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93
저 눈이 녹을때면 (1)
전쟁에 패한 기사들이 모여 있다면 이런 분위기일까.
주교의 집무실에 모여 있던 사제들은 마치 자신들이 패장(敗將)이라도 되는 듯 다들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복구 가능성은 어떻지?”
그래도 누군가는 지금의 물음에 대해 보고를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피에르 주교의 차가운 분노가 터져 나오고 말 테니까.
“자세한 것은 교황청으로 보내봐야 알겠지만······.”
피에르 주교의 심복인 하얀 법복의 사제는 차마 말하기를 주저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힘들 것 같습니다.”
“······.”
피에르 주교는 사제의 대답을 듣고는 무거운 침음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던 피에르였지만 그럼에도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어쩔 수 없는 한마디가 있었다.
“어이가 없군.”
성 마르엘로의 거울.
교황청이 직접 하사한 성물인 성 마르엘로의 거울은 피에르에게 있어 자부심과도 같은 물건이었지만 어이없게 깨지고 말았다.
고작 애송이 기사의 영혼을 비춰봤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도대체 뭐 하는 놈이냐.’
쇼아라의 블라드.
뒷골목 출신의 기사.
흔치 않은 이력과 어린 나이는 분명 독특한 개성을 자아내고 있었지만 그렇다 할 지라도 지금과 같은 이적(異跡)을 일으킬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었다.
“그의 영혼 안에 비쳤던 것을 본 사람이 있나?”
성 마르엘로의 거울은 영혼을 비추는 거울.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저 자신의 모습만을 들여다보았겠지만 블라드의 경우에는 차마 쳐다보기 힘든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그 말은 소년의 안에 분명 무언가가 깃들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특한 존재는 아닙니다. 그랬다면 저희가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교회의 지붕 위로 벼락이 날아왔다고 합니다. 현실에 영향을 끼칠 만큼의 강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피에르 주교는 사제들의 말을 듣고는 더욱 혼란에 빠질 뿐이었다.
“······도무지 무엇인지를 모르겠군.”
오랜 세월 동안 이단심문관으로 지내왔던 피에르조차도 정체를 가늠하기 힘든 존재였다.
밝게 빛났으니 악에 속한 것은 아닐 터.
그러나 신의 축복이라고 하기에는 지니고 있는 기운이 너무 매서웠다.
“이건 보고를 해야 하겠어.”
블라드의 안에 깃든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는 없었으나 분명 성물 하나를 부숴 먹을 만큼의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비록 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정도의 특이점이라면 분명 교황청에서도 관심을 가질 것이다.
어쩌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니 다시 한번 재판장에 세워 볼 수도······.
똑똑똑.
“들어와라.”
피에르는 때마침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잠시 상념에서 깨어났다.
“······주교님.”“무슨 일이냐.”
집무실에 있는 수많은 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명의 사제.
그의 손에는 자그마한 종이쪽지가 들려져 있었다.
“산 로지노에서 보낸 전보입니다.”
“산 로지노에서?”
사제의 말에 피에르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교황청 소속인 자신에게 북부 교구인 산 로지노가 전보를 보내올 일은 드물었으니까.
“줘 봐라.”
피에르는 왜인지는 몰라도 창백한 안색을 짓고 있는 사제의 손에서 쪽지를 빼 들었다.
위기 뒤에는 기회가 온다.
반대로 말하자면 기회 뒤에는 위기가 올 수도 있는 법이다.
피에르는 함정을 통해 블라드를 위기에 몰아넣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산 로지노······.”
이제 흐름은 피에르에게서 다시 요제프에게로 넘어갔고 쇼아라의 정당한 시장은 자신에게 넘어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북부 놈들이!”
안개 가득했던 마을에 누워있는 여인들이 눈물로써 증언하고 있었다.
검은 곰이라는 사람은 절대 면죄부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산 로지노는 그녀들의 눈물을 받아들였다.
-쇼아라의 주교 피에르는 검은 곰과 흑마법사들간의 관계에 해명할 것.-
쇼아라의 시장과 산 로지노.
북부에서 쏘아 올린 한 발의 화살이 피에르의 가슴을 싸늘하게 꿰뚫고 있었다.
※※※※
안드레아가 데리고 다니던 어린 부제의 이름은 크리스티앙이었다.
바르나에서 행했던 몬스터 토벌전에서부터 블라드와 나름의 인연을 쌓아왔던 어린 소년은 그가 모시는 안드레아를 따라 이곳 쇼아라까지 온 참이었다.
