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ll, I will live as the son-in-law of a conglomerate RAW novel - Chapter (52)
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52화(52/229)
52화. 17th. 도쿄 대공습 (1)
헨리에게서 자금 모집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도쿄로 넘어간 우리는 한 고급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하나둘씩 방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는 사람들의 숫자를 확인한 나는 엉덩이를 들고 미리 쓰고 온 가면의 턱 부분을 떼어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번 프로젝트를 설계한 존 데이비슨입니다.”
소개를 마친 나는 상 앞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봤다.
모두들 의아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박태진을 제외한 한국 측 참관인들 때문에 불편해도 어쩔 수 없었다. 오죽하면 내 영어 이름에서 ‘리’까지 떼어내고 영어로 나를 소개했겠나. 젠장.
이어서 내 바로 옆에 앉은 선해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라이엄프 캐피털의 선해철입니다. 썬이라고 불러주십시오, 하하.”
“스탠더드 캐피털의 클레어 로렌스입니다. 고향집인 트라이엄프와 다시 뭉치게 돼서 기쁩니다.”
그밖에도 트라이엄프 측 인사들, 정확히 말하자면 헨리 파벌에 속한 참석자들이 각자의 소개를 마치자 한국 측 참관인들의 소개가 시작됐다.
태현그룹이나 금강그룹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이 왔다. 보나마나 두 그룹 오너들의 가신들일 터. 해동그룹도 당연히 박태진이 자리했는데··· 신성그룹에서 온 사람은 의외였다.
“신성그룹 비서실의 박태곤 이사입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공정한 프로젝트가 되길 바랍니다.”
신성그룹 비서실 박태···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저 사람이 벌써 신성그룹 비서실에 입성했다니?
박태곤.
앞으로 신성그룹에 몇 안 되는 전설을 남긴, 아니 남길 남자다. 전생의 나조차도 질릴 만큼 지독한 근성과 숫자감각, 청렴함으로 무장한 남자가 아닌가?
이수한의 추천으로 장호건에게 발탁된 그는 IMF 때 구조조정실로 바뀐 비서실로 이동, 감사팀에서 승진을 거듭했다. 여기에 발터 모델 뺨치는 리스크 관리로 그룹을 위기에서 구해낸 그는 신성그룹 10만 샐러리맨들의 우상이었다.
그 뒤로도 박태곤은 국내외 계열사들과 법인들을 돌며 공을 세운 끝에 신성생명 대표이사가 되어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이수한 라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장용재, 장수연에 의해 그룹에서 쫓겨났다.
그런 식으로 쫓겨난 이들이 한둘이겠냐마는 박태곤과 나는 사적으로도 친했기에 그의 기억이 짙게 남아있었다. 지금의 그를 바라보니 회사에서 해고된 그와 단골 포장마차에서 닭똥집을 놓고 소주를 마셨을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주제 넘는 소리지만 이 실장님이 저 같은 샐러리맨이었다면 어땠을까 합니다. 오너 일가가 아니면 더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셨을 텐데···.]비주류로서 신성그룹의 정점까지 올라갔던 그의 눈에는 내 신세에서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다. 오너의 사위인데도 개처럼 일했고, 개처럼 일했는데도 부속실이라는 쓰레기 부서를 떠안았으니 말이다.
그 일조차도 나만을 위했던 나에 비하면 박태곤은 진짜 남자였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성과를 낸 것도 같은 처지의 청춘들에게 가능성을 열어주려고 자청한 게 아니었나.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그가 비서실에 올라간 경위를 알아봐야겠다. 내가 전면에 나서면 우리 그룹으로 데려오려고 찍어놨는데 벌써 비서실에 들어갔을 줄이야···.
넋을 놓고 바라보던 중 선해철이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쳐다봤다. 무안해진 나는 주먹을 입에 대고 헛기침을 했다.
“오늘부터 우리는 엔화를 사들입니다. 일본 내에서 유통되는 어음이든 단기 채권이든 A급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설계한 사람으로서 앞에 서서 목표를 밝힌 뒤, 왼쪽에 있던 박태진에게 물었다.
“해동그룹 진행상황은 어떻습니까?”
