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ll, I will live as the son-in-law of a conglomerate RAW novel - Chapter (83)
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83화(83/229)
83화. 25th. 아슬아슬하게, 아찔하게
장용재와 있었던 일이나 파나마 건과는 별개로 1995년 12월은 신나는 달이었다. 잡스가 스탠더드 캐피털에 보낸 초대장을 들고 토이스토리 첫 개봉에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어땠어, 조니?”
“길게 말할 게 있나요? 원더풀!”
영화 관람을 마친 뒤, 나와 잡스는 연회장에서 잔허리를 쥔 샴페인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나는 샴페인, 잡스는 맑게 걸러낸 사과주스를 기분 좋게 들이켰다.
“다 네 덕분이지. 네가 아니었으면 정말로 픽사를 팔았을 지도 몰라.”
“알아줘서 고마워요, 스티브.”
입에서 잔을 뗀 잡스가 나를 보는 눈빛은 거의 구세주를 바라보는 것에 가까웠다. 픽사를 팔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지를 접게 도와준 은인이 아닌가?
“다음 작품은 어떡할 거예요? 이대로 킵 고잉?”
“네버! 무조건 재협상해야지. 제프리도 쫓겨났으니 마이클 정도는 충분히 요리할 수 있어, 하하.”
역시 잡스다웠다. 제프리 카젠버그가 사내 힘 싸움 끝에 마이클 아이스너 회장에게 밀려 쫓겨났으니 역사대로 디즈니와 픽사의 불공정거래는 해소될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통쾌한지 껄껄 웃던 잡스가 사과주스 한 모금을 들이켜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나저나 트라이엄프와 손잡고 할리우드에 돈 뿌렸다는 거, 사실이야?”
“네. 연 초에 있었던 일 때문에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쫙 뿌렸어요. 수익률이 좋으면 앞으로도 쭉 투자하려고요.”
혹시나 해서 환투기 때문에 안 좋게 생각할까 조마조마했지만 잡스는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잘 생각했어. 내 친구가 돈놀이만 지독하게 하는 거, 마음에 걸렸는데 알아서 잘 하니 다행이네, 하하.”
“개처럼 벌어도 정승처럼 써야죠, 하하.”
나와 마주보며 껄껄 웃던 잡스가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나중에 우리한테도 투자해. 협상 마치는 대로 토이스토리 2 만들 건데 제작비 35퍼센트는 스탠더드에서 유치하고 싶거든.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고.”
“네?”
깜짝 놀랐다. 앞으로 픽사는 스크린에 걸 작품마다 절대 손해는 안 볼 작품인데 35퍼센트씩이나 투자 쿼터를 내주겠다니?
눈이 커진 나를 보고 잡스의 표정이 굳었다.
“왜? 불안해?”
“아, 아뇨! 엔딩 크레딧에 우리 이름이 걸릴 생각을 하니까 너무 즐거워서··· 하하.”
“조니 촉이 좋으니 잘 될 것 같은데? 지금 이야기 한 거, 계약서로 꾸미자고.”
잡스의 대답에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아예 못을 박아버리겠다는 게 아닌가?
“스, 스티브?”
“일본 건은 내키지 않지만 그것도 운이겠지. 돈도 벌고, 무사히 돌아왔으니. 네가 손대는 것마다 행운의 여신이 도와주는 것 같으니 그 계약서는 행운의 부적이 될 거야, 하하.”
그러고 보니 잡스는 오리엔탈리즘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고베대지진과 맞물린 엔고투기가 그 점을 자극한 건가 싶었지만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스티브.”
“네가 좋아하는 걸 보니 앞으로도 잘 될 것 같네, 하하.”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죠. 다음 주에 있을 상장도 잘 될 거예요, 하하.”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잡스는 든든한 물주를, 나는 황금알을 낳을 거위를 손에 넣었으니 서로가 만족할 만한 거래가 아닌가?
그로부터 일주일 뒤.
픽사는 주당 22달러로 증시에 상장됐다. 거래량이 폭발하면서 상장 첫날 주가는 39달러, 시가총액은 12억 달러를 기록했다.