“사제님은 괜찮으셔?”
“좀 더 누워계셔야 할걸요.”
낑낑거리며 자기 허리춤까지 오는 커다란 물통을 들고 가는 어린 부제.
블라드는 그 모습에 괜히 미안함을 느끼며 대신 물통을 들어주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바르나에서 편히 지내고 있을 아이였으니까.
“추운 날씨에 움직이는 것도 무리인데 도착하자마자 주교님이랑 한 판 하셨잖아요.”
“······그렇지.”
단순히 어린 부제에게만 미안한 것이 아니었다.
사제 안드레아는 지금 침대 위에 누워 골골대는 중이었다.
어린 부제의 설명대로 젊지 않은 나이에 할 수 있는 무리란 다 했으니 탈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뭐 필요한 거는 없어?”“없어요. 이미 요제프 님이 다 신경 써주고 계셔서.”
누군가에게 빚진다는 사실은 한 마디로는 설명하기 힘든 복잡미묘한 감정을 가져오고는 한다.
그리고 블라드는 안드레아를 볼 때마다 항상 그런 감정을 느껴왔다.
이름을 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안드레아에게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진짜예요?”“뭐가?”
이제 겨우 열 살이나 되었을 법한 소년의 눈동자가 블라드를 보며 빛나고 있었다.
“신의 축복을 받으셨다는데?”
“······누가 그래?”
소문이란 퍼지면 퍼질수록 덩치가 커지는 법이다.
직접 재판장에 있던 도시의 유력자들은 차치하고라도 교회로 몰려들던 새하얀 구름은 쇼아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이적 중 하나였다.
“그런 대단한 거 아니야.”
“그래요?”
크리스티앙은 말로는 그렇구나 라고 대답했으나 정작 짓고 있는 표정으로는 아닐텐데 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린 부제도 보았기 때문에.
밤하늘 아래서 악몽과도 같았던 여인을 갈라내었던 새하얀 일검을.
“그래도 좋아하셨어요.”
안드레아가 묵고 있는 방 앞에 도착한 크리스티앙은 블라드에게 물통을 받아들고는 말했다.
“좋아하셨어?”
“그럼요.”
땅바닥을 굴러다니던 어린 용병이 자신의 보증 아래 어엿한 기사가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상서로운 기운을 지닌 존재와 함께하고 있었으니 안드레아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나중에 제 동기들한테 자랑해도 되요? 블라드 경이랑 같이 기도했었다고.”
“······하고 싶으면 해.”
비록 미적지근한 대답이었지만 크리스티앙의 얼굴에는 이미 커다란 미소가 새겨진 후였다.
신의 축복을 받은 것인지도 모를 기사였다.
그런 기사와 함께한 인연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린 부제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자랑할만한 거리가 될 것이다.
“나중에 봐요.”
“그래.”
인사라도 한번 하고 싶었건만 앓아누워 있다니 별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을 위해 온 사람이었으니 최대한 배려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뭐 자랑까지 하나.”
문 앞에서 돌아선 블라드는 크리스티앙의 말을 떠올리며 괜스레 뒤통수를 긁적였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자랑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
아무도 없는 복도에 멈춰선 블라드는 가만히 멈춰서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주변이 조용해질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자신에게 말을 걸던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들려오는 것은 그저 대답 없는 자신의 혼잣말뿐.
“이거 적응 안 되네.”
만약 지금 목소리가 함께 하고 있었다면 그도 자신에게 자랑스럽다고 말해주었을까.
그러나 그 말에 대답해 줄 목소리는 자신의 세계에 자그마한 흔적들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리고 만 뒤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혼자라는 감각에 블라드는 가만히 서서 고요한 침묵만을 삼킬 뿐이었다.
※※※※
“산 로지노에서 전보를 보냈다 합니다.”
“빠르군.”
와인잔을 들고는 창밖을 바라보던 요제프는 자야르의 보고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쌓아왔던 감정이 있던 컸던 모양이지?”“북부 교구에 대한 교황청의 홀대는 이미 유명한 것이지 않습니까.”
대륙의 중심은 중부이며 이들이 그 외에 지역에 보내는 차별과 질시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북부 교구 산 로지노가 중앙에 있는 교황청에게 무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쁘지 않아.”
시기가 좋았다.
정치적인 사안으로 산 로지노의 지원을 얻어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급박하게 새로 짜여지는 힘의 균형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북부의 영주들과 산 로지노의 동맹.
