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94
저 눈이 녹을 때면 (2)
예전에.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은 예전에 블라드는 호르헤의 조직원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었다.
“아. 딱 100골드만 있으면 좋겠구만.”
사내들이 모이면 으레 하는 상투적인 대화들.
술, 여자, 별 특별할 것도 옛날이야기.
그리고 그런 대화들이 한 바퀴 돌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100골드 있으시면 뭐 하게?”
“있으면 이 짓 말고 당장 어디 땅 하나 사서 정착하지.”
“평생을 여기서 살았는데 퍽이나 농사짓고 살겠네.”
돈에 관한 이야기.
정확히는 일어날 리 없기에 상상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들.
“보스 봐. 역시 농사보다는 장사지. 어디 그럴싸한 건물 하나 잡아서······.”
“그러다 폭삭 망하는 거야. 장사는 쉬운 줄 아나.”
미래가 빤히 보이는 인생이란 서글프다.
그러니 가끔은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도 필요한 법이었다.
상상하고 이야기하는 데에는 어떠한 자격도 필요치 않으니까.
“······.”
땅을 산다, 건물을 산다, 아니다 사업을 해야 한다.
아무런 의미는 없지만, 열정만큼은 뜨거운 대화 속에서 버레이는 저 멀리 혼자 떨어져 있던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이 신입. 너는 100골드 있으면 뭐 할래?”
선배들의 하릴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히 밀대질을 하고 있던 조직의 막내.
“누가 준대요?”
“말은 해 볼 수 있는 거 아냐. 말은.”
금발 머리의 소년은 버레이의 질문에 잠시 밀대를 멈추고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갑자기 돈이 생긴다면 무엇부터 할 것인가.
“······100골드면 먼저 빚부터 갚아야겠는데.”
“뭐? 100골드나 빚졌냐?”
“저놈 싹수가 노랗네. 어디서 도박이라도 한 거 아냐?”
일어날 리는 없겠지만 상상은 해 볼 수 있었고 블라드는 그 상상 속에서도 먼저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박 빚은 아닌데 그래도 갚아야 할 게 몇 개 있어요.”
언제나 블라드의 머리 한편에는 무언가를 갚아야 할 사람들의 목록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 목록에는 원한에 관련된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정말로 빚졌기에 갚아야 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그 중 가장 위에는 언제나 같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328골드라.”
그리고 지금, 쇼아라를 떠나야 하는 블라드의 손에는 100골드가 훌쩍 넘는 돈이 들려 있었다.
돈이 생긴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자신의 대답을 들어줄 버레이는 이제 없지만 블라드는 항상 생각해왔던 일을 하기로 했다.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는 갚아야 할 때다.
※※※※
“우리는 뭔가 안 맞나봐.”
“그러게요.”
떠들썩한 손님들 속에 주거니 받거니 맥주를 건네는 두 사람.
또다시 근신을 당하고만 그레고리와 아예 추방이라는 징계를 받은 블라드는 임무에서도 제외된 채 하릴없이 서로를 마주 보는 중이었다.
“언제 떠나냐?”
“한 5일 남았나? 그냥 준비되면 빨리 나가게요.”
요제프는 블라드에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줬다.
넉넉한 것 같아 보이지만 평생 살아온 도시를 떠나야 하는 블라드의 입장에서는 미묘하게 촉박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가 계획했던 일은 다 끝나긴 한 거거든.”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어찌 보면 이번 일의 원인 제공자나 다름없는 그레고리는 자신이 제안한 일 때문에 도시를 떠나야 하는 블라드를 위해 나름의 배려를 해주고 싶어 했다.
“조만간 쇼아라로 칸노르 가문의 사람들이 올 거다.”
어쨌거나 검은 곰과 그의 조직은 뒷골목에서 자취를 감췄고 쇼아라에는 칸노르 가문이 파고들만 한 영역이 생겨났다.
“이건 실패할 수 없는 사업이야. 이미 요제프 님과도 어느 정도 조율이 끝난 일이거든.”
“······.”
보르단의 말대로 기사는 봉급으로 돈을 모으는 자들이 아니다.
유력자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장점은 얼마든지 기사들을 반짝이는 금화 앞으로 가져다 놓고는 했다.
“명목상 조금이라도 투자해둬라. 그러면 섭섭지 않게 챙겨놔 주마.”
칸노르 가문의 쇼아라 진출.
다른 상인들이라면 이번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악다구니를 쳐대겠지만 그레고리는 블라드에게만은 문 한켠을 열어주겠다 말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기사는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얼마나요?”
“특별 수당으로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여유가 되는 대로만 넣어둬.”
그레고리의 시선이 맥주잔을 넘어 블라드를 향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뒷골목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블라드와 함께 천천히 뒷골목에 뿌리를 내릴 계획이었다.
“흠.”
말로만 들으면 사기꾼들의 전형적인 수법같이 들렸지만 블라드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름만으로도 신뢰를 증명할 수 있는 바예지드의 기사였다.