덕분에 내가 투자한 2천 5백만 달러는 4억 달러로 불어났다. 추가로 매입하지 않아도 디즈니에 합병될 때쯤이면 여섯 배는 거뜬히 넘어갈 것이다.
픽사의 화려한 데뷔를 지켜본 나는 회사 일을 돌보다가 크리스마스가 될 즈음에 한국에 돌아갔고, 장하연이나 가족들과 연말연시를 보내다보니 새해가 시작됐다.
한파를 동반할 겨울폭풍이 몰아치기까지 앞으로 1년.
이제부터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아슬아슬하고 아찔한 줄타기를 시작해야 하니 말이다.
***
새해 둘째 날을 맞아 문을 연 스탠더드 캐피털 한국법인의 설립 축하 파티는 이태원 집에서 열렸다.
“휴우, 이거 다 먹으면 내일 아침은 건너뛰어야겠는데?”
“조니, 이거 다 태진 씨하고 둘이서 한 거야?”
연말을 함께 보냈는지 미국에서 함께 들어온 선해철과 클레어는 식탁 위에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보고 놀랐다.
“우리끼리 하는 파티라도 기분은 내야죠. 그렇죠, 형?”
“그럼요, 도련님. 맘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우리 둘은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음식을 준비하느라 주방과 식당을 벗어나지 못했다. 덕분에 이 식탁에 카프레제 샐러드, 비스킷, 캐비어, 참치 큐브 샐러드 등의 전채요리를 쫙 깔았다.
어디 그뿐인가. 삼단으로 된 오븐에서는 로스트비프와 치킨바비큐, 애플파이가 각 층에서 노릇노릇하게 익고 있었고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육개장을 응용한 매콤한 수프가 보글보글 끓고 있으니 모두 우리 둘의 손에서 나온 음식들이었다.
식탁에 앉아 전채 요리와 수프를 적당히 즐기던 우리는 오븐에서 다 익은 음식들을 세팅한 뒤, 코르크 마개를 딴 와인을 잔에 채우고 높이 외쳤다.
“더 웨이!”
“스탠더드!”
첫 회식 때 외쳤던 건배사를 외친 우리는 와인을 들이켰다.
“캬아, 좋다! 축하합니다, 오너님!”
“고맙습니다, 삼촌.”
나와 선해철이 축하를 주고받을 때 클레어는 박태진에게 축하를 건넸다.
“승진 축하해요, 태진 씨.”
“감사합니다, 미스 로렌스.”
두툼하게 썬 로스트비프를 한 장씩 접시에 덜어서 한 입 크기로 썰어먹던 우리는 다시 한 번 잔을 부딪쳤다. 와인을 마신 선해철이 병을 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가 보내준 술이지?”
“그럼요. 이 비싼 술을 어떻게 제 돈으로 사 마셔요? 흐흐.”
우리가 지금 마시는 술은 헨리가 보내준 로마네 콩티였다. 우리만의 파티였지만 새 역사를 시작하게 된 오늘을 기념하기에 제격인 술이라 첫 번째 병은 이놈으로 골랐다.
“자식, 돈도 많은 놈이 아직도 벌벌 떨기냐?”
“미국에 있는 돈, 함부로 못 가져오잖아요. 가져오면 국세청에서 들쑤실 텐데···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말하는 와중에도 몸이 부르르 떨릴 만큼 끔찍했다. 우리처럼 돈 많은 인간들에게 국세청 공무원들은 지옥에서도 만나지 않길 바라는 양반들이 아닌가?
선해철이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엄살은? 트라이엄프 통해서 가져오면 되잖아? 헨리도 도와줄 텐데.”
“그래도 마음에 걸려요. 호건이 아저씨가 절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요. 조심해서 나쁠 거 없죠.”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개운하지가 않다. 장하연을 앞세워 성의원에 쳐들어갔을 때도, 하이마트에 와서 매장을 둘러볼 때도 장호건은 나를 친아들처럼 자상하게 대해주지 않았나.
