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96
보리밭의 파수꾼 (1)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
평소보다 일찍 집무실에 들어선 요제프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커튼을 걷어냈다.
커튼을 걷자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정경.
하얀 눈이 내려앉은 도시.
보는 것만으로도 시려오는 쇼아라의 모습에 요제프는 팔짱을 끼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 창밖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가겠군.”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쯤 쇼아라를 나서야 해가 지기 전 다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떠나가는 블라드에게 임무를 주거나 임의로 목적지를 정해줄 수도 있었지만, 요제프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평생을 남의 명령만 받으며 살아온 소년에게 한 번쯤은 자신만의 생각으로 움직이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깃발을 든 기사(Knight banneret)라······. 실로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겠군.”
비록 추방이라는 형태로 쇼아라를 떠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블라드는 오래된 북부의 전통을 재현하게 될 것이다.
오직 스스로의 명예만을 치켜든 채 여행을 떠나는 기사.
아버지의 세대도 아닌 할아버지의 세대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오래된 전통 중 하나였다.
저 멀리서 오늘을 맞이하는 쇼아라의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멀리 있기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저곳에서는 자신만의 깃발을 든 기사 한 명이 밖으로 나서고 있을 것이다.
쇼아라가 품었으며 바예지드가 키워낸 기사.
그의 이름은 쇼아라의 블라드였다.
※※※※
“······안 오네.”
옷깃을 목 끝까지 세운 블라드는 누아르와 함께 성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 상인들도 여행자들도 움직이지 않을 지금 시기에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오직 블라드 한 명뿐이었다.
히이이이힝-
“원래부터 밖에서 살던 놈이 뭐가 춥다고 난리야.”
이미 편하디편한 마구간에 길들여져 버린 누아르는 차가운 바깥으로 나서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투레질을 해대었지만 이제 녀석도 좋은 시기는 다 갔다.
지금은 초심을 찾아 의연한 자세로 눈보라를 맞아야 할 때.
그리고 그 태도는 누아르뿐만 아니라 블라드도 기억해내야 할 만한 자세일 것이다.
“가자.”
자그마한 재촉과 함께 앞으로 나서기 시작하는 검은 말.
안장 뒤에 매달린 자그마한 깃발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조금씩 휘날리기 시작했다.
“······.”
누아르의 위에서 한 걸음씩 밖으로 나서던 블라드는 어쩌면 지금이 떠나기에 알맞은 시기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살아온 도시 쇼아라.
이곳에서 꿈꾸던 목표들이 있었다.
검을 잡겠다는 목표와 기사가 되고 싶다는 꿈.
그러나 이제 이 도시에서 꿈꾸던 것들은 모두 달성하였으니 위를 바라보고 앞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넓은 세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대장! 잠깐만!”
옛 기억을 떠올리던 블라드는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같이 가자고!”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새벽의 거리를 내달려오는 남자.
그는 바예지드의 마구간지기인 고트였다.
“아이고. 이거 겨우 맞췄네.”
“늦었잖아.”
블라드는 자신의 옆에서 혀를 빼물고 있는 고트를 보며 티 나지 않게 미소 지었다.
“이 정도면 늦은 것도 아니지. 아직 쇼아라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잖아?”
고트는 가쁜 숨을 내쉴지언정 대답하는 것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실로 전직 사기꾼다운 태도였다.
“용케 따라올 생각을 했네?”
“아무래도 억울해서 말이지.”
고트는 가슴을 피고는 당당한 목소리로 블라드에게 말했다.
“내가 예전부터 대장한테 투자한 게 있는데 여기서 그냥 날려버릴 수는 없는 거 아냐.”
투자에는 언제나 위기가 따른다.
적은 판돈을 가진 고트는 인생을 역전할 만한 큰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고트는 자신과 같은 밑바닥 인생들은 인생을 걸만한 위험한 기회조차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들어보니까 하벤인가 하는 친구한테는 배도 한 척 사줬다며? 나도 나중에 그 정도는 챙겨주나?”
“너 하는 거 봐서.”
평소와 같은 부루퉁한 대답일 뿐이었지만 고트는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블라드라는 사람이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디로 갈 거야.”
목적지를 묻는 고트의 질문에 블라드는 크게 숨을 내쉬고는 저 앞에 있는 하얀 벌판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정한 것은 아닌데.”
지금의 블라드는 두 개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나는 검과 함께 신의를 바치겠다는 요제프의 계약.
그리고 또 하나는 이름을 찾아주겠다는 목소리와의 계약.