“50골드면 되려나요.”
“그 정도면 적당하지.”
턱도 없는 금액이었지만 그 정도면 이름 하나 올릴 정도의 명목은 될 것이다.
그리고 칸노르 가문은 이미 블라드를 후원하는 가문 중 하나였으니 분명 섭섭지 않게 챙겨놔 줄 것이다.
“몸 조심히 다녀오고.”
“저 없는 동안 여기 잘 부탁드려요.”
“그래.”
그레고리는 미안하다 말했고 블라드는 뒷일을 부탁한다 대답했다.
이로써 서로가 해야 할 말은 다 했으니 남은 것은 술잔을 들이켜는 일뿐.
“······.”
그레고리가 맥주잔을 들어 올리는 동안 블라드는 무심히 앞에 놓여 있는 안주를 바라보았다.
빨갛게 익어있는 소시지.
“맛없긴 했어요.”
세상을 보기 전 블라드에게 있어 이 소시지만큼 맛있어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블라드는 이제 검은 곰이 만들어 낸 조악한 소시지 따위로는 만족하지 않기로 했다.
※※※※
“이게 뭐야. 여관비는 필요 없다니까.”
“이제는 여기 있지 못하잖아요. 그리고 돈 안 내고 도망간 라문드 영감님 몫도 있어요.”
블라드는 멋쩍은 농담과 함께 마르셀라에게 50골드를 건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가 받아줄 것 같지 않아서.
“······우리 여관이 이렇게 비싼 값을 받지는 않거든?”
“이건 투자라는 거예요. 나중에 수익금으로 돌려줘요.”
블라드는 그레고리가 한 말을 그대로 마르셀라에게 써 먹어 보았다.
“나는 장미의 미소가 이번 고비만 넘기면 충분히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
마르셀라는 장미의 미소라는 창관을 여관으로 바꾸기 위해 나름 돈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동안 모은 돈이 아무리 많았다고 한들 외팔이 잭의 방해 때문에 날아 가버린 돈이 대다수였고 비록 내색하지는 않았어도 마르셀라는 지금 자금난에 허덕이는 중이었다.
“······고마워. 이번 투자는 후회하지 않을 거야.”
“대신 앞으로 소시지는 무조건 칸노르 가문 걸 써야 해요. 가능하면 홍보도 해야 하고.”
“후후. 그런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이지.”
단순히 어린 마음에 자신을 동정해 주는 것이었다면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블라드는 나름의 사업을 제안하고 있었고 명분상 투자라는 명목으로 그녀에게 금화를 쥐여주고 있었다.
어른과 아이가 아닌 서로 동등한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었으니 마르셀라의 입장에서는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제가 없는 동안 제미나 잘 부탁해요.”
“그건 장담 못 하겠는데.”
미묘한 표정을 짓는 마르셀라를 보며 블라드는 그저 씁쓸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자신이 쇼아라에서 추방당한다는 말을 들은 제미나는 지금도 방구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상실감은 오직 블라드라는 존재만이 채워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어디 가?”“좀 바쁘네요.”
다음 일을 위해 계단을 내려가던 블라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이 쥐여준 금화 주머니를 들고 있는 마르셀라가 있었다.
“고마웠어요.”“응? 뭐가?”
호르헤가 주워왔지만, 그녀가 씻겨주었다.
마르셀라가 머리를 감겨주기 전까지 블라드의 머리는 그저 먼지 가득한 잿빛이었을 뿐이었다.
이제 그녀의 여관에는 질 좋은 칸노르 가문의 고기가 들어올 것이고 당분간은 적자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여유자금도 생겼다.
그래서 블라드는 자신의 머릿속에 적혀 있는 이름 중 마르셀라의 이름을 지워내기로 했다.
“다녀올게요.”
이제 요제프에게 받은 시간은 며칠 남지 않았다.
서둘러 여관을 빠져나온 블라드는 수도원에 있는 무덤가로 가 늙은 대장장이의 비석을 닦아주었다.
추운 날씨에 손이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하기로 했다.
“고마웠어요.”
오랫동안 보지 못할 늙은 대장장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으니까.
그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블라드는 머릿속 목록에서 늙은 대장장이의 이름을 지웠다.
“목숨값 갚은 것뿐이야.”
“그래도 꼭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시청으로 찾아간 블라드는 자신을 대신해 장미의 미소를 지켜준 기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비록 빚진 것을 갚았다 말하고 있었었지만 기사 막심은 자원해서 주교의 병사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자신을 위해 원한을 산 막심에게 고개 숙인 블라드는 자신의 인사를 받아준 그를 보며 목록에서 또다시 이름 하나를 지워냈다.
자신을 대신해 명령문을 읊어주었던 보르단을 위해 그가 좋아하는 과자를 가져다주었다.
자신을 믿고 따라주었던 오타르에게 멋진 도끼 하나를 사주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쥐여주고 고맙다 고개를 숙일 때마다 블라드의 머릿속에 있는 이름들이 하나하나씩 지워져 나갔다.
