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98
보리밭의 파수꾼 (3)
어두운 밤, 블라드는 병사들과 함께 야트막한 언덕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꼴이 좀 우습기는 했지만, 저 앞에 있는 보리밭에 누가 오가는지를 보려면 지금처럼 잠복하는 것이 최선이었으니까.
“이번에 실종되었다는 아이가 사실 이곳 근처에서 사라졌는데 말이지요”
“······.”
잠복의 기본은 은밀함.
이곳에 있는 듯 없는 듯 바짝 숨어있는 것이 상식이겠으나 블라드의 옆에서 계속 조잘거리는 기사단장의 머릿속에는 그러한 개념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이가 사라진 곳 바로 옆에 엄청 깊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고 하더군요.”
왜 이렇게 친한 척하며 옆에 달라붙어 있는지를 안다.
싼 맛에 부릴 수 있는 기사이니 최대한 써먹어 보고 싶겠지.
아마 달마티아 남작은 자신에게 오늘 아침에 실종되었다던 아이의 일까지 떠맡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럴 수는 없지.’
아이가 실종된 일은 안타깝지만 그렇다 해서 도브레치티의 모든 일을 떠맡을 수는 없다.
이번 보리밭을 지키는 임무도 엄연히 정령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받아들인 것이었으니까.
이번 보리밭을 지키는 파수꾼의 임무도 엄연히 정령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받아들인 것뿐이었다.
“고 계집아이가 참 되 바른 아이였는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도 어미가 영주관에 찾아와 울고불고······.”
“잠깐.”
기사단장은 블라드가 다급하게 내미는 손에 그만 입이 틀어막히고 말았다.
블라드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입안 가득 들어오는 흙덩이 때문에 단장의 얼굴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고 있었다.
“안 들립니까?”
“퉤, 퉷. 그게 무슨······.”
어둠 속에서 블라드의 귀가 기민하게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밀반입을 하기 위해 훈련되었던 청각이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이런.”
방금까지만 해도 내뱉는 숨소리조차 숨기려 들던 블라드였으나 지금은 마치 늑대가 사냥감을 향해 달려가듯 쏜살같이 언덕을 뛰쳐 내려가고 있었다.
“따라, 따라가라! 블라드 경을 따라가!”
블라드의 갑작스러운 돌격에 같이 잠복하고 있던 병사들이 허둥지둥하며 뒤를 따랐으나 다들 어두운 언덕에서 부딪히고 넘어지며 데굴데굴 굴러다닐 뿐이었다.
오히려 달빛 하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랜 몸놀림을 보이는 블라드가 기이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허억, 헉. 블라드 경. 왜 갑자기.”
그러나 겨우겨우 언덕을 내려간 병사들이 본 광경은 허탈한 표정으로 보리밭을 내려다보고 있는 블라드의 모습뿐이었다.
“털렸습니다.”
“네?”
블라드의 말에 서둘러 횃불을 밝혀 본 보리밭에는 과연 낮에 뿌려놓았다던 종자들이 감쪽같이 증발한 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 이게 어찌.”
달마티아의 기사단장은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을 보며 당황하고 말았다.
아무리 어둡다 한들 분명 자신들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삽 가져왔나?”
“네. 여기.”
단장과 병사들 모두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지만 블라드만큼은 옆에 서 있는 병사에게 삽을 건네받고는 보리밭을 파내기 시작했다.
일은 막지 못했으나 단서라도 찾기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봐야만 했으니까.
‘분명히 들렸는데.’
분명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었다.
그러나 지금 근처에는 어떠한 발자국도 남아있지 않았고 언덕 위에서 날카롭게 감각을 세우고 있던 자신의 시야에서도 움직였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지 않을까.
“······단장님. 아까 말한 아이가 실종된 곳이 여기서 얼마나 멉니까?”
“얼마 안 되지요. 저 언덕만 올라가면 금방입니다.”
마침내 삽질을 마친 블라드.
자신이 파낸 구멍을 뚫어지듯 내려다보고 있는 블라드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런데 그곳은 왜······.”
“횃불.”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병사에게 횃불을 받아든 블라드는 자신이 파놓은 곳을 비춰보았다.
“이게 무슨······.”
“허어.”
마침내 마주 본 보리밭의 저 아래.
단장과 병사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광경을 보며 놀람을 금하지 못했다.
횃불을 들어 마주한 그곳에는 블라드가 파내지 않았음에도 이미 뚫려있는 깊은 구덩이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아이가 실종된 장소에 구덩이가 뚫려있었다고 했었습니까?”
보리밭 아래에 깊이 파인 구덩이 하나.
비록 크기는 작았으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구덩이는 횃불의 빛으로도 그 밑을 살펴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번 가봐야겠군요. 그곳에.”
도저히 사람이 파낸 것으로 보이지 않는 구덩이를 보며 감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도브레치티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으니까.
어두운 밤, 홀로 밝혀 있는 횃불 아래 서 있던 블라드는 새까만 구덩이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왼쪽 눈을 감고 있었다.
※※※※
짐승이나 몬스터가 한 짓이라기에는 너무 기이하다.
