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97
보리밭의 파수꾼 (2)
요제프는 언제나 받은 것은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것이 은혜든, 원한이든 상관없이.
“살려······살려주십시오. 기사님.”
받은 것이 있다면 돌려줘야 한다.
나를 해하고자 했던 사람을 고이 돌려보낼 줄 정도로 블라드는 무르게 살아오지 않았다.
“너희도 남들이 살려달라고 하면 살려줬었나?”
때마침 비치는 달빛이 살려달라 비는 산적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목덜미에 매달려 있는 누군가의 손가락들이 너무나 가련해 보였다.
“그렇습니다! 살려줬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래?”
이 세상은 자격 없는 자들이 너무 많다.
자격이 없음에도 남들보다 많이 가져가고, 더 높게 일어서고.
그리고 자신들보다 약한 세계를 너무 쉽게 뭉개고 있다.
“지랄하지 마.”
그리고 자격 없는 자들이 가지는 공통점 하나.
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것.
“목에 단 손가락뼈들이나 치우고 말해. 이 쓰레기 새끼들아.”
고트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블라드의 감은 왼쪽 눈에서부터 시작되어 검 끝까지 흐르는 달빛을.
다른 이가 부른 달빛을 보며 감탄하던 소년은 이제 이곳에 없다.
지금 이곳에 있는 자는 스스로의 세계를 갖춘 사람이었다.
블라드가 불러낸 매끈한 달빛이 새빨간 핏물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자격 있는 자가 휘두르는 검격 아래서 거짓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감히 정당한 기사를 모욕한 값.
그것은 목숨으로 갚아도 모자란 것이었다.
※※※※
한적한 시골 영지인 도브레치티.
오가는 상인들조차 모두 낯익은 사람들일 뿐인 한적한 마을이었지만 지금 목책 앞에 서 있는 경비병들은 빳빳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요근래 영지를 흉흉하게 도는 소문들이 그들을 날카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저기 뭐지?”
“음?”
그런 그들의 눈에 보이는 수상한 일행이 있었다.
저 멀리 눈 덮인 언덕에서부터 말을 타고 오는 두 명의 사내들.
“저건 뭐야?”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끌려오는 사내들까지.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장화조차 신지 못한 채 줄에 묶여 끌려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평범한 일행은 아니었다.
“정지! 앞에 있는 자는 정지하라!”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낯선 사내들을 향해 미늘창을 앞으로 겨눈 경비병들.
그러나 가장 앞서 있는 남자는 경비병들의 날 선 제지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채 천천히 다가올 뿐이었다.
“누구······.”
“나는 바예지드의 기사. 블라드다.”
새까만 말 위에 타고 있는 금발의 청년.
화려한 머리 색뿐만 아니라 입고 있는 옷들 모두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청년은 누가 보아도 어딘가의 귀족 같아 보이게 하는 기품을 보이고 있었다.
“이 근방을 어지럽히는 산적들을 잡아 왔다.”
“산적, 산적 말씀이십니까?”
아직 제대로 된 신분증도 확인하지 못했지만, 경비병은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로 블라드를 대하고 말았다.
단순히 풍겨오는 기세가 귀족 같아 보여서만은 아니었다.
청년의 뒤에 밧줄로 묶여 따라온 사내들.
그들은 하나같이 바짝 얼어있는 누군가의 머리통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블라드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검집을 치켜들어 경비병에게 보여주었다.
블라드가 내민 검 손잡이 중앙에는 거대한 성벽 위에 휘날리는 깃발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북부의 명문 바예지드를 가리키는 문장이었다.
※※※※
“환영합니다! 도브레치티에 오신 것을!”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 들어갔던 경비병이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블라드를 공손히 마을 안으로 들였다.
블라드가 평범한 상인이나 여행자가 아닌 무장한 기사였으니 본인들의 결정만으로는 쉽게 진입을 허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주님께서 기사님을 직접 만나보고 싶어 하십니다!”
“······영주님이?”
블라드는 영주가 갑작스레 자신을 보고자 한다는 말에 조금은 당황하고 말았다.
본래는 책임자를 만나 산적들을 넘기고 적당한 사례금 정도나 받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현상금이라도 걸려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좋아.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경비병은 블라드의 대답에 재빨리 누아르의 고삐를 잡으려고 했지만 성질 나쁜 말은 마치 늑대처럼 하얀 이빨을 들이밀며 으르렁댈 뿐이었다.
“······고삐는 잡지 말고.”
“네, 넵!”
쇼아라에서의 생활 덕분에 누아르는 더이상 사람들을 꺼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지랄 같은 성격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니었다.
블라드를 제외한다면 그나마 안면이 있는 고트 정도나 누아르의 고삐를 잡고 안장을 얹을 수 있을 것이다.
“영주관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안내를 하겠노라 말하며 앞장선 경비병을 따라 말을 타고 걷는 블라드와 고트.
