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ll, I will live as the son-in-law of a conglomerate RAW novel - Chapter (78)
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78화(78/229)
78화. 22nd. 기브 앤 테이크 (8)
회사에서 일하던 나는 할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삼청동으로 들어갔다. 안 봐도 뻔하다. 동양일보를 비롯한 오늘자 조간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기사 때문일 것이다.
“성민입니다, 할아버지.”
서재 문 앞에서 노크를 하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너라.]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인사를 올린 뒤, 소파에 앉았다. 이어서 할아버지의 주문을 받고 고용인이 내온 밀크티를 마셨다.
“오늘자 신문, 잘 봤지? 흐흐.”
“네, 할아버지. 회사 사람들이 배꼽 잡고 웃던데요? 흐흐.”
“이 할애비 작품이다. 우리 장손이 고 여편네 코를 콱 밟아놨으니 동네방네 소문내야지, 으하하.”
이럴 줄 알았다.
서울대 문과 수석으로 입학했을 때도, 해동백화점 본점 신관이 전국 백화점 점포들 중 매출 1위에 올랐을 때도 할아버지는 신문사에 시켜서 기사를 실었다.
이번에도 안 했을 리 없었을 것이다. 할인점 사업에 처음으로 진출한 우리 그룹이 개점 한 달 만에 80억이 넘는 매출을 찍으면서 연 매출 1천억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지 않았나?
호탕하게 웃던 할아버지가 웃음기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래도 장호경 그 여편네,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야. 병호 형님을 빼다 박았으니 어떻게든 되갚아주려고 할게야.”
“우리와 한 판 붙을 거라는 말씀이시죠? 찐하게요.”
“그래. 분명히 우리 해동마트처럼 지들 매장을 죄 뜯어고칠게다.”
그럴 것이다.
과거에도 장호경은 한계에 부딪쳤던 1997년에 자식들 중 한 명, 그것도 본인 손으로 망친 자식의 의견을 받아들여 은평점처럼 리뉴얼을 시작했으니까. 나로 인해 그 시기가 앞당겨졌지만 절대 밀릴 일은 없었다.
“그래도 우리 쪽에서 상품공급을 틀어막아놨으니 2년만 버티면 됩니다, 할아버지.”
해동종금이 기회손실을 보면서까지 식품회사들에게 돈을 빌려준 건 단순히 우리 물량 확보 때문만이 아니었다.
‘추가 설비 도입 자금까지 똑같은 조건으로 빌려줄 테니 앞으로 2년만 우리 출점 속도에 맞춰 설비를 늘리고 우리에게 우선납품하라고 했지, 흐흐.’
묶음상품의 효과는 이번 은평점 개점으로 확실히 증명됐고, 그 묶음상품은 앞으로 2년간 우리만 써먹을 수 있다. 그러니 SSK마트는 우리처럼 매장을 고쳐도 공장에서 깔끔하게 포장되어 나오는 묶음상품을 절대 못 판다.
정 쓰고 싶다면 사람을 써서 일일이 묶어 팔거나 계열사인 제일제분의 인기상품인 ‘스팸’ 정도나 묶음상품으로 팔 수 있다. 어느 쪽이 됐든 신세기그룹은 앞으로 2년간 내가 날릴 공격을 되받아치느라 불필요한 피를 흘려야 한다.
그렇게 2년이 지나면 2등으로 주저앉을 신세기그룹은 백화점이든, 할인점이든 유통업에서 자신들을 완벽하게 내려다볼 해동그룹을 올려다보며 절망할 것이다.
‘2년 뒤에 2등이라··· 콩댄스 췄던 그 친구가 생각나는데?’
잠시 되도 않는 뻘생각에 입꼬리가 올라간 나를 보며 할아버지가 음침한 미소를 띠었다.
“영악한 놈. 할애비도 이 바닥에서 구르면서 상대방 자빠뜨리려고 안 해본 짓이 없었지만 너처럼 하진 않았다, 흐흐.”
“전쟁에서 이기려면 모든 수단을 다 써야죠. 후속조치들도 충분히 마련해뒀습니다, 흐흐.”