이번에 있을 북부 회의에서 확정될 사항이었지만 지금처럼 확실한 기회가 있다면 미리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도 서로에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보르단. 안드레아 사제님을 잘 모셔라. 가능하다면 바르나로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비록 소년을 핑계로 모시고 왔지만, 안드레아 사제는 존재만으로 피에르 주교를 압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널리 알려진 사제였으며 조만간 어느 곳의 주교직을 맡아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으니까.
요제프의 머릿속에는 이미 피에르에 대한 다음 계획들이 짜여져 있었다.
“요제프 님. 저 왔습니다.”
“들어와라.”
요제프는 창가에서 몸을 돌려 집무실로 들어오는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큰일이 있던 직후였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무어라 할 말이 쉽게 나오지가 않았다.
“내가 너를 어찌해야 할까.”
“죄송합니다.”
블라드를 바라보는 요제프의 표정이 실로 미묘했다.
“너는 항상 예측이 불가능하군. 시작부터 끝까지 말이다.”
“······.”
요제프는 철저한 계획으로 결과를 이끌어내는걸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소년은 요제프의 계획을 헝클어뜨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녀석이었다.
궁합으로 따지자면 최악일 둘이었지만 만들어내는 결과는 언제나 예상 이상이었으니 요제프로서도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사제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안에 신의 축복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다더군.”
“아닐 겁니다.”
“아니어도 상관없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
요제프의 짙은 눈그늘이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동과 날조는 귀족들의 특기이자 필수 교양인 항목이었다.
“······피에르 주교와 그의 뒤에 있는 교황청이 너를 주시하게 될 거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너는 그들의 일을 방해했으니.”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요제프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루기 어렵고 키우기는 더 어려운 어린 기사는 여전히 요제프의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받아라.”
“네?”
블라드는 갑작스레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주머니를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감각이 느껴지는 주머니였다.
“······이건.”
“이번 해가 끝나간다.”
내리는 눈과 함께 한 해가 끝나가고 있었다.
비록 사고로 마무리되는 한 해였으나 요제프의 인생 중 올해만큼 성과를 거둔 해도 없었다.
어찌 보면 전부 다 자신의 앞에 있는 소년의 공이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별 수당이다. 월급이 아닌 성과에 대한 보상이지.”
보르단이 말했듯이 블라드에게도 특별 수당이 지급되었다.
끝나가는 한 해에 맞춰 요제프는 블라드에게 확실한 계산을 맞춰주었다.
“300골드는 넘을 거다.”
“······!”
방금까지만 해도 송구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던 블라드였으나 요제프의 입에서 흘러나온 액수에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말았다.
잘은 모르겠으나 300골드라면 농사를 지을 땅도 살 수 있는 큰 금액이었다.
“왜, 왜······이렇게나.”
“종자였을 시절부터 해왔던 성과들도 계산해두었다. 큰돈이니 계획을 잘 세워봐라.”
소년은 언제나 요제프의 예상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어찌 보면 엉망진창인 과정이었으나 결과만큼은 눈부셨으니 요제프는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해줄 의무가 있었다.
“너는 이제 기사다. 마땅히 너의 성과에 대해 주장할 권리가 있다.”
“감사합니다!”
요제프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자신에게 감사하다 말하는 블라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뻐하는 저 모습을 보며 이 말을 전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해야만 한다.
자신은 블라드를 책임지는 사람이었으므로.
“명심해라. 이제 기사가 된 너는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오직 무기와 무력으로만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블라드는 지금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요제프에게서 자신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 말을 이해했나?”
“네.”
“좋다.”
17살인 블라드는 이번 해가 지나면 18살이 된다.
소년은 알아야 한다.
이제 올해가 지나가면 더는 소년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기사 블라드는 신의 뜻을 담은 면죄부를 무시했다. 이것만큼은 피에르 주교가 확실히 밝힌 너의 과오다.”
어제의 재판에서 블라드는 자신의 입으로 면죄부를 받은 검은 곰을 죽였다 말했다.
이것은 요제프도 인정하는 과오였으며 블라드는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기사 블라드를 쇼아라에서 추방한다.”
“······네?”
마주 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티끌만큼의 과오라도 남아있다면 주교와 교황청에게 명분을 남겨주고 말 테니까.
“기간은 내가 다시 너를 부를 때까지다.”
종자는 뒤에 서 있어도 되지만, 기사는 앞장서야 한다.
소년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어른은 책임져야만 한다.
그리고 블라드는 이제 책임과 의무에 대해 알아야 할 나이이다.
창밖으로 한 해를 덮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저 눈이 녹을 때가 온다면 블라드도 소년이 아닌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