그리고 그들의 뒤를 터덜터덜 끌려오는 산적들까지.
굉장히 특색 있는 조합을 지닌 일행이었으나 정작 이들을 보는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는 예상과는 좀 달랐다.
“대장. 여기 마을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
“······그러게.”
이곳이 쇼아라였다면 오랜만에 보는 색다른 구경거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브레치티의 마을 주민들은 마치 역병에 걸린 사람들을 보듯 재빨리 문을 걸어 잠그고 아이들을 뒤로 숨길 뿐이었다.
전직 소매치기와 사기꾼.
분위기를 살피는 것에 능숙한 두 명은 도브레치티의 분위기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 왔습니다.”
“음?”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짐작해보려 했던 블라드였으나 그것 또한 녹록지 않았다.
도브레치티는 블라드가 생각에 빠질 시간을 주지 않을 정도로 작은 곳이었으니까.
“이 앞이 달마티아 영주님께서 기거하시는 영주관입니다.”
“······,”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경비병이 가리키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3층으로 세워진 목재 건물.
나쁘지는 않아 보였으나 영주가 있다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건물이었다.
‘너무 작은데?’
비록 뒷골목에서 생활하기는 했으나 블라드는 엄연히 도시민 출신이었다.
먼발치에서나마 높은 성문과 교회, 그리고 영주들이 사는 으리으리한 저택을 보아왔던 블라드의 입장에서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작은 건물에 귀족이 살고 있다니 하니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사님.”
“그래. 안내해다오.”
귀족이 가진 권위는 가문이 가진 역사나 높은 작위가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달마티아 남작은 권위를 갖추는 데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블라드가 생각한 달마티아 가문에 대한 첫인상은 산적들에 대한 사례금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뿐이었으니까.
“오오. 우리 영지에 스스로를 증명한 기사가 찾아오다니!”
자신만의 깃발을 들고 온 기사를 알아본 달마티아 남작은 직접 영주관 바깥으로 나와 블라드를 맞이했다.
일개 방랑하는 기사를 맞이하는 것 치고는 과한 환대였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아닐세. 근방에서 골치를 썩이던 놈들까지 잡아 왔는데 주인 된 입장에서 자네를 환영하지 않은 이유가 있겠나!”
달마티아 남작은 자신에게 깍듯한 자세로 인사하는 블라드를 보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완벽히 체득하지는 못했지만, 옥사나 백작부인이 때려 넣다시피 한 블라드의 예의는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지!”
“네.”
달마티아 남작을 따라 응접실로 들어선 블라드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
“······.”
영주관까지 걸어오면서 봤던 마을의 풍경.
그리고 도브레치티에서 가장 화려해야 할 응접실까지.
블라드와 고트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일이 글렀음을 깨닫고 있었다.
이 영지는 빈털터리였다.
“그래. 잡아 온 산적들이 모두 9명이라던데?”
“목만 들려온 녀석들까지 합치면 그럴 겁니다.”
블라드는 자신에게 위협과 모욕을 준 산적들에게 정당한 값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받지 못한 나머지 값은 눈앞에 있는 영주가 지불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주변 치안을 위협하는 산적들을 잡았으니 주인 된 자로서 그만한 보상을 치러줘야 할 테니까.
“흠흠. 쇼아라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이 험했을 테니 피곤하겠구만. 내 점심을 미리 준비시켜놓았네.”
그러나 달마티아 남작은 보상에 관한 이야기는 미룬 채 살살 블라드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가능하다면 블라드를 오래 붙잡아 두고 싶었으니까.
‘혼자서 15명이라니!’
생포한 산적은 다섯, 죽인 자는 넷.
그리고 혼자인 몸이기에 미처 잡아내지 못한 자가 여섯 정도라 했다.
증거를 직접 끌고 왔으니 의심할 여지도 없다.
자신이 데리고 있는 기사 중 그 누구도 이만한 성과를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 깃발을 들고 온 기사니 자신을 증명할 일을 찾고 있겠군.”
“그렇습니다. 남작님.”
블라드는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직접 자신을 맞이하러 나온 영주에게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동안 귀족들에게 저질러왔던 실수들이 블라드에게 지금의 판단력을 갖추게 했다.
“마침 그런 자네에게 부탁을 하고 싶은 일이 있네. 명예를 좇는 진짜배기 기사인 자네이니 하는 말일세.”
처음에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블라드는 명예를 증명하기보다는 목소리의 흔적을 찾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으니까.
“요근래, 우리 영지에서 괴이한 일이 발생하고 있네.”
“무슨 일입니까?”
그러나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블라드에게 달마티아 남작은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지금 시기는 한참 보리를 파종해야 하는 시기지. 그래서 우리 영지도 그동안 보관해왔던 종자들을 밭에 뿌리고 있는데 말일세.”