음침한 미소와 웃음소리를 할아버지와 주고받았지만 지금 내가 한 말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신성그룹 유통사업 때문에 피 말리는 경험을 했던 내게는 유통이 가장 쉬웠으니까.
할아버지는 내 대답을 듣고 가늘게 뜬 눈으로 눈웃음을 쳤다.
“그리 자신만만하게 나온다면 유통 쪽 사업은 앞으로 네놈한테 맡기마.”
깜짝 놀랐다. 물산의 두 기둥 중 하나인 물류유통부문의 핵심 사업을 맡기겠다니?
“할아버지?”
“백화점에 할인점까지 전부 네 생각대로 해서 장사가 잘되고 있어. 내후년에 강남점까지 열면 백화점 실적이 곱으로 뛸 텐데 뭘 그리 놀라는 게냐?”
미치겠다. 회사에 말뚝 박으려고 한 게 아니라 스탠더드 캐피털로 옮겨가려고 한 거였는데···.
“그래도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리시면···.”
“네 진짜 소속이 어딘지 알고 있으니 완전히 맡기는 건 아니지만 가끔씩 구다보기라도 해. 할애비 곁에서 손 좀 보태줘, 이눔아.”
할아버지의 말에서 타협의 여지가 드러났고, 그 말을 실은 목소리에서 나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묻어났다. 이렇게 된 거, 미국에서 돌아올 때부터 준비한 일을 밝혀야겠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뭐냐?”
“내년이면 스탠더드 캐피털에서 한국에 법인을 낼 거라고 합니다.”
내 말을 듣고 할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참말이냐?”
“네. 그래서 다음 달 1일까지만 은평점 소속으로 근무하고 내년부터 스탠더드 캐피털 한국법인으로 옮겨가려고 합니다.”
“흐음···.”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좋으면서도 아쉬운 기색이 짙었다. 그래서 얼른 해야 할 말을 더 풀었다.
“걱정 마십시오. 소속은 바뀌어도 집안 살림 챙기는 데 소홀하지는 않겠습니다.”
“남의 집 밥 먹는 놈이 집안 살림을 어찌 챙긴단 말이냐?”
“지난 엔고투기 때 본사에서 실력을 인정받았고, 제 몫으로 된 투자금도 늘어났습니다. 덕분에 경영 컨설턴트로 외부활동을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얼굴이 밝아진 할아버지가 손바닥으로 가볍게 책상을 내려쳤다.
“옳거니! 그 방법이 있었구먼!”
“네. 그러니 앞으로 제가 그룹 경영에 참여해도 대놓고 불평할 그룹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이게 내가 집안의 불문율을 피하면서도 그룹 경영에 합법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다. 스탠더드 캐피털이 내 회사인 건 아무도 모르니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잡음 없이 한국에서 양쪽 모두를 챙길 수 있다.
그와 동시에 그룹 안팎의 사람들, 그리고 이 나라 국민들은 점점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 돈과 실력 모두를 보여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한국법인 대표는 누가 맡기로 했느냐?”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연말까지는 인선을 할 거라는데···.”
말끝을 흐리던 나는 밀려올라오려는 한숨을 겨우 참았다.
마음속으로는 선해철을 점찍었지만 물어볼 엄두가 안 났다. 회사의 규모 차이는 둘째 치고 아버지의 절친이자 내 동업자이며 헨리의 최측근이고 클레어의 애인이 아닌가?
조금, 아니 많이 물러터진 생각이지만 비즈니스만 얽혀있다면 몰라도 온갖 친분관계가 얽힌 일이기에 부하처럼 부려먹는 건 내키지가 않았다.
“장손.”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고개를 든 나를 보며 입에 주먹을 대고 헛기침을 했다.
“로렌스 대표가 괜찮다면 이 할애비가 쓸 만한 사람 한 명 알아봐주랴?”
“네?”
“너희 회사가 한국에 자리 잡으려면 이 나라 속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할 게다. 너하고 죽이 맞을 사람이면 더 좋겠지.”
왠지 모르게 쌔한 기분이 엄습했다. 설마?
할아버지는 내 시선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전화 한 통을 걸었다.
“날세, 선 대표.”