“일단은 동쪽으로 가볼 생각이야.”
이제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던 세계가 있었다.
넓은 밀밭과 함께 조용히 불어오던 바람에 따라 흔들리던 단풍나무 한 그루.
그리고 목소리는 그 나무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었다.
“거기서 찾아야 할 게 있어.”
블라드는 대답과 함께 검집을 치켜들고는 손잡이 끝에 박혀있는 알리시아의 호박석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목소리의 잔재밖에 남지 않아 오직 희미한 그림자만 보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목소리의 마지막 흔적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블라드 한 명뿐이었다.
“이제 가자.”
의무를 짊어진 기사는 신의를 바치겠노라 맹세한 대상을 뒤로 둔 채 또 다른 계약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한 명의 사기꾼과 한 명의 기사가 쇼아라를 떠나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배웅하는 것은 고귀한 남자가 들고 있는 와인잔과 붉은 머리의 소녀가 이별의 슬픔으로 적시는 베갯잇이었다.
※※※※
도브레치티.
중부에서도 북쪽에 속해 있는 이곳은 달마티아 가문이 지배하는 땅으로서 추운 기후를 이용한 보리농사와 임업(林業)을 주로 하는 영지였다.
“또또또! 또 이 사달이 났단 말이냐!”
그리고 보리농사와 임업을 주로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보리 종자만 심어놓으면 기다렸다는 듯 헤집는 놈들은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냔 말이다!”
딱히 이렇다 할 만한 산업이 없는 가난한 영지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곳 도브레치티는 그 사정에 알맞게 이름을 내세울 만한 도시 하나 없는 빈궁한 영지이기도 했다.
“병사들을 세워 밤새 경비를 시켜놓았는데도 어느새 아침만 되면······.”
“내 앞에서 변명 따위 지껄이지 마라!”
실패했다는 말을 길게 늘여 말하는 기사단장.
그 모습을 보던 달마티아 남작은 열이 올라오는지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올라오는 분노를 삭일 뿐이었다.
“······너희도 알 거 아니냐. 지금 시기에 파종조차 못 한다면 우리는 다가올 봄에 다 굶어 죽고 말 거라는 걸.”
“그렇습니다. 영주님.”
“그걸 아는 놈들이 그래!”
기름지지 못한 땅과 추운 기후.
기댈 곳이라고는 빽빽이 들어서 있는 나무들과 보리농사가 전부인 도브레치티로서는 지금의 변고를 그저 무시하고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병사들만으로는······.”
“병력이 모자라면 영지민들한테 쇠고랑이라도 들려!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그게 대수냐!”
퉁퉁한 볼을 부들부들 떨던 달마티아 남작은 주변에 집히는 것들을 마구 내던지며 보고를 하러 온 기사단장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어느 영주라도 사건 앞에서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기사를 본다면 그처럼 화를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고 머리야······.”
하지만 어쩌겠는가.
달마티아 가문은 이런 기사밖에 모으지 못하는 가난한 가문이었으니.
“있는 병력 없는 병력 다 끌어모아서 보리밭을 지켜라! 분명 숲에 있는 몬스터들이 하는 짓일 거 아니냐!”
“알겠습니다. 영주님.”
겨울은 인간들만 굶주리는 계절이 아니다.
나무에 열리는 열매도, 씹을만한 풀도 사라지는 겨울은 몬스터들 또한 먹을 것이 없어지는 계절이었다.
굳이 밭에 뿌린 종자들만 골라 먹는 이유까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이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거 용병이라도 고용해야 하나······.”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서 달마티아 남작은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답답한 마음에 창가로 다가선 달마티아 남작의 눈에 보이는 광경이 있었다.
영지를 빽빽이 둘러싸고 있는 도브레치티의 숲.
자신이 영주가 된 후 개간을 위해 많이 넓혀놓은 곳이긴 했으나 달마티아 가문이 세워지기 전부터 자리 잡고 있던 숲은 한낮이었음에도 여전히 어둠을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
“······후추, 소금, 육포, 이건 뭐야?”
“순례자의 증서.”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어두운 숲.
그 숲에서 쪼그려 앉아 열심히 나뭇가지를 비비대던 블라드는 고트가 꺼내든 종이를 보며 심드렁히 대답했다.
“아무 교회나 가서 등록만 하면 돼. 안드레아 사제님이 써주신 거야.”
“왜 쇼아라에서 안 하고?”
고트의 물음에 나뭇가지를 비비던 블라드의 손이 뚝 하니 멈췄다.
“아, 아아. 그랬지. 미안.”