“······.”
요제프나 자야르, 안드레아 사제와 같이 감히 갚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블라드는 아직 그들에게 무언가를 전해 줄 위치에 서 있지 못했기에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 목록에 적혀 있는 이름 중 가장 오래된 이름 하나만이 남아있었다.
“여기는 왜 오자고 한 거야?”
“빚 좀 갚으려고.”
“뭔 빚?”
절뚝이는 걸음으로 블라드를 따라나선 하벤은 곧 얼어붙은 강 옆으로 기대어 서 있는 커다란 건물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여긴 조선소잖아.”
“그래. 여기 조선소야.”
북부의 혹독한 날씨는 젖줄과도 같은 강을 일 년의 절반 정도는 얼어붙게 만들고는 했지만 그나마 북부에서도 최남단에 있는 도시인 쇼아라는 그 여파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조선소가 그에 대한 증거였다.
“그런데 여긴 왜 왔어?”
“빚 갚는다니까.”
조선소라는 곳은 배를 만드는 곳이기도 하지만 배를 판매하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그 과정에는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하겠지만 기사인 블라드에게는 크게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흐으······. 저거 봐라. 나오급 배다. 강 때문에 갇혔나? 선장이 애 좀 타겠는데.”
“저건 너무 비싸더라고.”
“응?”
블라드의 안내와 함께 조선소로 들어선 하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며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기는 예전부터 꼭 한번 와보고 싶긴 했지.”
“······.”
하벤은 어렸을 때부터 배를 좋아했었다.
언젠가는 배를 살 것이고 그 배로 강을 건너 뒷골목을 벗어날 거라고 쉴 새 없이 이야기했었다.
마치 다짐하듯이, 잊지 않겠다는 듯이 그렇게.
그리고 어린 블라드는 그런 하벤을 보며 별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었다.
“지금도 배 타고 싶어?”“그렇지.”
“쇼아라 멀리로 나가보고 싶은거야?”
“당연하지. 뭐야. 왜 그러는데.”
죽기 전에 반드시 먼 바다로 나가보겠다고 말하던 하벤.
그러나 하벤은 블라드와 제미나를 위해 어두운 뒷골목에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저건 200골드더라고.”
자신을 위해 주저앉은 하벤을 위해 허접한 지팡이를 깎아내던 날이 있었다.
뒷골목 어딘가에서 쪼그리며 앉아 나무를 깎아내던 그 날, 블라드는 결심했다.
반드시 하벤에게 빚을 갚겠노라고.
그래서 자신의 머릿속 가장 높은 곳에 그의 이름을 깊숙이 새겨넣었었다.
“코그(Cog)?”
블라드가 가리킨 곳.
조선소 구석에 박혀 있는 작은 배 하나.
그래도 자신이 범선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가로돛 하나가 올려져 있는 배는 강을 이용하는 상인들이 제일 많이 사용한다는 코그선이었다.
“저건 좀 싸더라고. 그래서 샀어.”
“응?”
지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하벤은 멍청한 소리를 내며 되물었지만 블라드는 그저 손짓으로 조선소의 직원을 불러왔을 뿐이었다.
“이제 네 거야.”
“······.”
블라드는 조선소 직원이 들고 온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서명해. 네 이름으로.”
조선소의 직원이 들고 있는 하얀 종이.
그것은 선박의 소유주를 증명하는 선박증서(船舶證書)였다.
“아니 이게, 이게 지금······.”
하벤은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당황하며 입을 더듬거렸지만, 곧 자신의 머리 위에 덮이는 무언가의 감촉을 느끼고는 그만 더듬거리는 것도 멈춰버리고 말았다.
“오늘부터 너는 캡틴 하벤이야.”
조선소 직원이 들고 온 것은 서명을 기다리는 증서만이 아니었다.
빳빳한 느낌이 드는 삼각형 모양의 모자.
그것은 오직 배를 가진 자들만이 쓸 수 있다는 선장모였다.
절름발이 하벤.
그러나 오늘부터는 그는 뒷골목 추레한 이름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이름을 선물 받았다.
“······캡틴 하벤.”
웃고 있는 블라드를 보는 그의 흔들리는 동공 속에서부터 짙은 물기가 번져오고 있었다.
100골드가 있으면 무엇을 할 것이냐.
이제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블라드는 지금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캡틴 하벤, 캡틴······.”
하얗게 비어있는 서명란에 하벤의 이름이 새겨질 때마다 블라드의 머릿속 목록에서는 그의 이름이 지워져 가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주저앉은 하벤을 위해 울면서 나무를 깎아내던 날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은 하벤이었고 그의 손에는 허접한 나무 지팡이가 돛이 달린 배 한 척이 쥐어져 있었다.
발목이 그어진 하벤은 여전히 절뚝거리며 걸어 다니겠지만 땅이 아닌 바다에서라면 누구보다 당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발이 아닌 돛으로 움직이는 세상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