달마티아 남작은 통통한 볼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갈한 차로 입을 축이고 나서는 입을 열었다.
“밭에 종자들을 뿌리기만 하면 사라지고 있어.”
“······씨앗들이 사라진다는 겁니까?”
“그래. 병사들을 세워놓고 밤새 감시해 봐도 그러네.”
언뜻 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병사들을 세워놓았는데도 밭에 뿌려놓은 보리 씨앗들이 사라진다니.
쥐 같은 동물들이나 몬스터들의 소행이라면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마을의 몇몇 노인네들은 숲에 사는 정령들의 짓이라고 말하기는 하네만······.”
“정령들 말씀이십니까?”
달마티아 남작의 말속에서 블라드의 관심을 잡아끄는 단어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 이 숲에는 정령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오고 있거든. 물론 나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그런 것들을 믿지는 않지만 말이지.”
제국과 세워짐과 함께 새롭게 만들어진 질서들은 정령들과 같은 오래된 옛것들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특히 교회 같은 경우는 신의 이름 아래 서 있지 않은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있었으니 지금에 와서 정령이라는 존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살아왔던 노인들 정도일 것이다.
‘정령, 정령······.’
그러나 블라드는 이 세상에 정령이라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보았고 느꼈으며 가호까지 받은 사람이었으니까.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일에 정령이라는 단어까지 흘러나오니 블라드로서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자네가 한 번 우리 영지의 보리밭을 지켜봐 줄 수는 없겠나? 자네같이 훌륭한 기사의 눈이라면 분명 다른 게 보일지도 모르니.”
별것 아닌 임무였지만 그 일을 부탁하는 달마티아 영주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로서는 이번 파종에 실패한다면 밀이 추수될 내년 가을까지 버틸 수 없을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가문의 존속까지도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남작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오오. 정말 고맙네! 아직 이 시대에도 기사도를 따르는 진정한 기사가 남아있을 줄이야!”
그저 노인들이 내뱉는 의미 없는 말일 수도 있겠으나 블라드는 승낙하기로 했다.
정령에 대한 단서를 찾고 있던 블라드에게는 지금 같은 단서도 감지덕지한 상황이었으니까.
게다가 보리밭만 지키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으니 크게 발목 잡힐 일도 없을 거라는 판단도 있었다.
“있는 동안 편하게 지내도록 하게! 산적들에 대한 보상도 내 최대한 신경을 써드리지!”
“감사합니다. 남작님.”
자신의 일과 관련이 있고 임무마저 간단한 것이라면 달마티아 남작에게 좋은 인상을 쌓아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기사에게 있어 명예라는 가치는 많이 챙겨둘수록 좋은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장. 우리 보상금은 어떻게 된 거야?”
이야기를 마치고 남작의 응접실에서 나온 블라드는 자그맣지만 다급하게 외치는 고트의 목소리를 들었다.
“돈을 받아야 할 거 아냐. 돈을! 누아르 그놈이 요즘 삶은 여물만 처먹는단 말이야. 여물값이며 장작값이며······”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뭐?”
큰일과 작은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요제프가 검도 쓰지 못하는 반쪽짜리 기사인 보르단을 항상 데리고 다닌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일은 이제 네가 알아서 해. 그러라고 데리고 나온 거니까.”
“오······.”
보르단과 고트.
협잡꾼과 사기꾼.
산적들에 대한 협상권을 넘겨받은 고트가 눈을 반짝이며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
“산딸기, 산딸기가 어디 있지?”
이제야 막 열 살은 되었을까.
발그레한 볼에 바구니 하나를 들고 온 소녀가 숲 언저리를 향해 걷고 있었다.
궁색한 사정을 보여주듯 옷차림은 초라했으나 반듯하게 땋아 올린 머리는 이 아이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기 있다.”
저 앞, 하얗게 눈이 덮인 넝쿨 위에 본연의 색을 내미는 작은 열매들이 보였다.
겨울 산딸기.
지금처럼 궁핍한 계절에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열매 중 하나였다.
산딸기의 선명한 색깔에 이끌려 넝쿨로 다가간 소녀.
하나 정도는 입에 집어넣을 만도 했지만, 집에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며 서둘러 산딸기들을 바구니로 집어넣던 소녀에게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크오오아아와-
“······?”
저 먼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것 같은 괴이한 소리.
마치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소리에 소녀는 산딸기를 따던 손을 멈추고 숲속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숲의 어둠은 살아있다.
도브레치티의 숲은 오래된 만큼 그 안에 수많은 전설과 기담들을 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소녀가 숲을 바라본 순간.
“꺄아아악!”
숲 또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어린 소녀가 있던 자리.
그곳에는 뒹굴고 있는 바구니와 어지러이 흩어진 산딸기들.
그리고 소녀를 집어삼킨 구덩이 하나가 어두운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