쇼아라의 교회에서 이 증서를 제출했다면 굳이 여기까지 들고 올 필요가 없었겠지만, 문제는 블라드가 교회와 감히 말을 섞을 수 없을 정도로 척을 지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그래. 알았어. 그래. 이거는 내가 알겠어.”
블라드의 매서운 눈빛을 피해 다시금 짐가방을 뒤지던 고트는 여전히 자신이 찾던 물건이 보이지 않자 그만 이를 악물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귀하고 비싼 것들은 빠지지 않고 챙겨왔으면서 어떻게 부싯돌 하나를 안 가져올 수 있지?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되네.”
“······.”
분노가 담긴 고트의 말에 잠시 멈춰두고 있던 블라드의 두 손이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 밤에는 이래저래 바빴어.”
당연히 바빴겠지.
원래 잘나가는 놈들은 밤에 더 바쁜 법이니까.
“그러는 너도 허접한 부싯돌밖에 안 챙겨왔잖아.”
“나는 적어도 챙겨는 왔잖아!”
고트는 역정을 내며 블라드 주위에 있는 잔해들을 가리켰다.
산산이 부서진 채 굴러다니는 부싯돌의 잔해.
그것들 모두 다 고트가 가져온 것들이었다.
“힘도 좋지. 그걸 다 부숴 먹으셨네.”
블라드라는 사람이 불 하나 붙이지 못할 정도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험하게 살아왔기에 이런 일에는 더욱 익숙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재수도 더럽게 없지. 그게 다 불량이냐.”
그러나 결과적으로 고트가 가져온 부싯돌들은 다 부숴 먹고 말았고 정작 자신은 야영에 필수라 할 수 있는 부싯돌 하나 챙겨오지 못했으니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누가 보아도 잘못이 명확했으니 이런 경우에는 조용히 앉아 불씨를 지펴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이씨.”
“왜 멈춰? 불 안 피울 거야?”
갑자기 비비던 나뭇가지를 내던지는 블라드를 보며 고트가 도끼눈을 떴지만 이미 블라드는 나뭇가지 대신 검집을 집어 들었을 뿐이었다.
“갑자기 왜, 왜 그러는데.”
아무리 인연이 깊다고 한들 블라드는 기사였다.
검을 잡고 있는 블라드의 기세는 아까 나뭇가지를 비비던 때와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살살 떨리고 있는 고트의 목소리가 그 증거였다.
“내가 비빌게. 대장.”
“됐어.”
거칠게 눈 바닥에 침을 내뱉은 블라드는 조용히 검집을 들고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장 내가 미안······.”
“불씨 빌려올게.”
블라드의 갑작스러운 말에 고트는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겨울의 숲.
그 숲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내들의 낄낄거림이 들려왔다.
“어이구 도련님께서 귀가 밝으신 모양이네.”
“알아챘으면 냉큼 도망치셨어야지. 뭣 하러 뻗대고 있었는가?”
얼추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사내들.
겨울의 여행길은 추위와 몬스터만 조심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곱상하게 생긴 것이 아무 데나 팔아도 제값은 받겠어.”
“어디서 나오신 도련님이신가? 부모를 말하면 우리가 적당한 값에 넘겨줄 수도 있겠는데.”
달랑 두 명만이 움직이는 일행.
그중 하나는 이제야 갓 솜털을 벗은 것 같은 애송이었으니 산적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이만한 사냥감도 없을 것이다.
“형씨들. 불 좀 빌립시다.”
“응?”
그러나 산적을 맞이하고 있는 금발의 청년은 주눅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잘 됐다는 듯 환히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 미친놈이 지금 뭐라······.”
황당한 표정과 함께 흉험한 기세로 무기를 치켜든 산적들이었으나 블라드의 망토 속에 비치는 물건을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반짝이는 판금 갑옷.
일개 애송이가 입고 다니기에는 버거운 물건이 그곳에 있었다.
“불씨 좀 빌리고. 그리고.”
물론 잘 사는 집의 도련님이라면 입고 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저 철없는 도련님이라고 하기에는 푸른 눈동자에서부터 퍼져 나오기 시작하는 존재감이 심상치 않았다.
“가진 거 다 내놔. 새끼들아.”
블라드의 얼굴에 사나운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예전의 블라드는 굶주려 있었고 항상 갈망하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나선 금발의 청년은 소년이었을 때만큼이나 굶주려 있었다.
“모가지는 내가 따줄 테니까.”
쇼아라를 떠나며 결심한 것 하나.
그것은 초심을 찾기로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