이럴 수가.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할아버지가 선해철을 물어다 주고 있었다. 로열스트레이트 플러시가 뜬 것보다 더 짜릿한 기분에 주먹이 절로 쥐여졌다.
***
서재에서 나온 나는 곧바로 트라이엄프 캐피털 사무실에 갔다.
“괜찮으세요?”
“뭐가?”
심드렁하게 되묻는 선해철.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트라이엄프 캐피털에서 나오시는 거요.”
물어보면서도 할아버지가 선해철에게 전화로 했던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주제 넘는 소리 같네만 스탠더드 캐피털 한국법인 대표, 자네가 맡으면 어떨까 싶네. 로렌스 대표가 자네 여자고 자네 조카도 그 회사에서 일하잖나. 자네가 모시는 양반 수락부터 받아야겠다만 그 회사에서 나온다고 그 양반과의 연이 아예 끊어지지도 않을 테니 숙고해줬으면 좋겠네.]직업이라는 게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다보니 할아버지도 정중한 말투로 부탁하면서 노골적인 강요는 피했다. 나와 함께 차를 마시는 저 양반이 무슨 소리를 할는지···.
마른침을 삼키고 바라보던 나를 보며 선해철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잘 됐다 싶다. 나도 슬슬 무대를 바꾸고 싶었거든.”
“삼촌?”
선해철은 어느 새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지금껏 내가 이 자리를 지킨 건 헨리 때문이었어. 정확히는 그 양반이 위태롭게 보여서 의리 때문에 못 나왔지만 말이야.”
“그러셨군요.”
“그런데 네 덕분에 헨리가 주도권을 되찾았어. 스탠더드처럼 IT 투자도 늘어나고 있고. 그만하면 헨리에 대한 의리는 충분히 지켰으니 이젠 명우와 너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지.”
“그래도 로이스 경은 형님 보스이자 친구인 분이잖습니까? 미스 로렌스가 로이스 경의 따님이고 스탠더드 캐피털 본사 대표라도 회사는 도련님 소유인데 잘못하면···.”
내 옆에서 말끝을 흐린 박태진, 그리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선해철이 빙긋 미소를 띠었다.
“헨리,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다. 성민이 덕분에 집안도 일으키고 클레어하고도 사이가 좋아졌으니 허락해줄 거다. 그리고.”
말을 잠시 멈춘 선해철은 어느 새 짓궂은 눈길로 우릴 바라봤다.
“클레어하고 같은 회사에서 일하니까 더 반길 걸? 어떻게든 자기 손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 흐흐.”
여느 때처럼 그 특유의 장난꾼 같은 웃음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감사합니다, 삼촌.”
“고마워할 거 없다, 조카야. 여기서 내가 받는 연봉 그대로 쳐달라고 계약서 내밀 거니까.”
“얼마라도 좋습니다. 오너 권한으로 최고의 대우를 해드리죠. 본사 이사회와 투자위원회 자리도 드리겠습니다. 흐흐.”
계약서에 얼마를 써도 상관없다.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으니 입꼬리가 귀에 걸릴 것 같았다.
“형은 어때요? 주주로서 물어보는 거예요.”
박태진 또한 엄연히 스탠더드 캐피털의 주식 3퍼센트를 쥔 주주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나와 함께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식견을 키우고 있으니 그의 의견도 들어야 했다.
“형님 실력이야 말할 필요가 없으니 반대할 이유도 없죠, 하하.”
박태진까지 선선히 동의하자 선해철이 입을 열었다.
“오케이. 한국법인 대표 문제는 해결됐고··· 너는 어떡할 거냐?”
“다음 달 초에 그만두고 스탠더드로 옮겨야죠. 마트에 매달리느라 못 챙긴 우리 살림도 살펴보고요.”
해동마트에서 일하는 동안 스탠더드 캐피털은 클레어에게 전적으로 맡겨뒀다. 당면과제가 끝났으니 오너로서 현재 자산운용 상황부터 향후 투자방향에 대해 의견을 내야한다.
선해철은 고개를 끄덕인 뒤,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해동은? 지금 판 짜는 거 죄다 네 머리에서 나온 거잖아? 사업 기반 마련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나중에 내부 조직 휘어잡으려면 그룹 명패는 있어야 할 텐데?”