숲속에 있는 배고픈 것들이 내려왔다면 굳이 바로 앞에 있는 민가와 가축들을 내버려 두고 씨앗만을 파내갈 필요가 있을까.
그것도 번거롭게 구덩이를 파내가면서 말이다.
“그래서 지금 블라드 경은 무엇을 하고 있다 하던가?”
어젯밤 블라드와 같이 보리밭을 지키던 기사단장은 머리를 조아리며 달마티아 남작에게 보고했다.
영지에 있는 기사는 단 두 명뿐이었으니 단장이자 기사이며 조언자인 그는 이곳저곳에 얼굴을 비쳐야만 했다.
“저와 함께 아이가 실종된 장소에 다녀오고는······지금은 마을의 노인들을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노인들을? 도대체 왜?”
비록 부탁한 일이기는 했지만, 너무 들쑤시고 다니는 것은 아닌가.
그래도 이제 어찌할 수 없는 것은 블라드라는 기사의 뒤에는 바예지드라는 거대한 뒷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그의 수사권을 제한이라도 했다가는 큰 모욕을 주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나중에 지금보다 더 곤란한 일이 발생할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노인들에게 예전 일들을 물어보려 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 일들을?”
달마티아 남작은 단장에게 들려오는 말을 듣고는 조금은 언짢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중부 외각에 있는 산골 영지.
교회의 영향권 밖에 있는 이곳에는 아직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옛 전통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노인네들이 별 이상한 말을 하지는 않겠지?”
“나이가 든 만큼 현명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들도 낯선 기사 앞에서 교회가 꼬투리 잡을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
단장의 대답에 달마티아 남작은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어느 몬스터 하나 잡으면 될 일이라 생각했건만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옆에 사람을 붙여라. 괜히 이상한 일까지 캐묻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그래도 블라드라는 존재가 이 일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사람임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기사단장보다 그의 검이 더 날카로울 것은 분명했으니까.
※※※※
“어르신들. 실종된 소녀가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여러분이 주시는 단서 하나가 그 아이를 살릴 수도 있습니다!”
노인은 현명하나 그렇다고 모든 일에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바로 앞에서 사기꾼이 주절대고 있다면 말이다.
“지금도 어느 구덩이에 박혀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모시는 기사님은 여러분을 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이 일을 위해서 열정을 불태우시는 것뿐!”
모아놓은 노인들 앞에서 고트가 쉴 새 없이 혀를 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블라드는 마치 약장수가 약을 파는 모습 같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정말 뭔가 짚이시는 일들이 없습니까? 이 모두가······.”
“······있긴 있었지.”
블라드에 대한 신뢰, 실종된 아이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위협까지.
“아이고 어르신. 드디어.”
협박과 회유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사기꾼의 혀끝에 드디어 노인 한 명이 홀리기 시작했다.
“보리가 없어지는 일은 예전부터 있긴 했지.”
“우리가 어렸을 때는 제사를 지내고는 했는데.”
“교회가 와서는 그거 하지 말라고 하지 뭐야.”
사기꾼의 현혹에 한 명이 넘어가자마자 여기저기서 증언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노인들도 지금의 사태에 나름 답답함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사라진 적은 없었지.”
“늑대에 물려간 적은 있었어도 구덩이에 빨려 들어간 적은 없었지. 암 그럼”
노인들의 말을 듣던 달마티아의 기사가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블라드가 내보이는 미소는 짙고 의미심장했으니까.
“제사는 뭐에 대한 제사입니까?”
“······.”
갑자기 들려오는 질문에 고개를 돌린 노인들은 푸르게 빛나는 블라드의 눈을 보며 다시금 입을 닫기 시작했다.
“무슨 제사예요? 어르신들. 이거 말 안 해주시면 애 못 구해요.”
“땅 귀신. 숲에는 땅 귀신이 있어.”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니고 제사만 지내주면 땅도 비옥하게 해주는 그런 녀석인데.”
“그런데 요즘에는 땅을 개간한다고 숲을 불태워서리.”
고트는 노인들의 말을 들으며 뒤에 서 있는 블라드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매서운 눈초리에 반짝이는 갑옷까지 입은 블라드로서는 도저히 끌어낼 수 없는 반응이었다.
“땅 귀신이 뭔지 알아 와봐. 밖에 있을 테니까.”
“알았어.”
블라드는 자신이 방해밖에 안된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조용히 고트에게 속삭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역시 사람은 적재적소에 써야 하는 법이었고 고트는 마구간지기보다는 사기꾼에 더 알맞은 인재였다.
“블라드 경. 제사라는 게 이상한 것이 아니고.”
“저도 압니다.”
기사의 변명에 방금까지만 해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던 블라드의 얼굴에 어느새 기품있는 미소가 서리기 시작했다.
옥사나 백작부인이 여자들 앞에서는 이렇게 지으라 가르쳤던 미소였다.
“오랫동안 살아오신 만큼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규율들도 있는 법이지요. 이해합니다.”
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지내는 제사는 우상 숭배나 다름없었다.