그 까칠하고 불 같은 양반이 나를 그렇게 대할 정도면 미저리나 소머즈 수준으로 나를 관찰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장하연과의 관계를 잘 쌓아가는 대가라고 생각해도 성가시기 그지없었다.
그때서야 선해철이 얼굴에서 웃음을 걷어냈다.
“하긴··· 그 인간이 널 가만히 둘 리가 없겠지, 후후.”
“네··· 네?”
무심코 대답하던 내 귀에 선해철의 목소리에서 이상한 뉘앙스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하다니···.
“무슨 말이에요, 삼촌? 아저씨가 왜 저를 가만히 안 둬요?”
선해철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내게 되물었다.
“왜 그러긴? 그 인간이 가장 아끼는 딸 옆에 네가 있는데 신경이 쓰이겠냐, 안 쓰이겠냐?”
“아···.”
듣고 보니 그럴 법했다. 나와 장하연이 양쪽의 키 맨 역할을 맡아서 두 집안, 두 그룹의 사업에 협력하는 모양새가 나왔으니 말이다.
선해철은 나를 보며 툭 던지듯 말했다.
“여하튼, 불편하게 됐어. 어차피 네 말대로면 지금 달러 들여오는 건 금하고 똥 바꾸는 거니까 알아서 잘 해봐, 흐흐.”
“네, 삼촌.”
기분 좋은 날인데 지나치게 예민했던 것 같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 오늘 하루만큼은 좋은 기분에 취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
로마네 콩티 한 병을 다 비운 뒤, 선해철과 박태진은 담배 한 대 태우고 들어오겠다고 말하고는 눈이 소복이 쌓인 정원으로 나왔다.
“휴우, 큰일 날 뻔했다. 정혼서약서 찾아서 숨긴 거, 헛수고될 뻔했어.”
”보는 저는 오죽했겠습니까? 때가 될 때까진 안 됩니다, 형님.”
담배 연기를 내뱉던 선해철이 가슴을 쓸어내렸고, 맞담배를 태우던 박태진도 얼굴이 굳어 있었다.
친조카 같고 친동생 같은 아이지만 그 아이는 자신들의 은인인 해동그룹 이 씨 가문의 다음 가주가 되어 가문을 번창시킬 만한 놈이다. 그럴 놈이 혹여나 신성그룹 따위에 휘둘리는 걸 볼 수 없으니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 아직도 안 알려주셨지? 정혼서약서.”
“예.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박태진은 대답을 마치고 굳은 표정으로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이 집안에 들어와서 늘 이성민을 친동생처럼 돌봐왔기에 더 마음이 편치 않은 듯했다.
“성민이, 앞으로 3년 안에 하연이하고 결혼할 거라고 저한테 말했습니다.”
“진짜?”
“네. 제가 결혼도 못하고 곁에서 돌봐주는 게 걸린다고 하더군요.”
눈이 커졌던 선해철이 박태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몇 년 안 있으면 네 나이 마흔이니 걸릴 만하겠네.”
“네. 마음 같아서는 사실대로 알려주고 두 사람 혼인을 밀어주고 싶은데 회장님 뜻이 그러니 어쩔 수 없죠.”
“성민이가 장 씨 놈들 잡아먹을 만큼 클 때 밝히시겠다는 거?”
박태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장호건 회장, 절대 만만한 사람 아닙니다. 성민이, 발톱도 송곳니도 튼튼해졌지만 장 씨 집안 사위가 되면 덩치 큰 고양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휴우, 내가 봤을 땐 지금대로만 하면 장 씨 것들 전부 다 찢어놓을 것 같은데. 뭐, 스탠더드가 성민이 개인금고라는 걸 회장님이나 다른 분들도 모르실 테니 이해는 된다만···.”
선해철이 안쓰럽다는 표정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지만 박태진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장호건 회장이 우리 그룹을 통째로 잡아먹기 힘들 때 정혼서약서를 알려주실 듯합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만 큰 건 아니잖습니까?”
“그러긴 해. 주가가 떨어졌어도 자산 규모로는 장호건 계열사만으로도 해동그룹의 다섯 배는 가뿐히 넘으니까.”
