들어져 하늘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얀색은 고결한 색이며 오직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색이다.
소년의 뿌리를 이루고 있던 목소리의 세계는 하늘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건들고 지랄들이야.”
언제나 거대한 세계들은 소년을 짓뭉개고는 했다.
예전에는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한 채 구겨지고는 했으나 지금이라면 크게 한 번 정도는 외쳐도 될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게 없다잖아!”
콰쾅-! 쾅!
소년의 울분과 함께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모여든 하얀색의 구름은 거짓된 교회의 가장 높은 곳으로 벼락 한 줄기를 떨구었다.
댕-대앵-댕-
소년은 잘못이 없다.
그저 살아남았을 뿐이고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백을 증명해 준 마지막 증인은 바로 언제나 블라드와 함께 했던 목소리였다.
도시 쇼아라에서 블라드의 결백을 알리는 종소리가 높게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