세 그룹이 편하게 돈 버는 꼴은 죽어도 못 봐서 참관인뿐만 아니라 일본 쪽 네트워크 동원을 요청했었다. 해동그룹도 불가피했는데 박태진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본사에서 넘어올 후발대와 함께 간사이로 넘어갈 예정입니다. 현지에서 모을 물량 전부 트라이엄프 캐피털에 넘기겠습니다. 또한···.”
박태진에 이어서 박태곤을 비롯한 참관인들도 각 그룹 일정을 보고했고 트라이엄프 캐피털 본사에서 파견된 헨리 직속의 측근들까지 보고를 마쳤다.
피부색은 다르지만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도쿄를 불태울 연합군이나 마찬가지였다.
“좋습니다. 달러와 마르크를 빌려서 엔화 표시 단기 지급 상품을 최대한 매입하세요. 이번 일은 오직 우리만 아는 비밀이어야 합니다.”
우리 측 포지션 방침을 밝힌 뒤 다음 질문을 던졌다.
“헤지들 상황은 어떻습니까?”
“소로스를 비롯한 헤지펀드들 모두 기존에 쟁여둔 달러와 새로 빌린 달러까지 엔화로 바꾸고 있습니다. 살아날 구멍이 녹아웃 옵션뿐이라 줄기차게 쏟아 붓는 중입니다.”
트라이엄프 쪽 담당자가 말했으니 사실일 것이다. 이번 도박은 더 많은 엔화를 먼저 차지하는 쪽이 다 먹는 판이니 최대한 많은 물량을 확보해야 한다.
“일본은행과 대장성 관료들, 마루노우치 금융가는 현재 환율이 안 무너질 거라 여길 겁니다. 하지만 불가능할 것 같던 도쿄대공습도 성공했죠. 이 땅에 다시 불지옥을 보여줍시다.”
자리에 앉은 나는 잔에 술을 채웠고, 다른 사람들도 술을 채웠다.
“건배사로 도쿄대공습의 주역이셨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을 기렸으면 합니다. 스톤 에이지, 어떻습니까?”
입꼬리를 올린 채 눈썹을 들썩거리자 사람들은 낄낄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한국 측 참관인들도 장교 출신인 박태진과 박태곤의 얘기를 듣고 낄낄 웃는 게 커티스 르메이가 2차 대전 당시에 ‘일본을 석기시대로 만들겠다!’라고 말했던 걸 들은 것 같았다.
“선창은 제가 하겠습니다.”
잔을 든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크게 외쳤다.
“Stone!”
“Age!”
지금 이 순간, 20세기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도쿄대공습의 서막이 올랐다.
***
회식을 마친 다음 날부터 우리는 미리 마련한 초기자금을 시작으로 달러와 마르크를 들여와서 엔화 표시 단기 지급 상품들을 사들였다.
마루노우치 금융가에서는 외국계 자본이 일본을 만만히 보고 덤빈다는 험담 섞인 소문이 나돈 지 벌써 한 달째.
해가 바뀌어서 1995년 1월 16일이 된 오늘도 우리는 일본에서 엔화 쇼핑을 거듭하고 있었다.
점심식사 겸 중간점검 차원에서 모인 고베의 한 식당.
그곳에서 만난 박태곤은 장어덮밥 그릇을 입에서 떼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늘 일정만 마무리되면 2조 5천억 엔이 될 겁니다, 미스터 데이비슨. 내일도 여기서 더 매입할 겁니까?”
그의 질문을 받은 나도 밥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가면 밑의 입을 닦고 말했다.
“아닙니다, 미스터 박. 지금도 충분히 물량을 확보했습니다. 지금 이상으로 불리면 처리하는 게 어려워집니다.”
헨리가 미리 세팅해 준 덕분에 오후 일정만 소화하면 모든 게 끝이다. 내일이면 인세의 지옥이 될 이곳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다.