“예. 그러니 성민이가 결혼해서 나중에 두 그룹이 합병이라도 하면 우리 그룹 사람들은 전부 밀려날 수도 있습니다.”
박태진의 추측은 극단적이었지만 선해철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민 덕분에 해동그룹이 커졌다고 해도 신성그룹을 따라잡는 건 아직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없이 담배를 태우던 선해철이 잊고 있던 게 생각난 듯 입을 조금 벌렸다.
“명동 쪽 자금, 안 쓰시겠지?”
“그러실 겁니다. 작년부터 현금 결제를 시작한 뒤로 그룹과 명동의 거래는 끊어졌으니까요.”
“잘 됐네. 다른 놈들 전부 회장님 사채조직이 흩어졌다고 믿겠어.”
“그러겠죠. 그룹도 외형과 내실 모두 갖췄으니 이제는 각자 독자생존해도 충분할 겁니다.”
박태진의 말대로 해동그룹이든 사채조직이든 충분히 홀로서기가 가능했다. 3년 전 금융실명제 이래로 이대수 휘하 사채조직은 해동그룹과 상관없이 사업을 하며 규모가 커졌으니 둘의 연계는 오히려 양쪽에게 독이었다.
“그러겠다. 그래도 달러는 최대한 모아두라고 형님한테 전해줘.”
“역 플라자 합의 때문이겠죠?”
박태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선해철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월가에서는 내년에 한국 쪽 적자가 더 심해질 거라 보고 있어. 작년에 한국 무역수지가 마이너스 60억 달러였잖냐. 헨리도 자료 받아보고는 성민이가 무섭다고 했어.”
이성민이 고베 대지진이 터지고 미국에 돌아갔을 때에도, 헨리 로이스 앞에서도 말했던 대로 일본과 한국의 대미 무역경쟁은 일본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때 그 일을 떠올린 박태진은 잠시 움찔하던 몸을 바로잡고 선해철에게 말했다.
“저도 승주 형님께 들었습니다. 해동종금에서 S&P 500 비중을 늘리느라 달러가 빠져나가긴 했지만 우리나 신성, 태현, GK에서 달러 벌어온 게 아니면 100억 불이 넘을 뻔했다고요. 재정경제원 내에서도 쉬쉬한다고 하더군요.”
이성민 때문에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의 화두는 이제 대한민국 경제로 옮겨갔다.
의식의 흐름처럼 보여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평범한 여염집 혼사도 아니고 재벌그룹 간의 혼사가 아닌가? 자칫 잘못하면 한쪽이 다른 한쪽에 잡아먹힐 수도 있으니 잡아먹히지 않게 만반의 준비를 하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빌어먹을 새끼들. 문제가 생겼으면 대책을 세워야지, 덮고 넘어가겠다고? 내 이래서 행시 안 보고 월가 간 거다.”
인상을 구긴 선해철을 보고 박태진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그 일 때문에 회장님부터 승주 형님, 대표님들, 부회장님도 여념이 없으십니다. 전부 줄타기 중이니까요.”
작년 하반기부터 해동그룹과 사채조직은 마천루를 이은 줄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아찔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다른 그룹들을 속이겠다고 앞에서는 돈을 쓰면서도 뒤로는 달러 보유량을 늘리거나 금융부채를 줄이고 있지 않나?
그 뒤로도 선해철은 박태진을 통해 그룹 상황을 다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6월에 노스 리미티드 인수만 처리하면 완전히 방심할 거다, 흐흐.”
“그럴 겁니다. 성민이가 짜고 형님과 미스 로렌스, 로이스 경이 다듬어준 일이니 완벽하게 방심하겠죠, 흐흐.”
박태진과 마주보며 음침하게 웃던 선해철이 숨을 내쉬었다.
“그만 들어갈까? 오늘만큼은 다 잊고 마시자고.”
“그러시죠. 회장님께서 나중에 정혼서약서 알려주시면 성민이가 서운해 하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하하.”
선해철은 박태진과 함께 껄껄 웃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세상의 모든 짐을 지고 사는 것 같은 이 집의 젊은 주인도 오늘만큼은 걱정을 잊길 바라면서.