비록 도브레치티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오래된 존재들에 대한 대우가 남아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교회가 금지하는 행위였다.
만약 들통이 나게 된다면 큰 경을 칠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지금 기사가 쩔쩔매고 있는 것이었다.
“오직 실종된 아이와 보리 도둑을 찾는 데에만 신경 쓰겠다고 신께 맹세하겠습니다.”
그러나 블라드는 그 일을 모른 척 넘어 가주겠다고 말하고 있었으니 달마티아의 기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아. 감사합니다. 블라드 경.”
안에서는 사기꾼이 밖에서는 소매치기가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이 예전과는 다르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도브레치티에서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깃발과 함께 하는 블라드와 고트는 더는 범죄자가 아닌 기사와 종자였으니까.
※※※※
“일종의 정령같은 느낌인데. 예전에는 그들에 대해 제사를 지냈었다고 하더라고.”
“으음. 좋아.”
아직 옛 관습이 남아있는 촌구석이어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도브레치티에는 정령과 관련된 풍습이 남아있었으니까.
“지금은 영주가 밭을 늘려보겠다고 숲을 불태우고 개간했다고 하더라고. 안 그래도 제사 지내던 곳이 그때 대장이 땅을 팠던 보리밭이었대. 소름 돋지 않아?”
고트는 자신의 한 말임에도 닭살이 돋는다는 듯 양손으로 어깨를 감싸 쥐었다.
고트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을씨년스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제사를 지내고 공물을 바치다니.
그러나 정작 듣고 있는 블라드의 입장에서는 마치 마른 사막에서 물을 찾은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땅 귀신은 뭐야.”
“땅 귀신은 이제 농사에 관련된 이야기인데.”
도브레치티에서 예전부터 모시던 존재는 땅과 관련된 존재였다.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영지민들의 입장에서는 땅과 관련된 정령만큼 의지할 대상이 없었으리라.
“제사를 지내면 땅이 비옥해지고 그랬다네. 농사를 지으려면 땅을 깊게 파야 하거든. 땅 귀신이 그런 걸 해줬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말이 왜 안 되나.
나무에 사는 뱀도 있는데.
심지어 그 뱀은 날씨를 따뜻하게 해주는 능력까지 가진 녀석이었다.
추운 북부에서 레몬까지 자라게 해주는 하얀 뱀과 비교한다면 땅 좀 비옥하게 해주는 것쯤은 간단한 일일 것이다.
“······어쨌든 보리를 좋아하고 땅속에서 사는 녀석인 것 같은데.”
블라드는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이 오고 있었다.
“어두운 곳도 좋아하는 것 같고.”
보리들은 언제나 밤에 사라지고는 했었다.
땅속에 사는 녀석들이라면 당연히 햇빛보다는 어두운 곳을 좋아할 것이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추운 날씨였으니 실종된 소녀까지 찾기 위해서는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가서 보리 좀 얻어와.”
“보리?”
요제프는 언제나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을 좋아했다.
판을 짜고 예측하고 그렇게 결과를 만들어내는 남자였다.
“그래. 보리.”
아직 정확한 정체는 몰랐으나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그렇다면 나도 조금은 예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짙은 눈그늘의 남자를 보고 배워온 것이 있었으니까.
밤이 오고 있었다.
※※※※
새까만 밤.
블라드와 고트.
푸르르륵-
그리고 누아르만 있는 어두운 산길.
“대장 이걸로 되겠어?”
고트는 의문스럽다는 얼굴로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밤새 가져온 보리들을 산길 여기저기에 흩뿌려놓았지만 이것만으로 보리 도둑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런데 굳이 바위 위에다가 놓으라는 이유가 뭐야.”
“쉿.”
그래도 블라드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땅을 파는 녀석인 것은 알겠으나 바위까지는 깨지 못했었으니까.
삽질을 하며 느낀 단단한 돌의 감촉이 그 사실을 증언해주었다.
“보인다.”
그렇다면 보리를 가지러 오기 위해서는 바위 위로 올라오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정체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어두운 밤. 흩뿌려놓은 보리 종자의 냄새를 맡은 무언가가 땅을 파고 올라오고 있었다.
축축한 코로 냄새를 맡으며 그렇게 땅 위를 올라와 바위 위로.
뀨이이익-
목소리의 잔재와 하얀 뱀의 가호와 알리시아의 호박석. 그리고 일각수의 피를 이은 검은 말까지.
정령과 관련된 모든 것을 짊어지고 나온 블라드는 마침내 바위 위로 기어 올라온 존재를 보며 살며시 왼쪽 눈을 감았다.
“두더지잖아.”
“그냥 두더지가 아니야.”
달빛 아래 비친 자그마한 두더지 한 마리.
목소리의 잔재와 함께 본 그 두더지는 어두운 밤임에도 희미한 노란색 빛을 띠고 있었다.
“빛나는 두더지지.”
교회가 하나 이름아래 신의 뜻을 널리 퍼트리고 있는 지금에도 도브레치티의 숲은 여전히 신비를 품고 있었다.
그 신비의 이름은 빛나는 두더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