내 속을 모르기에 박태곤은 날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듣기로 이런 배팅은 최하 다섯 배 이상 레버리지를 일으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트라이엄프는 딱 다섯 배수까지만 불린 겁니까?”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릅니다, 미스터 박. 우리가 미국 투자회사라도 엔화를 사느라 빌린 돈이 200억 달러 남짓입니다. 지금 월가에서 우리더러 미쳤다고 하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거대투자회사인 트라이엄프라도 파벌 싸움 때문에 이 이상으로는 자금을 모집할 수가 없었다. 한국의 네 재벌들에게 CB를 발행해주고 환투기 수익을 얹어서 재매입하겠다고 이면계약을 체결한 것만 해도 헨리가 이번 거래에 실패할 경우 자신의 모든 개인재산을 회사에 증여하는 조건으로 성사된 게 아닌가?
‘그게 다 삼촌하고 클레어, 나 때문에 추진한 일이었지. 헨리한테는 두고 두고 은혜를 갚을 일이야.’
이번 계획을 제안해줬다는 이유, 자신의 딸인 클레어와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시켜줬다는 이유만으로 헨리는 그 조건을 받아줬다. 자랑스러운 아버지, 떳떳한 친구가 되고 싶다며. 말이다.
이런 내막을 모르는 박태곤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옛 친구였던 사람한테 거짓말을 치려니 영 찜찜했다.
그래도 오늘이 지나면 나한테 평생 고마워해야 할 거다. 자기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될 테니까.
***
일과를 마치고 도쿄로 넘어온 우리는 제국호텔에 잡은 방에서 룸서비스로 시킨 피자와 캔 맥주로 저녁을 대신하고 있었다.
박태진이 입 안에서 우물거리던 피자를 삼키고는 빙긋 웃었다.
“이거 먹으니까 야후 생각납니다, 형님. 그땐 콜라를 마셨는데, 하하.”
“그러게 말이다. 우리 조카가 센스는 좋단 말이지. 덕분에 야후 투자도 성사됐잖아? 하하.”
선해철은 날 보며 껄껄 웃었지만 내가 그 생각을 해낸 건 이 나라 일본에서 IT사업을 하는 재일교포 덕분이었다. 나와 제리 양의 피자타임은 그 남자와 제리 양의 피자타임을 가로챈 게 아니었나?
본인은 한국계인 것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지만 자기 성씨를 지키려고 일본인인 마누라 성씨를 자기 성씨로 바꾸고 귀화한 걸 보면 재밌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과도 슬슬 만나게 될 텐데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피자를 다 먹고 난 우리는 입가심으로 위스키를 마셨다. 선해철은 위스키와 얼음이 함께 채워진 글라스를 흔들며 말했다.
“박태곤 그 사람, 보기보다 깐깐하대? 다른 그룹 참관인들은 조용히 시키는 대로만 일하던데. 재미교포 흉내 내길 잘했다야.”
“신성에서 보낼만한 사람이었죠. 가면은 이제 기념품으로 보관해야겠어요.”
박태곤··· 동료일 때는 든든하지만 적으로 두면 골치 아플 사람이니 때가 되면 내 울타리로 끌어들여야겠다. 아이기스 방패 같은 그의 리스크 관리 능력을 신성그룹에서 걷어치워야 하니까.
신해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위스키를 홀짝거렸다.
“그래도 이걸로 땡이다. 월가 친구들한테 들었는데 소로스가 이번에 헨리 들러리 됐다고 월가에 소문이 자자해. 지금껏 헨리가 무서워 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헨리가 그런 분일 줄은···.”
대답을 하는 나도 몸서리쳐졌다. 말이 200억 달러지 해동그룹 총자산의 몇 배나 되는 돈이 아닌가? 자기 개인 재산도 모자라서 자기 휘하 물주들의 재산까지 담보로 잡혀가면서까지 올인 했다니.
움츠러든 어깨를 펴고 술을 마시던 중 선해철이 육포를 질겅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고베 항, 왜 그렇게 흔들리던 거야? 살 떨리는 줄 알았네.”
투덜거리는 선해철의 말대로 고베 항은 지축이 꽤 많이 흔들렸었다. 박태곤의 권유를 애써 외면하고 돌아온 가장 큰 이유였다.
“저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이 나라에서 맘 편하게 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건 그래요. 종종 놀러 와서 여진을 느끼긴 했는데 처음이네요. 오사카 공항까지 흔들리다니.”