선해철이 걱정스런 눈길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에게도 방법이 있었다.
“그룹 경영은 컨설턴트 자격으로 참여하려고요. 해동물산 지분도 있고 할아버지나 다른 어른들도 제 실력 인정해줬으니 어렵지 않을 겁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기업 컨설팅도 해주고요.”
앞으로 나는 다른 재벌 후계자들과 다른 길을 갈 것이다.
해동그룹의 지배주주 중 한 명이지만 외부자로서 그룹 안팎에서 착실히 능력과 실력을 입증하면 삼청동 서재의 주인이 될 때 세상 사람들 그 누구도 나를 헐뜯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장호경은 너 절대로 안 쓸 것 같은데? 앞으로 1년은 너 때문에 고생하게 됐잖냐, 흐흐.”
선해철이 날 보며 낄낄 웃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장호경, 그 오만한 성격만큼이나 실력도 있는 장호경, 그럼에도 나한테 처참하게 처발린 장호경이 나를 쓸 리가 있겠나?
“거기만 회사는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형?”
옆에 있던 박태진이 나를 보며 껄껄 웃었다.
“1년 뒤엔 우리 상대도 안 될 텐데 가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하.”
***
이성민 삼총사가 한바탕 웃고 있을 무렵.
그 웃음의 대상이 된 장호경은 조석한의 보고를 받고 웃을 수가 없었다.
“안 된다고요?”
“예, 회장님. 매장 재개장에 앞서서 묶음상품을 공급받으려고 라면회사나 주류회사들과 접촉했는데 납품이 어렵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왜 안 된다는 거죠? 더 많이 팔아주면 서로 좋을 일 아닙니까?”
장호경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제조와 유통은 절대 척을 질 수 없는데 식품회사에서 납품을 거부하다니?
조석한은 입술을 넣었다 뺐다하며 망설이던 중 기어이 입을 열었다.
“그게··· 시험 도입한 설비라서 해동마트 은평점에만 간신히 납품물량을 맞출 수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물론··· 여유물량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 측 총수요를 받쳐주는 게 불가능합니다, 회장님.”
잠시 머리를 굴린 장호경이 다급하게 말했다.
“사원들 대기시켜서라도 출고물량 뺏으세요! 눈앞에 뻔히 정답이 있는데 안 할 순 없잖습니까!”
하지만 조석한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장호경에게 절망만 안겨줬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해동물산에서는 납품물량을 매달 현찰로 선결제한다고 합니다.”
장호경은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미친 유통업자가 납품물량을 현찰로 결제하고 떠안아서 판단 말인가? ‘선 납품-후 지급’이 지금의 유통사업 공식인데 해동물산은 그 공식을 완전히 무너뜨려버렸다.
조석한은 거칠게 숨을 내쉬던 장호경에게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회장님. 아직은 할인점이 많지 않아서 사업이 잘 되고 있으니 묶음상품 공급 물량이 충분히 늘어나면 그때 바꾸시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조석한의 의견을 듣고 장호경의 숨소리가 점점 부드럽게 변했다.
‘국내 할인점은 고작해야 10여개 남짓. 시간은 충분해.’
생각을 정리한 장호경이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조 실장. 매대 진열은 지금대로 갑시다. 대신.”
장호경이 말을 멈추고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표정을 풀자 조석한이 긴장했다. 평소 불같은 성격의 그녀가 숨을 가다듬으며 표정을 푼다는 건 최대한 침착하게 판단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즉석 조리식품 코너는 무조건 도입하세요. 제일제분에도 묶음포장이 먹힐만한 품목을 찾아보도록 하고요. 그조차도 안 하면 선대 회장님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할 수 없는 거라면 모를까 할 수 있는 것까지 안 할 수는 없었다. 기일이 코앞인데 생전에 그렇게 좋아했던 아버지 장병호를 볼 낯이 없으니 말이다.
조석한도 신성그룹 시절에 비서실에서 보필하며 우러렀던 장병호였기에 결연한 표정으로 장호경을 바라봤다.
“예, 회장님.”
하지만 두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늪에 빠졌다는 것을.
자신들이 빠진 늪을 해동그룹의 장손이 만들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