박태진과 클레어도 고베 항에서 겪었던 일이 찜찜한 듯했다. 일도 잘 마쳤는데 분위기를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잖아요. 경계선 위에 만들어진 땅인데.”
일본은 유라시아판과 필리핀판, 태평양판이 만나는 환태평양 조산대 위에 있는 땅. 당연히 지진과 해일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곳이다.
이 땅에서 쭉 살아온 일본인들이야 그러려니 해도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되도 않는 농담을 던지자 선해철이 코웃음을 쳤다.
“어쭈? 우리 오너님, 과학 시간에 딴 짓 안 하고 열심히 공부했나보네?”
“그러니 서울대 문과 수석으로 입학했죠, 형님. 졸업성적은 안 좋았지만요.”
이번 생에서의 내 성적은 지난 생이었으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안 좋게 나왔다. 투자와 사업구상 등에 목을 매달았던 것도 있었지만 올 A+이었던 전생에 비해 평균 B+를 간신히 넘겼으니 흠결이라면 흠결이었다.
“우리 오너 성적이 그거밖에 안 돼서 어떡하죠? 우리 회사 멤버들은 전부 아이비리그에서 숨마 쿰 라우데 찍었는데.”
선해철과 박태진의 대화를 듣던 클레어도 깔깔거리며 나를 놀렸다. 젠장.
“클레어도 참··· 성적 좋은 것보다 일 잘하는 게 낫죠. 멕시코 환투기도 잘 됐잖아요?”
그 사이에 멕시코에서 작업했던 건 전부 정산이 끝났다. 연 초를 넘기면서 달러당 7페소를 돌파할 때부터 정리한 결과, 순수익만 11억 달러였으니 나로서도 할 말은 있었다.
그 점을 다시 짚어주자 클레어가 날 보며 혀를 살짝 내밀었다.
“알고 있네요, 오너님. 이번 건 끝나면 보너스나 주세요, 후훗.”
“정산 끝나면 팍팍 쏠게요. 사무실도 넓히고, 직원도 늘리고. 어때요?”
한참동안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던 우리는 마감시간이 된 바에서 나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들 내일이 오면 오늘 밤처럼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을까?
***
“먼저 주무세요. 이따가 잘게요.”
“알겠습니다, 도련님. 내일 일정이 있으니 너무 늦지 마십시오.”
박태진을 침실로 보낸 뒤, 코냑 한 병을 따서 글라스에 채웠다.
손으로 감싸 쥔 잔을 코에 대니 장하연이 떠올랐다. 그때 함께 마셨던 코냑 향기가 달콤했는데···.
그때보다는 덜하지만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이 향기가 영원히 남기를 간절히 원했다.
눈앞에 있지는 않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흘릴 피의 비린내, 죄책감을 새길 그 피비린내가 바늘만큼의 틈에라도 내 코에 스며들지 않도록.
천천히 코냑을 비우고 채우길 반복하다보니 어둡던 하늘이 점점 푸르게 변했다.
그 푸른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마음속에 드리워진 어둠을 지워내던 중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도련님, 안 주무셨습니까?”
“아··· 네.”
뒤를 돌아보니 박태진이 날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걱정되시나봅니다.”
“그렇···죠. 일을 이렇게 벌여놨는데 아예 걱정이 안 될 수가 있나요, 하하.”
어색하게 웃는 내 어깨에 박태진이 손을 얹었다.
“다 잘 될 거다, 성민아.”
“형···.”
“넌 최선을 다했어. 선택도, 결정도 모두들 스스로 한 거다. 부담 갖지 마라.”
내 속을 알고 하는 말일까, 지금 스물다섯인 내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처럼 보여서 하는 말일까.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그의 따뜻한 말은 지워지지 않을 것 같던 어둠을 지워주고 있었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그가 손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도련님. 매일 시작되는 오늘처럼 앞만 달려가십시오.”
“고마워요, 형.”
말을 맺자마자 요란하게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입구로 가서 문을 열자 선해철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외쳤다.
“터졌어!”
“터졌다뇨?”
모르는 체하고 묻자 선해철이 다시 외쳤다.
“고베! 지진 났다고!”
올 것이 왔구나. 고베 대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